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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필립 얀시 지음, 김동완 옮김 / 요단출판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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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들어가면서 

 책에 밑줄과 comment를 써가면서 거의 다 읽어갈 무렵, 지하철에서 책을 잃어버렸다. 물론 나의 실수로 생긴 결과였다. 지하철 역에 가서 물어보기도 하고, 분실물 센터에 전화도 해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 책에 전화번호를 안 써놓은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책에 줄도 많이 치고, 별표도 하고, comment도 많이 써 놓는 스타일이라서 책이 없어진 나는 과제를 할 의욕을 크게 상실했었다. 그러나 다시금 기운을 차려서 다른 전도사님의 책을 빌려서 다시한번 훑어본 다음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얀시의 이 책은 얀시를 복음주의 저술가의 대표격으로 인정받게한 책 중에 한권이다. 그의 책 ‘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와 더불어 이 책은 가장 유명한 책들 중에 하나이다. 교수님이 추천해주시기 전에는 제목에 대해서 들어만 봤을 뿐 잘 몰랐었는데 읽어본 다음에는 참 글을 잘 쓴다, 깊이가 있다. 굉장한 구도자적 열정을 발휘한 책이다, 책을 쓰려면 이정도의 사고와 사색으로 써야한다는 등의 다양한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고, 도전을 받았다.

 

맺으면서

 곳곳에, 중간중간에 나의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고, comment를 써 보았다.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저자와 내용에 대해서 얻은 교훈을 말하고자 한다.

 저자의 열정에 대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 사람이 한 책을 쓰려면, 아니 꼭 책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요한 주제, 인생을 걸만한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생사를 걸고 물어보며 몇 년을 씨름하면서도 답을 얻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부분은 내게 많이 약한 부분이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에 대해 소홀히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토록 생사를 걸고 물어보며, 그분의 뜻을 묻고, 그 뜻에 따라 살고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500여권 이상의 책을 읽었으며, 카톨릭, 자유주의를 오가며 다양한 분야들을 저자는 섭렵하였다. 자신의 신앙고백은 그대로 가진채, 자신과는 다른 신앙고백이 있을지라도 더 넓은 사고들과 연구들을 수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체계적이고, 차곡차곡 예수에 관한 연구들을 더 폭넓게 깊이있게, 더 넓은 독자들이 공감되도록 글을 쓰고 있다. 참 본받을 만한 태도이고, 그런 연구 끝에 나온 그의 글의 문체와 예화들을 참으로 설득력이 있다.

 내용에 대해서 comment를 하자면, 여기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어줍게 알고 있던 복음서의 배경과 상식을 엄청나게 뛰어넘으면서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고, 그의 소개는 나를 2000년 전으로 데리고 가기에 충분했다. 예수에 관한 사실적이고, 인간적이 묘사와 그의 제자와 주변인물들이 느꼈을 만한 감정에 대한 묘사는 나에게 감정이입이 되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이러한 강조점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에 대상으로 생각될 만한 강조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초월성과 하나님 되심의 신성에 대한 점은 논리적 추론과 배경에서 나타나는 증거로서는 부족하기 때문에 저자가 일부러 강조를 덜 두었는지 몰라도 경배의 대상으로 예수님을 생각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지않나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요즘 복음주의의 경향인지, 저자인 필립 얀시의 경향인지, 독자들의 경향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신앙고백이 드러나면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더욱 드러냈으면 우리의 경배받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찬양하게 되지 않았을 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에게 부족한 자세히 관찰해보고, 숙고해보는 점에 있어서 좋은 모델을 제공해 주었다. 또한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다양한 측면에서 주님을 바라보게 한 점은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나에게 글을 쓰면 이정도로 써야 되는 구나라는 의미심장한 도전또한 주어서 기쁘다.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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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사람 믿음의 글들 214
윈 형제.폴 해터웨이 지음, 고석만 옮김 / 홍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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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더 윈이 쓴 ‘하늘의 속한 사람’ 이 책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나도 읽는 가운데 때로는 한없는 부끄러움과 자신의 안일함을 책하기도 하고, 너무나 큰 고난과 핍박, 육체적 고통 앞에서 책을 덮어버리는 순간도 있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수히 많은 성경의 믿음의 영웅들을 떠오르게 하였다.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 받는 순간 어머니께 달려가 부르셨냐고 물어볼때는 상상치 못한 부르심을 받았던 사무엘을 떠오르게 하였고, 서쪽과 남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부르심에는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던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생각하게 하였다. 감옥에서의 고난과 모욕과 핍박은 요셉이 받은 고난과 세우심과 일치했으며, 광야와 같은 감옥생활과 도피 생활은 모세의 광야생활과 감옥에서 수많은 서신을 쓴 바울을 생각하게 했다. 핍박을 받으며도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핍박하는 자들을 정죄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던 모습에는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옵니다’라고 중보했던 스데반이 생각나게 하였다. 그의 일사각오의 신앙은 ‘죽으면 죽으리라’고 외쳤던 에스더의 생사를 건 신앙이었으며, 인간적인 생각으로 고난을 더 받는 모습은 모세의 반석을 친 사건과 다윗의 고난을 떠오르게 하였다.

