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당신의 추천 영화는?

지금까지 괴델을 브라우어와 같은 직관주의자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위의 책을 보고 그것이 그에 대한 오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그는 플라톤과 같은  "관념론적 실재론"자라는 것이다. 후기의 후설처럼..

플라톤적인 이데아를 수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한 학자라는 것.

이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수리철학책도 들춰봐야 하는건가?

러셀의 <수학의 원리>같은 수리철학책은 왠만하면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ㅜ.ㅜ 

봐도 얼마나 이해할수 있을런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수리철학계의 계보를 정리해 보자.

먼저 논리주의

논리주의는 러셀에 의해서 칸토어의 집합론 속에 역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서 수학을 전통적 철학에서의 논리학의 한 분과로 인식하려는 관점이다. 이에 따라 수학의 기초를 기호논리의 형식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원래 논리주의는 19세기의 심리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한비판으로 고틀롭 프레게가 <개념서술>,<산술의 기초>등과 같은 저서를 통해서 발전시킨 분야이다.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학문의 기초로서 수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그는 경험이나 직관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논리의 용어만으로 수들을 정의하려 하였다. "산술명제가 순수 논리법칙만으로 증명가능한 논리체계"라는 것을 제시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프레게의 작업은 처음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러셀에 의해서 그의  공리체계에 모순이 있음이 알려지게 됨으로써 비로소 되늦게 조명받게 된다. 그 모순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이른바 "러셀의 역설"로 알고 있는 것이다.

러셀의 역설에 대해서 잠시 살펴 보자.

다음 2종류의 집합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1종집합: 자기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는 집합

2종집합: 자기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집합

이 때 "2종집합 전체"로된 집합을 R이라 할때, R은 1종인가? 2종인가?

 가정1: 만일 R이 1종이면 R은 스스로가 원소인 집합이다. 그런데 R은 2종인 집합이다. 따라서 R을 1종이라고 가정하면 2종집합이라는 전제에 모순이 발생한다.

가정2: R이 2종이면 R은 스스로 원소는 아니다. 그런데 앞에서 R은 "2종집합 전체"라고 했기 때문에 R은 전체 집합 R의 원소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것도 모순.

결론: R은 1종도 2종도 아니다.

집합론에서 발견된 이러한 러셀의 역설은 당시 수학계에 큰 파장을 미치게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후에 논리주의와 형식주의 그리고  직관주의로 나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한편, 힐베르트에 의해서 최초로 체계화된 형식주의는 러셀의 논리주의와는 달리 논리법칙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대신 수학적 공리계를 “형식화”한다. 다시 말해 수학적 공리나 정리를 수학적 기호만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 체계를 “힐베르트의 프로그램”이라고 부르는데 이 체계 안에서는 형식적 체계에 의해 표현된 수학적 대상은 일단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이러한 형식적 체계와는 달리 그 체계의 ‘증명’은 하나의 ‘기호열’이 됨으로써 그자체 수학적 대상으로 전화하고 그것에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이 때의 수학을 일명 “초수학” 혹은 “메타수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의 주요한 목표가 바로 형식적 체계의 “무모순성의 증명”이었던 것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형식화되지 않은 비형식적 수학이 있고 그 다음에 이를 체계화/형식화한 형식적 수학, 그리고 다시 그것을 증명하는 초수학 이렇게 3단계의 수학이 존재한다는 것. 형식적 수학은 비형식적 수학을 체계화함으로써 얻어지고 또 이 형식적 수학의 기초는 초수학이라는 메타적 방법으로 그 무모순성이 증명되는 구조를 이루게 된다. 


다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이와같은 체계의 증명라는 것은 무한번의 과정을 반복함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횟수의 조작을 통해서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식적 체계의 조작과정을 무한번 반복하게 되면 결국에 가서는 영원히 그 체계의 정당성은 증명될수없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을 소위 “유한의 입장”이라고 하는데 이는 직관주의의 형식주의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형식주의진영 내에서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흔히 수학의 토대를 무너뜨린 것으로 평가되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도 사실은 이러한 힐베르트의 형식주의를 철저하게 실행시킨 결과 탄생한 것이다. ‘산술의 무모순성’을 증명하기 위한 수학의 형식화가 거꾸로 자신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맞게 된 것. 이처럼 형식주의는 어떻게 보면 자체 내에 모순을 가지고 태어난 유토피아적 기획이긴 하였으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거꾸로 이 공리계의 형식화라는 야심찬 목표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이루려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셈은 아닐까? 더불어 형식주의는 이러한 공리계의 형식적 조작을 통해 아직도 유의미한 수학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공리적 집합론으로 불리우는 ZF집합론이 그 한 예이다. 

이러한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브라우어(L.E.J. Brouwer)에 의해 직관주의라고 명명된 입장이다. 직관주의는 수학적 대상이 실체적으로 인간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 혹은 의식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지식으로 간주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수학적 대상의 실체성과 진리의 가능성을 전제로하는 힐베르트의 형식주의에 대한 당대의 가장 강력한 비판이었다.

 

직관주의가 형식주의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논거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배중률이다. 배중률(the law of excluded middle; LEM)이란 가령 명제 A가 성립한다면 그것은 A이거나 아니면 A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성립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논리기호로 표현하면 A v ~A)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동일률과 모순율과 더불어 고전적 형식논리학의 3대 원리 중 하나이다. 수학에서는 이 배중률이 유한집합 내에서만 사용된다면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무한에 적용시켰을 때 발생한다.

가령 원주율인 π를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자. 알다시피 π는 소수점 이하자리의 수가 반복되지 않는 무한대의 십진수로 주어지는 무리수, 더욱 정확히는 초월수이다. 동경대에서는 이 π를 컴퓨터를 이용하여 32억 2천만 자리까지 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독특한 성질, 즉 소수점이하자리의 수가 무한대로 반복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성질로부터 우리는 배중률을 두고 발생한 형식주의와 직관주의간의 입장차를 분명히 확인해 볼 수 있다.

 π는 흔히 3.14로 소수점 둘째자리까지만 사용한다. 그런데 사실 그 소수점이하의 수는...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

이런식으로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그런데 소수점 이하 762자리에서 767자리에 처음으로 9가 연속적으로 6번 등장한다. 「.........134999999837........」이렇게 말이다. (요시나가 요시마사. 괴델 :불완전성 정리. 전파과학사 ,126쪽 참조)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9가 연속적으로 나올수 있는 가능성은  소수점이하 자리의 수가 무한일 때 그 가능성이 완전히 열려있다는 점이다. 가령 9가 연속적으로 100번이 나올수도 1000번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예컨대 동경대 컴퓨터로 계산한 소수점 32억 2천만 자리에는 그런 9의 연속이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다. 또 그리고 그것이 몇번째 자리에서 출현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바로 이 때 배중률이 적용될 수 없다는  문제점이 노출된다. 이 경우 배중률에 의하면 소수점 아래 몇번째 자리수에서 9가 100번 연속될지 알수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A이거나 혹은 A가 아니거나 하는 식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한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 브라우어가 힐베르트의 괴팅겐수학클럽에서 원주율과 관련된 난점을 이야기 했을 때 한 청강자가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고 한다.

