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비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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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버린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한때 미친듯이 그의 작품을 탐독해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탐독의 순서는 역시 먼저 읽은 독자들의 평. 그렇게 호평을 받는 작품들을 먼저 섭렵한 탓이었을까 뒤에 읽은 작품일수록 기대치는 높은데 그에 대한 만족감은 반비례했었습니다. 때문에 제겐 기복이 심한 작가로 각인되어 버린 그. 그래도 신간 소식이 들리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귀가 쫑긋 합니다. 어쨌든 명불허전 히가시노 게이고니까요. 1년에 반드시 2~3권은 국내에 출간이 되는 그의 작품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오래된 초기작들이 이제서야 번역이 되던 상황이라 정작 비교적 (일본내에서의) 최근작을 읽은 건 상당히 오래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이고의 초기작보다 최근작이 더 취향에 맞습니다.

 

동물병원 원장 대리 하쿠로는 어느날 아버지가 다른 동생 아키토의 아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가에데 가족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시애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동생 부부는 아키토의 아버지 야스하루가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 귀국하는데, 귀국 이후에 아키토가 실종되고 맙니다. 급한 볼 일이 있어 며칠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메모를 남기긴 했지만 그의 행방불명이 걱정스러워진 가에데는 아키토의 형인 하쿠로에게 연락을 취하여 이렇게 결성된(?) 아주버님&제수씨 콤비는 아키토의 행방을 뒤쫓으며, 하쿠로의 엄마가 재혼했던, 그러니까 아키토의 본가인 야가미가에 얽힌 내밀한 가정사도 추적하고, 그러다 보니 16년 전 조금 의아한 죽음을 맞이한 하쿠로 엄마의 죽음에 관련된 미스터리도 풀게되는 그런 스토리입니다.

 

이야기 속에 담긴 미스터리는 상당히 고전적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야가미가의 대 저택에서 만난 여러 수상쩍은 인물들. 야가미가의 어마어마한 재산과 이 재산 대부분을 물려 받게 될 아키토의 행방불명. 분명히 이 사건의 중심엔 야가미가의 누군가가 관여했을 것이므로 하쿠로와 가에데가 그들을 차례로 탐색해 가는 과정은 고전적 미스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입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미스터리는 뭔가 뻔하고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여기에 다채로운 다른 미스터리를 준비합니다. 하쿠로와 아키토 모친인 데이코의 16년 전 의문사. 그리고 그저 뇌종양으로 임종한 줄만 알았던 하쿠로의 친부 가즈키요의 죽음과 그가 남긴 그림 '관서의 망'. 재산과, 실종과, 의문사와, 그림. 각자 흩어져있던 사건들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고, 그렇게 맞이하게 되는 반전의 결말까지 독자는 쉴 새 없이 책에 빠져듭니다. 역시 게이고 그는 명실공히 가독성의 제왕답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과 출신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그의 지식은 여러 작품에서도 빛을 발하곤 했었지요. 각종 수학적 과학적 공과적 지식들을 이용한 미스터리들이 꽤 많이 존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갈릴레오 시리즈가 있고요. 이 작품에서도 그런 작가의 이과적 지식들은 꽃을 피웁니다. 프랙털 도형, 소수의 비밀, 울람 나선, 뇌과학 등등. 솔직히 저는 문과 출신이어서 그런지 작가의 이과적 지식들이 마구 분출하는 몇몇 작품들은 읽는데 조금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에서는 그런 지식들이 지나치게 상세하고 전문적으로 펼쳐지진 않아서 적당히 읽기 재밌을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몇몇 이론들엔 지대한 관심이 생겨 책을 읽으며 무한 검색을 했을 정도로 흥미롭기까지 했습니다. 역시 이런 점은 어쩔 수 없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강점이랄 수밖에 없겠네요.

