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쓴 100자평에 역자님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주셨기에 답변을 드리는게 예의인거 같아서 적어봤습니다. 글이 길어져서 페이퍼로 올려봅니다. 


이 책의 번역자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비문이 너무 많다니 유감입니다. 저 역시 일부 지젝 번역에 불만이 있는 터라 정성껏 번역하고 여러 차례 교정도 보았습니다. 그래도 번역에 오류가 없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 비문이라면 원서와 대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출간된 책을 검토하면서 서너 개의 오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서평에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서 ˝이해하기 힘든 비문이 너무 많다˝ 는 말씀은 무책임해 보입니다. 지젝은 그 인기만큼 가벼운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는 비문이 아니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이 책의 서문은 지젝의 다른 어떤 텍스트보다도 난해합니다. 
나쁜 번역에 악평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오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악평은 악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평의 근거를 제대로 제시해 주십시오.





일단 반갑습니다. 역자님.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서 좀 겸연쩍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근거를 제시해 달라고 하셔서 몇자 적습니다.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 악의라 생각치는 말아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원서내용이 궁금하던차에 구입하여 대조해 보았습니다. 대조해본 결과 제 의구심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어느정도 풀리더군요. 제가 님처럼 번역등의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전체적으로 대조할 시간을 낼수 없기에 서문일부만  살펴봤습니다. 읽어본 결과 가령 이런 문장들이 눈에 띄더군요. 


"이 책은 어떤 존재의 질서에도 구성적인 다양한 수준의 적대에 관한 몇가지 가정들과 함께 결론에 이른다." (본서16쪽)


이 문장은 보면 "비문"이라고까진 아니지만 한번 읽어서는 얼핏 무슨 뜻인지 금방 의미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독해력 좋으신 분들은 모르겠습니다만 저같은 평범한 독해력을 가진 사람들은 저와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 이 문장의 원문을 찾아보니까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더군요. 


"The book concludes with some hypotheses about the different levels of antagonism that are constitutive of any order of being,"


이 문장인데요. 제가 번역해보겠습니다. 


이 책은 어떤 존재의 질서에도 구성요소로 존재하는 다양한 수준의 적대에 대한 몇몇 가정들로 끝을 맺는다. 


차이점은 constitutive of 와  conclude with 의 번역차이에서 오는걸로 보이는데요. 님은 그냥 "구성적인"으로만 번역을 했죠.  그런데 이렇게 번역하면 "구성적인"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성요소인, 구성성분인" 이렇게 번역하면 이 표현이 "존재의 질서"와 갖는 관계가 보다 쉽게 드러나죠. conclude with같은 경우도 님은  "결론에 이른다"라고 하셨지만 지젝은 이 문장을 쓰면서 그 내용으로 책을 마무리한다는 뜻으로 conclude with라는 표현을 한거죠. 그래서 그 의미를 살릴려면 저처럼 끝을 맺는다. 마무리한다로 풀어서 이야기하는게 지젝이 전달하려는 의미가 더 잘 살지 않았을까요? 그 다음에 나온 오자 "detology"(dentology의 오자)는 교정자의 실수로 이해하겠습니다. 


역어선택에도 좀 미스가 아닌가 하는 부분들이 보이는데요. "self-identical"은 "자기 정체적"(14쪽)보다는 자기 동일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임석진씨도 같은 구절을 그렇게 번역했고요. "positedness"를 "정립됨"이라고 번역하셨는데 이러면 그 '수동적'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임석진씨처럼 "피정립성"이라고 번역하는게 더 나아 보이는 이유입니다. "반성된 결정"에서 결정도 bestimmung의 역어라면 '반성된 규정'(임석진씨는 "반성규정")으로 번역하는게 더 나아보이고요. 기타등등 이정도만 하겠습니다. 