"당신은 원주율 π를 10진법으로 표현했을 때 9가 10회 연속해서 나타나는지 아닌지가 우리들로서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마 그것은 알수 없겠지요....그러나 신은 알고 계실겁니다!"

이에 대한 브라우어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공교롭게도 나는 신과 연락하는 방법을 마침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요시나가 요시마사. 괴델 :불완전성 정리. 전파과학사 , 128쪽)

이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브라우어는 수학을 무한의 영역으로 확장했을 때 발생하는 이러한 문제점 그리고 배리법에 의한 증명이 not A는 증명하여도 not not A는 증명할수 없다와 같은 이유 등을 내세워 배중률의 사용을 부정하거나 혹은 그것에 제한이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형식주의는 배중률이 비록 무한집합에 적용되었을 때에는 역설이 발생한다고 하여도 유한집합 내에서는 여전히 배중률이 유효하고 또 그것의 사용으로 인해 수많은 수학적 성과물을 성취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직관주의는 수학적 지식이나 그 대상을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인(objective) 것으로 보지 않고 인간정신의 구성적(constructive) 결과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원주율에서 소수점이하 몇 번째자리에 9가 100번 연속되는지를 인간의 정신으로 구성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몇 번째 자리수에 있는지 알려고 하는 시도는 수학적 연구의 대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위의 일화가 그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다시말하면 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을 우리가 뭐하러 궁금해 해야 하는가라는 입장인 셈.

이런 입장은 사실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의 입장과 유사하다. 논리실증주의도 참, 거짓을 증명할 수 없는 명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기조로 삼는다.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이나 명제 예컨데 철학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담론이나 윤리학등이 그래서 무의미한 논의로 논리실증주의의 입장에서는 간주된다.  논리실증주의는 논리경험주의로도 불리우는데 이 때의  경험은 검증원리를 통해 참과 거짓을 증명할 수 있어야만 그 대상의 유의미성을 논할 수 있는 경험이다. 따라서 논리실증주의에서의 경험은 검증이전의 날것으로서의 가공되지 않은 경험이 아니라 "검증원리" 혹은 포퍼식의 "반증가능성"같은 논리적 잣대를 통해 참, 거짓이 확증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럴 때에만 (가능한) 경험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칼 포퍼(Karl Popper)가 그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의 철학을 "반증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도 결국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논리실증주의자/논리경험주의자들과 포퍼는 검증원리/귀납원리와 반증원리 간의 논쟁으로 그리고 포퍼와 쿤(Thomas Khun)은 반증원리와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혁명" 등으로 또 쿤과 이언 해킹(Ian Hacking)은 공약불가능성과 "실험과학"으로 대립한다. 이러한  논쟁은 여기서 정리해 보고자 하는 수리/수학철학의 범위를 벋어나는 '과학철학'의 영역이다. 이는 다른 기회에 한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이와같이 논리실증주의는 수학에서의 직관주의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특히 그 인식의 구성적 관점만을 승인하고 인식주관 밖에 있는 객관적인 (수학적) 실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브라우어가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직관주의(intuitionism)이라고 명명한 것은 칸트의 철학을 참조한 것인데 이것은 칸트철학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번 페이퍼에서 다룰 것이다. )

반면 괴델은 직관주의가 비판하는 이러한 수학적 실재를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플라톤주의에 가깝다. 비록 형식적으로는 형식주의자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구성적 인식이 불가능한 영역이 실재한다고 보는 플라톤주의의 입장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형식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 이는 수학기초론내에서도 독특한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가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하기 위해 형식주의자의 수학적 방법을 동원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산술의 무모순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형식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오히려 내용적으로는 그것에 대립하는 입장에 서게 된 점에서 말이다. 이는 다분히 이율배반적인 태도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를 가정하는 소박한 플라톤주의라고 하기보다는 "물자체"의 독립적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경계에서 물자체를 간접적으로 인지하는 선험적이면서 초월적인 직관을 논하는 칸트철학과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괴델의 입장을 플라톤주의라고 하기보다는 칸트주의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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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7-10-31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 님, 안녕하세요? yoonta 님의 수학/수학철학에 대한 글들이 매우 흥미롭군요. 깊고 치밀한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 줍니다. 앞으로 계속 좋은 글 기대합니다.

그리고《스탠퍼드 철학백과사전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http://plato.stanford.edu)에 지난 9월 25일 레온 호르스텐(Leon Horsten)이라는 벨기에 학자가「수학철학 Philosophy of Mathematics」항목을 새로 발표했더군요. 혹시 yoonta 님도 아시고 계신지요? yoonta 님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그럼 다음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위 글의 완성본이 기다려지는군요.

yoonta 2007-10-3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서툰 글인데 댓글을 주셨네요.^^;; 저도 되도록 빨리 완성하고픈데 이것저것 참조하다보니 자꾸 늦어지네요. 위에 말씀하신 곳 가봤더니 여러모로 도움이 될만한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qualia님 서재에 종종 눈팅하러 갑니다. 관심있게 보고있었답니다.^^

- 2009-01-20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수학교사를 꿈꾸는 학생이에요~
글 너무너무 잘 읽었어요 +_+
이해가 쏙쏙 되네요!!

특히 직관주의자들이 배중률을 왜 인정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됐었는데
글을 읽고 확실히 이해가 되었어요 ^^

앞으로 좋은 글 부탁드려요

yoonta 2009-01-21 20:20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꼭 수학교사되셔서 저에게 한수 지도해 주시길 ^^

goodantak 2022-12-07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번 기회에 배중률, 무한을 받아들이는 차이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난번 페이퍼에 이어서 『데카르트의 비밀노트』에 나오는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이번에 다룰 내용은 데카르트가 생전에 공개하지 않고 비밀리에 작성한 노트에 과연 어떤 내용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1650년, 데카르트가 스웨덴에 크리스티나 여왕의 개인교사로 건너갔다가 급작스런 독감증상으로(독살설도 존재한다. 그를 치료했던 의사가 위트레흐트논쟁으로 인해 데카르트를 극도로 혐오했던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한다)사망하자, 생전에 그가 기록했던 문서들은 당시 스웨덴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샤뉘를 통해 프랑스의 지인이었던 클로드 클레슬리에에게로 전해진다. 그 과정에서 배가 난파하여 데카르트의 노트를 소실할 뻔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어쨋든 운좋게도 문서를 손에 넣은 클레르슬리에는 데카르트의 노트들을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온갖 알 수 없는 기호와 암호로 가득 차 있어서 도저히 해독할수없는 노트가 있었다. 그것이 문제의 비밀노트였다.



