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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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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쿤데라의 소설을 읽었다. 14년 만의 장편이라고 하지만 이상하게 그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다. 그 사이에 그의 소설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고, 서점에서 자주 보았기 때문에 더 그런지 모르겠다. 그의 장편을 읽을 때면 늘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하면서 빠져들고는 했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다. 읽으면서 분량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이 풀어내는 수많은 이야기 파편들이 좀처럼 하나의 흐름으로 꿰지지 않았다. 그런데 각 이야기에 빠져든다. 분량이 적어 단숨에 읽었지만 몇 가지 의문과 생략된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1장에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한 명인 알랭이 여자들의 배꼽티를 보면서 사색에 잠긴다. 여성 매력의 중심이 가슴도 엉덩이도 허벅지도 아닌 배꼽으로 옮겨가는 현실을 간략하게 풀어낸다. 이 순간 뭐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배꼽 패티시인가? 그런데 이 배꼽에 대한 이야기가 마지막에서 다시 반복된다. 배꼽은 배꼽을 지닌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그 여자가 아닌 태아에 대해 말한다고. 이어서 우리가 배꼽의 징후 아래에서 단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한 섹사의 전사들이고 말한다. 이때 배꼽과 태아는 연결되고, 알랭의 탄생을 둘러싼 과거가 배꼽의 탯줄과 이어지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마지막 장에서 작가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147쪽)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무의미란 이름으로 부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147쪽)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정확한 실체를 붙잡지 못했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를 계속 놓치고 있다. 아마 어느 날 갑자기 이 무의미에 대한 답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무의미의 정의나 의미를 모르지만 24마리의 자고새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의미심장했다. 스탈린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짓말이라고 뒤에서 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편의 유쾌한 블랙코미디 같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인형극으로 이것을 제작하고 싶다고 했을 때 과연 어떻게 살을 붙여 한 시간 이상을 끌고 나갈지 궁금했다. 그리고 농담을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정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현재 한국도 유머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점차 사회가 경직되고 있는데 그들은 과연 이 스탈린 고사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를 낙태하려고 강에 뛰어들었다가 본능에 의해 수영하고, 그녀를 구하려는 남자를 오히려 죽이게 되는 이야기는 섬뜩하면서 묘했다. 이 이야기가 갑자기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는 부분에서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것이 번역 상 오류인지 아니면 비약적 전환을 의도한 연출인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칼라방이 파티에서 파키스탄 사람인 것처럼 연극하면서 가짜 파키스탄 말을 사용하는 설정을 만들어 포르투갈 여자와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한 편의 희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해도 의미도 통하는 그 장면은 어느 순간에는 언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든 일에서 무엇인가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회. 이 사회에서 농담은 거짓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사람들의 사고는 경직될 수밖에 없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펼치는 축제의 장은 그 속에서 누구도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지 않는다. 출연 계약도 없는 배우들이 공연하고, 연극 무대조차 필요 없는 사람들의 공연. 이것은 말 그대로 무의미의 축제다. 어쩌면 작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냥 풀어내면서 삶의 의미가 아닌 삶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의미를 찾는다고 소비하는 삶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역설인지도 모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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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쓴 인생론
박목월 지음 / 강이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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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파 시인 박목월에 대한 나의 무지를 먼저 말하고 싶다. 왜인지 모르지만 늘 <목마와 숙녀>를 쓴 박인환 시인과 헷갈려한다. 한때 이 시가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친구들이 상당히 많이 외우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어디에선가 혼선이 생겨 이런 착각을 만든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문제가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 어딘가 심하게 각인되어 계속 이런 착각을 만들 모양이다. 어쩌면 이번 수필이 하나의 치유 방법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러기에는 이 수필집이 나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많지 않은 분량에 수필집이란 것을 감안했을 때 그냥 들고 읽기 시작하면 금방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첫 두 편의 수필을 읽고 시대의 벽을 느끼면서 예상이 깨지지 시작했다. 부부의 대화에서 아내와 남편의 변을 공들여 썼는데 이것이 지금 이 시대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처음 이 수필집이 나왔을 당시에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최소한 지금은 아니다. 실제 이 두 부부의 삶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나의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을 보았을 때와 너무 맞지 않아 이상론을 펼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 시와 달리 약간 늘어지는 문장은 빠르게 집중하는 것을 방해했다.

 

모두 읽은 후 다시 차례를 펼쳐보니 상당히 관념적인 제목들이 많이 보인다. 이 글을 위해 그가 가장 많이 인용하는 두 명의 작가가 있다. 헤세와 릴케다. 한때 즐겨 읽었던 헤세의 문장을 인용해서 그의 논리를 펼쳐낼 때 더 집중해야 하는데 왠지 나와 궁합이 맞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릴케의 경우는 제대로 읽은 적이 없으니 통과. 그리고 가끔 톨스토이를 인용하는데 처음에는 뭐지 하는 느낌이었다가 모든 이야기가 다 나왔을 때 삶과 시간에 대해 또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가끔 이런 글들을 볼 때 시인의 시각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다른 면을 살짝 들여다보는 흥분을 느낀다.

