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뜨겁게
배지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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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불안감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일곱 살 때였다고 말하는 스물아홉의 제이. 그녀는 문학을 전공했고, 학원에서 국어 강사를 하다가, 지금은 잡지사의 비정규직 기자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일곱살 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밝혔듯, 그녀는 인생 전반에 많은 굴곡을 겪었고, 현재도 겪으면 살아가고 있지요. 그녀가 겪었던 특히 큰 굴곡은 아무래도 남자친구와의 이별과 아빠와의 이별이었습니다. 


  선배가 개업한 학원에서 선배에게 이용당하면서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동료 강사들에겐 원장의 친구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던 제이에게 다가와줬던 그녀의 남자친구는 후에 본인이 원하던 대로 건축회사에 취업하게 되고 바빠진 생활덕에 제이와의 사이는 조금 데면데면하게 됩니다. 그런 관계 개선을 위해 떠났던 겨울 산행에서 그녀의 남자친구는 갑자기 사라지고 맙니다.


  제이의 아버지는 성실한 시계 수리공이었습니다. 아이엠에프와 시대의 흐름을 타고 결국 일하던 백화점에서 퇴직을 당한 아버지는 부당해고에 대해 시위를 하다가 쓰러집니다. 병명은 폐암이었고, 수술 하루를 앞두고 사라집니다.


  남자친구와의 이별도, 아버지와 이별에서 제이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 상처가 무서워서 제대로 이별도, 이젠 사랑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심지어 이명까지 생겨 난청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그녀가 취재를 하게 되는 인물은 배명호라는 외계인을 쫓는 사람. 그는 실종된 사람을 찾아준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었지요. 제이는 그를 설계자로 부르며 자신이 기자임을 숨기며 그와 접촉합니다. 그러다 그녀의 남자친구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설계자와 함께 설계자의 아내와 제이의 아버지를 납치한 외계인에 대한 단서를 쫓게 됩니다.


  이별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외계인을 쫓는다니 이 무슨 뜬금 없는 전개인가 싶죠?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랩틸리언이니 외계인이니 유에프오니 하는 소재들이 마구 등장을 하는데, 처음에 실소를 뿜다가 어느새 제이처럼 저도 설계자의 말에 몰입을 하게 되더라고요. 설계자의 아내는, 제이의 아버지는 진짜 외계인에게 납치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좀처럼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만들어낸 망상인 것일까... 마지막 책장을 덮고난 지금에도 저는 사실 어느쪽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버지와 뜨겁게 이별할 기회조차 빼앗겼었던 점에 대해서 안타까웠을 뿐.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이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SF의 요소에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등의 추리소설적인 요소 또한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흥미롭게 잘 읽힙니다. 게다가 제이나 설계자 뿐 아닌 주변 인물들의 입체감도 참 좋았습니다. 인생을 즐기며 살 줄 아는 제이의 엄마도, 바람둥이인 주제에 진정한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마는 제이의 오빠도, 성인용품 가게를 하며 ㅅㅅ돌에게 순수한 애정을 보이는 미스터 리도, 보수 꼴통 사장도, 좀 재수없지만 어쩐지 친근한 보람 언니도. 다들 나 같고, 내 친구 같고, 내 부모 같고, 내 동료 같고, 내 이웃 같아서 나중엔 정이 들더라고요.


 올 봄에 작은 아버지의 암 투병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임종까지 지켰던지라 책을 읽으며 작은 아버지가 생각나 또 문득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더랬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으레 이별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어떤 것이니 쿨하게 이별하는 게 좋다고들 하지만, 세상에 쿨한 이별이 어디 있을까요? 충분히 뜨겁게 슬퍼하고, 아파해야 방공호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닐른지.... 시크한듯 감성 충만하고 슬픈듯 유쾌했던, 하지만 그 끝맛은 따뜻했던 멋진 소설이었습니다.




『 271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다 잠시 방공호에 몸을 숨길 수 있는 건 행운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곳에서 숨을 돌리는 건 절대 비겁한 것도 아니고, 현실 도피도 아니다. 살기 위해서 숨어든 거니까. 다디단 숨을 쉬려고 숨어든 거니까. 그러나 방공호에서 마침내 나올 수 있다면 그건 더 큰 인생의 행운이겠지. 그래서 삶이 조마조마하고 불안하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닐까. 


