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에서 브라우어(L.E.J. Brouwer)가 "직관주의(intuitionism)"으로 자신의 수학기초론을 명명한 배경에는 칸트철학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다루어보려고 한다.


브라우어는 수학의 기초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을 세우면서 칸트 철학에서 그 유사함을 본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그의 저서인 『순수이성비판』에서 수학을 "직관intui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정의하면서 그것이 "선험적 종합판단"임을 논하였다. 이러한 칸트철학을 참조하여 브라우어는  스스로를 직관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세희, 수학의 세계, 서울대학교출판부,312쪽. 참조) 이는 브라우어가 칸트철학을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수학을 인식주관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로 가정하지 않고 인식주관에 의해서 구성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종래의 견해에  기초한 결과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칸트철학에 대한 오독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수학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규정한 적이 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1, 아카넷, 225쪽 참조) 그러면서 그것이 순수논리에 의한 개념적 구성물이 아니라 왜 "직관을 보조로"한 학문인지 설명한다. 칸트의 설명을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자.

"처음에 사람들은 '7+5 =12'라는 명제는 '칠'과 '오'의 합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모순율에 따라 귀결되는 분석적인 명제라고 생각함직하기는 하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면 '7'과 '5'의 합이라는 개념은 두 수를 하나의 수로 통일한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이로부터 그 두 수를 포괄하는 이 하나의 수가 무엇인가는 전혀 생각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십이'라는 개념은 내가 순전히 칠과 오의 저 통일을 생각하는 것으로써만 이미 생각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그러한 가능한 합이라는 나의 개념을 한동안 분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해서 거기서 '십이'와 마주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두 수 중 하나에 대응하는 직관을 보조로 취해 예컨대 다섯 손가락이나 또는 (세그너가 그의 산술학에서 했던 것처럼) 다섯 개의 점을 그렇게 해서 하나씩 직관에 주어지는 다섯의 단위들을 일곱의 개념에 덧붙임으로써 사람들은 이 개념들을 넘어갈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나는 먼저 수 7을 취하고, 5라는 개념 대신에 직관으로서 내 손의 손가락들을 보조로 취함으로써, 나는 수 5를 형성하기 위해 앞으로 함께 취했던 단위들을 이제 저 나의 그림에서 하나씩 수 7에 더하고, 그렇게 해서 수 12가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되니 말이다. 5에 7이 더해져야(이 부분의 강조는 칸트가 직접 했다. 그는 5에 7을 더한다는 것이 분석적으로 유도되는 것이 아니고 직관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한다는 것을 나는 7 + 5의 합의 개념에서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합이 수 12와 같다는 것은 거기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산술의 명제는 항상 종합적이다. " (강조는 필자)

 (칸트, 순수이성비판 1, 아카넷, 225-226쪽)

 

브라우어는 칸트의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즉 "산술의 명제는 항상 종합적이다"라는 것의 설명으로부터 자신의 구성주의적 수학을 직관주의로 호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은 칸트가 비록 산술의 명제를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자연수의 합과 같은 산술이 "직관을 보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러므로 칸트의 수학에 대한 입장을 객관적인 수학적 개념(concept)나 대상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를 가정하지 않은 순수하게 구성적(constructive)이며 주관적인 학문이라고 규정했다고 볼수는 없다는 점이다.

 칸트철학의 본체를 보여주는 『순수이성비판』은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개별학문들 처럼 "선험적 종합판단"을 자체 내에서 수행하기 위한 작업이라기보다는 이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 즉, 그것의 토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때문에 그의 철학은 기존 형이상학과 개별 학문들의 토대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칸트는 "초월적 감성학"으로 『순수이성비판』을 시작한다. 다름아닌 바로 "직관"의 개념규정으로부터 책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수단에 의해 언제나 인식이 대상들과 관계를 맺든지 간에 그로써 인식이 직접적으로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고 모든 사고가 수단으로 목표하는 것은 직관이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1, 아카넷, 239쪽)

그리고 "직관은 오로지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졌을 때에만 생기며" 대상은 "감성을 매개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성에 의해 사고되며 지성으로부터 개념들이 생겨난다." (같은 책, 239쪽)

 

그런데 칸트는 시간과 공간과 같은 표상들은 "순수한 직관"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a priori)"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선험적인 것은 경험에 선행한다는 의미이므로 인식의 "주관"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특히 시공간과 같은 직관은 "신에게서나 가능함 직한 "근원적 직관"이 아니라 일종의 "파생적 직관"이라는 점에서 말이다.(칸트, 순수이성비판 1, 아카넷, 36-37쪽 참조) 그러나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비록 이 "파생적 직관"이 주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객관의 현존에 의존적이고, 그러니까 주관의 표상력이 그것에 의해 촉발됨으로써만 가능한” 직관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다시말해 시간과 공간과 같은 직관은 단순히 주관적인 파생적 직관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성을 내포한 “근원적-파생적 직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 공간(에 대한 직관)은 대상의 현존이 없이도 가능한 “상상력”이다. 그것은 “주관을 벋어나면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 감성적 직관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225쪽)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무질서하고 잡다한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용을 한다. 칸트는 그것을 “감각기능(감관)에 의한 선험적인 잡다의 일람(一覽)작용”, “상상력에 의한 이 잡다의 종합” 또는 “근원적 통각에 의한 이 종합의 통일”(같은 책 317)과 같은 말로 시공간에 대한 직관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 시공간에 대한 순수직관은 지성처럼 순수한 형태로 분석적 사고의 양식을 만들어 내는 능동성에 기반한다기보다 대상의 감관에 주어질 때에 비로소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인 것이다.

