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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피
강희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6월
평점 :
단순히 키스방에서 일하는 탈북 대학원생의 이야기로만 표현하기에는 그 내용과 역사와 현실이 무겁다. 우리, 혹은 내가 몰랐던 북한의 모습은 얼마 전 다른 책에서 읽고 놀랐지만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더 놀랐다.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바로 이들의 삶이 어떻게 뒤틀리고 파괴되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 전반에 깔린 탈북자에 대한 시선도 가슴 한 곳에 와 박힌다. 탈북자보다 오히려 중국 조선족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차별을 보여준다. 방송에 나온 탈북자들의 모습 뒤에 가려져 있던 실제 그들의 삶이 나의 무지를 일깨운다.
포피. 양귀비란 뜻이다. 이 의미 외에도 아편, 돈, 위로, 심지어 아버지란 뜻도 있다고 한다. 화자이자 주인공의 삶처럼 복합적인 단어다. 처음 이 설명을 읽었을 때 잘 이해를 못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 의미들이 하나씩 밝혀졌고, 끝 무렵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것도 이제 겨우 20대의 삶이 이렇게 힘들고 참혹하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가 하고 경악했다. 평온한 일상에 물든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겨우 만날 수 있는 삶이다. 영화니까, 소설이니까 하고 말하던 인생이다. 과연 이 포피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과장된 것일까? 현실이 소설을 압도한지 이미 오래된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일부만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성은 포피란 키스방매니저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져 있다. 일방적으로 그녀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잠시 다른 사람의 의견이 끼어드는 것도 포피의 반응 속이다. 키스방이란 공간과 입을 통해 이야기가 나온다는 설정이 묘하게 자극적이다. 실제 키스에 대한 섬세하고 자극적인 묘사는 에로틱하다. 그런데 이 에로틱한 키스가 그녀의 삶을 하나씩 풀어내자 안타까움으로 변한다. 아픔으로 다가온다. 좋은 대학의 대학원생이지만 결코 남한 사회에 편입되어 그 자유와 풍요로움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탈북자들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벽은 삼팔선이란 물리적 공간적 벽보다 심리적인 장벽을 더 높게 쌓아두고 있다. 몇몇 탈북자들 중의 성공한 사람과 방송 출연자들로 그 벽을 살짝 가리고 있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 가림막이 얼마나 허술한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림막을 치우기 위한 조그만 관심이 나를 비롯한 수많은 우리들에게는 아직 없었다.
북한의 기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전에는 몰랐다. 북한의 독재자 집단은 이 정보를 숨겼고, 우리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기근 당시 30십만에서 3백만 정도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바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남한은 음식물 쓰레기로 전국토가 신음하고 있을 때다. 한국도 상대적 빈곤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다. 물론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과 그 당시의 복지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말 살기 위해 그들은 북한을 떠나야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기 두려운 독재자는 그들을 잡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정보가 통제되었고 이 아사자의 숫자는 10배나 차이난다. 정확한 숫자가 없고 추정치만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변함없는 사실은 30만이라고 해도 엄청난 숫자란 것이다.
아편과 탈북자란 설정은 상징적이다. 굶주림에 지친 국민을 위해 먹을 것을 심어야 정상인데 양귀비를 심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잔혹한지,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경제적 봉쇄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알려준다. 독재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 달러가 필요하고, 이것을 쉽게 조달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아편이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에게는 국민이 굶어죽는다는 사실보다 이것이 알려지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고, 자신에게 필요한 물품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더 불편한 일이다. 단지 하나의 사건만 볼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관계를 봐야한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포피 같은 탈북자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은 늘 자신이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탈북자들은 중국에서 또 하나의 장벽을 만난다. 중국 공안이다. 그들은 탈북자를 잡아 북한으로 돌려보낸다. 운 좋게 이들을 피한다고 해도 그들을 받아줄 나라가 많지 않다. 남한으로 와서 새터민이 된다고 해도 그들은 이방인일 뿐이다. 정말 일부만 좋은 회사에 취직이 된다. 정부의 지원이 이들의 취업을 돕는다고 해도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 상황에서 여성의 삶은 더 가혹해진다. 얼굴이 반반하면 할수록 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매춘으로 그들의 삶이 흘러간다. 북한에서 억압되었던 성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열린다. 포피의 엄마가 보여준 이중적인 모습은 이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녀가 북한에 살아남은 남편에게 집착하는 것이 단순히 사랑 때문만은 아니다. 생존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애절한 것은 역시 포피의 사랑이다. 그녀가 사랑했던 의붓삼촌 이야기다. 그녀는 꽃미남 삼촌을 사랑했고, 그는 포피의 엄마를 사랑했다. 이들 사이에 성교가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감정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일방적으로 흘러갈 뿐이다. 포피는 삼촌에게로, 삼촌은 포피의 엄마에게로. 이 흐름 속에 포피를 잠시 흔드는 남자가 등장한다. 같은 탈북자인 체육학과 선배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대체품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 뿌리 내려 살고자 하던 그에게 탈북자란 낙인은 너무나도 깊고 강렬하다. 자신의 외모에 혹한 사람들이 나타나도 잠시일 뿐이다. 그가 선택한 것은 미국으로의 이민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키스방매니저였던 포피의 다음 삶을 암시한다. 그들에게 우리사회가 제대로 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갈 수밖에 없는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