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도서관에서 김상일씨의 <역과 탈현대의 논리>라는 책을 읽고 있다가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해서 몇자 적어 봅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상일씨는 동양철학을 서양철학과 수학과의 관련 속에서 해명하는 작업을 오랬동안 천착해 왔습니다. 특히 러셀의 역설이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들 속에 존재하는 논리적으로 해소불가능한 역설paradox의 문제를 易과 같은 동양의 사유속에서 해명하려고 시도하여왔고 그 결과물들을 <화이트헤드와 동양철학>, <원효의 판비량론 비교 연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풀어본 원효의 판비량론>, <한의학과 러셀 역설 해의>, <초공간과 한국문화>, <알랭 바디우와 철학의 새로운 시작> 등의 저술들로 소개해온 분입니다.

 김상일씨에 의하면 성서Bible 특히 창세기는 지금까지 윤리적 혹은 도덕적으로만 이해되어져 왔을 뿐이고 '논리적'으로 이해되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 창세기가 논리적으로 이해되어져 왔다면 "기독교의 역사와 신학은 지금과 많이 다를 것"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창세기의 한 구절을 옮겨와 봅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이 동산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밤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창세기 3장 1~5절)
 
   

기독교에서 보는 인류의 역사는 뱀과 여자와의 이 대화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창세기에서 이 구절은 결정적인 대목이 아니라 할수 없을 겁니다. 통상적으로 이 구절은 악으로 대변되는 뱀이 여자에게 선을 상징하는 "하나님Lord"의 명령을 거스를 것을 유혹하는 선과 악의 윤리적 대립구도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김상일씨는 이 대목을 윤리적, 가치론적 구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논리적Logical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합니다.
 
위 대목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부분은 뱀이 여자에게 "이 동산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는 구절입니다. 굵은 글씨로 강조했듯이 중요한 것은 이 "모든"이라는 부분입니다. 뱀과 여자가 이해하는 이 "모든"에는 당연히 동산의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와 그  열매 즉, 선악과도 포함됩니다. 뱀의 논리 그리고 그 논리에 포섭된 여자의 논리로 보았을 때 동산 중앙의 나무 역시 "모든 나무every tree"에 해당하므로 그것을 먹는 일은 비록 신의 명령을 거스르는 행위이긴 하나 비논리적인 행위라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수 있다고 했지만 동산 중앙의 나무 열매만 먹지 말라고하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있는 것이지요. 뱀은 이런 논리적 허점을 노리고 여자를 유혹했던 것이지요. 이 논리를 E형 논리라고 합니다. E형 논리에서는 전체도 부분에 '포함'됩니다. 수학의 집합론에서 어떤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에 전체집합이 포함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수학에서는 이와같은 어떤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을 '멱집합'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죠.  

반면 하나님이 상징하는 논리는 A형 논리입니다. A형 논리는 부분은 전체에 속하지만 전체가 부분에 속하지는 않는 논리입니다. 즉, 수학에서의 멱집합이 통용되지 않는 논리이죠. 동산 중앙의 나무는 "모든 나무"에 속하지 않은 일자one입니다. 동산 중앙의 나무는 그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전체성을 이루는 그러면서 모든 것의 지식knowledge of everything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러한 일자적 전체성으로서의 나무는 모든 (다른 부분집합으로서의) 나무들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피조물은 신에 포함되나 피조물은 신에 포함되지 않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이러한 A형 논리의 사례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같은 (물론 수행을 통한 깨닮음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이룰수 있다고 본 그노시스적 기독교 전통을 제외하고) 유일신적 전통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신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관계이고 위계적으로 동등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뱀과 여자가 따르는 E형 논리를 따르게 되면 신이 인간이 되고 인간도 신이 될 수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은 신이 곧 인간이 되고 인간이 곧 신이되는 이단heresy이 되므로 유일신으로서의 유대교나 기독교전통에서는 배척될 수밖에 없는 논리가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동양의 종교 그리고 사상은 E형 논리를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의 경우 대표적으로 E형 논리를 따르는 종교인데 사람도 수행을 통하여 깨닮음을 얻으면 모두 부처가 될 수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신과 인간의 동일성 혹은 인간이라는 소우주와 외부의 대우주 간의 동일성. 서양에서도 일부의 비교적esoteric 전통에서는 이런 신과 인간의 동일성 테제가 존재하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일 뿐 주류라보 볼수는 없지요.

그런데 이런 A형 논리는 기독교와같은 종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과같은 서양철학에서도 발견 됩니다. "A형 논리학의 출발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범주론>에 의하면 첫번째 "선행 범주"와 두번째인 <범주론>의 범주는  세번째의 후속 범주와 관련이 없습니다 이러한 범주들 간의 분리와 상호관계를 규정한 이유는 결국 "하나와 여럿의 관계에서 생기는 역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소위 "러셀의 역설"로 잘 알려진 역설을 해결하기 위한 러셀의 "유형이론"도 이러한 A형 논리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러셀은 1901년 소위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통해서 일반에게 알려진 러셀의 역설을 집합론set theory에서 발견합니다. 러셀의 역설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발견됩니다.


