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할 때 그 마음으로 - 법정이 우리의 가슴에 새긴 글씨
법정 지음, 현장 엮음 / 책읽는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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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란 에세이를 다 읽지 못했다. 오래 전 문고본을 들고 다니다 조금씩 읽었는데 술 한 잔 하고 탄 늦은 밤 택시에 두고 내리면서 인연은 끊어졌다. 다시 사서 읽어도 되지만 왠지 모르게 손이 나가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법정 스님의 다른 책들은 한두 권씩 샀다. 그 당시는 에세이를 거의 읽지 않는 시절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언론을 통해 스님의 부고를 들었다. 깜짝 놀랐다. 늘 유명인의 부고를 듣지만 그때는 조금 특별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언은 그의 이름으로 발간된 책들의 가격을 폭등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열기가 한국을 휩쓸었다.

 

언론을 통해 스님의 일화나 간단한 이야기가 나오면 늘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다 읽지 못한 무소유지만 그의 삶은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 책을 내지 말라고 했지만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로 인해 얻게 될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유언을 지키지 않았다. 그 결과로 법정 스님과 관련된 책들이 새롭게 나오기도 했다. 이 책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솔직히 법정 스님만 알지 현장 스님이 누군지 모른다. 비슷한 이름을 서점 등에서 본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책 속에 분명하게 나온다. 속세의 촌수로 따지면 조카다. 이해인 수녀의 글을 보면 이 사실이 많이 알려진 모양이다. 현장 스님이 엮은이로 나온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구성은 간단하다. 스님의 명동성당 강론, 종교 교류 활동, 애송한 짧은 시와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 교류 활동의 한 방편으로 명동성당 강론을 했는데 차분하게 새겨들을 말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것은 길상사 마리아 관음상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상당히 특이하다. 불교란 거대한 틀을 뛰어넘었다는 평에 동의한다. 천주교 신자에게 불상을 의뢰했다는 그 자체가 놀라운 발상이다. 스님의 넓은 포용력이 없다면 쉽지 않았을 작업이다. 강론의 원고가 없어 이해인 수녀의 CD를 통해 그 내용을 확인했다는 부분에서도 스님이 가진 삶의 한 철학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를 가장 사로잡은 부분은 애송한 짧은 시와 그가 쓴 글과 간단한 그림들이다. 표지에 나온 그림처럼 선 하나로 휙 그려낸 그림이 가슴 한 곳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일필휘지로 갈겨 쓴 글들은 초심자가 단숨에 알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오랫동안 글을 쓴 사람만이 가능한 서체다. 놀이(戱)란 단어를 그가 쓴 글에 많이 덧붙였는데 이 부분도 재밌다. 글의 내용은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닌데 글자의 모양이나 구도는 놀이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편지글로 오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괜히 스님이 재밌게 놀았던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싶다. 이 욕심 버려야 하는데 쉽지 않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그의 작품을 전부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두께도 당연히 얇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디다. 글과 그림은 한 번 더 쳐다보게 되고, 내용은 잠시 곱씹게 만든다. 병을 얻은 후 유머 감각은 아재 개그에 가깝지만 여유가 보인다. 그의 글에서 위안을 얻고, 자신의 삶을 돌아본 사람이나 그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에게 그의 부재는 이해인 수녀의 이 말 한 마디로 충분히 표현된 것 같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스님.” 언젠가 그의 종이 놀이와 글들이 더 모여 더 두툼한 책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과일을 먹을 때는 그 꽃향기까지 먹을지로다.”라는 말처럼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무소유 삶까지 실천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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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정원 나무 아래 모중석 스릴러 클럽 40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양영란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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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담스베르그 형사 시리즈만 읽다가 일반인이 탐정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상당히 고전했다. 몸 상태도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앞부분이 상당히 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괴상함은 바로 세 명의 역사학자 때문이다. 중세 역사학자 마르크, 선사시대 역사학자 마티아스, 1차대전 역사학자 뤼시앵 등이 바로 그들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가 이들의 개성을 강하게 표현하면서 나중에 펼쳐질 이야기의 배경을 잘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만 마르크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부분과 겹치면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개성 강한 세 명 덕분에 이야기가 풍성해진 것도 사실이다.