대략 이런 식입니다. 원서와 대조해본 결과 많이 체크해보진 않았지만 오역이나 비문까진 아니더라도 이처럼 금방 이해하기 힘든 지나친 직역투, 번역투의 문장들이 눈에 많이 띈다는 겁니다. 물론 전혀 이해할수 없는 건 아닙니다. 저야 몇 문장만 풀어서 번역하면 그만이지만 책한권을 통채로 그것도 지젝의 책처럼 난해한 책을 통채로 번역한다는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죠. 그런점에서 역자님이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짐작은 됩니다만 책을 통해 독서의 기쁨을 누리길 기대하는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위와같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문장들을 만나면 또 원서를 사서 비교해봐야하는 수고스러운 일을 반복해야만 하게되니 난처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책을 보니 그래도 오역이 넘쳐나는 다른 많은 번역서들 보다는 훨씬 신경을 많이 쓰신 흔적들이 보이긴 합니다. 다만 님이 번역하실때 이정도 직역이면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하고 무심코 해석한 문장들이 간혹 지나친 직역투, 번역투 문장이 되어서 원서를 접하지 않고 번역서로만 보는 독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될수있다는걸 간과한것 같다는 부분입니다. 이런 점만 조금 더 보완해 주신다면 앞으로는 지금보다 훨씬더 나은 역서를 내주실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p.s. 하나만 더 추가해 봅니다. 


empiricist skepticism, which doubts that we can ever form a consistent structure of what reality is out of the only thing we have access to, our dispersed and inconsistent experience, with its multiplicity of data.


역자님의 해석:이는(경험론적 회의주의) 우리가 언젠가는 다양한 자료를 가지고 우리가 접근했던 유일한 것  외부에 있으며, 우리의 분산되고 혼돈된 경험인 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일관성 있는 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다. (본서 33쪽)



저의 해석: 경험론적 회의주의는 우리가 다양한 데이타를 통해서만 유일하게 접근가능한, 분산되고 비일관적인 경험의 외부에서 무엇이 현실인지에 대한 일관된 구조를 늘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차이점은 역자님의 문장은 we have access to를 과거로 보고 "접근했던"으로 번역했는데 과거로 해석할 이유가 전혀 없고  더 큰 차이점은 님은 out of를  only thing과  dispersed and inconsistent experience를 대등이나 병렬의 관계로 저처럼 보지 않고 only thing에만 걸리는 것으로 보고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지 않게 되니 "분산되고 혼돈된 경험인 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일관된 구조" 처럼 "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일관된 구조"를 수식하는 것으로 dispersed and inconsistent experience를 보는 어색한 해석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기보다 저처럼  only thing과 dipersed and inconsistent experience가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병렬이나 나열의 관계로 보고(콤마가 그래서 있는 것이죠) 이것들의 전체에 걸리는 것으로 out of를 해석해야 좀더 정확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p.s. 2 쓴 김에 몇 자 더 추가합니다. 


"트로츠키주의의 영구혁명으로부터 서구 마르크스주의(아도르노)를 거쳐 오늘날의 "저항"의 형식들에 이르기까지.." (본서 35쪽)


"negative dialectics" from Trotskyist permanent revolution through Western  Marxism(Adorno) up to today's form of "resistence"


재번역:트로츠키주의식 영구혁명으로부터 서구마르크스주의(아도르노)를거쳐 오늘날의 "저항"의 형식에 이르는 부정변증법....


이 문장은 negative dialectics를 빠뜨리고 해석하셨군요. 이게 없어서 원서없이 볼때도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는데 원서를 보니 궁금증 해결..


"이처럼 기 꺾인 헤겔의 정치적 한계에 더하여 존재론적 한계를 보는 것이 결정적이다." (본서 35쪽)


It is crucial to see the political as well as the ontological limits of this  deflated liberal Hegel.


재번역:기죽은 헤겔의 존재론적한계 뿐만아니라 정치적 한계를 보는 것이 결정적이다.


보통 as well as는 뒤에서부터 해석하는게 정확한걸로 배웠습니다. 가령 not only A but also B = 

B as well as A 이렇게요. 그러니까 crucial로 강조하고픈건 존재론적 한계라기보다 정치적 한계라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확정 상태가 결정적이다!" (35쪽)


this indeterminacy is crucial!


재번역: 이 불확정성이 결정적이다! 


in을 놓치셨군요!