   
  "지금 자기 자신을 요소로서 포함하지 않는 집합의 전체를 X로 한다. 그런데 X자신은 X에 포함되는 것일까,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가령 X가 X에 포함된다고 하면 자기 자신을 요소로서 포함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X의 정의로부터 X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되어 모순이다. 또 가령 X가 X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면 X의 정의로부터 X는 X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 모순이 생긴다. 이와 같이 어느 쪽으로 해도 모순이 생기게 된다." (<괴델 불완전성 정리>, 요시나가 요시마사, 75쪽)   
   


이처럼 어느 쪽으로 해명하려고 해도 해소되지 않은 역설적인 상황을 러셀은 소박한 집합론 (naive set theory)에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일화에 의하면 러셀이 이러한 역설을 집합론 내부에서 발견하고 프레게에게 알려주었는데 프레게는 크게 낙담하여 수년간 연구해서 막 발표하려던 자신의 논문을 폐기처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러셀은 이러한 역설을 해소하기 위해 앞에서 이야기한 A형 논리를 다시금 도입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유형이론"입니다.

러셀의 해법을 설명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소위 거짓말쟁이 역설을 다시한번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옛날 한 크레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  그렇다면 이말은 과연 거짓말일까요? 진실일까요? 이 문장이 참이라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므로 이 말을 한 크레타인의 말도 거짓이 됩니다. 반대로 이 말이 거짓이라면 크레타인이 이 말을 한 것이므로 그것 역시 참이라고 할수있는 것이지요. 러셀의 역설도 이와같은 역설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러셀은 이 역설내에 감춰진 비밀을 "자기언급적"인데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만약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라는 말을 크레타인이 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모든'에 들어가는 크레타인이 이 말을 해서 역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언급적 순환고리를 깨는 일. 그것이 러셀의 해법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언급적 고리의 순환을 끊는 방식으로 역설을 해소하게 되면 계속해서 또다른 상위의 "계" 혹은 "급"을 도입하지 않을수 없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또다시 역설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러셀의 해법은 완전한 해법이 될 수 없는 임시방책에 지나지 않았죠. 그런데 이러한 러셀의 역설이 몰고온 수학의 난제를 결정적으로 해소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괴델입니다. 수학사와 괴델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번 주제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만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죠.

다시 창세기로 돌아와 봅시다. 결국 창조주인 하나님이 제시한 논리, 즉 에덴동산 가운데의 나무는 다른 모든 나무와는 다른 상위의 나무로 취급하는 A형논리는 러셀과 같은 위계적 해법에 비유할 수있습니다. 반면 뱀과 여자처럼 동산가운데의 나무도 다른 모든 나무와 같은 나무이므로 먹어도 된다고 보는 E형 논리는 A형 논리에서 보았을 때에는 '자기언급적' 역설을 야기하는 비논리가 되는 것이지요.그래서 창세기에서 그리고 나아가 서양의 지적 전통 내에서는 이러한 뱀과 여자의 E형 논리는 논리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역설만을 야기하는 악으로서 규정되고 이단으로 배척받아왔다고 볼수있는 것이죠. 결국 이처럼 서양의 종교(기독교)와 사유의 배경에는 A형 논리의 흔적이 짙게 깔려있다고  저자인 김상일씨는 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역설을 해소할 수 없는  A형 논리의 한계를 감지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던 시도들이 서양에서도 존재했죠. 플라톤 철학에서도 그 맹아가 존재하였고 근대철학에서는 라이프니츠에서부터 비롯하여 오늘날의 데리다와 들뢰즈 그리고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A형 논리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계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수학계에서는 칸토어가 대각선논법을 이용해 실수의 무한집합이 유리수의 무한집합보다 더 크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A형논리의 내부의 균열을 감지하였고 결정적으로는 수학의 무모순성이 불가능한 목표임을 보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A형 논리를 통한 역설의 해소가 불가능임을 '증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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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싫어 2010-02-0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이런 성서들을 보면 이해가 안 돼 도대체 한 마디도 말이 말 같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해설하는 사람은 또 자기 식대로 횡설수설,,, 심지어 왼갖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자기 자신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들로 신자들을 햇갈리게하는 재주는 기가 막혀 ㅎㅎ
하기야 신을 내 세우는 종교는 어쩔 수 없이 '무조건 따지지 말고 믿기만 하란 말이
이래서 나온건가 봐요

yoonta 2010-02-02 15:36   좋아요 0 | URL
"신자"신가요?

윤지 2010-02-0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자라고 거짓말을 할까요?
지금은 21세기예요 성서도 시대에 마춰 다시 써야합니다
어차피 그 성서가 만들어진 것이 밝혀진 이상
이상한 말장난으로 횡설수설하지 말고
불교와같이 과학과 철학적인 마인드로
신자들에게 접근해야만 기독교가 살아 남습니다
미국과 유럽이 왜 기독교 인구가 줄고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서양의 젊은 사람은 아무도 성서를 신뢰하고있지 않아요
가슴아픕니다

I.M.Curious 2015-01-0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성서는 이제 명언을 제공하는 어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서양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키워드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