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속한 사람 믿음의 글들 214
윈 형제.폴 해터웨이 지음, 고석만 옮김 / 홍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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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더 윈이 쓴 ‘하늘의 속한 사람’ 이 책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나도 읽는 가운데 때로는 한없는 부끄러움과 자신의 안일함을 책하기도 하고, 너무나 큰 고난과 핍박, 육체적 고통 앞에서 책을 덮어버리는 순간도 있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수히 많은 성경의 믿음의 영웅들을 떠오르게 하였다.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 받는 순간 어머니께 달려가 부르셨냐고 물어볼때는 상상치 못한 부르심을 받았던 사무엘을 떠오르게 하였고, 서쪽과 남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부르심에는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던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생각하게 하였다. 감옥에서의 고난과 모욕과 핍박은 요셉이 받은 고난과 세우심과 일치했으며, 광야와 같은 감옥생활과 도피 생활은 모세의 광야생활과 감옥에서 수많은 서신을 쓴 바울을 생각하게 했다. 핍박을 받으며도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핍박하는 자들을 정죄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던 모습에는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옵니다’라고 중보했던 스데반이 생각나게 하였다. 그의 일사각오의 신앙은 ‘죽으면 죽으리라’고 외쳤던 에스더의 생사를 건 신앙이었으며, 인간적인 생각으로 고난을 더 받는 모습은 모세의 반석을 친 사건과 다윗의 고난을 떠오르게 하였다.

 이렇듯 그의 삶의 여정은 성경의 장면장면을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알고보면 나의 부르심과 광야의 시간,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붙드심은 지금 나에게도 동일하게 있는 것이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맛보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느냐의 차이였다. 또한 경험의 강도의 차이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동일한 부르심과 광야와 고난 그리고 회개와 인내 그리고 지속적인 인도하심의 연속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와 동질감과 동역자 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안일함과 무덤덤함을 느꼈다. 말뿐인, 생각뿐인 신앙으로 머물지 않았던가? 나에게 고난이 없음은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순종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는가? 순간순간의 말씀앞에, 성령의 인도하심앞에 불순종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그의 삶을 보면서 묵상하게한 몇가지 화두를 적어 보고자 한다. 하나님, 자녀교육, 두려움, 비전이다.

하나님. 하나님은 그의 삶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셨다. 성부 하나님은 그의 구원과 부르심, 사명을 계획하시고 이끌어내시고 그의 경륜으로 이끌고 계셨다. 성자 예수님은 그의 친구이자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신 모델이자 견뎌낼 이유셨고 전할 메시지셨다. 성령님은 그의 친절한 인도자요 동행자셨다. 위로요 평안이요, 인내할 힘을 주시는 분이요, 피할 길을 보이신 가이드셨다.

자녀교육. 그는 자녀들을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양육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삶으로 자녀를 가르쳤다. 온몸으로 그들을 교육시킨 것이다. 나또한 확신하는 것은 부모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고,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는 진정한 본을 보인다면 그 사람은 잠깐 타락할 지언정 계속적으로 타락에 빠져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다. 그가 자녀를 하나님께 맡겼던 것처럼, 온몸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이 가정의 주인되시고,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 또한 기억하고 본받기를 원한다.

 두려움. 그의 삶은 한편으로는 놀라움이지만, 바라보는 내게는 두려움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게 그런 고난이 닥쳐오면 하나님을 그토록 고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내어맞기고 찬양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특히 그는 정강이를 부서지도록 맞아 가면서, 부서진 부분에 더 많이 맞아서 박살이 날만큼 맞아가면서도 그들을 증오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끝까지 붙잡을 수 있을까? 나에게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연속이었다.

