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R. R. 마틴 걸작선 : 꿈의 노래 세트 - 전4권 조지 R. R. 마틴 걸작선 : 꿈의 노래
조지 R. R. 마틴 지음, 김상훈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일곱 번 말하노니, 살인하지 말라. 처음 제목을 보고 든 생각은 당연히 추리나 스릴러겠거니...였습니다. 그런데 예상이 전혀 빗겨 갔네요. 이 <일곱 번 말하노니, 살인하지 말라>라는 단편은 오롯한 SF 소설입니다. 지구가 아닌 우주의 어느 곳이 배경이고, 인간과 더불어 외계의 어떤 다른 생명체가 등장하는. 저는 솔직히 말해서 이런 장르에 매우 취약합니다. 그 어떤 소설보다 어렵고, 난해한 게 이런 SF 소설이더라고요. 특히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불리우는 작품들은 특히나 제겐 너무나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를 그리고 있곤 하던데, 이 작품 역시 제가 생각하기엔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분류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젠시족이라는 외계 생명체(?) 부족이 사는 행성에, 강철 천사라고 불리우는 지구 종족(그러니까 아마 인간이겠죠?)이 젠시족을 정복하러 옵니다. 젠시족은 그들의 신을 모시는 피라미드를 숭배하며 상당히 원시적이며 샤머니즘적 생활을 하는 부족으로 지극히 지극히 지극히 순수합니다. 하지만 강철 천사에게 그들은 그저 미개한, 지배해야할 존재들일 뿐인 거죠. 그래서 젠시족의 피라미드를 부수고 그들을 내쫓고 심지어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에 이곳에서 무역을 하는 네크롤이란 인물은 그런 젠시족이 안타까워 그들에게 강철 천사들로부터 그들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끔 레이저 총을 건네 이를 사용하기를 권하게 되죠. 하지만 그 결말은.......

 

저는 SF적 상상력이 매우 부족하기에, 저의 좁은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제가 아는 이야기들에 대입하여 이 이야기를 해석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항상 SF 소설들은 이건 분명 고차원적 은유를 사용한, 결국은 인간들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읽어나가곤 하거든요. 그래서 혹시 젠시속은 예전 아메리카 원주민은 아니었을까, 강철 천사는 그들의 땅을 강탈했던 유럽인들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결말과 작품 속 결말은 상당히 큰 차이가 있긴 했지만요. 그... 어쩌면 상당히 끔찍하며 소름끼치는 결말에서 인간의 사악한 본성과 결국 그런 본성이 그들을 파멸로 이끌어 갈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하려던 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솔직히 제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 자신이 없습니다.(넘넘 어려웠어요 ㅠㅠ) 음... 역시 제게 SF의 벽은 높디 높기만 하네요. 꿈의 노래 세트에는 작가가 직접 쓴 해설도 수록되어 있다는데... 그 해설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스티스맨, 번역하면 정의의 사도쯤 될까요? 상당히 거창해 보이면서, 그래서 한편으론 솔직히 조금 유치해 보이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홍길동, 각시탈 같은 영웅이 나타나서 악당들을 물리쳐 나가는 이야기인가 싶지만 사실 이 소설은 사람들이 무던히도 죽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총 18개의 짤막한 바닥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매우 스피디하게 읽히는데, 그에 비례하여 살인 사건 역시 아주 스피디하게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살인의 과정을 잔인하게 그려놓은 범죄소설인가? 아니요. 그럼 연쇄 살인범을 쫓는 정의감 넘치는 경찰이나 검사들의 이야기인가? 아니요. 이 작품은 범인도, 이를 쫓는 형사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 작품은 바로 나 그리고 이 글을 보고 있는 바로 당신들의 이야기입니다. 흔히 누리꾼이라고 불리우는 그들, 아니 우리들.

