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개의 바람
줄리안 김 지음, 이순미 옮김 / 반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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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이야기 구성이 허술해서 긴장감이 떨어졌다. 싱가포르 거주 한국 작가가 비욘드 워즈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상이 어떤 상인지 자세한 설명이 없다. 신진 작가에게 주는 상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의 장르가 판타지임을 생각할 때 판타지 장르 쪽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물론 이 소설이 나에게 그렇게 강한 매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가 취향 탓일 수도 있다. 너무 빨리 드러나는 전생과 너무 쉽게 풀려버리고 허술한 비밀들이 나의 착각과 결합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한국 작가라서 그런지 주인공은 한국인 송수호다. 그는 고아 출신이지만 열두 개의 바람을 다루는 능력 때문에 세인트라는 조직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나이는 스물하나. 강원도에서 영어 선생을 하고 있는데 페루에 문제가 생겨 출동한다. 영국의 본부를 거쳐 뉴욕에서 동료 한 명을 만난다. 그가 바로 과거를 보는 디에고다. 그는 평소 핫도그 노점상을 한다. 수호와의 만남도 장난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이 만남은 이 소설의 도입부에 깔아놓은 전생의 기억을 하나씩 풀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 전생은 바로 진시황 시대다.

 

수호와 디에고가 페루에서 갑자기 사라진 마을 사람과 군인들을 찾고 있다면 서안에서는 홍콩의 천재적인 금융인 로니 탄이 진시황릉의 비밀을 하나씩 파헤친다. 놀라운 직관력과 판단력으로 그는 금융계에서 승승장구한다. 이 돈의 일부를 황릉 발굴 등에 기부하는데 그곳에서 발견된 열두 개의 바람이란 단어 때문에 서안으로 간다. 그곳에서 로니 탄은 엄청난 병마용 속에서 숨겨진 비밀을 하나씩 밝혀낸다. 진시황릉을 건설한 린카이푸의 안배에 따라 한 발씩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간다. 현대의 건축물보다 더 정밀하게 설계된 거대한 진시황릉 속으로.

 

수호와 디에고의 만남, 이들과 오드리의 만남은 전생의 인연을 현세에 그대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오드리의 전생을 보면서 수호와의 사랑을 들려주고, 각자의 끌림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알려준다. 사실 너무 빨리, 너무 빤하게 이 전생을 들려줘서 그렇지 하나씩 풀어내는 방식은 나쁘지 않다. 이것과 더불어 진시황릉을 연결해서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설정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 과정들이나 상황들이 그 어떤 신비감도 호기심도 불러오지 못함으로써 긴장감이 떨어졌다. 디에고가 기억을 잃었을 때 너무 쉽게 그 해독제를 찾아낸 것도 역시 그렇다.

 