한편 당시 미적분문제로 씨름하고 있던 라이프니츠는 때마침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었고 동시대의 유명한 수학자였던 크리스티앙 호이겐스의 도움을 받아 데카르트의 유고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의 이 미발표 문서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그가 연구하고 있었던 미적분이론과 큰 관련이 있다. 라이프니츠는 1673년 런던으로 건너가 영국 수학계 인사들과 교류를 하였고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일부의 영국학자들은 그의 수학의 업적은 "데카르트로부터의 연역에 불과하다"고 폄하였다고 한다. 또한 "데카르트가 새로운 수학적 방법의 진정한 창시자였고 그의 후계자들의 공헌은 오직 데카르트의 연장이며 상세화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편지를 받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미적분이론과 같은 새로운 수학이론을 고안하고 있던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가 남겼다고 하는 미발표 유고들 속에 혹시라도 자신이 발표하려고하는 수학이론과 비슷한 것이 있지 않았나하는 확인 작업이 꼭 필요하였다. 혹시라도 자신이 미적분 이론을 발표한 이후 데카르트의 유고가 출판되어 자신의 독창적 이론이 의심받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영국수학자들로부터 데카르트의 후계자에 불과하다라는 평가를 듣고 있던 마당에.때 마침 데카르트의 비공개 노트에 대해서 듣게 된 그는 부랴부랴 호이헨스의 소개를 통해서 클레르슬리에가 보관하고 있었던 데카르트의 유고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 때가 1676년 7월이었다.

라이프니츠가 보았던 데카르트의 사라진 "비밀노트"의 제목은 <입체의 요소에 관하여>였다. 노트는 모두 16쪽이었다고 한다. 노트는 도형그림이 한쪽에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고 온갖 상징들과 암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암호해독의 전문가였다. 또한 장미십자회 회원이었으므로 장미십자회 회원들이 사용하는 상징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할 수 있었다. 라이프니츠야 말로 데카르트의 비밀노트를 가장 잘 해독할 수 있는 적임자 였던 것이다. 필사를 하다가 그는 중간에서 멈추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시간도 촉박했을 뿐더러 그 노트의 핵심내용을 이미 간파 했으므로. 대신 그는 짤막한 주석을 남겼다. 그런데 그 주석이 완벽하게 이해되기 까지는 또다시 300년이 걸렸다. 그 주석의 해독은 1987년 프랑스 출신 수학자인 피에르 코스타벨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왜 정다면체에 그렇게 관심이 있었을까? 비밀노트를 작성하면서까지 숨기려고 했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은 총 1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마지막 13권째는 정다면체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플라톤이 중요하게 다루어서 플라톤입체라고도 불리우는데 그 5개의 플라톤 입체는 1. 정사면체, 2. 정육면체, 3.정팔면체, 4, 정십이면체, 5. 정이십면체이다.





정다면체는 각 면이 정삼각형, 정사각형, 정오각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면들이 모두 합동인 입체도형이다. 그런데 이 정다면체의 중요한 특징이 "정다면체가 구에 내접한다"는 사실이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에서는 이것을  여러가지 정리로 증명한다. 정다면체가 구에 내접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정육면체를 구에 넣으면 구에 쏙 들어가고 그 여덟개의 모서리가 모두 구에 내접한다는 것인데 이 성질은 앞서 말한 5개의 정다면체 모두에 해당한다. 이러한 정다면체의 성질은 고대 이집트에서도 알려져 있었고 고대그리스에서도 매우 중요한 성질로 "그리스기하학의 결정판이며 그리스 기하학의 3차원적 확장"이고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정다면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연구하였다. 그가 이처럼 정다면체 속에 숨어있는 성질을 연구하였던 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것처럼 정다면체속에 우주의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정다면체 기하학에 관심을 기울인데에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존재하였던 신비주의사상과  케플러와 같은 천문학자의 영향이 컷던 것으로 보인다.





데카르트보다 먼저 우주의 구조를 연구했던 케플러는 1596년에 발표한『우주구조의 신비 Prodromus Dissertationum Mathematicarum Continens Mysterium Cosmographicum』 라는 책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서술된 지동설을 지지하는 이유를 기하학적 모델을 동원하여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태양계의 행성들은 태양주위를 원의 궤도로 공전하는데 그 공전의 모델을 바로 이 정다면체의 성질을 이용하여 설명하였다. 당시까지 발견되었던 6개의 행성 즉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을 정다면체를 내접, 외접하는 6개의 구와 연관시켜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가 정다면체의 성질을 이용해 우주의 구조를 밝히려 했던 것은 분명 피타고라스와 유클리드 이래로 그리스기하학에 이어져 내려온 기하학을 통해 우주의 비밀을 밝히려고한 시도의 결과였다. 비록 그는 후에 티코 브라헤의 조수로 있으면서  좀더 정밀한 관측을 통해 후대에 케플러의 법칙으로 명명된 3개의 법칙을 발표하면서 태양계 행성의 궤도는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는 했지만 타원 역시 기하학의 원리에 의해서 유도되는 도형이 아닌가.

 



그런데 사실 이러한 케플러의 우주관은 그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는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헤르메스주의와 같은 신비주의사상에 깊은 관심이 있었는데 특히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와 같은 학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쿠사누스는 에른스트 카시러에 의하면 "르네상스 철학을 하나의 체계적인 통일로 파악하려는 모든 고찰은 그 출발점을 쿠사누스에게 두어야 한다."와 같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의 글을  인용해 보자.





"그것이 땅이든 공기든 불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이 우주의 고정된, 움직이지 않는 중심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따라서 중심일 수 없는 지구가 어떤 운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지구가 세계의 중심이 아닌 것처럼, 모든 항성 천구는 세계를 감싸는 둘레가 아니다. (...)이런 사실들로부터 지구가 운동하는 것은 자명해진다." (과학의 탄생. 동아시아, 303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부동의 고정점으로서의 지구를 부정하는 것은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우주관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을 부정하는 것이었다.한편 그는 신의 창조물인 우주 속에는 수에 의해서 표현되는 비례의 법칙이 숨어있다고 이야기한다. 

"수가 없으면 존재하는 것끼리의 다(수)성은 존재할수 없다. 왜냐하면 수가 없어지면 사물의 구별, 질서, 비율, 조화, 나아가 존재하는 것끼리의 다성 자체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이다.(과학의 탄생. 동아시아, 307쪽에서 재인용)    

"신은 세계를 창조할 때 산술학, 기하학, 음악 및 천문학을 동시에 사용했다. 그래서 우리도 모든 사물이나 모든 원소, 모든 운동의 비율적인 관계를 탐구할 때 이들 학술을 사용한다." (지혜로운 무지 De Docta Ignorantia. 과학의 탄생, 동아시아, 308에서 재인용)





이처럼 쿠사누스는 우주의 구조를 해명하기 위해서 지구의 운동가능성과 그속에 숨어있는 비례와 조화의 법칙을 이해하기 위한 수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후대에 코페르니쿠스나 케플러 그리고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와 같은 근대적 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사실 이러한 쿠사누스의 우주관자체도  플로티누스Plotinus의 일자의 철학와 같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글에서는 그와 관련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와같은 당시 유럽에 존재하였던 신비주의적 전통은 케플러와 데카르트에게도 강하게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케플러와 동시대 인물이면서 그를 생전에 만났음이 틀림없고 신비주의 비밀결사였던 장미십자회 소속 학자인 요한 파울바허와 같은 학자와 교류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은 데카르트는 그리스 기하학 중에서도 우주의 비밀스러운 구조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이는 정다면체 기하학의 신비로운 성질에 더욱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의 비밀노트에서 밝혀낸 것은 과연 무엇일까?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비밀노트를 필사하는 도중 수수께끼같은 수열을 보게 된다.