 

차례만 보면 두 번씩 다루는 소재가 둘 있다. 하나는 고독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이다. 사랑의 경우는 더 많지만 현 세태와 맞지 않는 듯하고, 아니면 현재까지도 불변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 특별히 신선함이 없다. 반면에 고독은 나의 이십 대를 뒤흔들었고, 지금도 가끔 그 고독에서 얻은 흔적을 가끔 떠올리면서 현재의 과잉을 꺼려한다. 고독을 병이라고 했지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그가 얻은 과실들을 볼 때면 삶의 다른 면 속에서 깊이와 풍성함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인용된 헤세와 릴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행복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시인의 행복과 우리의 행복은 다르다. 일상에서 발견한 행복을 그려낼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행복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라고 할 때 그 빤한 수사가 가슴 한 곳에 콕 박힌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집짓기의 괴로움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미숙한 경험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실제 일상에서 나도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는 미숙함과 주저함에서 비롯한다. 여기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의 삶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그 시대 여성 신자들의 삶의 한 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개인의 취향에 맞지 않은 글이 많았지만 청록파 시인들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한 글은 반갑고 재미있었다. 학창 시절 암기용으로 외웠던 청록파에 대한 정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이름만은 아직도 남아있다. 이 반가운 이름과 더불어 그 시절 시인들의 삶을 살짝 풀어내었을 때, 지금과 변함없는 문단의 비리 등을 토로할 때 순간적으로 더 집중했다. 현재와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독서의 즐거움에 대한 글은 나도 공감하는 바다.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베스트셀러나 필독선들 대부분이 책 읽는 즐거움을 빼앗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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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프랑크 틸리에 지음, 박민정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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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태생적으로 영화 <쏘우>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구속과 감금이 너무나도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닮은 것은 거기까지다. 가둔 사람과 직접적인 심리적 대결을 펼치지도 않고, 세 명의 인물들이 나와 펼치는 이야기는 최소한 내가 본 영화 <쏘우>와는 다르다. 물론 이 시리즈가 7편까지 나왔고,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모른다. 만약 이 소설과 닮은 곳이 더 있다면 영화가 작가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기존에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생존게임에서 흔히 다루는 과거 이야기를 최대한 절제하고 있다. 덕분에 이야기는 세 남자가 갇힌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부분 할애한다. 물론 그들의 과거와 정보마저 생략한 것은 아니다. 이 최소한의 정보와 단서가 독자에게 상당히 불친절하게 다가오지만 이것도 작가가 의도한 연출이다. 읽으면서 독자들은 분명히 이들이 함께 갇힌 하나의 이유를 찾는다. 왜, 어떤 이유로? 이것은 그들은 가둔 자가 던진 세 개의 질문과 연결된다. ‘누가 도둑일 것인가?’, ‘누가 거짓말쟁이일 것인가?’, ‘누가 살인자일 것인가?’

 

도둑, 거짓말쟁이, 살인자. 이 세 명의 남자들 중 누군가는 살인자이거나 도둑이거나 거짓말쟁이다. 아니면 모두 다 해당되거나. 이들을 가둔 사람은 이 질문을 던진 후 그 어떤 새로운 질문도 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어둡고 냉기 가득하고 다른 어떤 식량도 없는 공간이다. 이 세 명의 남자를 제외하면 화자의 애완견 포카라 뿐이다. 그리고 자살한 듯한 한 남자의 시체가 있다. 겨우 몇 개의 오렌지와 몇 통의 연료와 텐트 등이 이 추운 공간에서 생존을 위해 주어진 도구들이다.

 

세 명의 남자는 각각 다른 직업을 가졌고 나이와 사는 곳도 다르다. 화자인 조나탕 투비에는 전직 등산가고, 철가면을 쓴 미셀은 돼지 도살을 한다. 마지막 한 명은 아랍 청년 파리드다. 특별한 직업은 없다. 어떤 연관성도 없을 것 같은 이 세 명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면서 이들은 생존을 위해 협력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식량이 없는 상황에서 작가는 은연중에 자살한 시체와 함께 사는 개를 식량으로 사용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일반적인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개를 잡아서 식량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겠지만 조나탕에게 포카라는 특별한 존재다. 하지만 이 특별함과 연결되는 인물이 이 갇힌 공간 속에 함께 하고 있다. 이 단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밀실과 생존을 다루면서 인간다움에 대한 시험을 거치게 한다. 강한 생존 욕구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부족한 식량은 인간의 체력을 극도로 악화시킨다. 여기서 다수결 민주주의의 맹점이 드러날 때 우리 마음 속 한 곳에선 이 일을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인간의 이기심과 생존 욕구가 가장 극한 상황에서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진실과 자신의 감정보다 욕구가 더 앞서면서 이것을 정당화하는 작업이 벌어진다. 작가는 이런 작업을 아주 조용히 진행한다. 전문 산악인이었던 주인공을 내세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무엇인지 알려주면서.

