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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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국가의 평화를 위해 위험 요소, 그러니까 폭력이나 테러 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국가는 '안전 구역'을 선포하고, 이 구역들은 '평화 경찰'이 주둔(?)하며 밀착 감시를 합니다. 평화 경찰은 '위험 인물'을 색출해내고, 급기야 공개적인 처형까지 감행합니다. 하지만 이 '위험 인물'들이란 '위험 인물'로 지목이 되는 순간 진짜 그들이 '위험한' 인물들인지는 이미 중요치 않은 법, 그들을 취조(... 라고 쓰고 고문이라 읽습니다.)하는 과정에서 죄를 시인하면 그대로 위험 인물로 확정 처형되고, 부인하면 시인할 때까지 고문을 하다가 결국 시인하게 하거나, 끝까지 부인할 경우 고문에 못 이겨 목숨을 잃게 됩니다. 결국 '뒤집어 쓴 죄도 죄는 죄'라며 마녀 사냥식의 처형이 계속되지요. 이런 공포 정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그럼 국민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평화 경찰'들의 행위가 분명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나만 아니면 돼.'라거나 '내가 살기 위해선 네가...'라는 생각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또한 그들의 내면 안에 있던 '악'의 본성이 발현되기 해, 단두대에서 '위험 인물'이 처형되는 걸 즐기거나, 심지어 눈엣가시였던 이웃을 '위험 인물'로 몰아 발고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흉흉한 세상, 어찌해야 할까요? 정말 화성에라도 이주하여 살아야 할까요?

 

<비단 일본 센다이만의 이야기일 뿐인가?>

이야기의 1부에서 그려지는 참혹한 에피소드들을 보노라면 한숨이 나옵니다. 작가가 아마도 현 일본 정부의 만행들을 보며 착잡한 심정으로, 하지만 상당히 문학적이고 극적으로 과장되게 그렸을 이 에피소들이 오히려 저에겐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왔거든요. 작가가 작품 속에서 직설적으로 지적하고 있듯, 평화 경찰들의 행위는 일제강점기 '특고'들의 만행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또 우리 현대사를 꿰뚫는 여러 정권들에서 보여주던 그런 말도 안되는 공작 정치들과도 매우 닮아 있었습니다. 긴조 시대, 대공분실, 삼청교육대, "탁! 하고 쳤더니 억! 하고 죽었다."는 옛 형사의 말, 정권에 반하는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트럭으로 밀어 버리고는 교통사고로 위장했던 과거의 사건들, 댓글 조작, 민간인 사찰, 블랙리스트... 등등 정부가 수립되고 최근까지 이어져 온 수십 년간의 우리 현대사에서 결코 드러내놓고 자랑하고 싶지 않은 민낯들을 보는 듯하여 분노와 함께 부끄러움까지 함께 느껴야만 했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분명 일본의 센다이라는 도시인데, 게다가 작가는 거듭 가상의 공간임을 밝혔는데도 말이죠.

 

<영웅은 누구인가?>

1부에서의 어둡고, 끔찍하고, 참혹한 일련의 사건들은 2부에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평화 경찰'에 대항하는 '정의의 편'이 등장을 하거든요. 그는 위아래가 일체형인, 검은색의 라이딩 슈트를 입고 요상한 무기를 사용하며, 스쿠터를 타고 등장해 '평화 경찰'에게 부당하게 당하는 이들을 구해냅니다. 이에 평화 경찰은 위기 의식을 느끼고 특별 조사관을 센다이에 내려 보내 조사토록 합니다. 그렇게 '정의의 편'이라고 불리우는 이를 체포하기 위해 그가 도왔던 인물들의 공통점을 찾고, 덫을 놓아 포위망을 좁혀가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건, 분명 독자(...그러니까 저)는 '정의의 편'이 잡히지 않길 바라면서도 그의 정체는 누구일까...를 끊임없이 마카베라는 특별 조사관과 함께 고민하고, 작가가 앞에 던져 놓은 힌트들을 뒤지며 그를 추격(?)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 초반부터 작가는 '정의의 편'의 후보자들을 서너명 넌지시 깔아놓았거든요. 우리들의 '히어로'가 누구인지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그의 정체가 무엇일지 맞혀 보겠다는 승부욕을 이끌어내 추리 소설에서의 '범인 찾기' 플롯을 구축해내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찾는 '범인'이 '악인'이 아닌 '정의의 편'이라는 점과, 독자와 함께 머리를 쓰며 그를 쫓는 탐정 역할의 인물이 결코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는 점이 여타 작품들과 다르달까요.

