마돈나의 이중적 의미 : 슬래이브걸과 일상적 성사회학
프리가 하우그 외 / 인간사랑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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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코르넬리아 하우저가 쓴 '섹슈얼리티와 권력' 몇 구절들 / 섹슈얼리티의 표출을 억제하고 박해하는 현상을 일반적인 용어로는 '억압(repression)'이라고 명명한다. 이 용어는 모든 개인들이 성적인 욕망을 강하게 느낀다는 가정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가정에는 인간의 성적 욕망이 생명 에너지의 중요한 원천이라고 보는 생각이 깔려 있다. 만일 우리 사회에서처럼 욕망이 행동의 차원에서 억제당하고 금기의 대상이 된다면, 이러한 욕망은 인간의 발달 과정에 명확하고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270쪽

푸꼬의 가설을 간략히 한두마디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섹슈얼리티란 오로지 담론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섹슈얼리티는 담론을 매개로 할 때에만 비로소 존재하며 섹슈얼리티는 안정적인 것이 아니며 사회적 조건에 걸맞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278쪽

푸꼬는 국가 기구(state apparatuses)가 얼마나 억압적인가 아니면 얼마나 관대한가를 검토하지 않았다. 그는 그 문제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억압'이란 개념 자체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억압 개념이 단지 법이나 규율만을 가리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억압 개념을 거부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는 억압 개념이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운동으로서 정의되는 한은 그 개념을 가지고 현실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권력 관계'를 잡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푸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권력이 전개되는 모양'(the form of deployment of power)이라고 보았다. 그는 권력을 금지가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실천과 형식들에 쉽게 다가가에 해주는 힘이라고 이해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푸꼬는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권력에 대한 정의 - 국가를 통해서 규칙이 결정되고 법이 집행되며, 금지와 검열 / 이 중심이 되는 장이므로 권력을 국가와 관련해서 정의하는 것- 에서 출발한 이론적 모델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론을 폈다. -281~282쪽

푸꼬는 기존 모델의 대안으로서 힘들간의 관계란 견지에서 구성된 전략적 모델을 제안한다. 푸꼬는 "그리고 만일 법률적 체계가 권력의 - 유일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 대표적 형식이라 하더라도 법률 체계는 새로운 권력 방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새로운 권력 방식이란 권력의 전개가 권리가 아니라 기술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규범화에 의해, 또한 징벌이 아니라 통제나 국가 기구를 뛰어넘는 형식들과 매 수준에서 사용되는 수단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282쪽

푸꼬의 논증에 의하면 은폐나 침묵이 성적 억압을 역동적으로 심화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관찰하고 분류함으로써 성적 억압이 진전된다. 여기에서부터 대상은 논의거리가 되고, 바로 그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하나의 대상이 만들어진다.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쾌락이나 발견되지 않고 있었던 쾌락이 남김 없이 탐색의 대상이 되고, 각 개인들이 느낀 여러 종류 쾌락들에서 '추상화된 것'이 하나의 규칙으로 묶이게 된다. 그것은 개인에 외재해서 일어나지만, 일단 만들어지면 다시 개인의 내면에 '이식되는' 구조가 된다. 위에서 보았듯이 섹슈얼리티가 만들어져 개개인의 육체와 쾌락을 잠식해 들어가는 길은 단순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다. 경찰, 학교, 철학, 법, 심리 분석, 의학 등이 육체를 대상으로 논쟁을 벌이고 토론하면서 차례대로 자리를 잡아나간다. 그렇게 되면 육체를 담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삶의 영역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갖가지 제도나 기관들 내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로 인해서 섹슈얼리티가 생산되고 강화되는 것이다. 푸꼬에 따르면 이러한 잠식의 방법들을 한 마디로 특징지을 수 있다. -284쪽