 

은퇴한 소프라노 소피아는 집 정원에 너도밤나무 한 그루가 갑자기 심어진 것을 보고 불안을 느낀다. 남편에게 말하지만 시큰둥하다. 이 나무 밑에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다 낡은 옆집에 이사온 세 명의 역사학자에게 거금을 주고 파달라고 요청한다. 서로 왕래가 없던 이웃이 처음 인사하는 순간이다. 다행히 나무 밑에서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이 요청을 수낙하는데는 마르크의 외삼촌이자 전직 형사였던 방두슬레의 입김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여기에 다른 옆집의 쥘리에트가 등장한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그녀는 마티아스를 직원으로 고용하고, 좋은 이웃이자 친구가 된다.

 

추리소설보다 조금 괴팍한 인물들의 좌충우돌 이야기 같았는데 쥘리에트가 소피아의 실종을 말하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뀐다. 매주 목요일이면 늘 나타나던 그녀가 사라진 것이다. 남편의 반응은 곧 돌아올 것이라며 담담하다. 옛 연인이 보낸 것 같은 편지를 받고 떠났다는 말을 남편이 전하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방두슬레가 사건의 냄새를 맡고 이것을 신고하라고 말한다. 의심스러운 곳은 역시 정원의 나무 아래다. 다시 파헤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이때 소피아의 조카 알렉상드라가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다. 이모를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불에 탄 시체가 발견된다. 시체에는 소피아가 늘 가지고 다니던 돌이 있었다. 실종이 살인사건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소피아로 추정되는 시체가 나왔지만 다른 단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긴장감이 조금씩 높아지고 추리소설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이 개성 강한 네 명의 남자가 들려주고 보여주는 행동들은 변함없다. 아니 익숙해지면서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사가 진행되고, 단서가 모인다. 그런데 수사를 더 할수록 방향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다. 알렉상드라의 수상한 늦은 밤 드라이버가 의심을 산다. 보통의 살인사건에서 살인자는 이익을 보는 사람들 중에서 항상 나타나기 때문이다. 혼란은 점점 가중되고 나의 머리도 빠르게 돌아간다. 뭐 그렇다고 추리가 제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몰입도가 높아진 것이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 후 살해되면서 새로운 단서가 나온다. 이 작품의 재미난 점 중 하나는 이런 식으로 인물과 증거의 등장하는 것이다. 이 등장은 방두슬레에게 옮겨지고, 형사에게도 전달되지만 한 번 걸러진다. 하지만 진짜 재미는 잘 짠 구성과 함께 개성 강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추리다. 중요한 인물들을 역사학자로 설정한 것은 하나의 자료를 발견하는데 최적화된 인물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작가의 이력도 무시할 수 없다. 소피아의 아버지 집을 찾아가 스크랩된 자료를 뒤지는 모습이나 작은 단서를 가지고 계속 파헤치는 끈기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이들은 과거 속으로 들어가 단서를 찾는다. 아직 제대로 조립되지 않은 조각들이지만.

 

이 작품을 말하면서 세 명의 역사학자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습관과 전공에 대한 열정은 세밀한 장면을 풍성하게 만들고, 긴박한 순간에도 웃게 만든다. 잘 만든 한 편의 희극을 보는 듯한 장면도 곳곳에 나온다. 그리고 세 명의 이름을 복음서 저자와 연결해서 말장난 친 것도 재밌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한 집에 살면서 만들어내는 조화와 지성의 힘은 느린 듯한 전개에 재미라는 가속도를 더한다. 읽으면서 의문이 들었던 부분에서는 나의 예상이 맞았지만 범인에 대한 추리는 실패했다. 반전에 반전을 더하는 구성이고, 잠시나마 숨을 돌리고 추리를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더 이 작가를 알게 되어 즐거웠고, 더 많은 소설들이 번역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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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와 수잔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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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이런 책을 ‘<나를 찾아줘>나 <걸 온 더 트레인>을 잇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앞의 두 작품이 엄청난 성공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 등을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토니와 수잔>에게 점수를 더 주고 싶다. 물론 이 작품이 예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거나 미묘하게 감정을 건드린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아주 섬세하고 잘 짠 구성과 더불어 나로 하여금 충분히 공감하게 만드는 상황과 전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당연히 토니다.