"헤겔이 제안하고 있는 것은 단지 자연의 유기체들이 단순히 복잡성과 조직의 일정한 수준에서 자신들에게 전념하여 더 이상 자연의 경계들 안에서 적절하게 해명할 수 없는 방식 혹은 어떤 식이든 경험적 관찰의 결과로 마침내 자신들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서 35~6쪽)


The suggestion Hegel seems to be making is simply that at a certain level of complexity and organization, natural organisms come to be occupied with  themselves and eventually  to understand themselves in ways no longer appropriately explicable within the boundaries of nature or in any way the result of empirical observation. 


재번역: 헤겔의 제안처럼 보이는 것은 단순하다.  자연의 유기체들이 복잡성과 조직의 특정한 수준에서는 자기자신에게 집중하게 되면서 마침내 자신들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고 어느 면에서는 더이상 자연의 경계 내에서 적절하게 설명가능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경험적 관찰의 결과이길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역자님은 no longer를 appropriately explicable에만 걸리는 것으로 해석을 했는데 or 뒤의 result of empirical observation에는 해당하지 않는것으로 보았네요. 그러나 구문상으로도 그렇게 해석할 이유가 없고  문맥상으로 봣을때도 헤겔의 "좀더 자기 결정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을 의식하는" 내용을 강조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경험적 관찰의 결과"를 긍정하는 의미로 해석할 이유가 없습니다. 


번역을 비평하는 논거가 좀 부족한거 같아 번역문을 조금씩 계속 보고있는데 보시는 바와같이 눈에 띄는 구절들이 계속 나오는군요.. 계속 추가할지 말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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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현 2017-03-0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번역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좋습니다. 주관적인 지적도 있다는 느낌이 있지만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번역에 의구심이 든다˝거나 ˝비문이 너무 많다˝는 평가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원문과 대조해 보지 않은 채 많른 사람들이 책을 구매하는 사이트에서 그런 식의 말을 쓰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평가문을 수정하시거나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쓰신 평문을 내려주시기를 정중히 요청합니다.

yoonta 2017-03-04 17:44   좋아요 0 | URL
글쎄요. 지금도 번역문을 조금씩 계속 보고 있는 중입니다. 본문에도 내용을 약간 추가했고 계속 할수도 있습니다. 제 평가가 님 기준에서는 너무 가혹하거나 편협하거나 악의적으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여전히 미흡해 보인다는 것이죠. 당연히 제기준이므로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제 평을 보는 다른 분들도 그점 감안해서 판단하리라 봅니다. 님은 억울해 하실수 있다고 봅니다만 그것때문에 제 의견을 내려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yoonta 2017-03-04 18:18   좋아요 0 | URL
원문비교를 통한 비평이 아니고 인상비평이었다는 점에서 삭제했습니다. 대신 이 페이퍼는 기록으로 남기겠습니다.

소녀N 2018-08-24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안하지만 지젝 책 중에서 가장 읽기 쉬운 번역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악의적이고 멍청한 평가에 번역자님이 흔들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새벽에 너무 화가 나서 댓글 남깁니다.

yoonta 2018-09-16 16:58   좋아요 0 | URL
악의적이고 멍청한지 안한지는 원서랑 대조해서 읽는 분들이라면 알겠지요. 괜찮으면 한두페이지정도는 눈감고 넘어갈수잇고 아니면 페이지마다 잘못된 번역이 계속 튀어나오는 수준입니다. 잘못된 구절을 계속 업데이트할수있지만 무의미한것 같아 쓰다 말았는데 이게 ˝악의적이고 멍청한 평가˝로 보이시나보군요. ㅋ 웃고 지나가겠습니다.