즉 모든 사회 내 기관들과 제도들이 '거대한 외피를 갖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함께 연결되는 것이다. 이 네트워크 안에서 육체의 자극, 쾌락의 강화, 담론에의 유인, 조종과 저항의 강화가 지식과 권력이 주도하는 전략에 호응하면서 서로 연관을 맺어 나간다. 푸꼬는 이 네트워크를 섹슈얼리티의 전개(deployment of sexuality)'라고 명명했다. 이 네트워크의 기능은 그것이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구역들을 설정해내면서 섹슈얼리티를 조절해내는 것이다. -284쪽

우리는 푸꼬의 권력 개념이 지배와 권력이 같다고 본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배 관념이 억압 관계를 함축적으로 나타낸다는 사실에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또한 그는 뚜렷한 권력과 지배의 유착이 실제로는 환상이고 현실에 있어서는 권력은 권력대로, 지배는 지배대로 각기 다른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권력은 지배에 반해서 움직여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권력과 지배가 차이가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해방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탐색한다. -294쪽

권력 관계는 확실히 제도나 기구들 내에 실체를 갖고 있으나 그 제도나 기구는 국가를 초월해서 확장되는 '권력의 공간'을 구성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푸꼬의 견해에 동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국가의 전략적 범위라는 한계 내에서 포괄되어 있다. 그로므로 우리의 생각으로는 권력, 국가, 지배를 분석/ 적 차원에서 따로 구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294~295쪽

우리는 규범의 체계에서 개인들이 자신을 스스로 사회화(이것이 규범의 효과이다)시키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 방식이란 간략히 말하자면 규범적 권력을 불일치 정도를 평가하고, 수위를 결정하며, 특정성을 고정시키고, 차이를 분명히 밝히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규범적 권력이 동질화라는 효과를 이루어내는 방식이다. 모든 개인들은 스스로 자신을 개인들로 만들어내는 똑같은 표준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맥락을 고려해서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개인성(individuality)을 파악할 수 있다. 개인성은 표준에 동조하는 어떤 부분들과 표준에서 일탈된 어떤 부분들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화의 문제는 지식('지식은 권력이다')의 가능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편재하는 표준에 대해서 보다 엄밀한 지식을 갖게 되면 갖게 될수록 개인차가 생길 가능성은 보다 커진다.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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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의 사상흐름 : 지식인과 그 사상 1980 - 90년대 당대총서 13
윤건차 지음, 장화경 옮김 / 당대 / 2000년 10월
절판


70년대 후반부터 비판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분단현실을 객관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주목해야 할 전환은 한국을 '제3세계'의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사고 / 방식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제3세계라는 인식은 세계를 하나의 체계제로 상정하고 세계체제는 중심과 주변(또는 반주변)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주변은 중심에 종속되는 관계에서 발전해 왔다는 데 주목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세계체제는 현실적으로 수세기에 걸쳐서 형성되어 온 자본주의 세계체제이며, 따라서 근현대의 한국사회 구조 또한 자본주의 세계체제, 특히 일본 및 미국과의 관게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34~35쪽

80년대 한국 사회과학 연구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것은 한국사회 또는 한국 자본주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한국자본주의 논쟁'이라고 불리는 이 논의는 단순히 학계나 언론계뿐 아니라 이른바 '운동권' 내부에서도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이 논쟁의 주요 논점의 하나인 사회구조와 사회모순의 평가 내지는 성격 규정이 운동 주체세력 설정, 투쟁대상 규정 , 운동 노선 정립 등과 같은 전략, 전술을 결정해야 하는 당면한 사회변혁운동의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40쪽

80년대 초에 정성진, 조희연, 이대근 등은 당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던 종속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한국경제는 대외의존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며 더욱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주변부에 포섭되어 자본, 기술, 자원 등 모든 재화를 중심부에 의존시키는 종속성을 심화시켜 왔다고 논한다. 한국은 중심부와는 이질적인 사회구성체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자본주의, 즉 주변부자본주의에 편성되어 있으며 정부는 이러한 종속적인 발전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더욱더 권위주의적인 억압정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주변부자본주의론(주자론)'의 주장이다. -40~41쪽