수호 일행이 페루에서 잉카의 후예들과 전투를 펼칠 때 로니의 일행은 점점 더 린카이푸의 비밀에 다가간다. 잉카의 후예들이 가진 돌의 위력은 날씨를 조정하는 것이라면 린카이푸가 숨겨놓은 돌은 지진 등을 불러올 수 있는 위력을 가졌다. 페루에서 수호의 액션이 펼쳐질 때 로니 일행은 무덤 속에서 하나씩 암호를 풀면서 위기를 벗어난다. 적들의 공세가 점점 심해지면서 수호의 전생 연인이었던 오드리는 진시황릉으로 온다. 그녀의 가세는 황릉의 위험하고 견고한 방어를 뚫는데 큰 힘이 된다. 실제 중요한 순간 단서를 제공하고 약초에 대한 전생의 해박한 기억은 동료들을 위험에서 구해준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매력은 진시황릉에서 암호를 풀면서 전진하는 것이다. 수호의 액션은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볼거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는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진시황릉 속 암호 설정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도 이것을 안다. 하나의 방에서 암호를 풀면서 나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무협소설 속 장면과 비슷해 전혀 새롭지 않다. 이것이 나에게는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인연이 너무 많이 흘러넘치고 영웅의 활약이 너무 쉽게 이루어질 때 그 아쉬움은 더 커진다. 좋은 출연진을 모아놓았으니 다음 소설에서 이들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어떤 활약을 할지 한 번 더 기대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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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진짜 메이저리그다
제이슨 켄달.리 저지 지음, 이창섭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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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계속 야구를 봐 왔고, 지금도 시즌이면 계속 본다. 자꾸 보고, 해설을 듣고, 관련 책들을 여기저기서 읽다보니 다른 사람보다 야구를 조금 더 알고 있다, 고 생각한다. 어릴 때는 마구를 던지는 투수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음먹으면 홈런을 쉽게 칠 수 있는 4번 타자나 언제 어디서나 도루를 할 수 있는 발 빠른 주자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다. 이런 환상은 대부분 만화 등에서 왔다. 현실을 벗어난 천재들의 야구를 보여준 만화는 실제 야구와의 괴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다 가끔 현실적인 만화를 만나면 시큰둥했다. 너무 평범해서. 하지만 야구는 너무 평범해 보이고 시큰둥한 현실 속에 강한 뿌리를 내리고 우리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사실 미국 메이저리그를 잘 보지 않는다. 최근에 류현진과 추신수 때문에 조금씩 보지만 특별히 시간을 내어 보지는 않는다. 한국 야구 볼 시간도 많지 않은데. 하지만 이 책은 메이저리그와 한국 리그의 문화적인 몇 가지 차이만을 제거하면 우리가 야구를 보면서 생각하고 유심히 쳐다봐야할 수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그것을 조금씩 알아갈 때 야구 중계를 보는 것이 피동적인 움직임이 아닌 능동적인 움직임으로 변한다. 즉 공 하나 하나에 집중하고 타자의 반응을 예측하고 주자가 언제 달릴지 고민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야구는 휠씬 재밌고 긴장감이 흐른다. 이 책은 바로 관중으로 하여금 실제 야구장 속으로 끌고 들어가 진짜 야구 선수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왜 그런 곳에서 수비하고 그때 방망이를 휘두르는지 알 수 있게 만든다.

 

메이저리그를 잘 모르지만 제이슨 켄달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다. 포수 출신이다. 올스타를 세 번이나 했다는 것은 대단한 기록이다. 매년 쉽게 올스타가 되는 선수가 언론에 자주 나오니 대단한 기록처럼 보이지 않지만 한국의 IMF 영웅이었던 박찬호나 최근의 추신수나 류현진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이 대단함은 한두 해 반짝 성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매년 자신을 단련하고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운동장에서 꾸준히 선발 선수로 나갈 때 겨우 가능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몸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에도 그를 선수로 계약하는 팀이 나타났다.

 

책은 경기 전 모습에서 시작하여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타자, 주자, 감독, 그 밖의 이야기로 끝난다. 경기 전후의 모습은 TV를 통해 잘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그 나머지는 야구에서 각각 차지하는 역할을 구분해준다.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투수를 가장 먼저 내놓은 것은 야구가 투수놀음이란 말도 있지만 공을 던져야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단지 강하고 빠른 공만 던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는 것이 조금 많아졌다고 투수의 투구 후 위치나 공 배합 등도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포수로 넘어가면 더 복잡해진다.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알지만 화려함이 부족해서 가끔 상대적으로 홀대한다. 그러나 중계를 볼 때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경기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보고 단순히 타율이나 공 배합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야수나 타자나 주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야구 중계를 보다 보면 해설자가 야구를 멘탈 스포츠라고 말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절실히 느낀다. 정말 대단한 선수들이 얼마나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인지 담담하게 쓸 때 그 점이 더 부각된다. 타자는 단순히 투수하고만 대결하지 않는다. 야수도 타자의 기록을 가지고 수비 위치를 바꾸면서 아웃 확률을 높인다. 중계에서 잘 친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날아가서 아웃되는 것을 보는데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한일 야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감독으로 넘어간다. 자기 선수를 잘 아는 감독의 중요성과 수퍼스타에 휘둘리는 감독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살짝 깨닫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중요한 문장이 있다. 그것은 ‘경기 상황을 알아야 한다’다. 원론적인 이야기와 이론이 아무리 많아도 경기 상황에 맞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다. 켄달이 상황을 만들어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야구는 개인 기록의 경기지만 팀 경기다. 팀이 이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하고, 경기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야구 중계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대사 중 하나다. 개인 기록이 아무리 좋아도 팀이 우승하지 못하면 그 선수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메이저리그에서 MVP가 나쁜 성적을 거둔 팀에서 잘 나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선수들을 모아둔 곳이지만 그들도 인간이라 실수를 한다. 아웃이 일상적이라 3할이면 엄청난 대우를 받는 곳이다. 야구를 잘 모르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서 야구를 본다면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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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복, 휴休
오원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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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말을 보낸 적이 많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책읽기를 중단하거나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멍하니 텔레비전을 켜놓고 그냥 시간을 보낸 것 뿐이다. 이것이 과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하고 묻는다면 그 답은 아니다, 다. 휴식을 제대로 취하고 있는가 묻는다면 그냥 시간만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나간 시간이 아깝고 아쉽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이나 예전에 못했던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었는데 하면서. 우리는 이처럼 갑자기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그냥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한다.

