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의 철학이 칸트에 의해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행한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기인한다.

"로크의 『인간오성론』과 라이프니츠 이래로, 아니 오히려 우리가 형이상학의 역사에 대해 아는 한에 있어서, 형이상학의 태동 이후에, 이 학문의 운명에 관해서 데이비드 흄이 행했던 공격보다 더 결정적일 수 있었던 사건은 없었다." (임마누엘 칸트. 프롤레고메나 서문)

Since the Essays of Locke and Leibniz, or rather since the origin of metaphysics so far as we know its history, nothing has ever happened which was more decisive to its fate than the attack made upon it by David Hume.

이처럼 칸트가 높이 평가한 흄의 형이상학 비판중 하나가 그의 인과론에 대한 비판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우주론적 신증명(Gottesbeweis)"에 의하면 "작용은 존재에 따른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에 닮은 작용을 한다. " 어떤 것도 자기의 종種을 넘어선 작용은 하지 않는다." "원인은 그 자체 안에 결과를 내포하고 있다." "원인은 결과보다 중요하고 더한 존재를 가지고 있다."(요하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349쪽) 등등과 같이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인과론적으로 세계를 설명하였다. 그런데 흄은 이러한 생각들은 증명해 낼수 없는 것들로 규정한다. 그는 개념적 증명은 사고내에서의 필연성은 증명 가능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물들 혹은 실재들에 대한 증명일수는 없다는 것이다. 현상세계에서 우리가 알수있는 것은 단지 사물들 간의 근접성일 뿐이다. 사물들이 잇다라 근접하여 있음으로해서 발생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생김으로해서 우리는 그것들간의 규칙성을 가정할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규칙성으로부터 인간의 사고에 내면화되는 일정한 습관에 의해서 기대되는 것, 그것이 인과관계의 전부이고 "그 배후에는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

이러한 실재 혹은 경험에 대한 그의 설명은 심리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관념이란 실재와 관련하여 경험되는 감각들의 연합 혹은 집합일 뿐이다. 이와같은 관념의 연합이라는 생각은 로크에게도 있었지만 그는 실재론과 심리주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흄은 좀더 철저한  심리주의로 이것을 해결한다. 사물들에 대한 관념의 연합 혹은 집합은 사물의 객관적 내용이나 형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심리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그의 심리주의적 설명방식이다. 한편 그는 관념들의 심리적 성격뿐만 아니라 그것들 간의 인과성을 인접성만이 아닌 필연적 연관성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근접성과 연속성의 이 두 관계가 완벽한 인과 관념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의 대상은 다른 대상에 근접해 있고 선행해 있으면서도 그것의 원인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고찰되어야 할 것은 필연적 연관성necessary connexion이다. 이 관계는 앞서 언급한 두 관계의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하다." (데이비드 흄. A Treatise of Human Nature)

Shall we then rest contented with these two relations of contiguity and succession, as affording a complete idea of causation? By, no means. An object may be contiguous and prior to another, without being considered as its cause. There is a NECESSARY CONNEXION to be taken into consideration; and that relation is of much greater importance, than any of the other two above-mention'd.

"맨 처음 어떤 남자가 두 당구공의 충돌에 의한 것 같은 충격에 의해 운동의 상호작용이 일어남을 보았을 때는 그는 한 사건이 다른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connected)고는 말할 수 없고 단지 연접해 있다(conjoined)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본성에 대한 여러 차례의 실례를 관찰한 연후에 비로소 그는 그것들이 연관되어 있다(connected)고 말한다.(...)우리가 한 대상이 다른  한 대상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경우, 우리가 뜻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생각 속에서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서로의 존재를 보증하게 해 주는 그런 추론이 생긴다는 것이다. " (데이비드 흄. 인간 오성의 탐구. 고려원 112,3 쪽

이는 이중적인 태도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흄은 "필연성은 대상들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에 있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인과의 관념은...대상들 사이의 어떤 관계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흄은 필연성으로서의 인과성은 주관에서 비롯되지만 그것들은 대상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므로 그렇게 적용된 대상들은 인과적이라고 한다. 그런 대상들 간의 관계는 인과적 관계에 있다고 말할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물들 간의 인과적 관계는 현실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됨으로써 우리에게 필연적 연관이라는 "관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흄의 설명은 칸트에게 "명민한"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흄이 만약 이러한 필연적 연관성으로서의 인과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은 필연적 연관이 없게 되고 사물들 간의 시공간적 근접성만 주어지면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에게서의 필연적 인과성은 비록 주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흄처럼 사물들에 대한 경험에 의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관념의 연합이라기보다는 "감각경험 저편에 있는" 것, 즉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그리고 칸트에서의 선험적 관념은 흄처럼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는 지각들이 다발 (a bundle of perceptions in a perpetual flux and movement)과 같은 관념이 아니다. 관념을 이처럼 유동적인 심리상태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으로만 규정하고 필연적 연관성과 같은 인과성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반복적 경험에 의한 습관의 결과로만 설명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의 고정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특정 경험의 반복"자체도 불가능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경험의 반복"은 마음의 고정성을 전제로 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을 경우 동일한 경험은 두번 다시 반복될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연적 연관성이라는 "인상" 혹은 "느낌"을 안정적으로 교정해주는 그 마음의 고정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칸트에게서는 의식의 선험성이다. 경험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가능근거로서의 선험성. 이것이 칸트가 흄으로부터 비판적으로 발전시키려고하는 선험적 심리의 원리인 셈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쟈 2007-06-24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본격적인 서재인 생활을 시작하시는 건가요? 흄-들뢰즈의 경험론이 곧 이어질 거란 기대도 갖게 됩니다.^^

yoonta 2007-06-2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이라고 할 것까진 없고요.^^ 뭔가 쓰고 싶은게 있으면 또 적게 되겠죠. 흄-들뢰즈에 대해서도 시간되면 한번 정리해보고 싶은 주제네요. 이 글쓰면서도 들뢰즈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려다가 말았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