 

제가 수많은 게이고 작품을 읽어오면서 조금 아쉽다고 느꼈던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책을 읽어나가며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잔재미. 그러니까 캐릭터가 매우 매력적이라든가(그나마 가가형사를 가장 좋아합니다.) 문장 자체가 유쾌하다든가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게이고 작품에선 찾아보기 힘들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위험한 비너스에서는 그런 잔재미가 곳곳에서 보입니다. 우선 캐릭터들이 상당히 개성 강하고 매력적입니다. 먼저 주인공인 하쿠로. 그는 여자의 풍만한 가슴만 보면 금방 사랑에 빠져버리는 금사빠입니다. 곳곳에서 여자들의 몸매 품평을 하는 그를 보면 눈살이 찌뿌려질만도 한데 왠지 귀엽습니다. 분명 변태스러운데 순수한 맛이 있달까요. 그래서 그런지 이남자 나름 여자 관계가 복잡합니다. 하긴 그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금사빠니까요;; 그리고 하쿠로의 마음을 사로잡은 두 여성이 있습니다. 먼저 동물 병원 간호사인 가게야마 모토미, 항상 상사인 하쿠로에게 팩트 폭력 돌직구를 날려대는 그녀는 항상 하쿠로가 이성을 잃을 땐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하고, 위기에 봉착했을 때 지혜롭게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하쿠로에겐 금단의 열매처럼 위험한 비너스(저는 이 책의 제목이 이 인물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에데. 승무원 출신이라는 그녀는 언제나 쾌활 발랄하고 가벼워 보이지만 한편으론 논리가 예리하고, 임기응변에도 능하고, 심지어 체력적으로도 강한, 상당히 미스터리한 인물입니다. 이런 그녀에게 점점 빠져드는 하쿠로, 하지만 그녀는 하쿠로의 제수씨. 이때문에 고뇌하는 하쿠로의 내적갈등은 비난도 응원도 할 수 없어 독자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게이고의 전작들에서 분명 막장 치정극이나 팜므파탈 악녀가 등장하는 로맨스(?) 스릴러는 꽤나 있었는데, 이렇게 소소하게 진행되는 로맨스 아닌 로맨스가 있었던가요? 하쿠로와 모토미와 가에데의 삼각 로맨스에 저는 뭔가 마음이 뿌듯해졌습니다. 게이고의 작품을 읽으면서 설렘을 느낄 줄이야! 아, 그렇다고 이 작품이 로맨스가 짙은 작품이겠거니 오해는 마세요. 그저 책을 읽어가며 잔재미를 찾아내는 즐거움을 크게 생각하는 제겐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잔재미가 그것이었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하쿠로와 모토미와 가에데... 이 작품 혹시 시리즈로 또 나오진 않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이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너무 아깝습니다.

 