『  299 작가의 말 中 그래서 난 J에게 말하고 싶다. 견디지 말고 조금 더 빨리 포기하라고, 열정이 없다고 꿈이 없다고 노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하지 말라고. 힘껏 지고 실컷 웃기를, 경쟁에서 지고 낙오된다고 해서 그 인생이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 싶다. 그리고 세상의 교훈이나 조언을 제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기를, 실은 이런 나의 말도 부디 흘려듣기를. 그리하여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세상의 모든 J에게 뜨겁게 안녕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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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온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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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물론 아이도 없습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맘고생을 하다 결국 불임치료를 받고 결국 임신에 성공해 출산하여 육아를 하는 과정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봐왔습니다. 아이를 가지고 싶은데 생기지 않을 때 그 친구가 어떤 마음이었을까... 솔직히 미혼인 제가 그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요즘엔 자연임신(?) 만큼이나 시험관 아기들도 많으니까 으레 그러리라, 그리고 어쩌면 다른 부부들에 비해 짧은 기간에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었죠. 제 3자인 제가 보기엔 짧은 과정이었을지 모르지만 아마 그 부부에겐 정말 힘겨운 시간이었을 텐데...하는 생각을 <아침이 온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이제서야 하게 되었네요. 


<아침이 온다>의 주인공인 사토코 부부는 딱히 아이를 빨리 가져야 한다는 생각도, 그렇다고 아이 없이 부부끼리만 즐겁게 생활하자는 생각도 없었습니다만, 부모님들이 으레 그렇듯 친정 엄마가 닥달을 합니다. 자연 임신이 가능한 시기는 서른 넷에 이미 끝났다고, 더 늦기 전에 아이를 가져야한다고. 아아, 서른 넷에 이미 끝났다니... 어쩐지 사토코 친정 엄마의 그 말은 단순히 아이를 가지기 힘들다는 뜻을 넘어서 인생이 끝났다는 말처럼도 들렸습니다. 독자인 제가 그랬으니 사토코 입장에선 아마 더더욱 그랬겠지요. 그래서 이제 아이를 가져봐야겠다...하고 생각한 사토코 부부... 하지만 좀처럼 아이는 그들에게 찾아와 주지 않았습니다. 사토코는 산부인과에서 이제 불임 치료를 받게 되는데... 그 과정이 정말이지 냉정하리만큼 상세히 묘사가 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느끼는 사토코의 심정 역시도. 그래서 비혼족인 주제에 사토코에 한없이 감정이입을 해버리게 되더군요. 츠지무라 미즈키라는 작가가 여성 심리를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를 이토록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튼 아이는 좀처럼 찾아와 주지 않고, 산부인과에서는 결국 남편도 함께 진찰 및 치료를 받길 권하게 되고 결국 이들 부부의 난임 원인은 사토코 남편의 무정자증으로 밝혀집니다. 이제 사토코 남편의 힘겨운 난임치료 과정이 그려지지요. 제가 또 남자는 아니지만 여자들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여자들보다도 더 남자들이 난임치료를 힘들어 한다던데... 그 힘겨운 과정이 또한 정말이지 상세하게 묘사가 됩니다. 결국 난임 치료를 포기하고 서로의 손을 마주 잡는 장면에선 독자인 제가 다 눈물이 핑 돌더군요. 츠지무라 미즈키는 여성 심리 뿐 아니라 남성 심리 역시도, 그러니까 결국엔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아주 탁월한 작가구나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난임 치료를 포기한 사토코 부부는 이제 입양을 결심하게 됩니다. 베이비배턴을 통해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엄마들이 아이를 낳는 즉시 입양하기로 하지요. 그리고 전 또 한번 놀랐습니다. 이 입양의 과정에서 가질 수 있는 일들, 양부모의 심리들이 또한 매우 상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거든요. 아무튼 히카리라는 중학생 소녀가 낳은 남자 아이를 입양하게 된 사토코 부부는 원래는 아이의 친모를 만나서는 안 되지만 입양하는 그날 아이의 생모인 히카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 후로 6년이 흘러 사토코 부부에게 공개 입양된(이 점도 놀라운 점 중 하나였습니다. 입양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달까요.) 아들 아사토는 이제 여섯살이 되어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습니다. ㄱ,레사 작품 초반에 잠깐 아이를 양육하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면서 가질 수 있는 엄마로서의 갈등부분도 등장을 하는데... 이 역시 아이도 없는 미혼 주제에 어찌나 공감이 가든지요. 거듭거듭 작가의 필력이 놀랍기만 합니다.  아무튼 그러던 어느날 자신이 아사토의 친모라며 한 여인이 사토코 부부 앞에 등장합니다. 아이를 돌려달라고, 아니면 돈을 달라고... 하지만 사토코 부부는 그녀가 아이의 생모인 하키리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아이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그녀가 아이의 나이를 헷갈려 할 기가 없다고... 그리고 외모 또한 그들이 보았던 히카리가 아니라고.... 과연 그녀는 누구였을까요???