 

쉬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는 네 가지 방식을 말한다. 비우고, 몸에 귀를 기울이고, 타자와 만나고, 안과 밖이 없이 몰입한다. 이것은 다시 명상과 통합의학과 숲 치유와 예술 치유 이야기로 요약된다. 이 방법들은 저자가 잘 쉬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부터 가득 채우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정보와 지식과 부를 채우려고 아등바등한다. 생각이 점점 많아진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스트레스가 강해진다. 이때 이런 것들을 놓아버린다. 비워버린다. 생각과 마음을 비우는 명상에 빠진다. 물론 이것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완전히 몰입할 때 자신으로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

 

몸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너무 자주 병원에 가거나 거의 가지 않는다. 나의 경우는 후자다. 가끔 금방 끝날 병을 오래 가지고 가는 경우가 있다. 자연 치유를 과신한 결과다. 제대로 몸에 귀를 기울이고 좀더 세밀하게 관찰했다면 이런 일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잘 먹고 잘 움직이고 잘 자고 잘 숨 쉬며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힘든 일들이다. 일상생활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바른 자세를 취하고, 생활운동량을 늘리고, 편한 자세로 좋은 호흡을 하고, 늦게 자지 않으면서 숙면을 취해야 한다. 이러면 몸 안의 의사가 살아나 우리를 돌본다.

 

나는 ‘나들’로서 존재하고 있다. 숲에 들면 나라는 타자와 나무, 새, 냇물, 바람이라는 타자가 공생한다는 사실을 느낀다고 말한다. 요즘 흔히 말하는 피톤치드니 음이온이니 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풍부한 산소도. 숲속을 가득 채운 타자들은 음악으로 공명한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안팎이 없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할 때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것 또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이 필요하다. 글쓰기의 경우 뼛속까지 모두 드러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언제 이후부터 이런 깊은 글쓰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단순히 추상적인 말들로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는다. 현대 과학이 발견한 것을 근거로 역사와 과학과 경험을 엮어서 잘 쉬기 위한 방법을 제안한다. 찬찬히 책을 읽다 보면 실천으로 옮기기가 만만하지 않다. 어떤 것은 어느 순간부터 나의 삶에서 사라진 것도 있다. 평안함에 빠져 시간을 절약한다는 핑계로 그만 둔 것도 있다. 자극적인 것을 찾아 움직이면서 몸과 마음을 혹사한 경우도 많다. 순수한 몰입의 기쁨도 점점 사라진다. 집중하는 시간도 짧아진다. 이것들을 되찾기 위해 잘 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책이 요구하는 것들이 너무 많고 힘들어 보인다. 뭐 하나씩 한다면 다를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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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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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그 이름은 스위드다. 소설 속 작가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시절 뉴어크의 동네에서 스위드는 마법의 이름이었다. 그는 풋볼에서는 엔드, 농구에서는 센터, 야구에서는 일루수였다. 흔히 말하는 만능스포츠맨이었다. 아직 2차 대전 중이었던 그 시절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동네 사람들이 그를 통해 환상에 빠지고, 전쟁을 잊을 수 있게 만들었다. 정말 엄청난 일이다. 이 기억은 화자가 노인이 된 후에 그를 만나 인사만 했는데도 가슴 떨리는 흥분을 느끼게 만드는 매력을 지녔다. 영웅 숭배가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예다. 하지만 작가는 이 영웅이 파멸하며 추락하는 과정을 그 시대의 모습과 같이 엮어서 자세하게 풀어낸다.