 

토니와 수잔이라는 두 인물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수잔의 독자고, 토니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다. 물론 나에게는 두 인물 모두 소설 속 등장인물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누군가 뒤에서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설정의 다룬 소설도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토니는 수잔의 전남편 에드워드가 쓴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 속 주인공이다. 에드워드가 소설을 완성한 후 수잔에게 보내 평가를 해달라고 요청했고, 수잔이 며칠에 걸쳐 이 소설을 읽는다. 이런 읽는 다는 행위를 통해 수잔의 삶이 하나씩 드러난다.

 

이 소설의 형식적 구성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전남편이 보낸 소설을 수잔이 읽는 부분과 수잔의 과거를 다룬 장면들이 나란히 나온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액자 구성이다. 하지만 실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 경계가 살며시 무너지는 순간이 생긴다. 수잔이 소설 속 토니에게 너무 많은 감정이입을 하거나 전남편 에드워드와의 과거가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연관성이 이 소설 속으로 강하게 몰입하게 한다. 물론 잠시 이 관계를 떨어져서 보게 되면 수잔의 삶과 생각들이 낯설고 평범해 보인다. 그래서 좀 더 집중해서 읽어야만 제대로 그 긴장감을,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토니의 이야기는 8~90년대 미국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단란한 가족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악당들을 만난다. 악당들에게 아내와 딸이 죽고, 주인공은 무력하게 저항하다 크게 상처 입는다는 설정 말이다. 액션으로 바뀌면 악당들을 찾아내어 복수하는 것이 되겠지만 현실에서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토니의 행동은 변명이나 책임을 피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움츠리고 있는 불안과 공포에 짓눌린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딸의 시체를 본 후 일상도 소시민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일상으로 복귀한 토니의 모습은 분노나 절규 같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다. 심한 우울증에 사로 잡혀 자해하는 모습도 아니다. 그냥 처자식 없는 일상을 산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숨긴 채 살아간다. 성욕에 대한 부분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본능적인지 보여준다. 위선적인 행동과 평범한 일상은 한 대학교수의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용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변함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실한 경찰의 노력으로 다시 과거와 대면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불편하다. 무심코 지나갈 수도 있지만 살인자에 집착하는 경찰의 등장으로 상황이 꼬인다. 이런 변화를 작가는 느리지만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실 수잔 이야기에서 긴장감을 그렇게 느끼지는 못했다. 자신의 과거를 에드워드의 소설을 통해 재생하지만 극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심하게 요동친다. 남편의 불륜에 타협하고, 스스로 비겁한 변명을 만든다. 이 부분은 토니와 별 차이가 없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에드워드를 떠나 이웃이었던 아놀드와 불륜을 저지르고 재혼한 것이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 것이다. 수잔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정의 불안과 두려움을 만난다. 여기서 에드워드가 소설 원고를 주면서 던진 질문이 힘을 발휘한다. 소설 속에서 빠진 것을 찾아보라는 단순한 질문 말이다. 이에 대한 그녀의 답은 또 다른 질문의 시작이다. 책을 다 읽고 다시 마지막을 읽어도 명확하게 손에 잡히는 답이 없다.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과연 이 심리 스릴러를 영화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이다. 장면, 상황, 일상, 불륜, 감정, 심리 등을 다시 한 번 더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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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완벽한 1년
샤를로테 루카스 지음, 서유리 옮김 / 북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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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거의 읽은 적이 없다. 다른 장르소설을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로맨스 소설이라니. 이런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역시 저자의 이력과 미스터리 요소가 있다는 광고 때문이었다. 이전에 이런 광고에 속아 읽고 후회한 적이 있지만 작가의 이력은 다르다.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서 나의 선택을 잠시 후회한 순간도 있었다. 너무 여자들의 사담을 늘어놓는다는 느낌이 들 때였다. 장광설을 좋아하는 나지만 이런 평범한 이야기까지 길게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서 이 책의 구성이 마음에 들었고, 뻔한 결말이 기대되었다.

 

시작은 1월 1일 새벽에 요나단 그리프가 달리기 위해 집밖으로 나오면서부터다. 그 이전에 그는 함부르크 신문에 오타에 대한 메일을 보냈다. 이 작은 시작은 그의 성격을 알려준다. 그리고 집앞에는 전처가 놓아둔 초콜릿이 하나 있다. 전처는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이 나서 떠났다. 어떤 다른 요청도 하지 않고. 이 이혼이 요나단의 삶을 불편하게 만든다. 절친과의 결혼 생활이 금전적으로 풍족하지도 않기에 더욱 더. 송년 파티로 공원은 지저분하다. 이 또한 그에게는 불만이다. 이런 그의 자전거에 가방이 하나 매달려 있다. 이 속에 한 권의 다이어리가 들어있다. 다이어리에는 1년 동안의 계획이 모두 짜여 있다.

