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Hanna > 삶은 기다리는 것? <터미널>

  영화를 봤다. 지난 주 토요일, 군대 갔다 한참 전에 제대한 친구녀석을 만났었다. (제대한 지는 오래됐는데 한 번도 못 봤기에..) 없는 시간 쪼개서 만났더니만, 매너는 커녕 없던 말수도 험하게 늘어서 아주 상태가 불량해졌었다. 같이 본 영화가 <가필드>.. 정말 억지로 웃어줬던 영화다.

  일산에 오는 거에 재미가 들렸는지 어제 또 왔길래 이번엔 좀 재미있는 거 보자구 꼬드겨서 <터미널>을 봤다.  지난 번 봤을 땐 거슬리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더니만, 이번에 다시 보니 그래도 적응이 되서 만날 만 했다. 내 동생은 내가 또 그 녀석 만나러 간다니깐 정말 착하다고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ㅡㅡ;

  그러나 누구랑 보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에 빠져서 사람이 옆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것을.. 마냥 즐거웠다. 게다가 항상 바쁘고 여기저기 다니느라 피곤했는데, 이번 달 부터는 여유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난 행복하다. (사는게 뭐 있는가, 잘 먹고 행복하면 잘 사는 거다.)

  영화는 어리버리한 빅터(톰 행크스)의 어눌한 영어, 둔한 듯, 어설픈 듯한 행동과 함께 2시간 내내 날 너무나도 웃겨주었다. 마치 톰 행크스가 정말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것이 아니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연기는 정말 능글맞았다.  공항 안에서 사람들을 사귀어 가고, 카트를 모아서 돈을 벌고, 공항 내 빈 곳에 연장을 이용해 벽을 꾸미고, 영어 공부를 하고, 옷을 빌려입는 등의 장면은 'Cast away'를 연상시켰다.

  극중 톰 행크스가 어눌하면서 바보같지만 사랑스럽고, 극중 모든 인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이유는,

1. 그가 일 보다는 사람 중심적으로 생각한다는 점.

2. 그는 공부하고 연구해서, 정지해 있지 않고 발전한다는 점.

3. 불리한 상황에 있지만, 당당하고 떳떳하다는 점.

  대충 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말해서, 요즘의 헐리우드 영화는 기대한 만큼의 공감대 형성도, 기대한 만큼의 감동도, 기대한 만큼의 시나리오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래서 예전에는 헐리우드 영화라면 기대하고 봤지만 요즘에는 '감안하고'본다.

  물론, 이 영화도 역시 헐리우드 영화였다. 스토리의 전개도 그렇고, 뭔가 벌려 놓고 마무리가 덜 된 것 같기도 하며,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유와 뜬금없이 등장하는 인물들과 별 개연성이 없는 소재들의 연결이 영화를 재미있게는 하지만, 깔끔하게는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발전적으로 행동하며, 따듯한 마음을 갖고 살자고 한다는 점. 메시지가 정확할 수록 영화는 단순해 지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공항이 영화 내내 나와서 커다란 여행가방, 바쁜 사람들의 발걸음, 줄지어 선 공항 내 상점들, 비행기 표, 여권, 비자, 출입국 심사대, 스튜어디스.. 등등이 연신 눈앞에 아른거려서 자꾸만 날 자극해댔다.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휴~!

   아,

  한가지 덧붙여서..캐서린 제타 존스가 그렇게 예쁜 줄 몰랐다. 정말 방금 인형가게에서 튀어나온 인형처럼 오목조목 생긴 눈과 코와 입술.. 그리고 살짝 나온 광대뼈와 살짝 그슬린(?) 가무잡잡한 피부가 매력적이었다.

  영화의 모토는 '삶은 기다림이다'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난 별로 그런 느낌은 못 받았다. 영화 내내 가장 많이 들린 단어는 'wait!' 와 'next'지만, 기다림=삶 자체 처럼 보여서 그런지.. 지금 톰 행크스가 기다리고 있는 건지, 그냥 살아가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그런가.. 게다가 기다림의 정수는 역시 사무엘 바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두 사람이기에.. 삶은 그렇게 가볍고 즐거우며 유쾌한 기다림의 연속은 아니라고 보기에.. 영화에서 말해주는 기다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삶은.. 기다림이다.