 

단순히 생존을 위한 상황들을 보여주기 위한 소설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들이 남아 있다. 왜 이들이 갇혔는가 하는 의문이다. 시간이 지나가고, 과거에 대한 정보가 하나씩 흘러나오면서 조금씩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바로 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단서들이 있다. 이 단서를 세심하게 심어놓고 더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유는 단 하나. 진실과 복수다. 복수를 위한 하나의 명분으로 진실을 알고자 하고, 이 진실은 마지막 순간 드러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또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그런 점에서 약간 아쉬운 대목이다. 여운을 많이 제거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만들고 풀어내는 힘이 좋은 작가인데 다른 작품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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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해줘, 레너드 피콕
매튜 퀵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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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에 본 영화 중 한 편이 이 작가의 원작이다. 제목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고 원작에도 관심이 갔지만 늘 그렇듯이 영화 이미지가 원작을 침범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다 이 책 소개를 보았다. 한 소년이 친구를 죽이고 자살하거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더 눈길은 끈 것이 있다. 작가 이력에 나온 책 제목이다. 이런 관심에도 불구하고 실제 책을 받았을 때 약간 걱정이 되었다. 영화와 소설의 괴리가 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걱정은 읽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사라졌다.

 

레너드 피콕.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오늘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생일을 모른다. 그리고 그는 큰 결심을 했다. 그것은 한때 베프였던 애셔 빌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는 것이다. 총은 그의 할아버지가 나치를 죽이고 빼앗은 독일 제식 권총 P-38이다. 이전에 언론에 나왔던 학생들처럼 그도 애셔를 죽이고 학교에서 자살하면 되지만 이 괴짜 소년은 몇몇의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준 후 거사를 진행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선물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드가 준비한 선물은 모두 네 개다. 즉 네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은 열여덟 소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당사자들은 잘 모르지만. 그 첫 번째 인물이 옆집 보가트 팬인 할아버지 월트다. 그는 학교에서 외톨이인 레너드와 보가트 영화를 보면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소년이 전해준 선물은 보가트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모자다. 싼 모자지만 함께 영화를 보면서 대사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월트는 부모가 같이 살지 않는 그에게 집과 같은 역할을 한다.

 

다음은 이란 소년 바백이다. 그는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자다. 애셔 패거리에게 왕따를 당하던 그를 도와주었고, 돈을 내면서까지 바백의 연주를 들었다. 외톨이에 학교 어디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던 레너드에게 바백의 연주를 듣는 시간만은 휴식이었다. 그가 바백에게 전하려고 한 것은 할아버지가 그의 대학 학자금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이 수표를 바백에게 전하는데 그는 이것이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생각한다. 오늘 밤 자살하기 전 자신의 유산을 이란민주주의를 위해 사용해달라는 마음에서 전달한 것인데 오해한 것이다.

 

세 번째는 로렌 바콜을 닮은 로렌이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학교보다 부모에게 홈스쿨링을 받는다. 성경을 그대로 믿고 이 시대와 동떨어진 삶을 사는 소녀다. 길거리 선교 중 그녀가 레너드의 눈에 들어왔고, 그는 그녀와 첫 키스를 하고 싶어한다. 로렌과 첫 키스를 하고 싶은 레너드의 악의와 한 사람이라도 지옥불에서 구출하려는 로넨의 착한 의지가 충돌한다. 솔직히 로넨의 이야기가 답답하지만 이 둘 사이에 묻어나는 순수함은 좋았다. 선물은 은 십자가다. 그리고 로넨의 만나기 전에 그가 한 행동 중 하나는 우리의 삶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출근길 직장인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들을 뒤따르는 레너드의 행동에서 잘 나타난다. 그들 중 한 명이 내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 순간 뜨끔했다.

 

마지막은 학교 실버맨 선생님이다. 그가 가르치는 것은 홀로코스트 등이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학생들이 다양한 생각을 하고 다른 시각에서 사물이나 현상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진실을 바로 보는 것을 불편해하고 거부한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생각하지 못했는데 실제 우리 삶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일이다. 특히 정치 이야기로 들어가면 웃어른들과 싸우게 되는데 대개가 이런 불편한 진실을 둘러싼 공방이다. 제너드가 준 선물은 할아버지의 훈장이다. 그런데 실버맨 선생님은 이 행동에서 불길함을 느낀다. 학교에서 금지하는 자신의 연락처를 준다. 이 전화번호가 한 소년의 삶을 크게 바꾼다.