그리고 이야기는 이제 아사토의 생모인 히카리의 관점으로 전환되어 전개가 됩니다. 히카리는 중2 한창 사춘기였고, 부모는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는 교사 부부, 언니는 모범생입니다. 한창 민감한 나이일 히카리가 얼마나 답답하고 숨이 막혔을지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그녀는 일탈(그녀의 행동을 이렇게 부르는 것 자체가 저 또한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증거일지 모르겠지만)을 합니다. 부모가 알면 기함할 만한, 모범생인 언니는 결코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그것은 다름아닌 연애... 그리고 남자친구와의 잠자리... 월경을 시작하기도 전에 첫경험을 하게 되는 히카리는 결국 월경을 경험하기 전에 임신을 먼저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지식한 부모가 이 상황을 그냥 둘 리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비밀리에 아이를 낳아 입양을 하도록 결정을 하게 되지요. 그렇게 무사히(?) 출산을 한 히카리는 아이를 입양 보내고... 그때부터 히카리의 삶은 긴긴 터널 속을,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과정을 지켜보며 솔직히 너무 답답하고 힘들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렇다할 사춘기를 겪지 않고 무난하게 그 시기를 견뎌서였을까요.. 아니면 이제 나이가 너무 들어 버려 오롯한 '어른'의 입장에 섰기 때문일까요... 히카리의 계속되는 행보들이 한편으론 안타까웠지만 솔직히 그보다는 너무나 답답하고 한심하기까지 했습니다. 히카리와 함께 긴긴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으니까요. 아아, 쓰고 보니 이 또한 작가의 심리 묘사 능력이 탁월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끝없는 어둠을 헤매고 또 헤매는 히카리... 이제 결말이 불안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결국......!!!


사토코 부부의 긴긴 터널, 히카리의 칠흙같이 어두운 삶.... 그 과정을 정말이지 섬세하게 묘사해 놓는 작가....하지만 작품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결국 그들에겐 아침이 옵니다. 다행히도 말이죠. 옮긴이의 말 중에 보면 히카리는 빛이라는 뜻이고 아사토의 아사는 아침이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라는데.... 작품 제목과 인물들의 작명 센스 또한 멋지네요. 인물들의 탁월한 심리 묘사, 난임과 입양 등의 사회적인 소재... 그리고 희망적이고 따뜻한 결말... 삼박자가 조화로이 어우러진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이 전 처음이었는데 앞으로 다른 작품도 더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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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4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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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속도보다, 쌓는 속도가 더 빠른 저 같은 장서가한테는 난감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차곡차곡 쌓아둔 시리즈의 새 작품이 나올 때, 쌓아둔 책을 채 읽지도 못했는데 개정판이 나올 때. 최근 이 두 가지 난감한 순간을 저는 동시에 경험했습니다. 추리 스릴러 깨나 읽는 사람들은 읽었거나, 읽지 않았거나 알고는 있다는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저도 내내 이 책을 가지고 싶어(물론 읽고도 싶고; ㅋㅋ) 장바구니에 넣어 두고 결제 할까 말까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시리즈는 총 3부에 책이 6권이나 되는 관계로 섣불리 결제를 하진 못하고 말이죠. 그러다 도정제가 시행된다는 소식이 있었고, 저는 결국 도정제가 시행되기 바로 하루 전에 이 시리즈를 사들이게 됩니다. 책장 가장 위칸에 예쁘게 모셔두고 언젠가 읽고 말테얏...하는 마음으로 구경만 열심히 했더랬지요.(김영하 작가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을 책을 고르는 거라고... ㅋㅋ;) 


작가가 안타깝게도 요절을 한 터라 10부까지 기획했던 시리즈가 3부에서 멈춰졌고, 4부가 이어질 거란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다른 작가가 시리즈의 세계관을 고대로 이어 4부를 출간할 줄이야.... 그에 맞춰 1~3부가 근사한 양장 합본으로 개정판이 나올 줄이야!!! 장서가로서 가장 난감한 순간 두 가지를 동시에 맞닥뜨리고 만 것이었죠. 그리고 저는 패기도 좋게 4부부터 시리즈에 덤벼들었습니다. 순서에 집착하는 주제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태가 아닐 수가 없죠. 하지만 결과부터 말씀드린다면 4부부터 시작한 제 궁둥이를 지금은 셀프로 팡팡 해주고 싶네요.