그러나 진지한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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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제전이 될 것이라던 이번 올림픽은 숱한 편파 판정과 오심, 약물 복용 사건으로 얼룩졌으며, 무엇보다도 집시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강제 추방함으로써 얻은 기만적인 평화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몇몇 이들은 이를 전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테러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노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올림픽은 전 세계인의 축제 아닌 일부 선택 받은 이들만의 축제가 되어버렸으며, 그렇게 내쫓긴 이들은 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 분자로 끊임없는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따름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테러의 위험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만 하였단 말인가. 과거 냉전이 한참 전개되던 시대에 숱하게 자행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테러들도 이토록 모든 이들을 불안에 휩싸이게 만들진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자유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대립하는 무언가가 사라진 지금, 우리의 불안감은 더욱 극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자유 민주주의 흐름, 그 선두에 서 있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공격 받았던 지난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아니-인정하고 싶진 않으나-전 세계의 경제, 문화적 중심지였던 뉴욕 한 복판에서 자행된 비행기 테러. 장 보드리야르는 이를 하나의 예술로 파악하고 있는 듯해 보인다. (오해는 마시라. 그렇다고 보드리야르가 테러를 극찬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니 말이다.) 그에 따르면 쌍둥이 빌딩은 세계 무역 센터라는 그 기능 못지 않게, 같은 건물이 2개 위치함으로써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 역시 컸었다. 그것은 건물 하나로는 완성될 수 없는 전 세계 권력의 독점을 의미했으며, 건물 빼곡히 들어선 유리창에 반사된 빛은 미국적인 것의 위대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건물들은 화려함만큼이나 취약한 체제의 중심을 의미했다. 건물이 공격 받았다는 사실은 미국에 대한 반미적인 세력의,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교의 저항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지만,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해석이 사건의 본질을 오히려 망각하게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노라고 평한다. 물론 테러 내에 이러한 요소들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에 따르면 이와 같은 테러는 완벽성으로 대표되는 상징의 붕괴를 의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같은 모양의 건물 양쪽에 연이어 충돌한 비행기 두 대가 이러한 테러의 의도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파괴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기존에 완벽한 무언가가 들어서 있던 그곳은 이제 부재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 커다란 부재를 접할 때마다 사람들은 과거의 위대함 못지 않게 테러의 폭력성을 떠올리게 되며, 이는 그들 내에 잠재되어 있던 또 다른 폭력성을 자극하게 된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공격에 대해 미국인들이 보여준 무시무시한 지지도는 이러한 현상의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결코 테러를 박멸하는 태도로 옳지 못하다. 오히려 보드리야르는 테러가 자생적인 폭력 아닌, 강대국들에 의해 이식된, 강대국들이 지니고 있는 폭력성이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서양 세계는 분명 제국주의적 질서에 기초,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들 식민지들로부터 갈취한 것들을 기반으로 발전을 이룩하였다. 가지지 못한 이들은 식민지 경험을 통해 지배자의 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 테러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는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서 어느 사회에서나 엿볼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강대국은 힘의 논리에 기초, 자국의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가치 정의했으며, 그 과정 속에서 약자의 것은 철저히 소외,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수많은 테러들은 이러한 기제 속에서, 즉, 지배하고자 하는 이의 강압성에 의해 양산되었다. 이렇듯 보드리야르는 강대국의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늘날 전 세계인을 불안으로 몰고 간 테러, 즉 지옥의 힘을 양산했음을 명쾌한 논리 하에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지옥의 힘이라는 단어는 강대국이기에 정당화될 수 있었던 숱한 국가 폭력 역시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합법적으로 성립한 정권을 붕괴시키고, 폭력적으로 자국적 질서를 이식시키는 그 행위 역시 수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더 나아가 테러를 야기시킬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끔찍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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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둘러싼 한중일 삼국간의 공방이 뜨겁다. 모든 역사를 마치 자국의 역사인 것 마냥 해석하는 속에서 우리는 고구려를 잃어가고 있다. 한반도 내에 있는 아차산 등의 고구려 유적에 대해서는 전혀 관리하지도 않다가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하니 그제서야 들고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는 우리의 모습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 와중에서도 계속되는 사대주의 외교까지. 이런 상황에서 고선지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실로 행운이었다. 분명 그는 당나라의 장수였다. 하지만 그는 라는 성까지 부인할 순 없는, 고구려 유민이었다.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낯설게 느껴진다. 도대체 그가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단 말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는 부끄러움도 잠시, 페이지를 넘기다 발견한 지도 앞에서 난 할말을 잃고 말았다. 중앙 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넓게 드리워진 당나라의 영토, 안서도호부. 그 곳이 고선지의 활동 주무대(?)라고 했다. 이슬람 문화권과 동양 문화권의 접경 지역에서 활동했던 그였던 것이다.