 

머리에 총알 두 개를 박아 사람을 살해하는 살인 사건이 연이어 터지며 사회적으로 뒤숭숭한 때, 한 인터넷 카페에 '저스티스맨'이라는 닉네임으로 이 연쇄 살인 사건과 관련한 아주 구체적인, 그러니까 범인이 어떻게 그 사람을 죽였는지, 피해자는 과거에 어떤 악행들을 저질렀기에 죽어 마땅했는지 등의 사연들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사연들이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그 커뮤니티는 점점 더 화제가 되어가고 또한 거대해져, 회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갑니다. 연예인 옷 하나에도 설전이 벌어지는 누리꾼들의 세계일진데, 이런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는 사건에 대한 글은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받게 마련이지요. 때문에 게시글이 올라올 때마다, 그러니까 즉 사람이 한 사람씩 죽어나갈 때마다 그들은 댓글 폭탄의 꽃을 피우며 설전을 벌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는 없는 법, 그들은 파가 갈리기도 하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고, 그와중에 사건과는 무관한 아예 딴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 모든 것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광고 댓글을 다는 인간들도 나타나고...등등. 인터넷 커뮤니티나 기사 댓글들 좀 봐 온 사람이라면 언제나 흔히 볼 수 있는 볼성사나운 풍경들이 펼쳐지지요. 그리고 그 안에서는 또한 자연스레 '권력'이란 것이 생성이 되고, 누리꾼들은 그 권력에 빌붙고, 혹시나 '권력'에 맞서는 부류가 생긴다면 사정없이 배척당하여 공격 당하고, 그러다가 혹여나 그 견고할 것만 같던 '권력'이 힘을 잃는다 느끼면 곧바로 손바닥 뒤집듯 새 '권력'에 빌붙고, '권력'을 얻게 된 자는 그 힘의 달콤함에 빠져 다시 타락하고. 그렇게 결국 연쇄 살인 사건 따위야, 범인이 누구건, 어째서 그런 사건이 벌어졌건 이미 중요하지 않은 법. 그들에게 있어 '정의'는 그저 내 '안위'의 다른 말일 뿐. 더불어 '악의'란 역시 내 '안위'의 반대말일 뿐. 그런 어쩌면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보다 더더욱 볼성사나운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보며 웃고 또 웃었더랬습니다. 그들의 행태가 너무나 한심해서, 소름끼쳐서, 잔인해서, 그래서 터져나오는 조롱이 담긴 실소. 하지만 나 역시 그 수많은 누리꾼들 중 하나임을 자각하는 지라 자기 조롱의 의미 역시 내포된 웃음들이기도 했습니다. 아주 쓰디 쓴. 그래서 이 작품은 조롱하는 동시에 조롱당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작품 후반즈음에 이르르면 이제 국민은 없고 누리꾼들만 넘쳐나는 세상이 옵니다. 누리꾼의 누리꾼에 의한 누리꾼들을 위한 광케이블만이 존재하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은 온갖 '악의'로 넘쳐납니다. 정의라는 말따위는 잊혀진 지 오래.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그래서 보복하고, 그래서 다시 복수하는, 공격과 공격과 악의와 악의만이 존재하는 세상. 저는 이 장면을 보고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온라인상에서나 벌어지는 일을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 아니냐고, 설마 이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기야 하겠느냐고, 이건 그저 소설적 과장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일본의 넷우익이나 일베 사이트의 회원들이 오프라인에서 행했던 악행들을 생각하면 결코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어가며 이런 비슷한 문제 의식을 담은 작품으로 <댓글부대>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댓글부대>와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공포를 가져다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매력적이었던 건, 이런 누리꾼들의 행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동시에 사회적 쟁점이 되는 문제들, 그러니까 청소년 성범죄, 여성 불평등, 정치인들의 부패 등의 문제들도 속속들이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아주 자연스레 연쇄 살인 사건과 엮은 후, '저스티스맨'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이와 관련된 글을 올림으로써 누리꾼들이 출동하는 과정. 그리고 실상은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호기심은 끝까지 놓치지 않게끔 독자를 작품 말미까지 몰입하게 하는 연쇄 살인 범의 정체는 어쩌면 너무 뻔해보이기도 했지만, 그런 뻔함 때문에 작품 결말에서 호되게 한 방 제대로 먹고 맙니다. 이 크나큰 한 방은 작가가 작품 초반부터 교묘하게 복선인지, 아님 속임수인지 헷갈리게끔 뿌려놓은 어떤 덫과 독자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을 게 뻔한 어떤 편견을 이용하여 아주 제대로 질러주시는 최고의 한방이었습니다. 작품의 결말을 보고 작가에게 농락당하고 말았다는 분함을 느끼는 동시에 이번에 아주 제대로 한방 먹었구나 싶어 희열감 역시 느꼈더랬습니다. 그리 많은 분량은 아닌 소설에서 아주 다양한 메시지를, 그래서 다양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작가의 전작인 스파링을 읽다가 결국 중도 포기를 해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작품이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작가에 대한, 그리고 그의 작풍에 대한 성급한 반감 비슷한 것이 생겼었달까요. 그래서 이 작품도 좀 선뜻 읽기 망설여지기도 했었습니다. 헌데 작품 하나로 그 작가의 작풍을 오롯이 평가해버리는 건 역시 너무 편협한 내 아집이었구나 싶습니다. 이제 저는 작가의 신간을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작가의 말 중 제일 마지막 문장인 '포기하지 마시라.'라는 어쩌면 참 흔한 이 말에 어쩐지 위로 받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노블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우연이 아냐.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너와 내가 같은 반인 것도, 그날 병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야. 그렇다고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네가 여태껏 해온 선택과 내가 여태껏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했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난 거야.』