이에 대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의거하고 있던 박현채, 조민, 정윤형 등은 종속적일지라도 자본주의적인 한 그 내부에 자본주의 원리가 관철된다는 전제하에서 한국사회의 발전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론은 한국사회 내부의 계급관계와 모순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의 자본주의 발전단계의 성격을 인식하지 못한다, 해방 후의 한국사회는 주변주자본주의가 아니라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은 '국가독점자본주의(국독자론)'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였다. 즉 박현채 등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광공업부문이 GN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등 경제규모가 급속하게 확대됨에 따라 일정한 자본축적이 이루어져서 독점자본이 성장한 것을 강조하며, 주자론과는 달리 계급구조에서도 산업노동자가 도시빈민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이로부터 운동론으로는 반제, 반독점, 반독재를 기반으로 하는 민족, 민중, 민주혁명의 단계적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41쪽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80년대 말부터 엄청난 어려움에 부딪혀 새로운 전개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의 재벌기업이 세계 곳곳에 진출해서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높이고 문화와 소비가 시대의 관심사가 되는 가운데,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라는 헤게모니 장악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명제는 어느새 잊혀가고 있었던 것이다.-92~93쪽

90년대 한국의 사상적 특징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중심으로 한 각종 포스트주의와 문화이론 등이 폭발적으로 유행한 것이다. 논단에서 논의의 중심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 푸코, 데리다, 리요타르, 보드리야르 등의 프랑스사상으로 옮겨갔고 언급되는 어휘는 자본주의, 계급, 노동, 국가 같은 난해한 것에서 육체, 욕망, 문화, 지식, 권력 등과 같은 포스트모던한 것으로 바뀌어갔다. 자본주의, 계급, 노동, 국가 같은 어휘는 오히려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말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담론'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도 90년대 들어서부터다. -157쪽

민족주의는 결코 하나의 확고한 이론도, 개념도 아니다. 민족이 그러하듯이 민족주의도 '현실'의 추이와 함께 변해 가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만들어지고 이용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이데올로기이다. 당연히 민족주의가 사회진보에 건전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관념주의로 빠질 때, 그것은 곧 보수반동, 국수주의로 후퇴할 위험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격동하는 역사를 살아온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민중이 정서적으로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이데올로기로서, 역대 정부가 강요한 체제논리로서, 나아가 일종의 상업주의의 도구로서 끊임없이 이용되어 왔고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232쪽

사실 국민국가는 근대에 들어와서 생겨난 것이다. 이는 요즈음의 문화연구 등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허구성'을 띤 것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비록 국민국가가 '상상의 공동체'라 할지라도, 앤더슨은 국민국가론을 반드시 내셔널리즘 비판으로 전개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에 들어와서 국민(국가)을 구성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정치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인 정통의 가치라고 말하고 있다. 즉 국민국가는 상상의 공동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결코 진공상태에서 떠다니는 공허한 존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민국가에 얽혀 있는 갖가지 담론을 예의 주시하고 국민국가가 지닌 폭력장치나 타자에 대한 차이/ 차별화 기능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이며 또 어떻게 하면 정치권력이나 지배층에 이용되지 않는 아이덴티티를 공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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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청춘 꽃띠는 어떻게 청소년이 되었나? - 청소년 만들기와 길들이기
고미숙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5월
품절


청소년기의 질풍노도적 기질은 생물학적인 보편적 특징이라기보다 문화적 산물, 혹은 역사적 산물이다. 이런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마가렛 미드와 필립 아리에스에 의해 세상에 던져졌고, 이런 문제제기 자체가 너무 낡은 것인지는 몰라도 청소년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중략) 청소년기적인 기질의 탄생은 근대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 으며 근대 과학도 크게 공헌했다. 청소년들을 압박하는 사회적 요인은 더욱 강화되었고, 과학은 그들의 기질을 입증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질풍노도적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해냈다. 청소년기의 탄생은 바로 청소년기의 근대적 '기질' 발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발견된 기질은 단순한 과학적 사실에 머무르지 않고, 청소년을 다루는 장치와 방법을 고안해냈다.-16~17쪽