추리도 있고, 추적도 있고, 과학도 있고, 수학도 있고, 심지어 로맨스도 있는 이 작품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묵직한 메시지들도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동물 병원에서의 하쿠로의 진찰 장면이며 또한 자주 하쿠로의 진찰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되곤 합니다. 그렇게 작가가 반려 동물에 대한 인간들의 책임 의식 같은 걸 전달하려 했던 것은 아닐지 느꼈습니다. 또 하쿠로가 수의학 전공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은 동물 실험에 대한 문제 제기 또한 보여줍니다. 인간들에게 희생당하는 동물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순수한 동물들 덕에 흐뭇해지는 훈훈함을 또한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던데 작가의 동물 사랑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주제와 관련된 과학의 영역에 대한 문제 제기. 끊임없이 인간의 한계에, 나아가 신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려는 과학의 영역.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삶의 질을 무한히 발전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과학의 무한한 발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여러 분야에서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뇌의 일정 부분에 자극을 주어 후천적인 천재를 만들어 내는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연구의 결과란 것은...... 이 세상에 천재들이 많아지면 이 세상은 과연 행복해질까요? 작가는 천재로 태어난 아키토가 아닌 범(凡)재로 태어난 하쿠로가 사건을 해결한 결말을 통해 이에 대한 답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역시 작가의 이런 생각에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p.474 천재가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불행한 천재를 만들어내기보다 행복한 범재(凡才)가 좀 더 많아지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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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책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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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 가면 '잡탕'이라는 독특한 음식이 있습니다. 라면, 만두, 떡, 순대, 튀김 등등을 다 때려넣고 MSG 잔뜩 넣어서 끓인 굉장히 자극적인데 이게 또 중독성이 강해 자꾸 생각나는 음식. 무한의 책은 음식으로치면 바로 이 잡탕 같은 책입니다. 온갖 장르란 장르는 다 섭렵하고 있거든요.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SF, 오컬트, 판타지, 순문학까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산만하게 느껴지기 보단 재밌습니다. 은근 중독성이 있어서 자꾸 자꾸 페이지를 넘기게 되거든요. 게다가 소설의 형식은 또 어찌나 독특한지요. 일단 글자체만도 5종류가 넘는데다가 글의 구성은 소설이었다가 일기였다가 블로그포스트였다가 각주였다가 편지였다가 위키피디아였다가 노래 가사였다가 희곡이었다가... 거기에 시간 또한 뒤죽박죽. 과거였다가 현재였다가 미래였다가, 현재가 알고보니 미래였다가, 미래가 알고보니 과거였다가... 이런 이런,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요? 네, 이 책은 매우 정신없는 작품 맞습니다. 그래서 제목 또한 무한의 책입지요. 하지만 그 정신없음 속에서도 묘한 몰입감이 형성되어 끝까지 완주하도록 하는 힘 또한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용인 에버랜드에서 요상한 복장을 한 아이가 발견되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아이는 경찰서로 넘겨지고 아이의 행적을 찾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배경이 갑자기 미국으로 바뀝니다. 이 이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자 화자인 스티브가 등장하여 다시 이야기가 전개되지요. 스티브(한국 이름 박성철)는 엘름가 1408번지 한국인 가족 몰살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남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작품 속에서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야기는 스티브와 스티브의 현재 주변 인물들이 중심으로 전개되거든요. 그리고 갑자기 신이 강림합니다. 여러분은 신이나 천사하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지요? 당연히 우리 인간과 닮은 꼴의 외양이 그려지실 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 속 신은 파충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룡의 모습을. 그들은 2015년 12월 21일 지구 각지에서 비처럼 눈처럼 내려옵니다. 신은 우리 주변 곳곳에 산재되어 있음이 이렇게 엉뚱하게 증명되지요. 게다가 신이 티라노 사우루스였다니! 천사는 익룡이었다니! 다섯 살 난 조카가 손에서 놓지 않는 공룡 장난감이 알고보니 신의 닮음꼴이었었다니요! 처음엔 작가의 능청스러운 상상력에 피식댔었지만, 또 생각해보니 신이 파충류의 모습을 한 게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건 어쨌거나 인간들의 오만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일테니까요. 아무튼 신들은 그렇게 강림하여 인간들과 스마트폰 어플 '계시'로 소통을 합니다. 특히 우리의 주인공 스티브와는 문자 메시지로 무한 소통을 하지요. 신들은 갑자기 왜 강림을 한 것일까요? 그들이 스티브를 찾은 이유는? 용인에서 발견된 아이의 정체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이야기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서술자의 의식의 흐름대로 전개가 되는지라 이야기가 옆길로 자주 새버리기도 하고요. 온갖 잡다한 글의 형식이란 형식은 전부 등장을 하니, 아니 이게 무슨 소설이야? 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속된 말로 작가가 혹시 '약 빨고' 쓴 소설이 아닐까 싶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작은 퍼즐 조각들이었습니다. 하등의 쓸모가 없는 군더더기처럼 보이던 조각 이야기들이 사실은 하나의 큰 그림을 위한 중요한 조각이었던 거지요. 그렇게 큰 그림이 완성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졌을 땐 저는 살짝 눈물이 돌기까지 했습니다. 이 요상하고 또 요상한 이야기의 끝에 감동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노인과 소년이 손을 잡고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은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가끔 이런 책을 만나면 참 난감합니다. 읽을 땐 신나게 읽었는데 이 무한한 이야기에 대한 감상평을 단 몇 줄로 적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거든요.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부디 직접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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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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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4개월 여의 암투병 끝에 작은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꽤 오래 같이 살았던 적도 있고 현재는 작은집 인근에 살고 있기에 교류도 많았던, 제겐 아버지나 다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병원에 들러 나름 간병도 하고 격려도 해드렸지만 처음 입원하여 진단 받을 때부터 이미 시한부 선고를 받은 작은아버지가 점점 가족들과 그리고 세상과 이별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었습니다. 2년 전엔 또 할머니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시기도 했습니다. 90세가 넘은 연세인지라 사람들은 호상이라고들 했지만 어린 시절 저를 업어 키워주신 할머니와의 이별도 정말이지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 작은아버지를 연달아 보내고 자주 자주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작은 아버지 장례식 때 펑펑 울고 있는 저에게 사촌 오빠가 "이제 시작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나이를 먹은 만큼 부모님도 그리고 집안 어른들도 점점 더 연로해지실테니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해서 생길 거라는, 그러니 후회없게 지내라는 오빠의 충고 비슷한 것이었겠지요. 하지만 작별 연습이라니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놓는 준비라니요... 그게 과연 준비하고 연습한다고 되는 일인 걸까요?