 이렇듯 그의 삶의 여정은 성경의 장면장면을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알고보면 나의 부르심과 광야의 시간,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붙드심은 지금 나에게도 동일하게 있는 것이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맛보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느냐의 차이였다. 또한 경험의 강도의 차이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동일한 부르심과 광야와 고난 그리고 회개와 인내 그리고 지속적인 인도하심의 연속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와 동질감과 동역자 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안일함과 무덤덤함을 느꼈다. 말뿐인, 생각뿐인 신앙으로 머물지 않았던가? 나에게 고난이 없음은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순종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는가? 순간순간의 말씀앞에, 성령의 인도하심앞에 불순종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그의 삶을 보면서 묵상하게한 몇가지 화두를 적어 보고자 한다. 하나님, 자녀교육, 두려움, 비전이다.

하나님. 하나님은 그의 삶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셨다. 성부 하나님은 그의 구원과 부르심, 사명을 계획하시고 이끌어내시고 그의 경륜으로 이끌고 계셨다. 성자 예수님은 그의 친구이자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신 모델이자 견뎌낼 이유셨고 전할 메시지셨다. 성령님은 그의 친절한 인도자요 동행자셨다. 위로요 평안이요, 인내할 힘을 주시는 분이요, 피할 길을 보이신 가이드셨다.

자녀교육. 그는 자녀들을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양육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삶으로 자녀를 가르쳤다. 온몸으로 그들을 교육시킨 것이다. 나또한 확신하는 것은 부모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고,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는 진정한 본을 보인다면 그 사람은 잠깐 타락할 지언정 계속적으로 타락에 빠져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다. 그가 자녀를 하나님께 맡겼던 것처럼, 온몸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이 가정의 주인되시고,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 또한 기억하고 본받기를 원한다.

 두려움. 그의 삶은 한편으로는 놀라움이지만, 바라보는 내게는 두려움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게 그런 고난이 닥쳐오면 하나님을 그토록 고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내어맞기고 찬양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특히 그는 정강이를 부서지도록 맞아 가면서, 부서진 부분에 더 많이 맞아서 박살이 날만큼 맞아가면서도 그들을 증오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끝까지 붙잡을 수 있을까? 나에게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연속이었다.

 비전. 그러나 두려움만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내게도 그가 가진 비전과 같은 비전이 솟아 올랐다. 그는 백 투 예루살렘. 복음이 서남쪽으로 계속 전진해서 결국에 지구상의 미전도 종족이 없게 되는 것이,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비전 아닌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요 비전임을, 그리고 나의 비전임을 확인했다. 나의 선교사의 비전과 선교사 후의 선교사를 발굴하고, 훈련하고, 파송하고픈 비전과 공유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나 또한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모두가 태생이 같다. 한 아버지 안에서 구원받은 한 형제요 동지들이다. 그래서 더욱 기쁘고, 감사드렸다. 이 땅에 그토록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한 나의 동지와 형제가 있다니. 이 시대,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논리로 무시되는 시대에 윈 형제님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서 기쁘다. 이 책을 읽게 되서 기쁘고, 나를 돌아보게 되어서 기쁘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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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남자의 참을 수 없는 유혹
스티븐 아터번.프레드 스토커 지음, 윤종석 옮김 / 좋은씨앗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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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을 수 없는 유혹

 나에게도 참을 수 없은 유혹이 있는 데 그것은 성적인 유혹이고, 성적인 충동이다. 이책은 참 솔직하고, 진솔하게 저자의 경험과 더불어 그들의 고통과 죄책감, 무기력 들을 예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그리고 치유된 과정과 발견한 성경의 원리, 가르침들을 소개하며, 실제적인 훈련의 과정까지 소개하고 있다.

  세가지 훈련을 예로 들었다.  눈의 승리, 생각의 승리, 마음의 승리이다.