그리고 밝혀지는 영웅의 정체... 반전이면서도 반전이 아닌 그의 정체에 맞닥뜨리면 어랏?! 하면서도 아하! 하게 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굉장히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며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책 '정의란 무엇인가?'. 저는 그 책을 읽어 보진 않았습니다만 왜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 읽히는가에 대한 이유는 쉽게 짐작이 갑니다. 어떻게 해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니, '정의'를 정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 그에 대한 답이나 힌트 등을 그 책 속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그 책을 읽게 하는 게 아닐까요?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에서도 그 '정의'란 것의 정의에 대해서 깊이 고찰을 해 들어갑니다. 작품의 3부는 정체가 밝혀진 '영웅'이 과연 왜 '정의의 편'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영웅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대해서 고찰합니다. 스포가 될 수 있으므로 밝힐 순 없습니다만 우리의 '영웅'은 여러 주변 인물들 덕에 각성 비슷한 것을 하는데, 누구를 어찌 도와야할지에 대해선 고민이 많습니다. 위험에 처한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는데, 어찌 이를 정의라 할 수 있는지, 그건 '정의'가 그저 '위선'이 아닌지... 우리의 영웅은 이에 대해서 계속 고민합니다. 그래서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 ** **과 그의 가족들"만 구하는 걸로 하자고요.

그게 무슨 우물 안의 정의냐고, 이런 사람이 무슨 영웅이냐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번 떠올려 본다면 결코 이 영웅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겁니다. 며칠 전 벌어졌던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 피해자인 아이는 머리채가 붙들려 꽤 먼 거리를 끌려 갔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를 많은 이들이 보고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 행인들을 비난할 마음은 솔직히 없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그 행인들 중 하나였더라도 아마 그냥 스쳤을 것 같거든요.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봐 '마음'이 아주 없진 않은데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엔 어떤 '용기'가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 속 '영웅'은 달랐습니다. 자신의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들을 돕는 것으로 정의를 실현하려고 합니다. 이 '영웅' 하나의 행위는 사소한 정의일 수 있지만, 만일 사람들 누구나가 모두 자신의 눈앞의 사람을 돕는 세상이 온다면 결국 이 세상의 '정의'는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영웅도 작가도 결국 이런 로망을 꿈꾸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작가는 이 작품이 아닌 여러 작품들 속에서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곤 했거든요. "바로 눈앞의 어려움을 돕는 것." 작가가 내려놓은 이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한 정의에 대한 정의(定義)가 저는 참으로 공감이 갔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가?>

이 작품 속에서는 시민을 한낱 '벌레'나 '개미'에 비유를 합니다.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나서는 '정의의 편'들은 '다윗'에 비유를 하고요. 사람들의 무심한 손짓 한 번에 비명횡사할 수밖에 없는 벌레나 개미, 체급에서 이미 승패가 보이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그런데 개미가 떼를 지어 사람을 공격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이미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이 승리했음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이런 작은 정의들이 승리하여 이뤄낸 큰 정의를 맛보았지 않습니까? 작년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밝힌 수많은 촛불들. 바람 불면 휙~ 꺼져버릴 촛불들이 하나 둘 모이고 모여 이뤄낸 결코 꺼지지 않는 거대한 촛불 물결. 이로써 이뤄낸 "정의"의 힘을 저는 믿습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듯. 작가가 이 작품 전반을 통해 그려놓은 큰 그림도 결국은 이것이 아니었을까요...?