 

그런데 이 작품은 바로 그 '놓음'과 '작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만남과 사랑 뒤엔 반드시 이별이 있을 것임을 알기에 사랑과 함께 쌍으로 존재하는 두려움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머리를 다쳐 기억을 점점 잃어가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매일 사랑스러운 손자 노아노아와 함께 그의 상상 속, 기억 속 광장을 여행합니다. 그 곳엔 할아버지의 행복하고 즐거웠던 과거의 기억들이 잔뜩 있었습니다. 할머니와 처음 만났던 댄스장, 할머니가 좋아했던 히아신스, 할머니가 끔찍하게 생각했던 고수, 할아버지가 평생 사랑한 방정식, 할아버지완 다르게 수학보단 문학을 좋아했던 아들 테드, 테드가 낳아준 사랑스러운 손자 노아노아. 하지만 할아버지의 기억의 광장은 이제 점점 좁아져만 갑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계속해서 한 페이지가 없는 책을 읽고 있는데 그게 항상 제일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그에겐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그 기억들이 자꾸만 그를 떠나고 있으니까요. 이러다가 사랑하는 아들 테드나 손자 노아노아마저도 놓치고 말까봐...

 

뭉클해지고 코끝이 찡해지는 장면들이 많았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굉장히 감정이 절제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결코 신파로 흘러가지도, 독자들의 눈물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담담하고 담백하게, 하지만 사랑스럽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테드, 그리고 노아의 대사들이 주를 이뤄 전개되는데 그들이 주고 받는 말들은 한 문장 한 문장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이야기에 아기자기하고 예쁜 일러스트들이 어우러져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동화처럼 펼쳐집니다. 때문에 '슬픔'보단 '감동'이 더 크게 다가오며 이야기를 더욱 아름답게 합니다.

 