근대사회는 청소년들을 주변인으로 내몰았다. 미성숙한 것이 아니라 미성숙하도록 프로그램화된 것이다. -46쪽

일제강점 말기로 접/ 어들어 법률이나 문서상에서 공식적인 용어로 청소년이라는 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소년과 청년을 모두 훈육과 훈련, 규율의 대상으로 보면서부터다. 청소년을 아직 주체가 되기에는 미숙한 존재로 보고,충성스런 국민 만들기의 대상으로 삼으려한 것이다. (중략)학교제도를 포함한 갖가지 사회장치와 연령 발달에 대한 근대적인 아이디어는 미디어와의 공조를 통해서 생겨났다. 미디어와 일련의 제도는 청소년에게 질풍노도적 이미지를 덧씌웠고 서서히 주변인으로 살아가도록 길들이기 시작했다. / 이상 김현철-47~48쪽

이팔청춘과 청소년, 두 낱말은 같은 연령대를 지시하고 있지만, 둘을 에워싸고 있는 아우라와 표상의 차이는 실로 엄청난다. 전자가 자연적 생체 주기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후자는 근대 문명이 부과한 아주 특별한 호명체계다. 쉽게 말해 10대의 어떤 인간을 청소년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와 더불어 수많은 의미의 계열이 그물망처럼 산포된다. 예컨대, 일단 그는 결혼이나 동거 따위를 꿈꾸어서는 안 된다. 청소년이란 미성년의 주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절대 성욕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청소년과 성욕, 이 둘 사이는 멀면 멀수록 좋다. 아니, 숫제 청소년 따위의 성욕 따위는 없거나 없어야 마땅하다고 간주된다. (중략) 무릇 사회적 표상이란 이런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과 욕망을 철저히 망각하게 만들어버린다. 청년기에는 욕망의 부글거림으로 몸부림치다가도 막상 기성세대로 편입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청년은 순수할 거라는, 아니 순수해야 정상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 이게 바로 표상 혹은 호명체계의 위력이다. -59쪽

청소년의 존재 기반은 학교와 가족이다. 청소년은 모범적인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 효율적인 생산주체가 되기 위해 학교에서 교육의 과정을 착실히 밟아가는 세대이며 부모의 적극적(경제적)보호와 배려 속에서 대학입시를 향해 분투해야 하는 존재이다. 말하자면 청소년이라는 말 속에는 가족, 학교, 국가라는 개념들이 그물처럼 촘촘히 박혀있다. -60쪽

근대계몽기 민족담론은 모든 기호들의 차이를 봉인하는 블랙홀이자 초월적 좌표였다. 서구와 일제라는 대타자로 인해 국가와 민족이 발견되긴 했지만, 실상은 '텅 빈 기호'에 지나지 않았다. 발견과 동시에 부재를 감내해여 했기 때문이다. 오직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를 표현해야 하는 역설에 처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족담론은 모든 기호들을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버렸다.-91쪽

순수함이란 달리 말하면 탈성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자면, 근대 이후 급부상한 가정교육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소년기의 성욕을 통제, 관리하는 것이었다. 위생담론이 적극 개입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이상 고미숙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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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가 어쨌다구? What's Up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한보희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품절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 연구는 진리(관여된 주체적 입장)와 지식을 혼동함으로써 - 그 둘 사이를 갈라놓는 간극을 부인하거나 지식을 진리 아래 직접 복속시킴으로써(예컨대 양자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지식 분야가 지닌 고유한 개념 구조에 대한 적절한 숙지도 없이 사회 비평적인 안목만 가지고 이런 특수 과학을 성급하게 폄하해버린다)-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진지한 태도를 결여하고 있는 데다가 오만하기까지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특수한 분과 학문적 숙련성의 결여라는, 흔히 지적되는 문화연구의 문제점이다. 가령 문학 이론가가 제대로 된 철학적 지식도 갖추지 않은 채,헤겔 철학을 남근-로고스-중심-341쪽