 

<왜 이사카 월드인가?>

이사카코타로라는 작가의 작품 세계 전반을 흔히 '이사카 월드'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각 작품들의 인물들이 얽히고 설켜 있다든가, 그가 추구하는 세계관이 여러 작품에 아울러 표출된다든가, 치밀한 플롯과 개성적인 인물들의 향연이 특징이라든가 등등. 이 작품 역시 그런 그의 작풍들을 어김 없이 보여줍니다. 인물들간의 연관성, 치밀한 플롯, 거듭되는 반전, 재기발랄한 문체 등. 하지만 그중 단연 돋보이는 건 역시 여러 작품들 속에서 보여주었던 주제의식을 집약시켜 놓은 작가의 세계관이 밀도 있게 발현된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는 이미 이전 작품들에서 정의에 대해 고찰(러시라이프, 남은 날은 전부 휴가,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했었고,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마왕, 골든슬럼버, 모던타임스, 밤의나라쿠파)에 대해서도 자주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농도 짙게 압축해 놓은 작품이 바로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아닌가 싶습니다. 상당히 엔터테인먼트적인 소설들 속에, 꽤나 묵직한 메시지를 담아 별거 아닌 듯 툭~ 전달하기에 독자들이 별 거부감없이 이를 아주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그의 작풍을 역시 전 사랑할 수밖에 없네요.

 

<누가 그를 흑화시켰는가?>

하지만 이 작품은 역시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꽤 세고, 어둡고, 무거운 쪽으 분류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우스갯소리로 종종 아베에게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면, 이사카고타로는 상당히 상위 목록에 이름이 기재되어 있을 거라는 얘기를 하곤 합니다. 그동안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윗분들 심기를 건드릴 만한 소재들을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언급해 놓았거든요. 일례로 그는 이미 10년도 더 전에 헌법 개정의 움직임을 예언하고 전체주의를 이용하는 정치가를 경계해야 함을 강조했었습니다. 뭐 현재는 그 전체주의를 이용하는 정치가가 정권을 꽉 틀어쥐었고 헌법 9조는 이미 종잇조각이나 다름없어졌지요. 이사카고타로는 이 작품의 제목을 어떤 "끔찍한" 뉴스를 듣고 낙담해 있을 때 데이빗 보위의 명곡 'Life on Mars'를 듣고 이를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로 마음대로 잘못 해석하며 짓게 됐다고 하는데... 이 웃음나는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 중에 저는 그 "끔찍한 뉴스"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상상해 보게 되더군요. 아마...... 그렇고 그런 뉴스가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이렇게 흑화된 그에게서도 역시나 그다움을 아주 찾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묵직한 메시지의 영향인지 잔재미는 많이 줄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전 역시 전 작가 특유의 재기발랄함과 잔재미가 가득해서 엔딩이 비극인지 희극인지와는 상관없이 읽는 내내 유쾌해 입꼬리가 올라가는 그의 작품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부디 이젠 그가 흑화에서 벗어났길 바랍니다. 일본의 현정세를 보노라면 더더욱 흑화되지나 않았으면 다행이다 싶긴 하지만......

 

『 p.256 저 사람은 구하면서 이 사람은 버려둔다. 이런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요. 아니,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애당초 누구를 구하려고도 하지 않겠죠. 어쨌든 사람을 대가 없이 구하겠다고 하는 사람이니까 분명 좋은 사람일 테고, 그런 사람은 고민할 겁니다. A는 도와주고 B는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걸까? 모두를 도와줄 수는 없는데 어쩌지? 물론 제가 보기에는 무의미한 고민이지만 고민하는 사람은 할 겁니다. 좋은 사람일수록 고생하는 세상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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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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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단수이허 강에서 시신 두 구가 떠오르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었다고 합니다. 피해자는 79세의 노인과 57세의 여교수였고 둘은 부부였습니다. 범인은 강가 근처의 카페에서 일하던 27세의 여성이었고요. 이런 상황 설명을 듣고 여러분은 어떤 사건의 진상을 상상하셨나요?

 

이는 분명 치정극일 터다. 젊은 여자가 노인의 돈을 노리고 그를 유혹했겠지. 노인의 부인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다가 실패했든가, 아니면 애초에 부부를 살해하고 그들의 돈을 갈취하려고 했겠지. 뭐 대충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나요? 우리가 흔히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해 오던 사건들이나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보아 오던 스토리란 것이 대부분 이러했었으니까요.