시공간에의 직관은 이처럼 대상적 인식이 가능했을 때에만 주어지는 수동적 성격을 가지면서 그와 동시에 무질서하고 잡다한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능동성을 가진다. 그러면서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할수 있는 “상상력”에도 기초로서 작용한다. “양”이나 “다수성” “전체성”과 같은 범주들의 적용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대상들을 단일한 하나의 시간 혹은 공간으로 표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소위 “대상일반”의 인식도 그래서 가능해 진다. 


그런데 대상들을 통일시키고 그것의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시공간(에의 직관)은 대상들의 현존을 가능하게 하는 실재적 본질이다. 다음 설명을 들어보자. 

 “다시말해 공간, 시간은 그 자체로는 주관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관념적“인 것이지만, 현상하는 객관들과 관련해서는 실재적, 곧 객관적으로-실재적이다. 공간,시간은 그 자체만으로 볼 때나 경험적 직관 너머에 있는 어떤 대상, 가령 초험적인 사물과 관련해서 볼 때는 순전히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경험적인 직관, 곧 경험적으로 직관함과 경험적으로 직관되는 것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백종현, 같은 책, 42쪽. 강조는 필자) 


이러한 특성을 칸트는 “경험적 실재성” 혹은 “초월적 관념성”이라고 규정한다. 현상들과 관련해 그것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면에서는 “경험적 실재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인간의 주관을 벗어나서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대상 없이도 인간의 인식 내에 “상상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주관이라는 측면에서는 “초월적 관념성”을 가진다는 이야기이다. 완전히 객관적 대상에 귀속되는 실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수한 인식주관으로만 환원할 수도 없는 수동성을 가진다는 이러한 양면성. 그것이 시간, 공간에 대한 직관이다. 

칸트가 앞서서 7+5 =12 라는 수학적 결과는 두 수의 합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하나 세어보는 행위를 통해어 깨닫는 “직관”의 보조에 힘입은 바 유도되는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정수론에 심취하여 칸토어의 혁명적 업적을 부인했던 크로네커, 그리고 수학적 귀납법의 유용함을 근거로 환원공리를 비판한 푸앵카레(모리스 클라인, 수학의 확실성, 사이언스북스 참조) 그리고 자연수 내에 존재하는 “직관적”성격을 내세워 자신의 입장을 직관주의라고 명명한 브라우어 등은 모두 칸트의 수학에 대한 입장을 단순히 구성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만 간주했고 이는 칸트 철학에 대한 오독임이 분명하다. 다시말해 그들은 위에서 이야기한 직관의 초월적 성격, 객관적 실재로서의 측면은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그것의 한 측면 즉, 주관으로서의 성격만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수학론을 이처럼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비단 직관주의자들 뿐만이 아니다. 러셀과 프레게와 같은 논리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칸트가 수학을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규정한 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수학의 수학의 경험적이고 직관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면만을 강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가 이처럼 수학을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규정한 것을 두고 철학 내에 “타자”를 도입한 “철학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평가한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한길사, 87쪽) 다시 말하면 칸트가 수학을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규정한 것은 바로 철학에 대한 자기반성이요 비판이라는 것이다. 고진을 인용해 보자.

“내 생각에 형식적인 공리계에 의해 수학을 기초짓는다는 몽상은 수학 고유의 것이 아니다. 그 몽상은 분석판단을 유일하게 확실한 것으로 간주하는 형이상학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칸트가 부정하려고 한 것은 그러한 사고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형이상학이 스스로 밀어붙인 수학에 의거하는 이상, 수학에서 행해져야 한다. 반대로 수학에서 행해진 것은 수학을 모범으로 삼아온 철학으로 되던져질 것이다. 괴델의 ‘초수학’적 비판은 그러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그것은 칸트의 초월론적 비판과 연결되어 있다. 지금 돌이켜 볼 때 칸트가 수학을 ‘종합판단’이라고 간주한 것은 옳았다고 해야 한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한길사, 116쪽)