 비전. 그러나 두려움만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내게도 그가 가진 비전과 같은 비전이 솟아 올랐다. 그는 백 투 예루살렘. 복음이 서남쪽으로 계속 전진해서 결국에 지구상의 미전도 종족이 없게 되는 것이,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비전 아닌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요 비전임을, 그리고 나의 비전임을 확인했다. 나의 선교사의 비전과 선교사 후의 선교사를 발굴하고, 훈련하고, 파송하고픈 비전과 공유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나 또한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모두가 태생이 같다. 한 아버지 안에서 구원받은 한 형제요 동지들이다. 그래서 더욱 기쁘고, 감사드렸다. 이 땅에 그토록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한 나의 동지와 형제가 있다니. 이 시대,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논리로 무시되는 시대에 윈 형제님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서 기쁘다. 이 책을 읽게 되서 기쁘고, 나를 돌아보게 되어서 기쁘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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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먼저 논문 주제를 설정해서 논문을 쓰고 싶은데 그것은 ‘신자, 제자, 지도자’이다. 성경은 신자에 대해서 말하고, 제자에 대해서 말한다. 또한 수많은 지도자를 말하면서 그들의 삶을 보여준다. 성경이 말하는 신자란 무엇인가? 제자란 무엇인가? 지도자란 무엇인가? 내 인생의 큰 화두이다. 이런 고민을 언제, 어느때에 할까? 물론 신학을 공부해가면서, 목회를 해가면서, 성경을 봐 가면서, 선교를 해 가면서 고민하고 결론을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림도 없이, 확실한 그림도 없이 해 나간다면 많은 좌충우돌, 시행착오 끝에 발견해 나갈때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내가 현대에 있어서 신자,제자,지도자상이라는 책을 쓴다면 어떻게 될 까?

논문의 제목을 정하고, 논문을 준비해 나가면서 이 주제에 대해서 심도깊게 연구하고, 임상실험도 하고, 묵상하고 싶다.

 둘째는 애기가 있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애기를 잘 키우고 싶다. 이것은 내 철학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인데, 아기에게도 죄성이 있기 때문에 뭐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기를 존중해주고, 사랑하되 하나님 안에서 바른 길로 인도, 교훈, 훈계해야 할 것이다. 신생아라서 물론 대화를 한다거나, 특별한 말썽을 피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고, 나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다 듣고 있다. 무의식중에 그의 머리에, 생각에, 인격에 영향을 줄 것이다.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와 생각을 나누고, 기도를 나누고, 수고를 나눠야 함은 물론이다.

 셋째는 동역자이다. 사실 나는 나 혼자 하나님 앞에 잘 서면 다른 사람은 나의 인도를 따라 인도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온 것 같다. 그러나 동역자의식은 참 중요함을 요즘 깨닫는다. 그리고 동역자는 공짜로 생기지 않는다는 거. 내가 먼저 섬기고,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같은 마음을 품고자하고 뛰어들 때 생긴다는 거.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기다리고, 포용할 줄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할 것이다.

 넷째는 성경이다. 성경고사 성적이 평균을 못 넘는다. 성경고사를 위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너무 소홀히(특히 요절...)한 것은 사실이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수준은 최소한 해야하지 않은가? 꾸준히 통독하고(로마서는 하고 있다), 깊은 성경연구(화,수,목 아침마다 하고있다(7:20-8:20)또한 중요하다. 숲과 나무를 동시에 봐야한다.

 다섯째는 책 많이 읽고싶다. 성경을 보는 안목을 넓혀주고, 세상의 사고와 사상을 앞서가려면 무엇보다 부단한 연구와 독서와 묵상은 필수적이다. 세상이 다원화되고 혼탁할수록 성경의 말씀과 바른 생각과 삶으로 보여주는데는 책이 중요하다.

 논문, 아내와 아기양육, 동역자, 성경, 책. 이 다섯가지는 올해 3개월을 남겨둔 화두이다. 그러나 다크호스로 떠오른 한 가지는 노회와 교단 문제로 인한 교회사역문제도 있다. 그것은 조금 더 두고 보고, 기도해 볼 일이다.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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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2004-10-0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벌써 10월이야..진짜 자기말대로 올한해도 3개월만이 남아있네~남은 3개월동안 이루고 싶은 5가지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길 바래..아내도 함께할께^^화이또^*^

yunpeter 2004-10-10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도 빼라고 했지. 홧팅
 