 

이 소설은 그런 우리들의 일방적이고 편협한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과연 사건의 진실이란 것이 그리 단순한 것일까? 하고요.

 

자전이라는 주인공은 그저 평범한 행복을 꿈꾸며 열심히 살아가는 20대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만의 가게를 개업하길 꿈꾸었고, 남자친구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소박한 꿈은 2건의 살인 사건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그녀는 왜 훙보와 훙타이를 죽였을까요?

 

자전, 그녀의 구속과 판결의 과정은 빠르게 진행됩니다.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언론과 여론은 제각각 한없이 자극적인 소재들을 끌어들이며 사건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과연 자전이 어째서 그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어차피 그들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그녀를 ‘사갈녀’라 부르며 손가락질 했고, 그녀에 의해 살해된 훙씨 부부를 당연히 선한 피해자라 여기며 그들만의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사실’은 그게 맞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 안에 감춰진 ‘진실’도 그러할까요?

 

이 소설은 자전이 기소되고 재판을 받게 되는 과정에서 자전이 그녀의 삶을 반추하는 형식과 훙타이가 강 속에서 죽어가며 또한 그녀의 삶을 반추해 가는 형식이 교차하며 전개됩니다.

 

가해자인 여성과 피해자인 여성. 아이러니한 것은 나이도 형편도 전혀 다른 두 여성이 묘하게 닮아 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대만이라는 사회는 예부터 유교 윤리가 팽배해, 그 안에서의 여성들의 삶이란 것은 결국 남성이라는 힘과 권력에 속박되고 이용당하는 존재들일 뿐이라는 걸 이 두 여인을 통해 보여줍니다. 우리의 실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기에, 그리고 저도 여성이기에 이 두 여인들에게 조금 공감이 가기도 하고, 동정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그녀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녀들이 결국 남성 권력에 이용당하는 건 사회의 분위기와 수많은 인과관계가 얽혀 그리 된 것인 것이 맞습니다만, 이를 끊고 벗어날 수 있는 건 역시 그녀들 안에 있었을 테니까요. 자전이 자신에게 닥친 어떤 사건들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항(?)했다면 어땠을까, 훙타이가 좀 더 일찍 실패한 결혼 생활 따위 팽개쳐 버리고 자신의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들이 저는 자꾸만 들었습니다. 어차피 사회란 놈이 잘못되어 먹어 이리 되었다고, 이 모든 건 그놈의 사회 탓이라고 탓만 해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결국 벽을 넘든, 깨부수든, 뭐라도 해야 그 사회란 놈을 혼쭐을 내주든, 바꾸든 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요. 그것이 달걀로 바위치기라 할지라도.....

 