그렇게 독자들에게 작가는 '놓음'과 '작별'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결국 어쩔 수 없는 이별의 나날임을... 그렇기에 놓아야 할 땐 놓아야 함을... 그러므로 조금은 뻔한 교훈이긴 하지만 매일 매일 후회없이서로 사랑할 것을... 때문에 저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눈물 짓기보다는 미소 지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내내 곁에 두고 읽으며 위로 받고 힐링할 수 있을, 자그마하고 어여쁜 책 한 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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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웃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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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명 작가는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내가 만약 작가라면 이정명 작가의 작품들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의 스토리엔 기본적으로 '재미'가 담겨 있고, 그 재밌는 스토리를 풀어내는 문장은 매우 정갈하게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훈민정음과 세종대왕', '김홍도와 신윤복', '북한 꽃제비' , '윤동주와 그의 시' 등 그가 소설 속에 담는 소재들은 또한 어찌나 취향저격인지요. 때문에 아주 아주 어린 시절 잠시 작가를 꿈꿨던 적이 있지만, 제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그 꿈을 접은 저에게 이정명 작가의 작품들은 언제나 대리만족이자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가가 4년만의 장편을 들고 나왔는데, 그 소재는 '6월 민주항쟁'이라 합니다. 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전혀 없는, 소설로 역사를 배워가는 저에게 이런 단비 같은 작품이라니요. 게다가 80년대 정보 요원들이 요주의 인물을 감시하는 이야기라는 소개를 보고 굉장히 인상깊게 봤던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이 떠오르기도 해서 더더욱 기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 흐름이 제 예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민주화 운동 중심에선 민족 투사와 이를 잡으려는 정보 요원의 쫓고 쫓기는 스펙타클 첩보전...같은 걸 기대했었는데 민주화 투쟁은 그저 가끔씩 언급되는 소재일 뿐, 그 언급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배경이 80년대인 줄도 모르게 스토리는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스토리의 중심엔 다섯 인물이 있고, 이 작품 속에서 중요하고 또 중요하고 매우 몹시 중요한 '연극'이 있습니다.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각자 펼쳐지다가 후에 이들이 합을 이루는 구성을 워낙 좋아하는지라 매우 흥미롭게 읽어나갔습니다. 이정명 작가의 스타일을 아는지라 분명 반전이 있으리라 예상하며, 그 반전이 무엇이겠구나 짐작도 해 가면서요.

 

하지만 복병은 앞서도 언급했던 중요하고 또 중요하고 매우 몹시 중요한 소재인 '연극'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연극'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필이면 이 작품에서 소개가 되고 있는 '연극'이 제게 너무나 생소하고 난해한 그리스 신화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대학 시절 심리학 서적에서나 보던 '엘렉트라'의 이야기. 그 엘렉트라의 이야기가 너무나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읽다 보면 이 작품이 과연 이정명의 선한 이웃이란 작품인지, 엘렉트라 신화인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죠. 어째서 작가가 '연극'이란 소재를 끌어 왔는지, 왜 그 연극이 '엘렉트라'였는지 이해가 되면서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조금은 장광설처럼 늘어놓는 엘렉트라의 이야기는 솔직히 독자인 저를 힘겹게 했습니다. 한창 책을 읽어나가다 일단 엘렉트라 신화부터 읽고 다시 이 작품을 읽어냐 하나 고민했을 정도니까요. 결국 어느 정도 커트를 해가며 읽어나가니 훨씬 수얼해지긴 했지만, 4년 동안 오매불망 기다려 온 작품을 이런 식으로 읽고 말았구나...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구나... 하는 찜찜함이 남아버렸습니다.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으니 마치 혹평 같아졌지만, 작품 자체에 대해 실망을 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이정명식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었고, 역시 그의 문장들은 한결 더 정제되어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이 작품이 말하려는 주제와 관련된 소름 돋는 결말이란! '연극'이란 어수선한 가지들이 어떻게 '선한 이웃'이란 나무에 뻗어 있는지, 그리고 이 나무가 어떻게 숲을 이루고 있는지를 본다면, 이 작품이 얼마나 멋진 작품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작가는 '선(善)'을 정의하려면 3가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의도'와 '행위'와 '결과'. 과연 의도는 선했으나 행위와 결과가 나빴다면 이를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작가는 누구나 선한 의도는 가질 수 있음을, 하지만 그 행위나 결과는 악할 수 있음을, 때문에 '선함'을 판단할 때엔 '의도'만을 고려할 수 없음을 역설하기 위해 반어적 뜻을 담아 소설의 제목을 '선한 이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에 깊이 수긍하며, 해외 망명이라도 하려는건지 영어 사전만 들입다 파고 있다는 수인 번호 503에게 이 소설을 소개하고 싶어졌더랬습니다. '당신의 선의는 결국 다른 이들에게 심각한 악행이었으므로 당신의 그 선의마저도 부정되어야 함이 맞다고!'