원래 저는 리뷰를 쓸 때 줄거리 요약은 잘 안 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특히나 줄거리 요약은 엄두도 못 낼 것 같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만도 수십명에 그 수많은 인물들의 다중적인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그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단 며칠 동안 일어난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반엔 인물 파악하기도 힘들고, 낯선 스웨덴 인명이나 지명들 덕에 혼란의 혼란을 거듭하며 진도가 좀체 빠지지 않기도 했지만 여러 인물들의 입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기에 그 긴박감이나 긴장감 만큼은 압권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 사건이 결국엔 하나로 모아지는 그 구조는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플롯이기도 해서 거미줄에 걸린 곤충이 발버둥을 칠수록 거미줄에 옭아매지듯 저도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소설은 수많은 인물들의 다중적인 관점으로 전개가 됩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두 축을 이루는 인물은 시리즈 전반을 아우르는 주인공인 리스베트와 미카엘이지요. 제가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캐릭터의 매력도인데 이 작품 속 캐릭터들 점수는 제 기준으론 만점에 가깝습니다. 특히 저는 미카엘 보다는 리스베트쪽이 말이죠. 저는 늘 천재를 동경하고 괴짜 천재들이 등장하는 소설들에 환호하는데 리스베트 그녀는 딱 그런 캐릭터였거든요. 천재 해커인 그녀가 해킹을 통해 사건에 접근해 가는 방식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때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수학 용어나 컴퓨터 용어들이 무수히도 튀어나왔지만, 오히려 그런 것들 덕에 그녀에게 경외감이 생겼달까요. 게다가 그녀가 악당(?)들을 응징하는 장면들은 어찌나 사이다던지. 이 시대의 가장 독특하고 개성강한 히어로가 아닐까 싶네요. 특히 리스베트가 아우구스트와 독특한 방식으로 교감하는 장면들은 감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자폐아인 아우구스트가 리스베트에게 "가지마."라고 말하는 장면에선 눈물까지 핑 돌았다구요!



시리즈의 새로운 막을 여는 작품이자, 하나의 완벽하 독립성을 가지는 작품이며, 시리즈 전반을 아우르는 정중앙에 위치한 <거미줄에 걸린 소녀>. 1~3부는 아마 리스베트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그려졌었던 모양이던데, 4부부터는 리스베트의 쌍둥이 동생인 카밀라가 등장을 하고 리스베트와 대립각을 세우는 구도. 그러면서 또 시리즈 전부가 이어지는 구조. 솔직히 책을 읽다 보니 시리즈를 처음부터 읽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싶은 점들도 분명 많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서는  4부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 작품 안에서 그려지는 사건 자체도 굉장히 흥미로웠지만 아직 읽지 못한 1~3부의 이야기들이 조금씩 언급될 때마다 그 작품들이 미치도록 궁금해졌거든요. 그와 동시에 4부부터는 큰 틀의 이야기가 새롭게 전개되기 때문에 다음 이야기 또한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거미줄에 걸린 소녀>인데 이는 분명 주인공인 리스베트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독자인 저를 표현하기에도 적절하다 싶습니다. 새로운 작가가 뛰어들어(?) 총 6부까지 기획되어 있다는 이 시리즈의 중간에 위치한 이 작품을 읽는 제가 마치 거미줄의 정중앙에 걸려든 독자 같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내내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하더니 작품 가장 마지막에 독자에게 던지는 지극히 낭만적인 마지막 문장. '밤 하늘에선 별 하나가 떨어져내렸다.' 이야기가 끝난 것을 암시하면서 또 다시 시작될 것임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고 여태껏 애면글면 이야기를 읽어온 독자들에게 긴장감 해소와 함께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 매력적인 한 문장에 전 그만 또 한 번 작가한테 반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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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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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70 그래서 이젠 편안해지고 싶은 것뿐이에요. 꿈 같은 거, 하고 싶은 거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남한테 치이지나 말고 하루하루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치열하게 살라는 말. 치열한 거 지겨워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치열했는데도 이 나이가 되도록 이래요.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 』

 