소녀N 2018-09-17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알겠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정말 그렇네요. 악의적이고 멍청하다는 말은 죄송합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 말은 성철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법문으로 유명한 구절입니다만 사실 성철 스님이 최초로 한 말은 아니고 선가禪家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말입니다. 이 말의 해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가능하다고 봅니다만 제 나름대로 이 말의 의미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단 가장 단순하게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AA이다라는 동일률로 먼저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산은 산이기에 산이고 물은 물이기에 물이다라는 논리죠. A=A이므로 산을 단지 산으로 물을 단지 물로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으로부터 우리는 동일한 어구의 반복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사실 저 말은 다음과 같은 좀더 긴 문장에서 따온 말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렇게 구성되는 전체 문장의 마지막 구절만 따온 것이죠. 먼저 처음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할 때의 그것은 동일률의 논리에 기반합니다. 그런데 동일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 객체가 항상 그러하다라는 사태를 전제합니다. , 객체와 그 객체를 바라보는 주체의 동일성을 전제해야만 성립하는 것이죠. 대상을 분별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은 처음 인식했을 때의 그 양태와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 그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의식도 항상 일정해야 하죠. 대상A가 갑자기 대상B로 바뀐다던가 하는 현상이 생긴다면 산은 산일수 없고 물도 물일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와 같은 동일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 대상과의 구별이 가능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와 객체간의 이원적 구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이 내 마음 속의 것인지 나와는 무관한 내 밖의 것인지 혼동되면 여기서 동일성에 기반한 동일률은 더 이상 가능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에 기반한 세계가 바로 이런 세계입니다. 상식적이면서 일상적인 현상계 그리고 동일률, 모순률, 배중률과 같은 형식논리와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인 것이죠. 그리고 한번 이렇게 어떤 대상을 AB로 규정하게 되면 그 대상은 그 개념으로 고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체로서의 AB는 늘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것처럼 만물은 늘 유동하는 것이죠. 그런데 AA라고 부르는 순간 AA(라는 개념)으로 고정됩니다. 말이나 개념에 의해 우리는 A를 분별할수있게 되었지만 그순간 실체로서의 A는 잊혀지게 되는 것이죠.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일상적 분별력으로서의 현상계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이 현상계의 배후나 본질을 캐묻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시도는 다양한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죠. 비단 철학이나 종교에서만 이런 본질인식의 추구를 한 것이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20세기물리학의 하나인 양자역학과 같은 경우죠. 양자단위의 극소세계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세계에서의 물리학 다시말해 고전물리학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양자의 세계는 양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알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측정대상과 측정행위간의 명백한 분리도 여기서는 불분명해집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대상에 영향을 줄수있기 때문입니다.

 

앞서의 일상적 분별력에 기반한 의식을 표층의식이라고 한다면 일상적 분별이 불가능한 무분별의 세계를 바라보는 의식을 심층의식이라고 합니다.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하게는 대상의 분별가능성에 있습니다. 일상적 의식으로는 서로 다른 것으로 인지되는 AB는 심층의식의 관점에서는 무분별 혹은 무분절적인 일자나 전체로서의 실체일 수 있습니다. 현상적이거나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AB는 다르지만 그 본질을 들여다보니 사실은 구분되지 않은 동일한 실체라는 시각이죠. 표층의식이 현상을 보는 의식의 상태 혹은 관점이라면 심층의식은 대상의 이면이나 본질을 들여다 보려는 의식입니다. 표층의식으로 봤을 때 산은 산일 뿐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산이 산이 아닐 가능성을 이 때 보게 됩니다. 산이 물일 수도 있고 물이 산일 수도 있을 가능성 혹은 잠재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지질학적 시간대로 보면 이 말은 액면 그대로 사실이죠. 산은 강이나 호수 혹은 바다였고 혹은 바다가 융기해서 산이되는 경우는 흔하니까요) 이렇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로 이행하게 됩니다. 현상적 분절의 상태에서 본질적 무분절의 상태로 이행한 것이지요. 현상의 배후 혹은 기초적 본질로서의 무분절 혹은 상호관계성으로의 이행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무분절의 상태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무분절만으로는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죠. 현실화되지 않는 잠재성만으로는 현상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체로서의 일자만으로는 세계는 우리에게 인식될 수 없는 물자체일 뿐입니다. 흔히 불교를 모든 것을 공으로만 보는 허무적이며 명상적인 종교나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불교 특히 화엄종에서는 다즉일多則一과 동시에 일즉다一則多를 이야기합니다. 하나인 동시에 전체이고 전체인 동시에 하나인 상호연관으로서의 연기緣起를 말하는 것이죠. 때문에 불교를 정적이고 허무적으로 보는 관점은 편협한 관점일 수 있습니다. 일자에서 다자로의 이행 역시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불가분한 요소이기 때문이죠. 스피노자의 실체론도 이와 유사합니다. 전체로서의 자연을 자기원인으로서의 일자로 보고 세계의 다수성을 이 일자가 분화한 다양한 양태로 보는 관점 역시 전체로서의 무분절적 일자에서 분절적 다수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논리입니다. 헤겔의 변증법도 이와 유사하죠. 즉자는 부정을 통해 대자화 되고 다시 이를 부정함을 통해 즉자대자가 됩니다. 일자로서의 즉자는 부정을 통해 분별적 대상이 됩니다만 이는 다시 부정,지양되어야만 비로소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절대지로 고양될 수 있는 것이죠. 주자의 성리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주자가 쓴 <태극도설>을 보면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계의 참된 실재 혹은 본질로서의 무극은 현실적 다수성으로서의 태극과 같다라는 말이죠. 여기서도 전체로서의 하나에서 현실적 세계로서의 다수성으로의 이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리학이 정치이념으로서 보면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고려시대의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사상이긴 합니다만 사실은 철학적으로 보면 지극히 불교적인 이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성리학 다시말해 송대의 신유학의 성립배경자체가 고전의 자구해석에만 그쳤던 훈고학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의 존재론을 도입하면서 유교를 혁신했던 것인데 그 과정에서 이처럼 불교의 세계관과 존재론을 수용했던 것이죠.