 

올해는 6월 민주 항쟁 30주년입니다. 작가는 30년 전의 이야기를 통해, 30년 후의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대비해야하는지를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작품 속 소름 돋는 결말이 30년 후의 우리 나라의 모습은 결코 아니길 항상 경계하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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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트의 우울
곤도 후미에 지음, 박재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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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곧잘 말하곤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바로 멍멍이라고. 멍멍이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고. 저희 시골집에선 개를 키우지 않았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그 말인즉슨 제가 태어나자 마자 개란 존재는 가족과 다름 없었다는 말이죠. 그동안 키웠던 개들의 종류도 무궁무진. 잡종 믹스견부터 진돗개, 치와와, 셰퍼드, 비글까지 다양합니다. 저는 너무 어렸어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전설적인 셰퍼드 '해피'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가족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 작품 속 주인공(?)인 독일 셰퍼드 샤를로트가 마치 내 개라도 된 양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샤를로트는 경찰견 출신으로 건강상 경찰에서 은퇴 후, 주인공 부부의 집에 입양됩니다. 주인공 부부는 불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샤를로트를 입양하고 난 후엔 샤를로트를 정말 딸처럼 키워나갑니다. 개를 키우리라 전혀 예상치 않았던 부부지만, 경찰견 출신이었던 샤를로트는 워낙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명견이라 큰 어려움 없이 동고동락하게 됩니다. 그렇게 개를 키우게 되면서 일어나는 몇몇 소소한 일들과 미스터리가 작품 속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건 아닌 사건들은 샤를로트의 도움을 받거나, 샤를로트 덕에 힌트를 얻어 주인공 부부가 풀어나갑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저는 이 작품이 단어 단위로 사랑스러웠습니다. 샤를로트의 행동들이 마치 눈에 그려지는 듯하여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읽는 내내 엄마 미소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경찰에서 은퇴했다고 이제 경찰들 일이라면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경찰서 근처에만 가도 안절부절 못하는 샤를로트, 집안을 한껏 헤집어 놓고 큰 죄라도 지은 양 움츠러든 샤를로트, 잘못을 저질러 놓고 잘못했다고 한 번만 봐달라고 얼굴을 핥는 샤를로트, 남자 친구가 다른 암캐에게 관심을 두자 질투하는 샤를로트, 뭔가 수상한 일이 발생하면 곧장 주인공에게 알리는 샤를로트, 아이를 좋아하는 샤를로트, 장난을 좋아하는 샤를로트, 샤를로트.. 샤를로트... 샤를로트.... 로 시작되는 모든 문장들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작품 속 말처럼 '개를 키우면 우울할 새가 없습니다.'

 

작품속에서도 지적하고 있던데... 솔직히 개들이란 존재가 작정하고 인간에게 덤빈다면 인간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개들은 인간들에 그저 순종하며, 심지어 희생까지 하곤 하죠. 저는 그런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오로지 개들만이 가진 그 특성이 참 좋습니다. 작품 속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샤를로트를 침실에 들여 같이 자고 부터는 숙면을 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도 살짝 불면증 비슷한 것이 있어서 쉬이 잠들지 못하고, 잠도 꽤나 얕은 편이라 그런 주인공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제게도 샤를로트의 온기가 필요합니다!

 

샤를로트가 외로워하면 함께 자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외로운 것은 인간이다. 체온이 높고 멋진 털을 가진 동물과 함께 자는 건 너무 기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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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탱이 2017-06-21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멍멍이라는 말씀에 백번 공감해요^^

그녀,읽다. 2017-06-21 14:48   좋아요 1 | URL
정말 소소하지만 정말 사랑스러웠어요^^ 강아지가 다 한 소설^^

은탱이 2017-06-2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취향저격일듯한 느낌이 드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