자신이 보통 사람임을 믿어 달라고 강조하는 코가 큰 남자가 대통령이던 1988년, 김추봉이 될 뻔했던 김지혜 씨가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올해로 딱 서른이 되었죠. 88만원 세대인 그녀는 서른이 되었지만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반지하에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나름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지런히, 열심히,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어째 그녀에게 세상은 팍팍하기만 합니다. 그런 그녀 앞에 규옥이라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그는 그녀가 비정규직으로 몸 담고 있는 디아망 아카데미에, 그녀와 똑같이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저 '보통'만 되도 좋겠다며 아등바등 사는 지혜와 다르게 규옥이라는 인물은 보통을 넘어서는, 상당히 진취적이며 개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주도로 지혜를 비롯한, 무인, 남은, 네 사람은 작당모의를 하게 되고, 그들에게 갑질하던 모종의 세력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게 됩니다. 그 과정이 상당히 경쾌하게, 유쾌하게, 하지만 깊이 있게 그려지는 소설입니다.

 

『 p.69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죠. 내가 말하는 전복은 그런 겁니다. 내가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 그런 가치의 전복요.』

『 p.86 놀아보고 싶어요. 세상은 경직되어 있고 모두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죠. 난 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치기 어리다고 욕 들어도 좋으니 적어도 반항을 해보고 싶다고요. 역사가 말해줬듯 급진적인 혁명은 실패할 겁니다. 세상은 점점 팍팍하고 딱딱해지고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움직임은 통제되거나 검열되니까요. 난 통제나 검열이 불가능한 일들을 해보고 싶은 겁니다. 재미있게, 놀이처럼 말이죠.』

 

사실 지혜라는 인물보다 저는 나이가 다소 많지만 그녀가 태어나면서 여태까지의 인생 속에서 겪는 여러가지 일들이 저와 너무나 비슷해 지혜라는 인물에 한없이 몰입하며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저 역시 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고, 세상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 작은**이라고 불렸고, 가장 중요한 건 저 역시 지혜 못지 않게 '보통 사람'을 꿈꾼다는 거였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 거 같은데 늘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아니 오히려 자꾸만 퇴행하고만 있는 것 같은 패배감, 그저 튀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살고 싶어하는 소시민적 소망, 불합리가 판을 친다고 말은 하지만 섣불리 대항하지거나 행동하지는 못하는 용기 부족 등. 그런 그녀를 각성시키는 인물은 바로 규옥이었습니다. 규옥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뭐라도 행동을 해야 하는 거라고, 뭔가 세상에 반격을 가해야 한다고, 그걸 놀이처럼 한번 즐겨 보자고. 이런 규옥이라는 캐릭터에게 저는 상당히 모순적인 감정을 품었습니다. 뭐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그에 대한 경외와 함께, 하지만 그것은 결국 그가 보통 이상의 사람이기에 이상을 꿈꿀 수 있는 거 아니겠느냔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지혜 역시 그랬는지 그녀는 규옥을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패배의식이자 피해의식인 거겠지요. 사실 이 세상은 규옥처럼 '변화'를 위해 크고작게 노력하는 사람들 덕에 약진하며 지금이 되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규옥은 결국 결말에서 그 역시도 각성하여 피상적인 '이상'을 넘어 구체적인 '현실'에까지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혜 역시 한발짝 더 나아가지요. 그리고 지혜는 깨닫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도 되어 보겠다고 그토록 아등바등했던 그녀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사실 알고 보면 처음부터 다들 특별한 존재였다고.

 

『 p.233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륙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

 

<아몬드>라는 전작에서는 현대인들의 공감 불능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이번 작품에서 다루는 사회 의식은 더욱 다채롭습니다. 드문드문 정치나 역사 의식도 담겨 있고, 세대 간의 갈등, 계층의 갈등, 대기업의 횡포, 갑질 논란 등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이 모든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또 그리 산만하지 않게, 내용 전개 과정 중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 가독성마저도 좋습니다. <아몬드>라는 작품에서도 느꼈지만 작가의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필력은 새삼 놀랍습니다. 분명 작가가 작품 속에서 다루는 세상은 무언가 불합리하고, 인물들이 겪는 일들도 내내 속상하고 억울하기만 한데, 어쩐지 작품은 경쾌하게 술술 읽힙니다. 심사평에서 이 작품을 '미쁘다'라고 평가했는데 이 작품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서술어인 것 같습니다.