4  6  8  12  20 그리고 4  8  6  20  12     

그는 첫번째 수열의 의미를 금방 파악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정다면체의 면의 수였던 것이다. 즉 4(정사면체), 6(정육면체), 8(정팔면체), 12(정십이면체), 20(정이십면체)를 의미하였던 것. 그리고 두 번째 수열은 각각의 꼭지점의 수와 일치한다. 여기에 모서리의 수를 추가하면 다음과 같은 수열을 얻을 수 있다.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면       4              6               8               12                   20

꼭지점     4               8              6               20                   12

모서리     6               12            12               30                  30

그런데 여기에서 면과 꼭지점의 수를 더한다음 모서리의 개수를 빼면 2가 나온다. 면을 F라 하고 꼭지점을 V 모서리를 E라고 하면

F + V - E = 2

이 공식은 위의 5가지 다면체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정사면체의 경우 4+4-6=2, 정육면체도 6+8-12=2이고 나머지도 모두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질은 후에 위상불변량(topological invariant)라고 불리게 되는 성질을 보여주는 공식이 되는데 데카르트가 발견한 이 공식은 후에 위상수학(topology)라고 불리우는 수학의 분야에서 발견한 최초의 정리로 알려지게 된다.

위상수학은 라이브니츠에 의해서 최초로 그 가능성이 예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679년 호이겐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수학이 양을 다루는데 비해 직접 위치의 기하학(geometra situs)을 다루는 해석의 또 다른 분과가 필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732년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는 그 유명한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문제"를 다루면서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문제같은 것 들이) 아마도 라이프니츠의 위치의 기하학의 문제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그는 위에서 언급한 데카르트의 공식을 발견하여 "다면체 공식"를 발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 정리는 오일러보다 데카르트가 먼저 발견하였던 것이다. 최근에는 그 공식을 피에르코스타벨의 재발견 이후에는 "데카르트-오일러 공식"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데카르트-오일러 공식"이 우주의 비밀을 밝히는 것과는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그것은 위상수학에서의 위상불변량(topological invariant)을 나타내는 공식이다. 그런데 이 위상불변량은 위상적 속성topological property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위상수학에서의 위상동형사상(homeomorphism)과 관련이 있다. 위상동형이란 무엇인가? 다음 글을 확인해 보자.

"오일러의 공식(F+V-E=2)에서 유의할 점은 이것이 꼭지점 모서리 면의 개수에 관한 것일 뿐, 모서리의 길이나 면의 꼴과 면적에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주어진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주어진 면이 곡면이어도 마찬가지 결과를 얻는다. 프왕카레의 관찰에 따르면, 볼록다면체의 표면을 연속적으로 변형하여 구의 표면으로 보아도 역시 공식이 성립한다.(...)두 점집합 A, B에 대하여 1대 1대응 f : A → B가 있어 f 도 연속이고,역으로 역대응도 연속이라 하자. 여기에서 f 와 그것의 역대응(함수)가 연속이라 함은 A에서 서로 가까이 있는 점들은 f 에 의하여 B의 서로 가까운 점들로 변환되고 역으로 B의 서로 가까운 점들은 f 의 역함수에 의하여 A의 가까운 점들로 변환된다는 뜻이다.(...)이와 같은 성질을 만족하는 변환(함수) f 를 위상동형(homeomorphism)이라고 말하며 이 같은 f 에 의해서 불변인 성질을 위상적 성질(topological property)라고 부르는 것이다."(수학의 세계. 박세희. 서울대학교출판부, 171∼2쪽)

다시말하면 함수 f 가 일대일 대응이고 그것의 역함수도 성립하며 또 연속continuity라면 그것에 의해 표현되는 기하학적 속성들은 같은 위상적 성질을 가진다는 이야기이다. 위상수학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흔히들 이런 농담을 한다고 한다. "수학자들은 도우넛과 머그잔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위상수학으로 보았을 때 도우넛의 표면 (토러스 torus)와 머그잔의 표면은 위상동형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구의 표면과 (정)다면체는 위상동형인데 데카르트가 비밀노트에 적었던 내용이 바로 이 구와 다면체의 동형성에 관한 위상불변량공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있는 우주는 어떤 모양일까? 우주의 크기는 유한할까? 무한할까? 다시말해서 우주에는 경계boundary가 있을까? 대부분의 수학자들 특히 위상수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은 우주는 유한하다고 말한다. 우주를 예를 들어 3차원으로 된 정육면체 지도로 우주의 부분들을 표현한다면 유한한 갯수의 지도의 합으로 모두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수학용어로는 컴팩트(compact)하다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우주의 크기는 무한한 것이 아니라 유한하다는 것.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우주의 크기가 유한하다고 해서 우주의 경계boundary가 있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크기는 유한한데 경계가 없다는 말은 무엇일까?

2차원 표면에 그릴 수 있는 둥그런 원반을 생각해 보자. 그것의 경계는 원이다. 원반의 내부는 2차원이지만 경계는 그것보다 한 차원 낮은 1차원의 원인 셈. 우리가 만약 이 원반 내부의 한 지점에서 바깥쪽으로 계속 걸어나가면 결국에는 1차원으로된 원 즉 경계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구면sphere의 경우는 어떨까? 구면은 크기는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다. 예를들어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출발하여 일직선으로 똑바로 계속 나아간다면 어떻게 되는가? 과거에 지구는 둥그렇지 않고 평평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 시절에는 지구의 끝 즉 경계에 다다르게 되면 거대한 낭떠러지나 절벽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사실 지구의 표면은 오늘날 알다시피 구면sphere이다.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은 자기가 출발한 자리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게 된다. 만약 지구에 경계가 있다면 우리는 원이나 직선과 같은 한 차원 낮은 경계와 만나야 하는데 그런 경계는 나오지 않고 자기가 출발한 자리로 되돌아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지구와 같은 구면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 된다.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원반과 같은 도형은 유한하고(compact하고) 경계boundary가 있지만, 지구의 표면과 같은 구면은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학자들은 우주의 모양도 이처럼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는 즉 구면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지구의 밖을 볼수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는 지구밖에 나가서 지구를 볼 수 있기 때문. 우리는 그것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지구 밖에서 우주선이 지구의 모습을 촬영해 오면서 확인 할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우주의 밖으로 나갈수 없다. 아니 우주의 크기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주의 밖으로 나가서 우주의 모양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주의 모양을 가늠해 볼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우주의 모양에 관해서 위상학적 성질topological property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수학의 밀레니엄 문제 중 하나인 푸앵카레의 추측(Poincaré conjecture )은 바로 이 위상수학 그리고 우주의 모양과 관련된 수학문제이다. 푸앵카레의 추측은 위상수학이 이룬 최고의 성과인 동시에 수학의 밀레니엄 문제로서 수많은 수학자들이 이의 증명을 위해 노력을 해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밀폐된 3차원 공간에서 모든 밀폐된 곡선이 수축되어 하나의 점이 될 수 있다면, 이 공간은 반드시 원구로 변형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설명 하나를 인용해 보자.