처음 접하는 대만 소설이라 인명이나 지명 등이 낯설었고,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인 줄 알고 읽었다가 ‘미스터리’는 별로 없고 지극히 사회소설이어서 당황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생각할거리가 많아 인상 깊은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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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박생강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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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대선 선거 운동 기간에, 한 후보자가 선거 연설에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제일 먼저 종편 두 개를 없애버리겠다는 문제의 발언을 했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 그럼 나는 그 두 개의 방송만을 봐야겠구나 생각했었죠.(ㅋㅋ;;) 그 두 개의 종편 채널 중 하나가 누가 봐도 JTBC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최순실의 태블릿 PC를 처음 보도하여 대통령을 탄핵으로 이끄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곳이 바로 손석희 사장이 이끄는 JTBC 보도국이었으니까요. 보수를 자칭하는(글쎄 과연 그게 진짜 보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후보 눈에 JTBC는 눈엣가시도 그런 눈엣가시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이유로 (잘 보지 않는 뉴스이진 하지만) JTBC 뉴스룸은 곧잘 챙겨보곤 하지만요. 아무튼 지난 대선 때 그 후보와 같은 이유로 JTBC라면 학을 떼는 어르신들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단정하는 건 좀 위험하겠지만 그들은 주로 저희 부모님 세대이거나 꽤나 큰 부와 권력을 가졌거나 하는 분들일 겁니다. 그리고 이 작품 속 주인공들이 정확히 그런 조건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손태권은 작가입니다. 하지만 변변한 책 한 권을 내지 못하고 논술 학원 강사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오다 그나마도 근무하던 학원이 쫄딱 망하는 바람에 연인인 공에게 빌붙어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다 우연히 본 구직사이트에서 헬라홀이라는 피트니스 클럽의 사우나 매니저에 지원하게 되고 그곳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헬라홀의 주 고객층은 대한민국 상위 1퍼센트의 중장년들이었는데 그들 갑을 상대로 태권은 을도 아닌 심지어 병이 되어 그들을 돌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태권은 헬라홀도 고객들도 그리고 자신도 어쩐지 근사한 콧수염이 아닌 코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처음 작품의 제목을 보고선 상위 1퍼센트의, 속된 말로 기득권 보수 꼴통들을 비꼬는 풍자극일 거라 짐작했었습니다. 물론 그 짐작은 어느 정도 맞기도 했지만, 제가 짐작하고 기대했던 바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저는 풍자라는 것의 가장 큰 묘미는 역시 '뒷맛 쓴 통쾌함'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풍자의 맛은 대부분 밍밍하면서 부분적으로 크게 쓰기만 했거든요. 좀 단순하게 말하자면 극적인 어떤 사건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병이나 을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갑들로서의 씁쓸함과 병과 을로서의 씁쓸함만이 그득그득 했달까요. 작품 속에서 '리얼리즘'에 대한 언급이 많았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치열하게 사실적인 리얼리즘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 속 허구의 세계에서 자그마한 재미와 위로를 찾으려 독서를 하는 제게 이런 치열한 리얼리즘 소설은 조금 잔인하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 작품의 제목은 원래 '살기 좋은 나라?'였다던데... 솔직히 지금의 제목을 보며 무릎을 탁 쳤던 독자로선 이 무슨 촌스럽게 직설적인 제목이냐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살기 좋은 나라?' 만큼 이 작품의 주제를 잘 살리는 은유적 제목도 없었겠다 싶기도 하네요. (저를 포함한) 한쪽에선 JTBC를 찬양하고, 또 한편에선 그렇기에 JTBC를 무조건 배척하는 나라. 빈과 부, 세대와 세대, 남과 여, 지역과 지역으로 둘로 셋으로 넷으로 자꾸만 갈리는 나라. 이런 나라가 언젠가는 정말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지... 아...... 역시 이 소설 곱씹을수록 쓰고 또 쓰고 쓰디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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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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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도서업이 성행인 일본엔 각종 문학상이 많지만 그 수많은 문학상들 중 제가 가장 신뢰하는 문학상은 두 가지입니다. 나오키상과 서점대상. 그런데 의외로 이 두 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이 그동안 단 한번도 없었다네요. 올해 이 두개의 상을 동시에 거머 쥔 최초의 작품이 바로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이라고 합니다. 제가 가장 신뢰하는 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했다니, 이 작품에 대한 기대치는 자연 높아질 대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으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라...하는 우려도 있었고요.

 

그도 그럴 것이, 저에게 온다 리쿠라는 작가의 가장 큰 이미지는'몽환적'이었습니다. 이 '몽환성'이 가끔 난해함으로 읽히기도 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게다가 친숙하지 않은 클래식, 피아노 콩쿠르가 소재인데다가 책을 마주하는 순간 일단 주눅이 들고 마는 책의 두께까지.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저의 기우였다는 것을 책을 펼쳐 들고 고작 몇 페이지만을 읽고 바로 깨달았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 콩쿠르 프랑스 예선. 이곳에 나타난 15세 소년 가자마 진. 수백년을 이어 온 전통때문일까요, 클래식이라는 장르 탓일까요. 클래식 음악계는 몹시도 보수적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사사를 받았다거나, 어느 대학에서 수학중이라거나 하지 않는, 그러니까 무명의 음악인이라면 일단 심사위원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가자마 진이라는 소년, 날것 그대로의 음악을 연주하며 한없이 자유분방하고 결코 틀에 얽매이지 않지만 곡을 해석하여 연주하는 능력은 뛰언 이 천재 소년은 심사위원들을 말 그대로 멘붕에 빠뜨립니다. 떨어뜨리자니 그 능력이 너무 출중하고 통과시키자니 여태껏 본 적 없는 파격성을 가지고 있고. 그런데 이 소년, 어마무시한 추천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임에도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았다는 유지 폰 호프만이 직접 쓴 추천서를 말이죠. 결국 심사위원들은 호프만의 추천서에 힘입어 가자마 진을 예선에서 통과 시키고 가자마 진은 콩쿠르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향합니다. 이 작품은 그러니까 이 콩쿠르의 1, 2, 3차에 이은 본선까지의 콩쿠르 과정을 매우 상세히 담아놓은 작품입니다.