 오늘은 어거스틴이 회심했다고 말하는 구절인 ‘13:12-13절’을 묵상하였다. 밤이 깊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낮이 가까이 왔다. 이제 죄된 습성은 벗어버리자. 그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 구체적인 밤의 행위는 13절이 말한다.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쟁투, 시기이다.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을때만 이러한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을 것이다. 육신의 일을 도모할 여유가 없다. 낮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곧 해가 떠오른다. 그때에는 주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시리라. 엡 5: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구속하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때가 악한, 밤이 깊은 시기이니, 빛의 갑옷을 입고, 그리스도로 옷입고 시간을 구속해야 될 것이다. ‘어떻게’는 오늘 읽은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과 같은 논의들을 계속하며 구체적인 고민이 이어져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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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남자의 참을 수 없는 유혹
스티븐 아터번.프레드 스토커 지음, 윤종석 옮김 / 좋은씨앗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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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을 수 없는 유혹

 나에게도 참을 수 없은 유혹이 있는 데 그것은 성적인 유혹이고, 성적인 충동이다. 이책은 참 솔직하고, 진솔하게 저자의 경험과 더불어 그들의 고통과 죄책감, 무기력 들을 예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그리고 치유된 과정과 발견한 성경의 원리, 가르침들을 소개하며, 실제적인 훈련의 과정까지 소개하고 있다.

  세가지 훈련을 예로 들었다.  눈의 승리, 생각의 승리, 마음의 승리이다.

 눈의 승리는 전체 싸움의 관건이다. 눈을 잘못된 그림과 영상에 길들여진 사람은 생각과 마음에 그런 잔상을 벗어버리기 어렵다. 눈의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챤이 마음먹고 그런 싸이트나 영상을 접하는 경우는 중독이 되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무 생각없이 인터넷을 하다가 문득 보게된 야릇한 그림으로 인해 충동이 일어날 경우는 종종 있을 것이다. 즉 눈은 언제, 어느때 발동할 지 모른다. 함부로 나의 눈을 돌려서는 안되겠다.

 눈의 승리가 생각의 승리를 이끈다. 눈의 잘못된 습관과 지속적인 패배가 생각도 지배한다. 나의 생각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 가? 무엇에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고, 무슨 생각에 나의 시간을 드리는가?

 마음의 승리는 아내와의 견고함을 나타낸다. 부부간의 믿음, 신뢰, 책임감, 사랑으로 마음의 중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 그러나 부부간에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성의 유혹앞에 이기려면 지속적인 눈,생각,마음의 훈련밖에 없는 것 같다. 즉 경건의 훈련이다. 경건이란 Godliness. 하나님적 성품을 품는 것이다. 하나님의 순결성,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자.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것은 곧 선한데는 지혜롭고 악한데는 미련하라는 말씀과 같다. 유혹을 이기는 데는 지혜롭고, 유혹에겐 미련(무관심)하라는 뜻일 것이다. 지속이다. 꾸준함이다. 신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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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빼먹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몇일째로 표기 안하고, 몇독째로 표기하기로 했다.

1:14절. 바울의 빚진자의식이 먼저 눈에 띠었다. 빚진자. 나는 복음에 빚진자인가? 갚을 의무가 있는 자를 빚진자라고 하지 않은가?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어야할 의무가 있는 걸까? 공짜를 좋아하는 나,우리의 생각으로는 그 은혜를 떼 먹으려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빚짐은 거져받았기 때문에 거져 줘야할 빚짐도 있음이고, 감사해서 기꺼이 드리는 빚짐의 표현도 될 것이다. 어거지가 아닌 기꺼이 드림.

오늘 태양은 가득히 라는 영화를 봐서 그런지, 인간의 죄악, 뿌리깊이 숨겨진 탐욕,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적인 죄성을 가진 죄인의 자기변호를 보게 된다. 나에게도 그것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가끔 섬뜩섬뜩 놀란다. 또한 어찌할 수 없이 죄에 포로된 상태에 놓인 나를 발견할때는 참으로 허무하고,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나를 본다. 3:23-34절 거기에 소망이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무기력함. 그러나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은혜다. 은혜. 오직 은혜다. 오직 주님이다. 오직 그리스도 그분에게서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다. 나는 지금 연약하고 무기력 하지만 그러나 능히 견고케 하실 하나님을 바라본다(16:26-27). 주여 견고케 하소서. 기도케 하소서, 주만 바라보게 하소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게 하소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살게 하소서.(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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