 

소설 중간중간에 미래로부터 온 편지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뭐지? 진짜 미래에서 온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실버맨 선생님이 제너드에게 쓰라고 시킨 숙제다. 이 편지를 처음 읽을 때는 몰랐는데 왜 이런 편지를 쓰게 했는지 듣게 되는 순간 그냥 가볍게 읽었던 문장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소년의 삶이 어떤 어려움과 괴로움과 고통 속에 놓여 있고, 그가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슬픈 생각들이 글로 표출될 때 삶의 의지가 조금씩 살아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은 자살하려는 레너드를 찾아오는 실버맨 선생님이다. 그는 결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진짜 선생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업시간에 학생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하는 기행을 펼치는 것도 놀랍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불편하고 힘든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자세와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행동들이 슬픈 생각에 잠식된 레너드를 현실 속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피콕이 왜 얘셔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고 했는지 후반부에 나오는데 사실 이 부분은 이 소설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이지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레너드의 삶 속에 자리잡은 슬픈 생각을 하나씩 파악하고 그 슬픔을 견디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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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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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란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만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없는 것 같다’란 표현을 쓰는 것은 그의 장편이나 단편을 읽었다는 확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단편 한두 편 정도는 어딘가에서 읽었을 것이다. 예전에 수많은 문학상 단편집들을 읽었으니. 하지만 장편은 모르겠다. 낯익은 제목들은 보이는데 읽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이런 상황들이 왠지 모르게 그의 소설에 쉽게 손이 가지 않게 한다. 책장을 뒤지면 그의 소설 한두 권 정도는 분명히 있을 텐데.

 

작가 이승우의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래서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조금 기대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취향이 아니다. 간결하고 분명한 문장을 좋아하는데 그의 문장은 모호함과 복잡함으로 가득하다. 천천히 곱씹으면 분명한 차이가 보이지만 의미 중복을 이용한 문장은 읽기 불편하다. 물론 이런 불편을 통해 사물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그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지금 나에게는 관념적인 문장에 빠져 헤매고 다닐 마음도 여유도 없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역시 <이미, 어디>다. 나는 ‘이미’ 읽고 지나간 문장을 잊고 있었다.

 

표제작 <신중한 사람>을 읽으면서 불안과 분노를 느꼈다. Y의 신중함이 소심함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고, 이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과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Y의 집이 전세 사기를 당한 사람들의 집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Y의 무능과 무력함에 분노가 생겼다. 정말 그의 아내가 치밀하지 못한 신중함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유약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한 표현에 동의한다. 해외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오랜 세월 근무한 직장인의 모습치고는 너무 유약하고 소심해서 오히려 낯설고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오래된 편지>와 <딥 오리진>은 작가 세계의 한 면을 살짝 엿본 느낌이다. 한 작가의 성공을 질시하는 작가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날 때 자세하게 묘사되는 심리 변화는 너무 솔직해서 섬뜩했다. 전작은 과거를 묻으려고 하고, 후작은 현실과 환상의 교묘한 경계를 통해 진실을 모호하게 처리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자주 저지르는 심리적 변화다. 낯익어 더 불편하게 다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리모컨이 필요해>에서 무기력한 한 가장의 삶을 서글프고 묘하게 쓸쓸하게 표현했는데 이상하게 은근한 여운을 남겨준다.

 

문학상을 수상한 <칼>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잘 몰랐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빠져들었다. 기이한 한 부자의 삶 속에 칼이 어떤 의미인가 알려줄 때 고개를 끄덕였고, “어머니는 가끔 나를 염려한다. 나는 나를 염려하지 않는다.”(224쪽)고 할 때 이 표현이 주는 재미와 깊이에 빠졌다. <어디에도 없는>는 비자를 받기 위한 유의 행동이 카프카의 소설 속 장면을 연상시켰다. 집행관이 주장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도 생기면서. <하지 않은 일>은 수사학적 문장으로 가득하다. 이 논리를 따라가면 현실이 얼마나 불분명하고 모호한지 알 수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 사람이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을 보여줄 때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분명히 이 소설집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모호함과 불확실함과 불안감 속에 드러나는 우리의 일상은 낯설지 않고, 신중한 사람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유약한 소심함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반복되는 문장 구조 속에 숨겨진 분명한 차이가 수사학의 논리로 풀려나오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면 빨려들어간다. 하지만 그 순간뿐이다. ‘어디’로 나의 시선과 마음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군더더기 많은 문장과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 충분한 매력을 즐기지 못했지만 한 명의 작가를 가슴에 아로새기기엔 충분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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