 

췌장암을 앓고 있는, 이제 1년 후면 그 병으로 죽고 말,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있습니다. 그녀는 가족외의 주변인이 그녀의 병을 알지 않길 바랍니다. 그런 그녀가 그만 같은 반 남학생에게 그녀의 병을 들켜 버리고 맙니다.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밝고 밝고 또 밝은 긍정에네저 뿜뿜인 그녀와,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 없고 때문에 친구도 전혀 없는 그와의 만남. 그들의 만남과 대화와 썸과 이별이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감동적으로, 때론 매우 아프게 그렇게 펼쳐집니다.

 

주변인들이 너무 슬퍼할 것 같아서, 그렇다 보면 '일상'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병을 쉬쉬했던 그녀는 그녀의 그런 병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덤덤하게 '일상'적으로 대해주는 그를 만나 말 그대로 '일상'을 '살아' 갑니다. 고기 뷔페에 가서 내장 고기를 실컷 먹고, 디저트 뷔페에 가서 디저트도 배불리 먹고, 심지어 신칸센 타고 1박 2일 일정으로 그와 여행까지. 그런 과정 속에서 그와 그녀는 끊임 없이 그녀의 '죽음'을 화두로 올리지만 언제나 그들의 대화는 그녀의 호탕한 웃음인 "우화화화핫!"으로 마무리되는 장난의 연속. 때문에 그녀는 소중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고, 그는 '죽음'을 조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죽기 전에 그에게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나 아닌 누군가와 서로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 그걸 가리켜 산다는 것이라고 한다." 는 걸.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자신은 작은 풀잎 배이기에, 커다란 선박 같은 그녀에게 휘둘리고 또 휘둘리고 마는 거라고 생각하던 그는 이제 깨닫습니다. 그는 사실 그녀와 서로 마음이 통했었다는 것을, 그렇게 그녀 덕에 그 또한 살아있었음을.

 

학교를 기점으로 정반대 방향에 살고 있는 그와 그녀. 오롯한 밝음의 그녀와 오롯한 칙칙함의 그. 정말이지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끝과 끝인 것 같은 그와 그녀. 하지만 사실 이 세상의 끝과 끝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와 그녀는 정반대에 쪽에서 항상 맞은편을 바라보며 서로를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처음 제목을 듣고 일으켰던 거부감, 반신반의 했던 작품 서두에서의 작가의 제목에 대한 변 등은 이제 사라져버리고 이 한 문장이 이토록 감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이토록 먹먹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래서 심지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맙니다. 정말이지 완벽한 제목입니다.

 

얼핏 고등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애 소설, 라이트 노블 같아 보이는 이 소설은 연애 소설도 라이트 노블도 물론 맞지만, 실은 "관계"에 대한 꽤나 고차원적이고 복잡 미묘한 고찰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결코 라이트 하지(가볍지) 않다는 것. 이런 감성을 자극하는 일본 소설은 사실 좀 흔한 편이지만 그래도 꽤 자신있게 추천드리고 싶네요. 예쁘고 풋풋하고 감동적이고, 꽤나 심오한, 심지어 중간에 예기치 못한 반전까지 등장하는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 나 아닌 누군가와 서로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 그걸 가리켜 산다는 것이라고 하는 거야. 』

 