주의라고 험담하는 글을 쓴다거나 영화나 뭐 그런 다른 영역들에 대해서도 섣부르게 덤비는 것 등등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 여기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적절한 지식도 없이 모든 것에 판단을 내리려 드는, 일종의 그릇된 보편주의적 비평 능력이다. 전통적인 철학적 보편주의에 온갖 비난을 퍼부었던 문화 연구가 실은 자신을 일종의 대용품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는 꼴이다. 문화 연구의 막연한 관심들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보편 개념으로 변용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령 탈식민주의 연구에서 '식민화'라는 막연한 관념이 헤게모니를 쥔 개념으로 취급되기 시직하면 그것은 이내 보편적 패러다임으로 격상되며 급기야는 양성 간의 관계에서 남성이 여성을 식민화한다거나 상층 계급이 하층 계급을 식민화한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줄을 잇게 되는 것이다. -342쪽

문화 연구에 대하여 우리는 벤야민의 오래된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볼 필요가 있다. 즉 그들이 권력과 어떤 명시적 관계를 갖는가가 아니라 지배적인 권력관계 안에서 그들 자신은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 / 가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문화 연구가 지배적 권력 관계를 폭로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권력관계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 양태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비판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척하기만 할 뿐인 그런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푸코가 '억압하고'/ 금지하는 사법 권력과 대비시켜 무언가를 생산하는 '생명-권력'이라고 불렀던 개념을 문화 연구에 적용해본다면 생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성을 규제하는 '억압적' 담론들이 실은 성의 번창과 완전히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 연구라는 분야도 오늘날의 전 지구적 지배 관계를 위협하기는커녕 그러한 지배 관계의 틀에 꼭 들어맞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가부장적인/자기동일성에 집착하는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비판이 그런 것들을 전복하기 위한 의지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모호한 매혹에 빠져있음을 무심코 드러내는 것이라면 어떨까?-344쪽

바로 이 지점에서 영국의 문화 연구에서 미국식 문화 연구로의 전환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그 둘은 비록 동일한 주제와 개념 등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수행하는 사회적-이데올로기적 기능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진짜 노동 계급 문화와 연계되어 있는 문화 연구에서 급진주의라는 겉멋이 든 강단 문화 연구로의 전환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적 언급에도 불구하고 문화 연구를 적대시하는 저항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은 문화 연구 / 가 현행 제도권 학계에 완전히 흡수될 수 없는 이질적 외부자로 남아 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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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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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비판을 위하여 : 폭력 비판이라는 과제는 그 폭력이 법과 정의와 맺는 관계들을 서/술하는 작업으로 돌려서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원인이 어떻게 작용하든 간명한 의미에서의 폭력이 되는 것은 그 원인이 윤리적 상황에 개입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들의 영역은 법과 정의의 개념으로 지칭된다. 둘 가운데서 우선 법을 두고 보자면 모든 법질서의 가장 원초적인 기본 관계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라는 점은 분명하다.-79~80쪽

폭력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는 이러한 자연법론의 명제에 정면으로 맞서 등장한 것이 실정법적 명제로서 이들은 폭력을 역사적으로 생성된 결과로 본다. 자연법론이 모든 현존하는 법을 그것의 목적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할 수 있을 뿐이라면, 실정법[법실증주의]은 모든 생성하는 법을 오로지 그것의 수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한다. 정의가 목적들의 기준이라면 적법성이 수단들의 기준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두 학파는 공통된 기본 도그마에서 수렴하는데, 즉 정당한 목적들은 정당화된 수단들을 통해 달성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들은 정당한 목적들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자연법론은 목적의 정의 [정당성]를 통해 수단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며, 실정법은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하려고' 노력한다. -82쪽