 

소설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기억 속의 낙원, 2부는 추락, 3부는 잃어버린 낙원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 이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두 읽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 보니 한 편의 실낙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추억과 기억으로 윤색되었던 과거를 현실 속으로 불러오고 사실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영웅과 낙원을 산산조각낸다. 한 인간의 엄청난 성공이 시대와 딸이 불러온 사건으로 인해 어떻게 파괴되는지, 그 과정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행동했는지 그 시대의 풍경과 같이 보여준다. 특히 중심이 되는 시대는 60년대다.

 

한 영웅에 대한 숭배와 그로 인한 오해에서 이 소설은 시작한다. 오해하고 오해하면서 사는 삶에서 어릴 때 자신의 영웅을 만나 찬란했던 과거사를 듣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자 행복이다. 하지만 이 행운과 행복은 자신만의 착각이다. 그가 다시 만난 영웅은 딸 메리가 폭탄 테러를 가하고, 그 때문에 한 명의 선량한 시민이 죽으면서 추락하기 시작한다.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먼저 들지만 현실은 잔혹하다. 그 시대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의 파도에 그 딸이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비록 이전에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하지만 성인은 아직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열정적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빠져들기에는 충분한 나이였다.

 

학창 시절에는 운동선수로 정점을 찍었고, 가업을 물려받아 장갑업체를 운영할 때는 늘 승승장구했다. 이런 영광들도 딸의 폭탄 테러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의 살인과 도망은 평온했던 가정의 삶을 불안과 공포로 가득 채운다. 혹시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역시였다. 이 과정들을 보면서 우리의 7~80년대 모습이 잠시 떠올랐다. 자식들의 데모 참여와 죽음으로 그 부모들이 어떻게 의식을 깨우치게 되었는지 생각났기 때문이다. 물론 메리의 폭탄 테러와 민주화 운동은 다른 문제다. 그래서인지 스위드의 대응도 그 원인을 제대로 보기보다 자기만의 생각으로 흘러간다. 어쩌면 그는 그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 하는 의문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겼다. 스위드가 자신이 딸과 한 키스에서, 대화에서, 가족 내부의 관계 속에서 되짚으면서 찾지만 이미 자신만의 세계 속에 살고 있던 그가 또 다른 자신만의 세계에 살던 딸을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자기들의 주장만 내세우면서 정면에서 진실을 마주할 마음이 없었던 스위드에게 이것은 이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항상 승승장구하면서 남들이 바라는 바대로 올바르게 행동하고 생각했던 그이기에 돌발적이고 충격적인 행동을 할 힘을 상실한 것이다. 힘들게 딸의 소재를 알고 그녀의 삶이 얼마나 비루하고 처참한지 알면서도 힘으로 끌고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동생 제리와의 대화는 이제 그 추락이 바닥에 닿았음을 알려준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있다. 하나는 베트남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베트남 전쟁은 다시 그 시대에 불같이 일어났던 인종차별 문제와 또 연결된다. 이것은 스위드가 유대인이란 것과 또 이어진다. 스위드의 아내인 돈이 아일랜드계 천주교도라는 것은 메리가 태어났을 때 종교와 인종 문제로 시댁과 불화를 불러왔다. 이런 과정이 어린 메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까? 미인대회 출신의 엄마가 바라는 바대로 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받았던 메리가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방황할 때 이 부부는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베트남에서 승려들이 분신자살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지만 부모는 ‘왜 그런 일을 할까’라는 생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이미 이때 아빠와 딸 사이는 벌어지고 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두고 벌이는 논쟁은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그 유명한 포르노 영화 <목구멍 깊숙이>로 이어진다. 아직 이혼이 그렇게 보편적이지 않았고 성윤리 의식이 강했던 그 시절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하지만 이 대화 속에서 핵심은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이것을 바라보는 미국 시민의 의식이다. 40년이 지난 현재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는 그냥 있을 수도 있는 일로 치부되면서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과연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가장 올바른 사나이였던 스위드의 불륜이 드러난다. 강한 윤리 의식으로 묶여 있는 것 같은 외양을 지닌 미국 가정의 허상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스위드 부자는 자신들이 성공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노력에 의해 부가 축적되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흑인 폭동이 벌어졌을 때도 자신들은 흑인 등에게 좋은 사업가란 인상을 계속 풍긴다. 작가는 왜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알려주지도 않는다. 물론 그 나라 사람들이라면 역사 시간에 제대로 배웠으니 필요 없을 것이다. 이후 이 폭동에 대응하는 자본가들의 모습은 현재 미국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스위드는 잠시 늦었을 뿐이다.