 

콩쿠르는 거의 100명이나 되는 참가자가 참가를 하는데, 이 작품에선 가자마 진을 비롯한 4명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아버지가 양봉업자라 프랑스 전역을 떠돌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꿀벌 왕자 가자마 진. 그는 콩쿠르에서 입상을 하면 피아노를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해(네... 그는 어이없게도 피아노가 없습니다.) 콩쿠르에 참가합니다. 한때 천재 피아니스트 소녀였으나 어린 시절 피아노 스승인 엄마를 잃고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던 에이덴 아야. 그녀는 그동안 아예 음악을 기피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굳이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었습니다만 엄마의 지인이자 모 대학의 음대 학과장의 적극 추천으로 음대에 입학하고 결국 요시가에 콩쿠르에까지 참가하게 됩니다. 또 일본계 남미인 줄리어드 신예 피아노 천재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그는 한 콩쿠르에서 재능이 아닌 다른 이유로 안타깝게 탈락하였지만 그 능력은 이미 인정 받아 이번 콩쿠르의 유력한 우승 후보로 지목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물은 콩쿠르에 참가하기엔 연배가 좀 있는 스물 여덟 악기상점 직원인 다카시마 아카시. 음악에 대한 지식은 없으나 음악을 지극히 사랑했던 할머니 덕에 피아노를 시작하고 전공했던 그이지만 생업 전선에 뛰어들며 피아노를 연주할 일은 거의 없게 되어버린 아카시는 우연한 기회에 이번 콩쿠르에 참가하게 되고, 그의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다시 한 번 들끓게 됩니다.

 

워낙 방대한 분량인지라 인물 소개만으로도 숨이 차는군요. 이리 장황하게 그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네 인물들이 누구나 하나같이 예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그 청춘이, 그들의 꿈이 반짝 반짝 빛나며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네 주인공들 덕에 저는 함께 긴장했고, 함께 꿈을 꿨고, 함께 음악 속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저는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동안 꿈에서조차 그들과 함께 콩쿠르가 열리는 회장에서 그들의 연주를 듣고, 심지어 그들이 되어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피아노라고는 바이엘도 떼지 못한 제가 말이죠. 그만큼 그들에 한없이 몰입해서 콩쿠르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즐기고 또 즐겼습니다.

 