 눈의 승리는 전체 싸움의 관건이다. 눈을 잘못된 그림과 영상에 길들여진 사람은 생각과 마음에 그런 잔상을 벗어버리기 어렵다. 눈의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챤이 마음먹고 그런 싸이트나 영상을 접하는 경우는 중독이 되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무 생각없이 인터넷을 하다가 문득 보게된 야릇한 그림으로 인해 충동이 일어날 경우는 종종 있을 것이다. 즉 눈은 언제, 어느때 발동할 지 모른다. 함부로 나의 눈을 돌려서는 안되겠다.

 눈의 승리가 생각의 승리를 이끈다. 눈의 잘못된 습관과 지속적인 패배가 생각도 지배한다. 나의 생각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 가? 무엇에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고, 무슨 생각에 나의 시간을 드리는가?

 마음의 승리는 아내와의 견고함을 나타낸다. 부부간의 믿음, 신뢰, 책임감, 사랑으로 마음의 중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 그러나 부부간에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성의 유혹앞에 이기려면 지속적인 눈,생각,마음의 훈련밖에 없는 것 같다. 즉 경건의 훈련이다. 경건이란 Godliness. 하나님적 성품을 품는 것이다. 하나님의 순결성,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자.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것은 곧 선한데는 지혜롭고 악한데는 미련하라는 말씀과 같다. 유혹을 이기는 데는 지혜롭고, 유혹에겐 미련(무관심)하라는 뜻일 것이다. 지속이다. 꾸준함이다. 신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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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가득히
르네 끌레망 감독, 알랑 드롱 외 출연 / 영상프라자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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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랭들롱의 이 영화는 무척 유명한 영화이다. 알랭들롱을 스타덤에 오르게 한 영화라고도 말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근래에 맷 데이먼 주연으로 리메이크 되어서 상영하기도 했다. 나는 맷 데이먼이 주연한 '리플리'를 먼저 본 다음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알랭들롱이 참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깍아놓은 것 같은. 우리나라의 장동건하고 비슷한 것도 같은, 그러나 더 깍아놓은 듯한 외모를 볼 수 있다. 잘생긴 남자는 남자에게도 매력을 끌 수 있는 것을 또한 안다.

 줄거리는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모욕을 주었던 친구를 죽인후 그의 재산을 탈취하고, 그의 친구도 죽이고, 그의 애인도 뺏으려다가 나중에는 발각된다. 그러나 리플리는 결말을 좀 다르게 만들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죄'가 아닐까? 한 사람의 증오와 질투가 가져오는 엄청난 죄성, 그 파장들을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죄성이 있다. 누구나. 이것은 인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하는 바이다. 저마다 자신이 죄를 짓는다는 것을 누가 부인 할 수 있을까? 다만 죄에 대한 상대성을 무기로, 나는 누구보다 덜 죄를 지었다고 하거나, 누구나 인정할 보편타당한 기준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 자신안에도 그런 죄성이 감춰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주인공의 완전범죄를 오히려 더 기대해주니말이다. 영화라고 그렇다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나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있음을 여지없이 드러내 준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받은 모욕, 증오, 질투심. 이 모든 것이 함께 필립을 죽이는 그 범죄에 작용했다. 사람들은 내가 그런 모욕과 수모를 당했으니 그이상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죄인인 우리는 참으로 자기 방어적이다. 죄를 짓고 난 후에는 얼마나 간교해 지고, 계산적이고, 치밀해 지는지. 누구도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철저히 포장하고 철저히 숨기고 속인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날 것이다. 행한대로 보응하시리라. 인생의 기준이고, 판단자 되시는 그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우리를 대신해서 죄 값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그분께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고 의롭다 칭함받은 사람만 그 심판에서 건져질 것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내용을 기억하고, 성경을 상고하고, 성경을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기초해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반석위에 집을 지은 것 같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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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일반판
볼프강 피터슨 감독, 브래드 피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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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보고 싶었던 영화다.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나서부터, 그 영화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 한번 보고 싶었다. 왜? 내가 아마 스펙타클하고, 스케일이 큰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돈을 좀 쓴 헐리우드식 영화를 좋아하나보다. 그만큼 돈을 들였으니 내 영화비로 조금 보태줘야지...이런 생각인가? 어쨌든 그런 영화는 가슴을 넓게, 포부를 크게 만드는 것 같다.
몇 명의 캐릭터가 나오는 데, 그 중에 브래드 피트가 맡은 ‘아킬레스’, 에릭 바나가 맡은 ‘헥토르’, 올랜도 볼룸이 맡은 ‘파리스’. 이 세사람이 줄거리에 축인 것 같다.