"만약 사과표면의 둘레에 고무줄을 감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천천히 이동시킴으로써 찟거나 표면으로부터 떨어뜨리거나 할 필요없이  한 점으로 수축시킬 수 있다. 반면 같은 고무줄을 도넛의 주위에 적절한 방향으로 늘어뜨린다면 고무줄이나 도넛을 자르지 않고서는 한 점으로 수축시킬 수 없다. 우리는 사과의 표면은 “단순히 연결되어 있다 simply connected”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넛의 표면은 그렇지 않다. 푸앵카레는 거의 한세기전 2차원 구면은 이러한 단순연결성simple connectivity의 성질을 기본적인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3차원 구면(최초의 지점origin으로부터 단위거리unit distance에 있는 4차원 공간에서의 점들의 집합)에 대응하는 질문을 제기했다. 이 질문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고 수학자들은 그 이후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

If we stretch a rubber band around the surface of an apple, then we can shrink it down to a point by moving it slowly, without tearing it and without allowing it to leave the surface. On the other hand, if we imagine that the same rubber band has somehow been stretched in the appropriate direction around  a doughnut, then there is no way of shrinking it to a point without breaking either the rubber band or the doughnut. We say the surface of the apple is "simply connected," but that the surface of the doughnut is not. Poincare almost a hundred years ago, knew that a two dimensional sphere is essentially characterized by this property of simple connectivity, and asked the corresponding question for the three dimensional sphere (the set of points in four dimensional space at unit distance from the origin). This question turned out to be extraordinarily difficult, and mathematicians have been struggling with it ever since.

 이를 다시 쉽게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만약 구면에 고무줄과 같은 닫힌 고리loop를 건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그 고리를 구면의 어떠한 위치에 걸더라도 고무줄이나 구면을 자를 필요없이 한 점으로 수축시킬 수 있다. 얼핏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는 이 사실은 위상수학적으로 하나의 위상적 성질topological property을 표현하는 성질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도형이 있다. 바로 도넛의 표면 즉 토러스 torus이다.



 

위의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저 토러스의 원환면에 고무줄을 건다면 우리는 그것을 한 점으로 수축시킬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러스를 자르거나 고무줄을 잘라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따라서 위상수학에서는 구면처럼 고리와 같은 폐곡선을 절단하지 않고 한 점으로 수축시킬수 있는 것을 단순히 연결되어 있다 simply connected고 규정하고 토러스와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쉽게 도식화할 수 있는 2차원 다양체인 구면과 토러스와는 달리 우주는 3차원 다양체 3-dimensional manifold라는 사실이다. 3차원 다양체는 2차원 다양체의 특정한 점(집합)을 일대일 대응시키면서  연결한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도식화시키기도 어렵고 계산하기도 매우 까다롭다. 그런데 푸앵카레는 이 3차원 다양체의 모양을 가진 우주도 2차원 다양체인 구면과 같은 단순연결성을 가진다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것이 푸앵카레의 추측Poincaré conjecture 이다.

그런데 그것의 수학적 증명은 푸앵카레가 최초로 추측을 제기한 이후 약 100년이 걸렸다. 그 증명을 최초로 해낸 사람이 바로 그리고리 페렐만 Grigori Perelman이다. 페렐만은 푸앵카레 추측과 관련된 논문을 2002년 최초로 인터넷(www.arXiv.org)에 올렸다. 그리고 그 뒤 두 편의 논문을 더 추가한다. 페렐만이 주로 사용한 수학공식은  리처드 해밀턴 Richard Hamilton이 리만 메트릭을 가진 다양체를 해석학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사용한 리치 흐름 방정식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이곳을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Grigori_Perelman )

\partial_t g_{ij}=-2 R_{ij} +\frac{2}{n} R_\mathrm{avg} g_{ij}

이를 이용해 그는 푸앵카레 사후 100년동안 증명되지 못한, 그리고 클레이 수학연구소(www.claymath.org)  가 수학의 7대 난제로 선정하고 이것을 증명한 사람에게 100만 달러의 상금을 걸었던 그 문제를 증명하였던 것이다. (페렐만의 증명을 직접 보려면 이곳을 참조: http://arxiv.org/abs/math.DG/0211159 ) 이 증명의 발표이후 여러 검토작업이 있었지만 2006년 사실상 최종적으로 증명이 완료된 것으로 공인된다. 이 업적으로 페렐만은 2006년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 fields medal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그는 수상을 거부하였다.(필드상 위원회에서는 페렐만이 수상을 거부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한다.) 많은 수학자들은 페렐만의 이 푸앵카레 추측의 증명은 수학의 역사에서 기념비적 사건이며 앤드류 와일즈 Andrew Wiles 가 증명에 성공했던 페르마의 정리에 상응하는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증명일지 모른다고 평가한다. 이런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 푸앵카레의 추측은 단순히 특정 수학의 정리를 증명하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주의 구조와 비밀의 해명이라는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철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혹은 성직자들이 해명하려고 노력해 왔던 그런 주제이다. 더불어 데카르트도 그의 비밀노트에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작성해 왔던 바로 그 주제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데카르트의 비밀노트로부터 시작된 우주의 모양에 대한 수학적 해명이 페렐만을 통해서 하나의 큰 도약을 완성하게 된다.



그런데 페렐만은 클레이 수학연구소가 상금으로 걸었던 100만달러와 필드상을 모두 거부하였다. 그리고 현재 러시아에 은둔하면서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살고있다고 한다. 타고난 성격때문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혹시 그도 데카르트처럼 비밀리에 작성하고 있는 노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앞서서 그가 발표한 푸앵카레 추측의 증명보다 훨씬 더 놀랍고 충격적인 어떤 우주의 비밀을 밝혀줄 그런 비밀노트를. 그래서 그것을 아직까지는 세상에 공개하기 싫어서 은둔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P.S. 푸앵카레의 추측과 관련해서는 『데카르트의 비밀노트』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푸앵카레의 추측 - 우주의 모양을 찾아서 』를 참고하면 도움이 되겠다. 수학적 설명은 최소화한 책이긴 하지만 설명이 그다지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긴 이미지로 도식화시키기도 쉽지 않은 3-다면체를 말로서 설명하려니 그게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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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23 04: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yoonta님. 쓰신 문장 중에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우주의 크기가 유한하다고 해서 우주의 경계boundary가 없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크기는 유한한데 경계가 없다는 말은 무엇일까?"라는 부분이 있는데, '우주의 경계가 있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를 쓰시려 하셨던 거겠죠?