법적 주체로서의 개별 인격체에 관한 한 유럽의 법 상황에서 특징적인 점은 이 각각의 개인의 자연적 목적들을, 그 목적들이 상황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폭력적으로 추구될 수도 있는 모든 경우에는, 허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법질서는 개인들의 목적이 합목적적으로 폭력적으로 추구될지도 모를 모든 영역들에 법적 목적들을 세워둠으로써 법적 강제력만이 이런 식으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게끔 만들려고 한다. -85쪽

각각의 법의 수중에 놓여 있지 않은 폭력은 그 법에 위험으로 작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 폭력이 추구하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 폭력이 법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추측은 '대'범죄자의 형상 자체가 그의 목적이 제아무리 극악무도하다 할지라도 얼마나 자주 민중에게서 은밀한 경탄을 불러일으켰는지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은 그 범죄자가 저지른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가 증명하는 폭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경우에 오늘날 법이 모든 행동 영역에서 개인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폭력이 실제로 위협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범죄자가 제압되는 가운데서도 법에 반감을 갖는 대중들의 공감을 자극한다. 폭력의 어떤 기능 때문에 그 폭력이 근거를 갖고 그처럼 법에 위협적으로 보이고 또 법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지는 바로 현재의 법질서에 의거해서도 그 폭력을 펼치는 것이 여전히 허용되는 곳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86쪽

사형의 의미는 법범 행위를 처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 법을 확립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법은 그 어떤 다른 법 집행보다 생사여탈의 폭력을 행사하는 데에서 스스로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94쪽

법적 계약은 그것이 제아무리 평화적으로 계약 당사자들에 의해 맺어질지라도 결국에는 가능적 폭력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법적 계약은 각 당사자에게 상대편에 대해, 만일 상대편이 계약을 위반하게 될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강제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계약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계약의 원천 역시 폭력을 요구한다. 그 폭력은 법정립적인 폭력으로서 물론 직접적으로 그 계약 속에 현전해 있을 필요는 없지만, 법적 계약을 보증하는 권력 자체가 - 그 권력이 그 계약 자체 속에 폭력을 적법하게 투입되지 않는다 해도 - 폭력적 기원을 갖고 있는 한, 그 계약 속에 들어 있다. -97쪽

법은 도덕적 차원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그 사기가 사기를 당한 사람에게서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폭력적 사태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사기를 단죄하기 시작한다. -100쪽

외교사절들은 주로 사적 개인들 사이의 합의와 유사하게 그들 국가의 이름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서 그때그때 자신들의 갈등을 중재하였다. 이것은 중재재판을 통해서라면 더 단호하게 해결될 섬세한 과제이면서 근본적으로 중재재판적인 해결방식보다 더 상위에 있는 해결 방식인데, 그 이유는 해결이 모든 법질서를 넘어서, 그에 따라 폭력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05쪽

수단의 정당화와 목적의 정당성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은 결코 이성이 아니며 오히려 전자에 대해서는 운명적인 질서, 후자에 대해서는 신이라고 할 수 있다.-106쪽

법 정립은 물론 법으로서 투입되는 것을 그것의 목적으로 삼아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가지고 추구하긴 하지만, 목적한 것을 법으로서 투입하는 순간 폭력을 [ 소임을 다했으니],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도 직접적으로 법정립적인 폭력을 만든다. 이러한 일은 그 법 정립이 없는 폭력이 없는 독립된 어떤 목적이 아니라, 그 폭력에 필연적이면서 내밀하게 연계된 목적을 법으로서 권력의 이름으로 투입하면서 일어난다. 법 정립은 권력의 설정이며, 그 점에서 폭력을 직접 발현하는 행위이다. 정의는 모든 신적인 목적 설정의 원리이고, 권력은 모든 신화적 / 법 정립의 원리이다.-108~109쪽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대해 신이 맞서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인 폭력이 맞선다. 그것도 후자의 폭력은 모든 면에서 전자에 대한 반대상을 가리킨다.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 -111쪽

모든 신화적 폭력, 개입하여 통제하는 폭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정립적 폭력은 배척해야 마땅하다. 그 폭력에 봉사하는 관리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법보존적 폭력 역시 배척해야 마땅하다.-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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