이처럼 고진은 칸트철학이 수학에 대해서 가지는 입장을 인식주관에 의해서만도 아니요, 혹은 객관적 실재로서만도 아닌 이율배반적인 초월성을 가진 것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한 것이다. 아카넷판 『순수이성비판』의 역자인 백종현씨도 고진의 입장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칸트에 대한 오독은 국내학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라는 책을 쓴 진은영씨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가 선천적 종합판단의 대표적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은 7+5 =12와 같은 수학적 판단이다. 칸트에 따르면 7+5=12는 우리가 사과나 돌멩이를 가지고 경험적으로 세어보았기 때문에 타당한 것이 아니다. 일일이 세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이 판단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것을 세어보아야만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수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손가락, 발가락으로 세면서 수학적 판단을 배우게 된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수학적 판단의 보편성과 필연성은 경험과 무관하다. 누군가 1234+1001=2235가 맞는지 묻는데 예전에 세어보았던 경험을 돌이켜야 한다든가 세어본 경험이 없어서 1234개의 사과와 1001개의 오렌지를 창고에 넣으며 수를 센 후에만 대답할 수 있다면 수학적 판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우리는 손가락이나 돌멩이로 세는 일 없이도 수학적 판단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확신한다. 도대체 이와 같은 보편성과 필연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 칸트는 우리의 주관적 형식에서 온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진은영,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그린비, 66쪽. 강조는 필자)


이 구절의 앞에서 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위에서처럼 칸트가 설명한 산술명제의 예를 들고 있다. 하지만 위와같은 진은영의 설명은 선험적 종합판단의 예라기보다는 오히려 분석판단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7+5=12라는 수학적 결과는 “경험적인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판단”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앞서서 문제의 칸트의 구절을 직접 인용해 본 것처럼 칸트는 분명 7+5=12라는 결과는 단순히 개념적 수들의 합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7을 취하고 5라는 개념 대신에 직관으로서 내 손의 손가락을 보조로 취함으로써, 나는 수 5를 형성하기 위해 앞으로 함께 취했던 단위들을 이제 저 나의 그림에서 하나씩 수 7에 더하고, 그렇게 해서 수 12가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되니 말이다.(....)7+5의 합의 개념에서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합이 수 12와 같다는 것은 거기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산술의 명제는 항상 종합적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진은영은 칸트가 7+5=12의 예를 들면서 수학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다라고 설명한 것을 분명 오독하였고 때문에 무엇인가 어색함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물리적 판단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의 "선험적 종합판단"의 경험과의 연관성을 이야기한다. 더불어 칸트가 수학과 물리학의 경우를 “나누어 설명하려고 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마치 선험적 종합판단이 경험적이지 않은 것과 경험적인 것 두 개로 구분된다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수학과 같은 “선험적 종합판단”도 마찬가지로 경험적 직관을 포함한다는 것이고 또 직관자체가 비록 경험을 포함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가능근거로서 직관이 작용한다는 점에서 “선험적a priori”이라는 표현을 칸트는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경험은 달리말하면 선험적이기 때문에 직관적인 것이고 직관적이기 때문에 선험적인 동시에 경험적인 것이므로. 이러한 양면성 혹은 이율배반을 이해하는 것이 칸트 철학에서 주요한 핵심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노 2007-12-0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제가 도움이 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yoonta 2007-12-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도움을 드린건진 모르겠지만 쓸모는 있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노을 2010-01-09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칸트를 잘못 읽은 것 같군요. 직관주의자들이 참조하는 칸트를 이해하려면 "순수이성비판" 서론의 "선천-후천", "분석-종합" 구분에만 의지해서는 곤란합니다. 수학 자체의 본성을 다루는 "감성론", 특히 시공간적 직관의 본성을 다루는 부분을 참조해야지요. 그래야 왜 직관주의자들(구성주의자들)이 칸트를 조상으로 여기는지 이해할 수 있읍니다.

yoonta 2010-01-11 01:42   좋아요 0 | URL
"직관주의자들이 참조하는 칸트"에 대해서 제가 오해하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접한 텍스트가 한정적이라서요. 기왕 댓글주신 김에 직관주의자들이 위의 저의 해석과는 다르게 칸트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저의 칸트 해석에는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디오티마여신 2012-03-18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치 선험적 종합판단이 경험적이지 않은 것과 경험적인 것 두 개로 구분된다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수학과 같은 “선험적 종합판단”도 마찬가지로 경험적 직관을 포함한다는 것이고

가 아니라 수학과 같은 선험적 종합판단은 순수직관이 필요하며 범주에서 양질 항목인 수학적 원칙과 관계양상 항목인 역학적 원칙은 구분되는 것은 맞으며 둘다 순수직관의 선험적 구상력의 형상적 종합이 필요합니다. 수학에서는 경험적 직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경험적 직관이란 지각이라는 말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소리나 색깔 맛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칸트가 수학과 철학이 다른점에 대한 선험적 방법론 1장인 순수이성의 훈련 부분의 4항목중 첫번째 부분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칸트가 이야기한 수학적 판단의 엄밀성과 보편성은 수학적 개념이 순수직관에 의해 주어짐 즉 '구성'됨에 의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돈케빈 2015-03-2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ct.수학자 브라우어.. 부동점 정리를 만든 사람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