 

결국 정리해보면 성철스님이 말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의 의미는 다음의 세 단계를 거치는 것과 같습니다. 1. 산은 산이고 물은 물(현상적 대상으로서의 산과 물) 2.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산과 물의 본질로서의 보편성은 하나 혹은 전체로서의 일자에 있다) 3.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전체로서의 일자성을 깨달은 뒤에 다시 돌아온 세계) 이런 과정을 거친 뒤의 그 산과 물이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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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일본사상>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1980년대이후 일본 사상의 변천사를 다루고있는데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부분은 2000년대 일본사상은 아즈마 히로키의 독무대이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저자의 평가에 의하면 아즈마히로키는 오늘날의 (일본) 사상이 더이상 비판적 이데올로기로서나 혹은 참여적 사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현실을 다만 감수하고 관찰하는 역할에만 그친다고 보고 이러한 변화한 현실에 사상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변화된 현실이 설정한 새로운 게임의 규칙에 사상을 변화시키는 시도를 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론이나 사상도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하기에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읽힐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아즈마 히로키는 2000년이후 일본사상을 주도할수 있었다라는 이야기 입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재설정된 오늘날의 게임규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재설정된 게임보드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어쨋든 승패가 확실히 결정되는 것, 둘째는 어떤 구체적인 성공과 결부되는 것입니다. 첫번째 조건을 통과하지 않으면 곧바로 '상대화'에 휩쓸리고 맙니다. 그렇다고해서 2000년대의 사상이 예컨대 1980년대의 오타쿠가 그랬던 것처럼 취미 판단의 특수성(센스)이나 축적한 지식이나 정보의 많고 적음을 경쟁하지는 않습니다. '센스가 좋다'라든가 '다른사람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라든가 '알고 있는 것'의 빠름이나 늦음 같은 것은 오히려 거기서는 모멸의 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규칙'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000년대의 사상은 플레이어들에 의해 널리 '공유'된 필드(주로 오타쿠계문화/하위문화)와 어떤 사람에게도 거의 공통된 문제(사회나 인터넷이나 공공성등)를 상대하게 됩니다. ...........'현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사상'은 그에 대항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 같은 도식에 감히 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한 심심풀이 놀이가 되어 버립니다. 2000년대의 사상이라는 게임은 이제 유희일수 없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든 진지한 경기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왜 이제와서 일부러 '사상'같은 걸 하려고 하겠습니까?"  (<현대일본의 사상> 사사키 아쓰시 291~2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최근 논란이 된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과 관련된 일들이 생각나더군요. 비단 사상뿐만 아니라 같은 대중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한참 인기있는 아이돌위주의 댄스음악이 아니기에  아무리 노래를 잘부르고 가창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대중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지 못해왔던 가수들이 소위 서바이벌이라는 포맷을 도입하여 예능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여주니 전에 없던 폭팔적 관심을 받게 된 사건말입니다. 이는 위에서 말한것처럼 "재설정된 게임보드"의 규칙에 음악을 도입하고 이를 통해 승패가 확실히 갈리면서 "구체적 성공과 결부"되는 방식을 정확히 적용한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예를들어 이전까진 김범수나 김건모의 가창력이나 음악적 해석능력이라는 것들은 대중들사이에서 "공유된 필드"에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었고 도리어 이렇게 공유되지 않은 필드를 '나혼자'펼쳐보이면 '허세'라는둥 모멸이나 핀잔을 받을 뿐이었지만 이러한 사상 혹은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공유되지 못한 필드들이 서바이벌이라는 게임보드의 규칙에 오르는 순간 비로소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케이스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들이 교차하게 되면서 다시한번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게 뭐냐면 소위 지식혹은 예술자체가 가진 탁월함과 그것의 사회적 수용은 서로 별개의 문제일수 있고 때로는  양립불가능할수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후자를 위해서 전자는 타협을 하거나 절충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할수밖에 없게 됩니다.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들이 그들의 음악적 자존심을 버려가면서까지 출연을 결정하였다면 바로 이런 '현상황'에 대한 절충이요 타협이라고 볼수있는것도 이 때문이지요. 하물며 대중음악내부에서조차도 사정이 이럴진데 그렇지 않아도 독서인구가 갈수록 줄어들고 소위 거대서사에는 관심을 상실한듯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사상이나 이론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겠지요. 원래 아즈마 히로키는 아사다 아키라나 가라타니 고진이 만든 <비평공간>이라는 평론지를 통해 등단했던 인물입니다만 후에 그가 이들과 결별했던 이유도 이러한 새로운 게임보드의 규칙의 수용문제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존재론적, 우편적 -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과 같은 본격적인 철학이나 문예이론서로 글쓰기를 출발했던 그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같은 대중들이 쉽게 공유할수 있을만한 영역으로 타켓을 변경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고요.  