람혼 2007-07-23 05: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몇 번을 계속 다시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데카르트의 '송과선'에 관한 이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yoonta님의 글을 읽으면서 역시나 다시금 드는 생각은, 데카르트는 정말이지, 여전히, 아직도, 너무나 많은 생각의 끈들을 제공해준다는...^^

yoonta 2007-07-23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 표현은 "우주의 크기는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다"라는 이야기입니다. 흔히들 경계가 없다라는 것을 크기가 무한하다라는 것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수학에서는 경계가 없다는 것이 곳 크기가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뫼비우스의 띠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뫼비우스의 띠는 분명 크기가 유한합니다. 하지만 그것의 표면은 안과 밖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끊임없이(경계없이) 순환하게 되어있죠. 그런점에서 뫼비우스의 띠는 크기는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다고 말할수 있는 것의 예가 됩니다. 지표면이나 구의 표면도 이런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만 끊임없이 그 차원 내를 순환할 뿐이지 결코 경계를 만날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순환 혹은 반복을 흔히 크기의 무한성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우주의 모양이나 크기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죠. 푸앵카레가 추측하고 페렐만이 증명한것이 바로 이러한 생각이 오류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대단한 업적인데 내용이 어려워서 그런지 잘 소개가 안되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람혼 2007-07-23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 드린 말씀이 바로 그것인데, '우주의 크기는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다'는 것이 이야기의 요지이므로, yoonta님이 쓰신 문장은 "우주의 크기가 유한하다고 해서 우주의 경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가 아니라 "우주의 크기가 유한하다고 해서 우주의 경계가 '있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앤드류 와일즈의 페르마 정리 증명, 페렐만의 푸앵카레 추측 증명 소식 등등에 흥분했던 기억들이 새롭군요. 언제 기회 되실 때 리만 가설에 대한 yoonta님의 글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기도 합니다. 건필!^^

yoonta 2007-07-23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제가 원래 이렇게 덤벙댄답니다..^^;; 지적감사하구요. 수정들어가야겠네요..

2007-07-28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7-07-30 00:19   좋아요 1 | URL
아..네 그걸 물어보신 거였군요. <홀로그램 우주>라는 책에서 인용했습니다. 우주와 인식(정신)을 물질의 파동성으로 설명하는 내용의 책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의 책이니 관심있으시면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마늘빵 2007-07-30 22:22   좋아요 1 | URL
아 제목도 설명도 어렵습니다. 저 문구만 간직해야겠습니다. :)

쿠자누스 2007-07-31 0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재밌네요...
 



지난 주말 서점에 갔다가 재미있는 제목의 책을 한 권 발견했다. 바로 『데카르트의 비밀노트』라는 책이다. 데카르트는 생전에 공개한적이 없는 비밀리에 작성한 노트가 있었는데 그것은 고대그리스로부터 내려오는 기하학과 관련된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대신 라이프니츠가 이것을 필사해 놓았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는 것이다.그런데 그 비밀노트의 내용은 대단히 파격적이어서 오늘날의 물리학에도 영감을 불어넣어 줄 만한 신비스런 내용을 포함했다고 한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데카르트와 관련된 여러 신비주의적 면모에 대해서 소상히 고찰해 놓은 책인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 보자마자 집어들었다. 읽어보니 마치 소설 『다빈치코드』를 읽는 것 같은 흥미진진함이 느껴지는 책이다. 거기다가 책에서 다루는 사건이 대부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니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그 비밀노트의 내용에 대해선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고  지금은 그에 관한 음모론적 이야기보다는 그가 『방법서설』에서 논증했던 기하학에 대해서 간략히 적어 보겠다. 다음에 소개할 내용은  『데카르트의 비밀노트』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기원전 427년 아테네에서 전염병이 돌자 당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는 델로스섬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목적은 아폴론 신의 신탁을 받기 위해서 였다고. 결국 신탁이 내려졌는데, 내용인 즉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을 두 배 늘리라는 것이었다. 이 신탁을 받은 아테네 사람들은 신전의 길이와 폭 그리고 넓이를 두 배로 확장하였다고 한다. 공사를 완성한 사절단은 결과에 만족하여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런데 병마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에 사절단은 다시금 신탁을 받았는데 그 결과를 듣고 깜짝 놀랐다. 신탁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당신네는 아폴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소. 신이 요구한 대로 신전의 크기를 정확히 두 배로 늘리지 않았단 말이오. 돌아가서 아폴론이 지시한 대로 따르시오.!"

그제서야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들은 신전의 길이, 폭, 높이를 각각 두배로 늘렸기 때문에 실제로는 신전의 부피를 8배 (2×2×2 = 8)를 늘렸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리스 건축가들은 직선자와 컴파스만으로 크기를 작도를 하였는데 아무리 크기를 계산해봐도 그 크기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신전의 크기를 2배로 키우지 못했을까? 신전과 같은 입체도형의 부피, 예컨대 정육면체의 부피를 2배 늘리려면 가로, 세로,높이 각각에 2의 세제곱근을 곱해야 한다. 세제곱근을 곱해야 필요한 수인 2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선자와 컴파스 만으로는 세제곱근만큼 늘어난 값을 계산할 수가 없었다. 이는 피타고라스나 유클리드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들은 오늘날과 같은 대수학 이론 그리고 데카르트에 의해 발견된 해석기하학을 몰랐고 단지 직선자와 컴파스 만으로 작도를 했기 때문이다.이런 문제점에 때문에 다음과 같은 고대 그리스시대 기하학의 3대 난제가 탄생하게 된다: ①정육면체의 부피를 두배 늘리기 ②원과 면적이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기 ③각을 3등분하기.





데카르트는 이와 같은 그리스 기하학의 난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인 해석기하학을 창시함으로써 그리스기하학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제공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 기하학이 가진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했는데, 가령 위에서 이야기한 난제 중 2번의 경우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직선자와 컴파스 만으로는 세제곱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한편 그는 직선자와 컴파스로 제곱근은 작도 할수 있음을 대수적으로 "증명"하였다. 다음의 내용은 그의 최초의 문제적 저서인 『방법서설』 속에 있는 기하학편에 나오는 증명이다. (아쉽게도 옆에 나와있는 해석본에 기하학편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나머지 편들인 굴절광학 및 기상학도 하루빨리 번역되어 나오길 바란다.)




위 그림는 직선자(직각자)와 컴파스만으로도 작도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로부터 제곱근을 직선자와 컴파스만으로 작도 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위 그림 속 세 직각삼각형으로부터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세 방정식이 나온다.

c^2 = a^2 + b^2 -------ⓐ

d^2 = 1^2 + b^2 -------ⓑ

(a+1)^2 = c^2 + d^2 ---ⓒ

우변을 전개하고 ⓑ를 ⓒ의 우변에 대입하면

a^2 + 2a + 1 = c^2 + 1^2 + b^2

그런데 ⓐ에서 c^2= a^2 + b^2 였으므로 이를 대입하면

a^2 + 2a + 1 = a^2 + b^2 + 1^2 + b^2

이를 다시 정리하면

2a = 2b^2

∴ b = √a

이처럼 데카르트는 직선자와 컴파스 만으로 √a 라는 제곱근을 작도할 수 있음을 대수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런데 직선자와 컴파스만으로는 3차원공간상에서의 크기를 잴수 없기 때문에 정육면체를 2배만들기와 같은 계산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논증기하로는 불가능함을 데카르트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의 수학적 "증명"은 그로부터 약 200년 뒤 어이없는 결투로 아까운 목숨을 잃은 비운의 천재 갈루아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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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육면체 부풀리기
    from to be immortal 2007-06-28 16:29 
    아키타스와 라이프니츠 사이에 데카르트?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귀가 솔깃해진다  
 
 
로쟈 2007-06-2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라고 해서 제쳐놓았었는데 의외로(?) 재미있나 보군요.^^

yoonta 2007-06-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아닙니다. 비밀노트라는 제목때문에 소설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데 사실은 그의 전기더군요. 그리고 실제로 비밀노트도 존재했었고요. 당시 신비주의단체로 유명했던 장미십자회와도 직간접적인 교류가 있었더군요. 데카르트의 전기로는 좋은 책인 것 같습니다. ^^

