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할 때 그 마음으로 - 법정이 우리의 가슴에 새긴 글씨
법정 지음, 현장 엮음 / 책읽는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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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란 에세이를 다 읽지 못했다. 오래 전 문고본을 들고 다니다 조금씩 읽었는데 술 한 잔 하고 탄 늦은 밤 택시에 두고 내리면서 인연은 끊어졌다. 다시 사서 읽어도 되지만 왠지 모르게 손이 나가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법정 스님의 다른 책들은 한두 권씩 샀다. 그 당시는 에세이를 거의 읽지 않는 시절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언론을 통해 스님의 부고를 들었다. 깜짝 놀랐다. 늘 유명인의 부고를 듣지만 그때는 조금 특별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언은 그의 이름으로 발간된 책들의 가격을 폭등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열기가 한국을 휩쓸었다.

 

언론을 통해 스님의 일화나 간단한 이야기가 나오면 늘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다 읽지 못한 무소유지만 그의 삶은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 책을 내지 말라고 했지만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로 인해 얻게 될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유언을 지키지 않았다. 그 결과로 법정 스님과 관련된 책들이 새롭게 나오기도 했다. 이 책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솔직히 법정 스님만 알지 현장 스님이 누군지 모른다. 비슷한 이름을 서점 등에서 본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책 속에 분명하게 나온다. 속세의 촌수로 따지면 조카다. 이해인 수녀의 글을 보면 이 사실이 많이 알려진 모양이다. 현장 스님이 엮은이로 나온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구성은 간단하다. 스님의 명동성당 강론, 종교 교류 활동, 애송한 짧은 시와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 교류 활동의 한 방편으로 명동성당 강론을 했는데 차분하게 새겨들을 말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것은 길상사 마리아 관음상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상당히 특이하다. 불교란 거대한 틀을 뛰어넘었다는 평에 동의한다. 천주교 신자에게 불상을 의뢰했다는 그 자체가 놀라운 발상이다. 스님의 넓은 포용력이 없다면 쉽지 않았을 작업이다. 강론의 원고가 없어 이해인 수녀의 CD를 통해 그 내용을 확인했다는 부분에서도 스님이 가진 삶의 한 철학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를 가장 사로잡은 부분은 애송한 짧은 시와 그가 쓴 글과 간단한 그림들이다. 표지에 나온 그림처럼 선 하나로 휙 그려낸 그림이 가슴 한 곳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일필휘지로 갈겨 쓴 글들은 초심자가 단숨에 알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오랫동안 글을 쓴 사람만이 가능한 서체다. 놀이(戱)란 단어를 그가 쓴 글에 많이 덧붙였는데 이 부분도 재밌다. 글의 내용은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닌데 글자의 모양이나 구도는 놀이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편지글로 오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괜히 스님이 재밌게 놀았던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싶다. 이 욕심 버려야 하는데 쉽지 않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그의 작품을 전부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두께도 당연히 얇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디다. 글과 그림은 한 번 더 쳐다보게 되고, 내용은 잠시 곱씹게 만든다. 병을 얻은 후 유머 감각은 아재 개그에 가깝지만 여유가 보인다. 그의 글에서 위안을 얻고, 자신의 삶을 돌아본 사람이나 그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에게 그의 부재는 이해인 수녀의 이 말 한 마디로 충분히 표현된 것 같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스님.” 언젠가 그의 종이 놀이와 글들이 더 모여 더 두툼한 책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과일을 먹을 때는 그 꽃향기까지 먹을지로다.”라는 말처럼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무소유 삶까지 실천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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