그러나 저는 사상이나 철학은 '비판'이라는 성격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타협이나 절충보다는 사상그자체의 탁월함이나 진리성으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정치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요. 다만 비판이라는 작업이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다수대중들과의 접점을 찾을 수밖에 없는데 또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아즈마히로키나 나는 가수다와 같이 새로운 게임보드의 규칙을 수용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 사상이나 예술자체가 가진 진리를 절충시키지 않으면서 현실의 변화를 동시에 받아들일수 있는 방법이 오늘날 있을까요? 저로선 이에 대해 뚜렷한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아보이네요. 마치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신념인 지동설을 포기함으로써 목숨을 건진 갈릴레이가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이게 다 원래 현실이라는 것은 언제나처럼 영원히 풀리지 않는 아포리아로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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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이 이 책에서 대답을 시도하려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 있는가?

왜 우리가 있을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그는 강한 인본원리strong anthropic principle를 주장합니다. 인본원리란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가시적인 물리법칙들을 도출할 수있다"는 원리인데 지금의 우주가 지금처럼 보이는 이유를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때문이라고 보는 원리입니다. 그 중에서도 강한 인본원리는 단순히 환경적 요소뿐만 아니라 물리적 법칙자체까지도 인본원리에 의해서 해석하는 관점이지요. 이에 의하면 예를들어 상대성원리나 양자역학도 인간존재가 있음으로해서 성립하는 법칙이 됩니다.

때문에 이러한 호킹의 인본주의적 관점에서는 모든 것의 절대적이며 최초의 원인으로서의 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수의 우주로 구성된 다중우주multiuniverse에서 하필이면 우리가 살고있는 이 우주에 우리가 존재하게 된 원인에 바로 인간의 선택 혹은 관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강한 인본원리를 주장할 수있게 하는 배경에는  파인만의 양자이론이나 M이론같은 물리학도 근거로 작용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모형의존적 실재론model dependent realism"이라고 스스로 표현한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 개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철학은 이제 죽었다"(9쪽)라고 선포하지만 이 "모형의존적 실재론"을 통해서 그는 다시 철학을 도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한 "모형의존적 실재론"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과학을 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모형을 만든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과학적 모형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상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창조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정신적 모형들에도 적용된다. 우리의 감각과 생각과 추론을 통해서 창조된 우리의 세계 지각에서 관찰자 - 우리-를 떼어낼 길은 없다. 우리의 지각은 - 따라서 우리의 이론이 토대로 삼는 관찰도 - 직접적이지 않고 오히려 일종의 렌즈에 의해서, 인간 뇌의 해석구조에 의해서 형성된다." (<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 58쪽)