『 우리는 방향성이 다르다고 그녀는 곧잘 말했다. 당연하다. 우리는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언제든 서로를 보고 있었다. 정반대 쪽에서 항상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요즘 심심찮게 길거리 묻지마 범죄에 관한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사람 많은 번화가 한복판에서 칼부림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끔찍한 사건들. 한 사람이 칼을 그렇게 휘두르고 있는 동안, 그래서 죄 없는 사람이 이유도 모른 채 목숨이 스러져가고 있을 때, 그 주변에 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을까? 그런 의문을 품었던 적도 있고요. 그런데 막상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 보면, 나 역시 그 상황이 너무 무서워 속수무책 아무것도 못하고 벌벌 떨거나 그저 줄행랑을 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몬드'라는 소설은 바로 그런 길거리 묻지마 살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날 한 명이 다치고 여섯 명이 죽었다.'로 시작되는 소설. 그날은 또한 크리스마스이브이자 주인공인 윤재의 16세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윤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외식으로 냉면을 먹으러 갔던 윤재와 엄마와 할멈. 윤재는 식당에서 '자두맛 사탕'을 받으려다가 엄마나 할멈보다 늦게 냉면가게에서 나오게 되고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엄마가, 할멈이 칼부림을 당하는 걸 고스란히 지켜보게 됩니다. 하지만 윤재는 그 장면이 '끔찍하다.'거나 '마음이 아프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감정을 전혀 느끼진 못합니다. 윤재의 아몬드(편도체)는 일반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 작아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거든요. 제가 평소 즐겨보아오던 소설들 속에서 이런 인물이 등장한다면, 그는 분명 후에 자라서 잔인하기 짝이없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이 되게 마련이기에 윤재의 성장과정을 묘한 긴장감으로 읽어갔습니다.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이 없고 표정이 없는 괴물이라고 치부되어 온 윤재. 이런 인물이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어쩌면 기적일 테니까요. 때문에 윤재의 엄마나 할멈은 윤재가 품거나 갖지 못하는 사랑까지 몇곱절의 사랑과 정성으로 윤재를 키워오고, 윤재에게 감정을 '학습'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할멈은 없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살아도 산 게 아닌 채 누워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더더욱 앞으로의 윤재가 걱정이 됩니다.

 

이런 윤재 앞에 또다른 괴물인 '곤'이 나타납니다. 곤은 윤재완 다르게 세상 만사가 불만 투성인 감정 과잉인 아이입니다.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괴물 녀석과, 감정 과잉인 괴물 녀석의 만남은(게다가 이들이 만나게 된 계기 또한) 아슬아슬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괴물과 괴물이 만나 그야말로 엄청난 '괴물'이 탄생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그런데 이녀석들 귀엽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욕설과 비속어인 곤과 무미건조하기 짝이없는 반응으로 일관하는 윤재의 대화가 어쩐지 피식피식 웃음이 나고 녀석들이 사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괴물이라 치부되어 온 두 녀석인데, 알고보면 녀석들 또한 평범하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게지요. 그리고 전 그런 녀석들에게 어느새 정이 들어버린게지요. 너무나 다른, 극과 극인 두 녀석이 서로를 이해하려고, 그래서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은 진심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특히 '곤'이 나비를 가져와서 '윤재'의 감정을 일깨우려고 했던 장면은 정말이지 좋았습니다. 이런 '곤'이의 노력 덕이었을까요, 아니면 윤재 말대로 첫사랑과 함께 찾아온 사춘기적 감성 때문이었을까요... 윤재의 아몬드는 분명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곤'이의 성장은 그리 순탄치가 않습니다. '윤재'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곤'이, 그래서 윤재의 아몬드에 변화가 생길 수 해준 곤이, 이제 윤재가 곤을 구하러 갑니다. 그 결과는 저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책 속 구절에서처럼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누구도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일 테니까요. 다만 한 가지 저는 이 책의 결말 부분인 4부를 읽으며 내내 울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슬퍼서이기도, 감동적이기도 해서, 즉 제 가슴이 제 아몬드를 지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책 속에서 정말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윤재가 심 박사를 찾아갔던 어느 날이었는데, 심 박사가 환하고 다정하게 웃으며 윤재를 맞이하는 뒤쪽으로 보이는 텔레비전 뉴스 속에서는 전쟁으로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은 소년이 울고 있었습니다. 윤재는 이에 생각합니다. 자기 같은 천치도 저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끔찍하고 불행한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안다고요. 저는 정말이지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종종 식사를 하며 뉴스를 보는데, 이런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많이 있었으니까요. 그걸 보면서도 목구멍으로 밥은 참 잘도 넘어갔었으니까요. 아몬드가 다른 이들보다 한참이나 작아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는 이에 이렇게 외칩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라고. 공감 불능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우리 정말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요?