 

p.128 언젠가 그런 얘기를 아빠한테 했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겪어보지 않고 쉽게 말하지 말라는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아빠 세대와 우리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은 그런 건지도 모른다. 각자의 세대가 더 힘들다고 주장하고 그에 비해 상대의 세대를 쉽게 얘기하며 평생선을 달린다. 그런 걸 보면 삶을 관통하는 각박함과 고단함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인가보다. 』

 

제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세상 살이 너만 힘든 건 아니야, 인생은 누구나 다 고달프단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또 '그런데 세상은 말이야, 또 그렇게 팍팍하지만은 않아. 네가 있고 내가 있어 우리가 되어 살다보면 인생은 꽤 즐거운 거란다.'라는 위로를 받고 싶어서입니다. 손원평 작가의 작품들은(이제 겨우 두 작품을 냈지만) 이런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어 좋습니다. 그래서 전 이미 그녀의 팬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벌써 다음 작품이 기대가 되고 기다려지는 것을 보면요.

『 p.180 그래도 위로가 될 사실이 있지요. 우리는 모두 보잘것없다는 것. 정말로, 하찮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죠. 특별한 척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누구나 아등바등 살아가요. 어떻게든, 그저 존재를 확인받으려고 발버둥치면서. 』

『 p.180 아마 그 고민은 죽을 때까지 하게 될 거예요. 백 살이 될 때까지 같은 생각할걸요. 외롭다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으냐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괴롭고 끔찍하죠. 그런데 더 끔찍한 거는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질문을 외면하죠. 마주하면 괴로운 데다 답도 없고, 의심하고 탐구하는 과정만 있으니까. 산다는 건 결국 존재를 의심하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에요.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고통스러운지 알아가는 과정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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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같은 말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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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단편 소설집을 읽는 것을 좀 어려워 합니다. 분량은 장편 소설의 그것보다 훨씬 적음에도 어쩐지 품은 훨씬 더 드는 것 같다고 느끼거든요. 단편 소설 특유의 넘치는 은유와 상징으로 인한 난해함에, 단편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몇몇 소재들에 대한 불편함까지. 그래서 <그 개와 같은 말>이라는 책을 받아들고 솔직히 한숨을 그렇게 내쉬었더랬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 소설집도 많이 어렵고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제가 갖고 있는 단편 소설집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난해함과 불편함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어렵고 불편했다고 해야 맞겠습니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선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선한 행동에 어떤 불손한 의도가 있다면 이를 선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고 그렇기에 결국은 자기만족이 아닌가. 등의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아니 저 스스로 하게 하는 작품이었거든요.

 

특히 <고두>라는 작품은 좀 특별한 의미로 충격적이었다고까지 하겠습니다. 아이들에게 도덕과 윤리의 가치에 대해서 가르치는 윤리 교사인 서술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끊임없이 말합니다.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고. 제자 중 하나는 이런 그의 말에 반박하며 자기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도 누군가를 도왔다면 이는 순수한 선의지가 아니겠느냐고 하지만, 그는 이런 행동 또한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함이고 순수한 선의지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자기 만족에 가까운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궤변에 가까운 그의 말들에 저는 어쩐지 수긍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그의 제자처럼 반박해 보려 했으나, 생각해 보면 생각할수록 그의 논리가 어쩌면 불편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리에 가까운 건 아닐까 싶어서 내내 불편하고 씁쓸했습니다.

 

또 이와 비슷하게 불편했던 명제가 여러 작품 속에 드러나기도 합니다. "나는 혹시 남의 불행을 보며 안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무슨 '개와 같은' 말이냐고요?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아마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지하철역에서 홈리스를 만났을 때나, 몸이 불편해 구걸 비슷한 걸 하러 기다시피 다니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때... 그들을 보며 저도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야... 라고 생각했던 적이 분명 있거든요. 텔레비전 뉴스에서 큰 사고나 재난을 겪는 이들을 보며 그들을 안타까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내가 저 일을 겪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솔직히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분명히 존재하나 결코 꺼내어 드러내놓고 생각하며 인지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들에 관한 의문들이, 인물들의 대화속에 아무렇지 않은듯 툭툭 튀어나옵니다. 분명 10개의 단편이 모인 단편집인데 묘하게 작품 전부에 이런 비슷한 명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산란하게 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전 그냥 저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남을 의식했건, 자기 만족에서건 선한 행동은 선한 행동 그 자체로서 그냥 좋은 거 아닐까요? 어차피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고 남을 돕는 어떤 사소한 행동들 하나하나에도 어떤 불손한 의도가 모두 담겨 있는 것이므로 이 세상에 오롯이 순수하게 착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기엔 너무 슬프잖아요. 이런거 저런거 따지지 않고 남의 어려움이 보이면 그냥 돕는다...그게 바로 선한 거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살래요...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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