피아노 콩쿠르를 소설로 써내려갔다니... 잘 상상이 안 되실 겁니다. 피아노나 교향악단, 합창단 같은 소재를 담은 영화나 드라마는 많지만 이들은 영상과 소리를 함께 담을 수 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은, 아니 오히려 그런 영상 매체들의 소재로 쓰기 매우 유용할지 모르지만, 소설은 오로지 글로써 승부해야하니까요. 사실 저도 그런 점이 이 작품을 읽기 전에 가장 걱정스러웠던 부분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친숙하지 않은 클래식인데, 하물며 이를 글로써 감상해야 하다니요.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음악들에 정말 미안하지만, 클래식을 귀로 듣는 것보다 이 작품을 통해 글로 보는 것이 저는 훨씬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하고 또 아이러니하게도 말이죠. 이것은 오로지 작가의 정성과 역량 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가자가 곡 하나를 연주하는 과정을 정말 아름다운 묘사로 독자에게 전달하거든요. 그 묘사를 읽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그 정경들이 눈 앞에 펼쳐지며, 듣고 있지 않은 음악이, 심지어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음악이 귀에 들리는 듯했습니다. 이런 제 표현이 과장 같으시죠? 그런데 정말 정말 저에겐 그랬습니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면, 이 콩쿠르만의 고유한 규칙이 있는데 2차 예선에서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작곡가의 신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콩쿠르의 2차 과제곡은 미야자와 겐지의 소설을 모티프로 작곡한 <봄과 수라>. 이번 콩쿠르를 통해 처음 연주되는 신곡이니 연주자의 개성과 해석이 더욱 돋보이게 되는 곡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네 주인공 중 이 곡을 가장 처음으로 연주하게 되는 인물은 '다카시마 아카시'. 그는 봄과 수라의 해석을 놓고 고심을 거듭합니다. 그러다 그는 떠올립니다. 처음 피아노를 시작하게 해 준 할머니의 푸른 뽕밭을. 그리고 깨닫습니다. 이 뽕밭은 이어져 있다는 것을. 미야자와 겐지의 영국 해안으로 그의 하나마키, 그의 우주로.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펼쳐집니다. 이런 아카시의 연주를 듣는 가자마 진은 눈앞에 어떤 푸른 초원이 펼쳐지는 걸 느낍니다. 다카시와 진은 서로 음악으로 통하게 된 거죠. 혹시 지금 이거 상당히 오글거리는데?! 라고 생각하신 분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건 제 리뷰가 한참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작품을 통해 이런 장면들을 읽어 가신다면 더없이 큰 감동을 받으실 거라고 장담합니다.

 

콩쿠르의 과정을 지켜보며 흥미로웠던 점이 있습니다. 한국인 참가자들에 대한 극찬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 다만 그들의 연주를 네 주인공들의 연주처럼 상세하게 묘사하는 건 아니고요. 한국인 피아니스트의 세계적 위상이 높다는 언급이 자주 됩니다. 실제로 6명의 본선 진출 자 중 2명이 한국인입니다. 비중이 가장 높지요. 그래서 조성진처럼 한국인이 우승을 했느냐고요? 아니면 네 주인공 중 하나가 우승을 했느냐고요? 그것은 당연히 비밀입니다. 다만 책 앞 부분에 네 주인공의 1~3차 및 본선 참가곡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은 주인공들이 콩쿠르를 준비하며 짠 리스트지 그들이 이 곡들을 다 연주하게 되는지는 직접 작품을 읽으시면서 확인하세요. 저는 그 리스트를 보고 뭐야~ 4 주인공 모두 그럼 본선에 든다는 거야? 이거 스포 아냐?... 라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것은 절대 스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떨어지겠군...이라고 짐작하시고 계시죠? 글쎄요, 이 역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 감안하시고요! 저는 콩쿠르 결과가 정말 너무나 궁금했던 나머지 가장 마지막 챕처를 먼저 읽어볼까 하는 유혹을 뿌리치느라 아주 혼이 났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알았을 때 끝까지 참아낸 제가 대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런 즐거움을 놓치지 마시길.

 

꿀벌 왕자로 불리우던 가자마 진. 꿀벌의 날갯짓에서도 음악을 듣던 그는 요시가에 콩쿠르에, 그리고 클래식 음악계에 호프만의 표현처럼 '기프트'이자 '재앙'이었습니다. 가자미 진의 음악은 결국 천둥이 되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그들을 각성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호프만이 진에게 당부했던 것처럼 결국 그는 음악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게 됩니다. 꿀벌과 천둥에서도 음악을 찾아내는 것. 결국 음악은 자연으로부터 왔다는 것. 그렇기에 음악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 따라서 음악은 감동이라는 것. 이 작품을 통해 진하게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꿀벌 과 천둥.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하고픈 명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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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람을 죽여라
페데리코 아사트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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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라는 한 남자가 자기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려 합니다. 아내와 딸 둘은 처가에 가 있는 상태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 그의 끔찍한 몰골을 딸들이 보지 않도록 대비도 완벽하게 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립니다. 테드는 무시합니다. 그런데 집요하게 두드리는 문소리. 어쩔 수 없이 테드는 반갑지 않은 방문자를 내쫓으려 응대하지만 그 방문자는 말합니다. "당신이 서재에 놓아둔 9밀리미터 권총으로 뭘 하려던 중인지 다 알아요. 한 가지 약속하죠. 그 일을 말리지는 않을게요." 결국 테드는 그를 집으로 들이게 되고 그는 테드에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합니다. 자살하지 말라고, 그들이 테드를 죽여줄 거라고, 대신 테드도 누군가를 죽여 달라고, 그들은 죽어 마땅한 인물들이라고, 이왕 스러질 목숨 죽기 전에 정의 구현을 하라고, 그러고 나면 그들 시스템에 의하여 테드도 죽여주겠노라고, 그러는 것이 남겨질 아내와 딸들에게도 덜 상처가 되지 않겠냐고. 이런 제안엔 테드만 솔깃한 게 아니었습니다. 독자인 저 역시 솔깃했거든요. 이런 상황 설정을 가진 작품이 그리 희귀한 편은 아니지만 소설로써는 처음 읽는 거였거든요. 그렇게 신나게(내용이 신난 것은 아니었음을 밝힘) 1부를 읽어나갔는데.......