 

『 p.245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펭귄철도 분실물센터 펭귄철도 분실물센터
나토리 사와코 지음, 이윤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기...... 왜 역 분실물센터에 펭귄이 있어요?"

누군들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흔들리는 전철 안에, 역 대합실에, 분실물센터에 펭귄이 있다면 말입니다. 펭귄은 남극이나 하다못해 수족관이나 동물원에 가야 볼 수 있는 동물이니까요. 뭐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 펭귄 녀석 귀엽기 그지없습니다. 때문에 '진짜 펭귄? 펭귄이 여긴 왜?'와 같은 의문은 금세 '어머 귀여워.'의 감탄사로 잊혀지곤 마니까요. 아무튼 이 작품 속에 수록된 4개의 단편은 모두 펭귄철도라고 불리우는 우미하자마역을 종점으로 하는 본선과 지선의 철도들과, 우미하자마역에 마련된 분실물센터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4개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모두 무언가를 전철 안에서 잃어버립니다. 렌터카 회사에 다니는 교코는 죽은 지 1년이 넘은 고양이 후쿠의 유골 단지를(제1장), 히키코모리 고등학생 겐은 초등학교 때 받은 러브레터를(제2장), 거짓말이 상습화되어 약간 리플리 증후군 증상을 보이는 전업 주부 지에는 문구점에서 산 어떤 꾸러미를(제3장),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지 온통 화나는 일 투성이인 준페이는......(제4장)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잃어버린 물건들을 찾으러 우미하자마역의 분실물센터에 방문, 그곳에서 빨간 머리 역무원 소헤이와 문제의 그 '펭귄'을 만나게 되지요. 그렇게 그들은 또다시 일련의 사건들을 맞이하게 되고, 이에 어떤 인연이 생기게 되고, 그들의 소중한 분실물은 찾기도 혹은 찾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들이 솔직히 매우 긴박감 넘치게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아주 잔잔하고 소소하게 진행되지요. 그래서 조금 진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설정들과 구성들은 익히 여러 일본 소설들에서 많이 접해오던 것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이 작품이 전의 이런 류의 작품들보다 특출난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럼 그래서 이 작품이 재미가 없었느냐면,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진부하긴 했지만 따뜻했고 몹시 감동적이었고, 그래서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탕엔 분명 (제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 동물들의 힘이 컸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미 첫 단편을 읽으면서부터 눈물을 질질 짜버렸거든요. 교코가 후쿠와의 추억 아닌 추억과 후쿠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부분이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혼이 났습니다. 그러다 두 번째 단편이나 세 번째 단편은 꽤나 발랄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어 방심하고 있었는데 복병은 마지막 단편이었네요. 어째서 역 분실물센터에 펭귄이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이 등장할 때는 정말이지 펑펑 울어버렸습니다. 이때부턴 아예 휴지를 옆에 놓고 자꾸 눈물이 차올라 뿌얘진 눈으로 마지막장까지 읽어나가야 할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저의 격한 감정의 기저엔 고양이와 펭귄이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동물들에 한없이 약한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동물들은 감정에 매우 솔직하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느끼는 감정들을 표출하는데 그들은 결코 머뭇거리도 않고, 이에 후회하는 법도 없으니까요. 우리 인간들이란 동물들은 이를 자주 잃어버리고, 혹은 애써 부인하며 사는데 말이죠. 이 작품 속 4개의 단편 속 주인공들은 말하자면 모두 이런 것들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분실물센터에서 찾은 것은 다름아닌 이런 것들을 자신의 내면 안에서 찾아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아니었을까 저는 생각했습니다.

 

삐딱하게 보자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희망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뭐 어떻습니까. 저를 펑펑 울게 했고, 그래서 그 끝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더불어 저 또한 '용기'와 '희망'을 가져보자 마음 먹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작품 아니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