 줄거리는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가 트로이를 침입하는 얘기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헬레나’를 데리고 간 것이 발단이 되었지만 아가멤논왕의 야심은 이미 그것은 건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왕의 야심으로 트로이를 침입하게 되고, 그리스의 위대한 전사 ‘아킬레스’는 참전하게 된다.

 아킬레스를 선봉으로 해안에 발을 디딘 그리스군은 또한 아킬레스의 불참으로 패배를 맡게된다. 그것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의 용맹과 지략 때문이었다. 헥토르는 꽤 멋있는 사람인 것 같다. 동생을 보호해 주고, 나라를 사랑하고, 수호하는 훌륭한 왕자였다. 그러나 가만있으면 퇴각할 그리스를 트로이의 잘못된 판단으로 공격을 해 버렸다. 신들의 제사장(트로이는 아폴로 신을 너무 잘 섬기고 있었다)의 판단과 왕의 판단은 신이 트로이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판단이다. 맹신은 위험하다. 신을 자기 이익의 수단과 방편으로 삼는 주관적인 신의 해석은 위험하며 잘못된 것이다. 신이 자기편이라는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 잘못된 맹신은 국가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헥토르가 아킬레스의 사촌동생을 죽임으로서 헥토르와 아킬레스는 전투를 하게되고 헥토르는 전사한다. 헥토르의 장례를 기념하는 12일동안 그리스는 트로이의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의 영내에 침입한다. 그를 통해 트로이의 왕과 백성은 죽음을 맞는다. 마지막에 ‘파리스’가 쏜 화살에 ‘아킬레스’가 발목을 맞게 되는데, 아킬레스의 건을 의식한 듯 하다. 겁쟁이였던 ‘파리스’가 남자로서의 구실을 한다. 브리시리스, 아킬레스가 사랑한 여인, 그 여인 때문에 다시 트로이 성안에 뛰어들었지만 죽음을 맞는다.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두 인물은 이 영화의 중심축이다. 아킬레스의 리더쉽은 전형적인 전사의 카리스마다. 그것은 곧 실력에서 나온 영웅화이다. 아킬레스는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으며, 왕도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 그가 명령을 듣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한 일일 뿐이다. 그에게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없었고(존경받지 못한 왕, 명분 없는 전쟁일 시에는 더더욱),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그의 진격에 따라가며, 그의 명령에 따르는 충실한 50여명의 군사뿐이다. 그러나 그를 통해 선발대가 승리하면 그 나라 전체가 승리의 순간을 앞두고 있게 된다.

 그러나 헥토르는 조금 다르다. 그는 형제애, 국가애, 가족애에 바탕을 둔 진실된 왕자로서 손색이 없다. 명분 없는 싸움은 싸우지 않으며, 갖게 된 전쟁에는 목숨 걸고 용맹하게 싸운다. 그는 전략적으로 지휘하며, 부하들의 신임을 받고, 앞서서 싸워나간다.

 두 장수 모두 앞서는 리더쉽을 보여준다. 물러서서 명령만하지 않는다. 둘 다 선두에서서 직접 싸우면서 지휘한다. 그러나 헥토르는 리더로서, 왕의 면모를 갖추었지만, 아킬레스는 훌륭한 장수로서 존재한다. 아가멤논은 그를 다스리지 못했다. 명분 없는 정복야욕은 그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헥토르의 지휘에 아킬레스가 있었다면 아마 그 시대를 평정했을 것이다.

 잘못된 종교심 또한 얘기할 만 하다. 트로이의 사제들 역시 계시를 받고 움직인다. 그러나 그들의 계시는 무엇인가? 전쟁에 질 것을 몰랐지 않았나? 잘못된 신, 자신의 전통에 따른 신, 자신의 이기심에 지원자로서의 신은 잘못된 것이다. 오직 약속과 그 약속에 따른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뿐이다.

 이시대도 전쟁은 계속된다. 과거엔 보이는 우상의 전쟁이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사상의 전쟁이다. 헥토르의 모습과 같은 지키는, 수호하는 리더쉽,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군사, 지도자가 필요하다. 아킬레스와 같은 뛰어난 전사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방향을 상실한 목표는 위험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뛰어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경륜과 역사에 방해될 수 있다. 옳게 분별하여 옳게 쓰임받음이 필요하다. 이 시대는 뜨겁게 사람많이 모으고, 힘을 일으켜 내는 사람보다는 바른 삶의 모델을 보여주고, 바른 가치관에 따라, 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선을 이뤄내고, 그의 나라를 세우는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세상이 통치되고, 사람들의 심성에 품어지는 구속의 나라가 되어야할 것이다.

 그 나라가 오기까지 묵묵히, 한 걸음씩 주님의 시간을 구속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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