 

허허 이것 참, 1부 끝에서 일단 뒤통수를 호되게 맞습니다. 그렇게 전환을 맞은 2부 이야기는, 분명 1부에서 뒤통수를 맞았대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1부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다시 일어납니다. 테드는 자살을 하려던 참이고 반갑지 않은 방문자가 찾아와 자살을 방해하고, 테드에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하고...... 그런데 어이없는 건 분명 똑같은 패턴으로 이야기가 흘러감에도 1부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사건이 전개되어 간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헛소리냐고요? 어허허 이것 참, 뭐 어떻게 줄거리로 설명도 못하겠네요. 하다보면 스포일러가 대방출 될 테니까요. 게다가 이런 반전이 아주 끊임 없이 등장을 합니다. 책 띠지에 떡 하니 박혀 있던 미쓰다 신조의 추천사 "독자의 모든 예상을 가차없이 배신 하는 소설!" 네, 미쓰다 신조의 그 표현은 아주 정확했습니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그 반전을 맞혀 보는 재미에 집중하며 독서를 하는 저는 몇몇 반전을 예측해 보았는데, 아 맞혔다! 하는 순간 바로 이어 가차없이 뒤통수를 얻어 맞거든요. 

 

그렇게 작품을 읽어갈수록 테드라는 남자는 제 정신을 쏙 빼놓고 말았습니다. 솔직히 소설 초반의 설정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지라, 이를 제대로 엎어버리는 2부부터는 사실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이어지는 3부에서의 급격한 배경 변화 덕에 테드와 함께 제 정신은 안드로메다를 헤매느라 영혼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었달까요. 그런데 기억인지 망상인지 현실인지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 모를 테드의 기억의 편린들이 맞춰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어느새 저 역시 책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독서 탄력이 붙어 버린 거죠. 저녁을 먹고 시작한 작품의 후반부에 앉은 자리에서 내리 결말을 봐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시간까지 설거지, 청소 다 미뤄놨는데 큰일났네요.)

 

밝혀지는 사건의 전말에, 맞춰지는 테드의 기억들에 테드가 한없이 가여워졌습니다. 테드가 그 오랜 세월 짊어지고 살아야했던 견기디 힘든 진실. 그런 과거를 지닌 사람이 건강하고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비정상적이었을 터. 테드가 어찌나 가엽고 또 가엽던지요. 작품 말미에 한 여자분이 "나 테드와 사랑에 빠졌어요, 조금"이라고 외치는데 이건 마치 제가 외치는 말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하는 주머니쥐. 이야기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다시 찾아온 멘붕. 하지만 이어지는 페이지는 작가의 말. 허허 이것 참,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독자들에게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소설이라더니 진짜였군요! 작가가 마련해 놓은, 애초에 출구가 없는 미로속을 미련하게 출구를 찾아 나가겠다며 계속 헤매는 기분입니다. 에잇! 이 야밤에 미뤄든 설거지나 해야겠네요. 에잇! 에잇! 에잇!

 

 

<3문장 요약>

재미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누구든 같이 읽고 저랑 이야기 좀 나눠 보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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