쿠자누스 2007-06-2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육면체를 두배로 만드는 방법은 아키타스(http://de.wikipedia.org/wiki/Archytas)
가 증명한 걸로 아는데요,(http://mathforum.org/dr.math/faq/davies/cubedbl.htm)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 비밀 노트>를 필사할 때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궁금하네요, 라이프니치가 장미십자회에 있었던 건 아는데 데카르트도 그랬다는 건 처음 듣네요

yoonta 2007-06-29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스의 증명은 논증기하의 방식이죠. 즉 해석기하학에 의한 대수적 증명이 아닌 직관적인 유클리드기하학을 사용한 논증입니다. 그러나 보다 완전한 증명을 하기위해서는 데카르트가 발명한 해석기하학적 방식으로 다시말해 대수적으로 정육면체를 두 배늘리는 방식을 "증명"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리수계수를 가진 3차방정식이 유리수근을 가질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갈루아의 군론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각을 3등분하기 문제도 동일한 이유로 유클리드기하학으로는 완전히 증명될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원과 면적과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기 문제도 19세기 린데만에 의해서 파이가 초월함수임을 보임으로써 그것이 작도불가능임을 증명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데카르트조차도 그것의 작도 불가능성을 완전히 증명하지는 못했다고 보는 것이죠.

yoonta 2007-06-29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위 책에 의하면 데카르트가 장미십자회원이었다는 확증은 없는 것으로 기술되어있습니다. 자신은 장미십자회원임을 강하게 부정했죠.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정통 카톨릭교인으로 행동했습니다.그러나 그가 교류했던 학자들중 요한 파울바허와 같은 장미십자회원이 있었던 것, 그리고 그의 수사법중 장미십자회원이 사용하는 특유의 수사법이 자주 동원 된다는 점, 그리고 그의 비밀노트에 적힌 G.F.R.C.라는 이니셜은 Fratenitas Roseae Crucis 즉 장미십자회를 의미한다는 등등의 단서들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가 장미십자회원이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들과 밀접한 교류를 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는 힘들다고 보는 입장이더군요.

쿠자누스 2007-06-30 0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들은 바로는 아키타스 기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불모성을 입증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사위 두배 만드는 작법이 중요하다는 건데 이걸 이해하는 게 좀체 쉽지 않네요. 비밀노트는 라이프니츠가 필사한 게 사실인가요 ? 그렇다면 그의 저작 목록에 들어있음직한데요...

yoonta 2007-07-01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스 기하학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바가 없네요. 시간나는데로 한번 그 인물에 대해서 조사해봐야겠네요. 아키타스기하학이 유클리드기하학의 불모성을 입증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업적인것으로 보이는데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네요.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필사한 것이 맞습니다. 책을 보시면 필사본 사진이 나옵니다. 저작목록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의 비밀노트를 필사한 것이 발견된 것도 비교적 최근이라고 하네요.

쿠자누스 2007-07-02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scienceagogo.com/news/books-24-11-05.shtml 여기 보니까 비밀 노트는 16 쪽인데 데카르트 친구가 보관하고 있던 것을 라이프니츠가 일부 필사했다는 군요. 원본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말이 없네요. 필사본이 최근 발견되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되겠져. 라이프니츠 저작 가운데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게 많다고 하니까요.

yoonta 2007-07-02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전체를 필사할 필요가 없었다는 군요. 비밀노트의 핵심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라이프니츠의 필사본을 통해 데카르트가 발견한 것을 이해하는데 또 오랜시간이 걸렸다고..원본은 현재 행방불명이랍니다.

람혼 2007-07-23 0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루아의 최후는 정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마치 저의 일인 것처럼 안타깝습니다...ㅡㅡ;

쿠자누스 2007-08-25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루아가 "21세가 채 안 된 1832년에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애정문제로 인한 권총결투에 유인되어 살해되었다." 는 건 그의 죽음에 얽힌 흑막을 숨기려고 꾸며낸 것이겠지요.
 

 



흄의 철학이 칸트에 의해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행한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기인한다.

"로크의 『인간오성론』과 라이프니츠 이래로, 아니 오히려 우리가 형이상학의 역사에 대해 아는 한에 있어서, 형이상학의 태동 이후에, 이 학문의 운명에 관해서 데이비드 흄이 행했던 공격보다 더 결정적일 수 있었던 사건은 없었다." (임마누엘 칸트. 프롤레고메나 서문)

Since the Essays of Locke and Leibniz, or rather since the origin of metaphysics so far as we know its history, nothing has ever happened which was more decisive to its fate than the attack made upon it by David Hume.

이처럼 칸트가 높이 평가한 흄의 형이상학 비판중 하나가 그의 인과론에 대한 비판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우주론적 신증명(Gottesbeweis)"에 의하면 "작용은 존재에 따른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에 닮은 작용을 한다. " 어떤 것도 자기의 종種을 넘어선 작용은 하지 않는다." "원인은 그 자체 안에 결과를 내포하고 있다." "원인은 결과보다 중요하고 더한 존재를 가지고 있다."(요하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349쪽) 등등과 같이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인과론적으로 세계를 설명하였다. 그런데 흄은 이러한 생각들은 증명해 낼수 없는 것들로 규정한다. 그는 개념적 증명은 사고내에서의 필연성은 증명 가능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물들 혹은 실재들에 대한 증명일수는 없다는 것이다. 현상세계에서 우리가 알수있는 것은 단지 사물들 간의 근접성일 뿐이다. 사물들이 잇다라 근접하여 있음으로해서 발생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생김으로해서 우리는 그것들간의 규칙성을 가정할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규칙성으로부터 인간의 사고에 내면화되는 일정한 습관에 의해서 기대되는 것, 그것이 인과관계의 전부이고 "그 배후에는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

이러한 실재 혹은 경험에 대한 그의 설명은 심리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관념이란 실재와 관련하여 경험되는 감각들의 연합 혹은 집합일 뿐이다. 이와같은 관념의 연합이라는 생각은 로크에게도 있었지만 그는 실재론과 심리주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흄은 좀더 철저한  심리주의로 이것을 해결한다. 사물들에 대한 관념의 연합 혹은 집합은 사물의 객관적 내용이나 형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심리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그의 심리주의적 설명방식이다. 한편 그는 관념들의 심리적 성격뿐만 아니라 그것들 간의 인과성을 인접성만이 아닌 필연적 연관성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근접성과 연속성의 이 두 관계가 완벽한 인과 관념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의 대상은 다른 대상에 근접해 있고 선행해 있으면서도 그것의 원인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고찰되어야 할 것은 필연적 연관성necessary connexion이다. 이 관계는 앞서 언급한 두 관계의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하다." (데이비드 흄. A Treatise of Human Nature)

Shall we then rest contented with these two relations of contiguity and succession, as affording a complete idea of causation? By, no means. An object may be contiguous and prior to another, without being considered as its cause. There is a NECESSARY CONNEXION to be taken into consideration; and that relation is of much greater importance, than any of the other two above-mention'd.