 

한나의 이야기는 이보다 2달 빠르다. 그녀는 어린이집 교사를 하다가 틈새 시장을 노려 친구 리자와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어린이집이 끝난 다음에 아이를 돌보는 사업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잠에서 깨자마자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 상대를 모른다. 남자 친구 지몬은 아니다. 내심 지몬의 청혼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나가 지몬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 아주 많이. 요나단이 얻은 다이어리 속 1년 동안의 계획도 지몬을 위한 것이다. 왜 그런 계획을 세웠냐고? 지몬이 자신은 암으로 죽을 예정이라 사랑하는 한나를 놓아줄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청혼을 예상하고 간 멋진 만찬에서 말이다.

 

요나단과 한나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단순한 구성이다. 두 사람의 시간을 다르게 흘러가게 만들면서 결국 만나게 한다. 작가는 얄궂게도 서로가 만날 수 있는 상황을 살짝 살짝 빗나가게 만든다. 그리고 두 사람의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다. 요나단이 깐깐하고 냉소적이며 강박적이라면 한나는 너무나도 긍정적이고 여유롭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를 보고 있다 보면 요나단의 변화에 저절로 눈길이 간다. 완고한 사람의 변화가 늘 긍정적인 사람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실제 요나단의 변화가 단숨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작은 변화에서 시작하여 점점 더 커진다. 이 변화의 순간이 누군가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요나단의 직업은 권위있는 출판사의 사장이다. 실제 업무를 처리하는 사장이 있지만 중요한 결정은 그가 내려야 한다. 실제 숫자에 대해서는 그가 무지한 것은 제외하고. 그의 출판사는 대중들이 좋아하는 작품보다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작품들을 낸다. 해리포터를 무시한 결과는 너무나도 뻔하다. 좋은 작품이 나오지만 대중들이 바라는 것은 다양한 장르 소설이다. 그런데 완고하게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작품만 낸다. 당연히 매출이 감소한다. 가문의 권위와 현실의 부조화는 늘 있는 일이다. 대중 소설을 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선택의 문제는 이 소설의 재미 중 하나다. 놀라운 것은 한 인기 작가의 낭독회가 콘서트장을 방불케 한다는 것이다.

 

로맨스 영화처럼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스쳐지나가고, 시간이 살짝 빗나가고, 몸이 부딪히지만 상대방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완벽한 1년을 적어 놓은 다이어리다. 만약 500유로가 다이어리에 들어있지 않고, 그가 분실물센터에 맡기려고 한 날 쉬지 않았다면 이 둘의 인연은 그 순간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창조자의 손길로 이들을 가늘게 연결한 채 이야기를 끌고 간다. 운명적인 사랑의 순간도 만들고,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순간도 만들었다. 그리고 왜 요나단이 이런 어른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는지 알려주는 이야기도 같이 넣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로맨스 소설이지만 풍성한 이야기를 넣어 강한 운명적 사랑 이야기를 멋지게 마무리했다. 로맨스 소설도 이제 나의 위시리스트에 넣어야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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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감옥 모중석 스릴러 클럽 41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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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계곡>이 기대에 조금 미치지 못했다면 이 책은 기대를 넘어섰다. 전체적인 짜임새에서 뭔가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지만 정말 가독성은 뛰어나다. 등장인물들 한 명 한 명에게 신경을 쓰고, 사연을 만들어서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기본적으로 스릴러 방식으로 진행하지만 미스터리를 같이 넣어서 마지막 반전에 한 방 먹었다. 솔직히 말해 반전 중 하나는 예상한 것이지만 너무 쉽게 긴장을 풀면서 놓쳤다. 작가의 능수능란한 작업에 속은 것이다. 그리고 찜찜한 몇 가지 문제를 남겨 놓았다.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잘 모르겠다.