 
   

 

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말해 그의 모형의존적 실재론은 대상 그 자체에의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관찰하는 "인간의 뇌"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실재론?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이 모형의존적 실재론은 실재론realism과 반실재론사이의 논쟁을 을 "우회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형이 실재에 부합하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고 , 오직 모형이 관찰에 부합하느냐는 질문만 유의미하"(57쪽)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서 본 것처럼 결국 여기서 그가 말한 "관찰"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은 "뇌의 해석구조"에 의지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실 여기서 다시 이야기되어야 할 지점은 도대체 이 인간 "뇌의 해석구조"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는 이  인간 "뇌의 해석구조"란  무엇인가 (가령 인간 뇌는 컴퓨터처럼 조직되어있는 만능튜링기계universal turing machine과 같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등의 논의) 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론"과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뇌의 해석구조"에 의해서 "모형의존적 실재론"이 가능함을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이는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우회"한다기보다는 인간 뇌의 구조에 기반한 "관찰"을 중시하는 반실재론에 불과하게 됩니다. 플라톤적 실재론이나 수학적 실재론에 의하면  실재론은 인간의 "뇌"나 (뇌의 영향을 받는) "관찰"과는 무관하게 '실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있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호킹은 모형의존적 실재론을 인간뇌의 해석구조에 등치시키는데 이를 통해서 사실  그가 강조하려는 관점은 결국 대상에 대한  "관찰"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그가 관찰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앞서서 이야기한 강한 인본원리를 주장하기 위함이고 또 그 배경이 되는 양자이론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말이지요.  물리학에서는 물론 "관찰"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론"도 중요하지요.  이론과 관찰을 엄밀히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이론적 바탕을 먼저 세운 뒤 관찰을 통해 이를 검증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물리학에서 어떤 모형을 이론적으로 구축할 때 주로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수학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학도 "인간 뇌의 해석구조"에 의존하는 것일까요?  

호킹과 같은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인 로저 펜로즈는 수학을 인간의 뇌로 구성할 수있는 주관적 상관물혹은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수학적 연구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발견의 대상이라고 봅니다. 예를들어 카오스이론에서의 만델브로집합http://navercast.naver.com/science/math/3955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만델브로집합에서 발견되는 "자기유사성"은 인간에 의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수학자체의 내포적 원리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지는 현상이지요. 

    


이러한 발견은 뇌의 해석구조가 창조했다기 보다는 수학자체의 원리에 의해서 사후적으로 "관찰"될 수있을 뿐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펜로즈는 수학적 실재론을 주장하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이 수학적 실재론은 플라톤주의적 실재론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수학은 인간의 주관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적 보편으로 존재하는 형상eidos로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물리학은 이러한 수학이 없이는 자신의 "이론"을 구성할수가 없습니다. 미적분 없는, 복소수 없는 고전역학이나 상대성이론 혹은 양자역학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어떻게보면 물리학은 호킹이 이야기하듯이 모형의존적 (뇌의 해석구조 의존적)이라기 보다는 수학 의존적 실재론mathematics dependent realism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관찰"이라는 것 역시 수학적 도구 없이는 불가능한데 관찰 할 수있게 주어지는 data도 결국은 다시 수학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호킹이 이처럼 모형의존적 실재론을 뇌의 해석구조와 동일시하고 이것을 다시 강한 인본원리로 연결시키면서 무신론적 결론을 도입하게 되는 이론적 배경에는 양자이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양자의 운동으로부터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확정적으로 알수 없는데 특정한 위치나 운동량을 알려면 결국 "관찰"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결국 이 관찰에 의해서 양자의 운동이 결정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죠. 양자이론의 이런 불확정적이면서 확률론적인 성격을 그는 확대 해석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법칙 자체도 우리의 관찰에 의해 결정되는 강한 인본원리에 의해서 재구성된 우주일 따름이다라는 결론으로 비약하게 된 것입니니다. 