 

좋은 소설이다. 읽을 때 조금 힘들게 읽었는데 글을 쓰면서 하나씩 떠올려보면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그 시대의 풍경과 사람들의 의식, 인종차별과 베트남 전쟁, 정치 문제와 이에 대응하는 정치권과 시민들의 모습, 사회 운동이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자본가들의 의식과 현실 인식, 잘 가꾸어진 가정의 뒤틀리고 왜곡되고 숨겨진 배신들. 사랑으로 가득할 것 같은 가족의 삶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낙원이 얼마나 허약하고 과장되고 기만적인지 그 참 모습을 보여줄 때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들의 낙원은 잃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는지 모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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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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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는 왠지 모르게 나와 잘 맞지 않았다. 같은 영국 작가인 이언 매큐언의 소설에 미친 듯이 빠져든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인지 반스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 사놓은 책이 몇 권 되지만 손이 쉽게 나가지 않았다. 2012년에 나온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대한 엄청난 호평을 기억한다. 이 기억은 줄리언 반스라는 작가를 그냥 포기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그러다 나온 이 에세이는 소개글부터 특이했다. 처음에는 소설인줄 알았는데 2008년 아내와의 사별 후 감정을 담은 에세이라고 한다. 소설이 아닌 에세이라면 어떨까? 그렇게 인연은 이어졌다.

 

이 에세이는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에세이들과 다르다. 모두 세 장을 되어 있고, 각 장이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냥 소설로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는 구성과 전개다. 특히 마지막 장인 깊이의 상실에서 그의 깊은 상실감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소설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각 장에서 반복되는 하나의 문장은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바로 이 문장이다. 이후 나오는 문장은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와 “때로는 합쳐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다. 이 문장들은 각 장의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앞의 두 장을 끌고 나가는 소재는 기구다. 인간이 하늘을 날기 전 가장 많이 이용되었던 도구다. 작가는 이 기구를 중심에 놓고 두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명은 세상의 변화를, 다른 한 명은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물론 가장 핵심은 사랑이다. 그런데 그렇게 길지 않은 이 이야기들이 왠지 모르게 집중력을 흐트린다. 줄리언 반스의 다른 책을 읽을 때 느낌을 떠올려준다. 단순한 역사와 기술에 대한 나열로 먼저 다가온 탓이다. 좀더 집중해서 읽었어야 하는데 보통의 장편소설처럼 가볍게 도입부를 지나갔다. 그 결과는 작가에 대한 나쁜 선입견만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3부 깊이의 상실 장에 오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아내의 사별 이후 그가 느낀 감정들이 하나씩 풀려나올 때 집중하게 되었다. 단순히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이 주는 의미를 하나씩 던져준 것이다. 누군가가 먼저 자식을 떠나보낸 후 자신들은 매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이 글 속에 자살을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도 나온다. 단순히 죽는다는 것으로 이 상실의 깊이가 단숨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변한 것들도 조금씩 들려준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169쪽)고 할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과 존재의 소멸을 같은 선상에 놓지 않고 이야기하면서 그 상실감을 어떻게나마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보면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이야기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결코 버릴 수도, 보낼 수도 없는 존재에 대한 사랑을 가장 절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모습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고? 한 번도 이런 경험을 오랫동안 유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별개의 이야기인 것 같은 세 장의 이야기가 마지막 장에 오면 하나의 이야기로 모인다. 바로 줄리언 반스의 아내 팻 카바나다. 그녀의 죽음이다. 그녀에 대한 그의 비탄과 상실과 사랑이다. 사랑이다. 제목처럼 사랑은 죽는다고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적어도 작가에게는 그렇다. 이 사랑을 이런 고품격 에세이로 풀어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그 사랑의 깊이가 얕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정제되고 잘 구성된 이야기를 통해 그의 감정도 같이 정돈되고 다듬어졌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문장들이, 단어의 선택이 조금은 더 마음속으로 한 발 더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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