말년 양귀비에게 빠져 정세를 돌보지 않음으로써 당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갔지만 분명 당나라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현종, 고선지는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고구려계 유민으로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노예 신분일 수 밖에 없었던 그에게 무(武)는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어려서는 병약했고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고구려인 특유의 대범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였기에, 험악한 산악 지대에서도 주눅들지 않았으며, 아버지와도 같은 넓은 가슴으로 부하들을 끌어안았다. (소발률국 점령을 위해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파미르 고원을 뛰어넘기도 했는데, 이 높이는 나폴레옹이 넘었던 2,500미터의 알프스 산맥의 거의 2배였다고) 비록 패하긴 했지만 탈라스 전투는 동양 문명의 우수함을 유럽 사회에 알릴 수 있는 기회였기에, 그는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인이라는 태생으로 인해 그는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넓은 도량을 갖추지 못한 부몽영찰은 고선지의 전공을 헐뜯었다. <구당서>를 비롯, 대다수의 기록들은 한족 중심주의적 사관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는지, 고선지의 공을 한족 장수의 것으로 돌리다 못해 고선지를 깎아 내리기에 급급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양귀비에 푹 빠져버린 현종이 정치를 멀리하기 시작하면서, 당나라는 절도사와 환관의 나라로 돌변해버렸고, 이는 한족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세한 고선지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안록산의 난과 함께 고선지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나라 잃은 설움이 이런 것이었던가. 그는 영웅을 알아보지 못한 시대의 희생양이었고, 왜곡된 역사 기록 속에서 다시 한 번 생명을 잃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 아닌 당나라의 기록, 우리나라 학자의 연구 아닌 외국 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의존한 복원이었지만, 지금껏 알지 못했던 너무도 멋진 고구려인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아울러, 말로만 고구려 역사 수호를 부르짖지 말고, 부디 한반도 내에 있는 고구려 유적 관리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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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어쩌면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어디론가 가야만 하는 존재. 꿈과도 같은 현실들을 수없이 마주 대하면서, 그렇게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감정들이 메말라가는 것을 느끼면서, 그게 어쩌면 삶이고 인생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냉정함의 노예가 되어 세상이 바라는 대로만 살지는 않는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나를 울리다 못해 가슴을 후비 파고 들어오는 이가 있으니, 그 이름이 바로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통해 많은 이들의 메마른 가슴 속에 물줄기를 심어주었던 그였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될 정도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인물,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데미안>이 아닐까 싶다. 변화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하루하루의 일상에 지쳐가던 그 순간마다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자신만의 외로운 투쟁을 벌이는 새와 내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살아온 지난 날이었기에, 아프락사스 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치 못할 동경에 사로잡혀 지냈던 지난 날이었기에. 그래서 어쩌면 나는 헤르만 헤세 라는 이름을 영원히 지난 과거 속에 묻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을 지금 와서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유독 그의 책은 다시 섣불리 집어들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어린 시절 나를 이끌어준 그 이름을 영원히 과거에 묻어두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적어나간 시. 실로 오랜만에 그의 이름과 함께 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는 자의 비애, 그것은 서글픔이었다. 젊은 시절 지녔던 막연한 꿈, 세상에 대한 동경이 모두 무너져버린 나이.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사랑에 대한 추억들. 그렇게 가슴 속 어딘가에 잘 보이지 않게 고이 접어 간직하던 것들을 헤세는 자신의 글을 통해 바스러질까 조심스레 펼쳐 보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가능한 여유로움. 하지만 이미 말라버렸을지라도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눈물 자국. 그 크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을 배반한 것은 세상임을, 모든 것은 변화하고, 그렇게 빛 바랜 꿈만이 남아있음을 고백하는 노인에게 남은 것은 쓸쓸함의 정서였다. 하지만 어두움의 정서들은 헤세의 다듬이질 속에서 지독한 밝음으로 변화를 겪었으니, 이별의 아픔을 진실로 아는 이는 슬픈 발라드에 눈물 흘리지 않는다 했던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애처로움도 찾아볼 수 없는, 아니, 오히려 몽환적이기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구 하나하나. 헤세의 글은 그랬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꾸며대지 않은 것 같은, 온갖 수식어로 장식을 해댄 듯 하지만 결코 그 장식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진 않는, 이런 것을 두고 내공이라 말하는 것일지도.

이렇듯 헤세의 시 속에는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지난 날의 인연들. 눈을 감으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전개되는 추억들이 묻어나고 있었다. 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현실이라 착각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펜대를 놀려가며 적어나갔을 그 글귀 속에는 인간 세상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숨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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