 

과거 속에서 한 장면을 묘사한다. 한 여자를 익사시키는 장면이다. 여자가 누군지, 살인자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 도입부의 과거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이 살인이 이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남는 것은 왜? 라는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내가 불만을 가지는 대목들은 이런 왜?에 대한 답들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 반전 같은 장면들은 가장 현실적인 물음일 수 있다. 현실의 모든 상황이 언제나 그 정답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니까.

 

물의 정령이라고 말하는 인물이 있다. 그가 스스로 말하는 장면들을 보면 연쇄살인범이다. 그가 내뱉는 독백 속에는 왜 그가 에릭 슈티플러 형사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하지만 그 이유가 나올 즈음이면 소설의 끝부분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여동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동생 이름은 시리다. 그 아이는 수영을 아주 잘 했다. 돌고래처럼 호수를 돌아다닌다. 점점 자라면서 더 빨라져 살인자보다 더 빨라진다. 그래도 오빠가 더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잠수다. 더 깊이 더 오래 물속에 머물 수 있다. 이 능력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익사시키는데 사용된다. 개인적으로 익사 장면을 읽으면서 순간적으로 감정이입되었다. 무서운 장면이다.

 

슈티플러에게 전화가 온다. 여자가 죽을 것이란 암시를 주는 전화다. 누군지 바로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경찰 경력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아내의 불행했던 과거가 가정의 불화로 이어졌고 결국 이혼했다. 하지만 그가 세운 경력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그 덕분에 호수에서 발견된 여자 시체의 몸에 새겨진 글에도 불구하고 담당이 된다. 처음에는 그가 이 불행한 과거을 벗어던지고 범인을 열심히 쫓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추측은 그가 내미는 변명들에 의해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신참 경찰인 마누엘라 슈페를링이 차지했다.

 

마누엘라는 이 소설만 놓고 보면 아주 뛰어난 경찰이다. 아주 탁월한 추리력과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수다스럽다. 서장이 그녀를 슈티플러와 한 팀이 되게 했지만 슈티플러는 그녀를 곁에 둘 마음이 없다. 그녀에게 반경 60킬로미터 안의 호수물을 조사하라고 시키고, 그녀가 조사한 자료를 무시한다. 불만이 많지만 그녀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증거물을 수집한다. 이때만 해도 등장인물 중 그냥 그런 한 명이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그녀가 전면에 나오기 시작한다. 그녀의 추리와 열정이 새로운 사건을 해결하는데 큰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택시 기사인 프랑크도 뒤로 가면서 비중이 높아진다. 처음에는 그냥 일반적인 택시기사였다. 이전에 창녀였던 라비니아를 우연히 태워준 많은 기사들 중 한 명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미행당하는 불안감을 느끼고, 겁을 먹으면서 둘이 만나게 된다. 승객과 기사로서 말이다. 이런 그녀를 프랑크가 도와준다. 그리고 프랑크는 그녀라면 자신의 문제를 포용하고 사랑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보통이라면 잠시 스쳐지나갈 인연이지만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인연을 이어가게 한다. 어느 순간 둘은 자신들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프랑크는 기면증을, 라비니아는 창녀와 누군가를 죽일 뻔한 과거를 말한다.

 

라비니아의 시점은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불안감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불안감을 느끼는데 가장 크게 느끼는 인물이 라비니아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스토커 정도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과거가 이것을 단절시킨다. 희생자들이 늘어날 때마다 혹시 그녀가 아닐까 하고 긴장한다. 프랑크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이 긴장감은 더 커진다. 그녀가 집에 없다는 이유로 경찰에 신고하지만 오히려 스토커로 오해받는다. 자주 보는 설정이자 장면이다. 자신의 바라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현실의 벽은 낮지 않다. 라비니아의 실종을 조사하는 인물이 프랑크인 것은 3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설정 때문이기도 하다.

 

살인범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의 주요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평온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불안감에 휩싸여 있거나 살의로 충만해 있거나 자신의 병 등으로 인한 부채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연쇄살인범이 중심에 있다. 다른 소설이라면 언론을 집어넣어 사회문제로 만들겠지만 왠지 이 부분이 빠져 있다. 경찰 내부의 부패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빠져 있다. 인물과 사건과 살인범의 사연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 덕분에 가독성은 높지만 앞에서 말한 찜찜함이 남는다. 혹시 연작 중 한 권이라면 금방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미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많이 본 설정이니까. 이 작품으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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