"맨 처음 어떤 남자가 두 당구공의 충돌에 의한 것 같은 충격에 의해 운동의 상호작용이 일어남을 보았을 때는 그는 한 사건이 다른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connected)고는 말할 수 없고 단지 연접해 있다(conjoined)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본성에 대한 여러 차례의 실례를 관찰한 연후에 비로소 그는 그것들이 연관되어 있다(connected)고 말한다.(...)우리가 한 대상이 다른  한 대상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경우, 우리가 뜻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생각 속에서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서로의 존재를 보증하게 해 주는 그런 추론이 생긴다는 것이다. " (데이비드 흄. 인간 오성의 탐구. 고려원 112,3 쪽

이는 이중적인 태도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흄은 "필연성은 대상들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에 있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인과의 관념은...대상들 사이의 어떤 관계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흄은 필연성으로서의 인과성은 주관에서 비롯되지만 그것들은 대상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므로 그렇게 적용된 대상들은 인과적이라고 한다. 그런 대상들 간의 관계는 인과적 관계에 있다고 말할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물들 간의 인과적 관계는 현실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됨으로써 우리에게 필연적 연관이라는 "관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흄의 설명은 칸트에게 "명민한"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흄이 만약 이러한 필연적 연관성으로서의 인과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은 필연적 연관이 없게 되고 사물들 간의 시공간적 근접성만 주어지면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에게서의 필연적 인과성은 비록 주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흄처럼 사물들에 대한 경험에 의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관념의 연합이라기보다는 "감각경험 저편에 있는" 것, 즉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그리고 칸트에서의 선험적 관념은 흄처럼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는 지각들이 다발 (a bundle of perceptions in a perpetual flux and movement)과 같은 관념이 아니다. 관념을 이처럼 유동적인 심리상태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으로만 규정하고 필연적 연관성과 같은 인과성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반복적 경험에 의한 습관의 결과로만 설명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의 고정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특정 경험의 반복"자체도 불가능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경험의 반복"은 마음의 고정성을 전제로 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을 경우 동일한 경험은 두번 다시 반복될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연적 연관성이라는 "인상" 혹은 "느낌"을 안정적으로 교정해주는 그 마음의 고정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칸트에게서는 의식의 선험성이다. 경험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가능근거로서의 선험성. 이것이 칸트가 흄으로부터 비판적으로 발전시키려고하는 선험적 심리의 원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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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6-24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본격적인 서재인 생활을 시작하시는 건가요? 흄-들뢰즈의 경험론이 곧 이어질 거란 기대도 갖게 됩니다.^^

yoonta 2007-06-2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이라고 할 것까진 없고요.^^ 뭔가 쓰고 싶은게 있으면 또 적게 되겠죠. 흄-들뢰즈에 대해서도 시간되면 한번 정리해보고 싶은 주제네요. 이 글쓰면서도 들뢰즈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려다가 말았답니다. ^^
 

 

 

 

 

최근 <초끈이론> 이라는 살림지식총서를 읽고 있다. 그런데 마침 로쟈님이 쓰신 지젝의 블랙홀 http://blog.aladin.co.kr/mramor/1310499 을 읽고 갑자기 물리학의 '블랙홀'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따라서 이 페이퍼를 쓰게된 동기의 절반은 로쟈님에게 있다. ^^;

블랙홀은 특정 천체가 핵분열 에너지 등을 모두 소모하여 중력과의 평형상태를 잃고 천채 내부로 중력붕괴가 일어날 때 발생한다.
이 때 블랙홀 주변의 시공간은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장에 의해 심하게 휘어지고 빛조차도 블랙홀이 형성하는 중력장 외부로 탈출할 수 없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블랙홀로부터 나오는 가시광선을 포함한 어떠한 종류의 광선도 관측할 수 없게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러한 천체를 블랙홀black hole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런데 어떤 천체가 블랙홀이 되려면 그 물체는 그 질량에 비례하는 슈바르츠실트Schwarzschild 반지름을 가져야 한다. (자세한 설명은http://en.wikipedia.org/wiki/Schwarzschild_radius 을 참조할 것) 물체가 이 반경 이내로 압축이 되면 그 물체는 (회전하지 않는)블랙홀이 된다고 한다. 지구의 경우 그것은 1cm 이고 태양의 경우 3km 이다. 즉 지구나 태양의 반지름이 이 정도의 크기로 압축이 된다면 블랙홀이 될 수 있다는 것. 또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안쪽으로 빛이 들어가면 빠져나올수 없으므로 이 때의 구면을 '사건의 지평선'으로 부르고 그것이 블랙홀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슈바르츠실트 공식을 한번 유도해 보자. (공식유도는이 곳 http://blog.naver.com/sky_kingdomg?Redirect=Log&logNo=110017872884 참조)

만유인력 공식은 다음과 같다.

Fg = GMm/r^2

다음은 구심력 공식.

Fg = mv^2/r

블랙홀에 빛이 빨려들어갈 때 원운동을 한다. 그러므로 만유인력과 구심력이 평형을 이룬다고 다음과 같이 가정할 수 있다.

GMm/r^2 = mv^2/r

이 식을 v에 관해 정리해 보자.

v = √ GM/r

이 때 v는 빛이 빨려들어가는 속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때의 속도는 탈출속력과 같다. 탈출속력(Vesc)은 이 식에서의 2배이다. 즉.

Vesc = √ 2GM/r

그런데 탈출최대한계속도는 광속도 이상을 넘을수 없다. 그 이상의 속도는 자연계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빛의 속도가 곧 최대탈출속도가 된다.

c = √ 2GM/r

이를 다시 반지름인 r 로 정리하면

r = 2GM/c^2  (r은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G는 중력상수, M은 물체의 질량, c는 빛의 속도이다.)

 이것이 슈바르츠실트의 반지름이다.

r_s = \frac{2Gm}{c^2},


그런데 슈바르츠실트의 반지름에 의해 계산되는 사건의 지평선의 구면은 블랙홀의 질량의 제곱에 비례한다. 호킹은 이로부터 사건의 지평선은 항상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한편 베켄슈타인은 호킹의 이러한 발견으로부터 블랙홀의 엔트로피적 특성을 제안하였다.  블랙홀은 열역학의 법칙을 따른 다는 것이다. 그런데 블랙홀로부터는 어떠한 열도 방출되지 않으므로 일반상대성이론에 모순이 된다. 때문에 우리는 블랙홀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역학과 같은 통계적 물리량과 양자물리학이 필요하게 된다. 엔트로피는 "특정 물리계를 구성하는 미시적 자유도가 그 계에 주어진 거시적 물리량을 유지하면서 가질 수 있는 가능한 상태들의 가짓수에 의해 결정"됨을 알려준다. 블랙홀의 열역학도 이러한 미시적 자유도를 알아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미시적 자유도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초끈이론이다.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내의 물리계 즉 사건의 지평선 내부의 미시적 설명은 중력에 대한 일반상대성이론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것을 양자적으로 통합해 내는 양자중력이론 예컨대 초끈이론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설명될수 있다는 것이다.

초끈이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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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6-15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임'의 절반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yoonta 2007-06-1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책임'이 저에게 블랙홀이 되어도 전 '책임' 못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