그러나 양자이론의 이런 불확정적 성격이 반드시 관찰자의 결정적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 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293 이라고 불리우는 입장과 유사한데 양자이론에는 이런 해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는 단지 양자이론을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입장 중 하나일 뿐입니다. 양자이론이 가정하는 소위 파인만적 "역사합"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러한 양자이론에 근거한 다중 우주들 가운데에 인간이 생존가능한 물리법칙과 자연환경을 가진 지금의 우주에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 뿐이라고 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호킹이 이야기한 것처럼 일종의 강한 인본원리에 의한 "역행적 우주해석"  을 통해 지금의 우주를 인간이 선택한 것이라고 본다기 보다는요. 

결과적으로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호킹이 제시한 강한 인본원리에 의한 우주해석은 양자이론이나 M이론이 제공가능한 여러가지 우주론해석 중의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는 각자의 시각과 입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제가보기엔 호킹이 이 책에서 제시한 원리들은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신에 의한 "지적설계론"를 비판하는 "결정적 한방"이라기보다는오히려 허술한 그의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서 확인할 수있는 것과 같이 철학의 죽음을 너무 일찍 선포한  결과 도출된 일종의  '헛스윙'에 불과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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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 2011-01-09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학자체의 내포적 원리라는 것도 인간 뇌의 해석구조와 무관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정신적 모형은 틀일 뿐이지 관찰결과가 나와있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만델브로가 발견의 대상이라는 얘기는 호킹의 글을 반박하기에는 핀트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용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yoonta 2011-01-13 01:03   좋아요 0 | URL
그 "인간뇌의 해석구조"라는게 도대체 무엇인가를 먼저 이야기해야겠죠. 인간뇌의 해석구조가 인간의 (해석적)주관성을 기초로하는 구조인가 아니면 인간뇌의 내부에 존재하는 실재의 구조인가하는 문제같은 이야기들 말입니다.

 

1. 프랑스철학자인 퀑탱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라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실재론에 관심이 많은 차에 바디우의 수학을 기초로한 실재론을 전개하는 이 메이야수 책을 읽고 바디우를 읽을때와 같은 일종의 계시성을 느끼게 되는군요.  메이야수는 바디우와 동일하게 수학을 사변적 실재를 논증하는 유일한 토대임을 논증합니다. 특히 그는 칸트와 칸트 이후의 철학을 인식주관과 실재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세계 혹은 경험세계를 기초지으려는 상관주의철학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의 방식은 고전 형이상학이나 데카르트적인 독단적 철학의 방식이라기보다는 "선조성"(메이야수가 개발한 개념으로서 우주의 기원이나 지구의 기원처럼 상관적인식의 경험적 주체인 인간 이전의 실재 혹은 대상이 가진 과학적/수학적 성질을 의미)이 던지는 의미들을 논증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독단주의 철학은 상관주의적 관계 이전의 실재를 신비화하고 실체화 혹은 총체화할 뿐 그것에 대해서 존재론적 설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인간의 유한한 경험의 한계 내부에 세계를 고정시키고 그 밖의 외부를 "유폐적 외부"로서 인식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러므로 비존재하는 무엇으로 간주하는  상관주의철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독단주의철학과 칸트 이후의 상관주의 철학은  인간의 인식가능성 내부의 세계와 인식 외부의 실재간에 뛰어넘을수 없는 간극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원화에 대한 비판은 종교를 과학과 분리시킨 근대이후의 서양의 세속적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영역 다시말해 인간의 경험적 인식의 세계 너머에 있는 인식불가능의 범주를 다루는 영역과 세속의 영역, 즉 과학적 실험과 관측이 가능하고 경험적 인식으로 설명가능한 세계 혹은 이와 관련된 지식이나 인식간의 분리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메이야수는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려 합니다. 그는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철학적 사유 자체가 헤겔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는 무전제에서 시작하는데 이 무전제는 다름아닌 사유불가능의 실재와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사유 혹은 철학적 이성은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은 실재의 공간에서 시작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철학의 고유한 성질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메이야수가 생각하는 절대자는 헤겔적인 ‘총체화’되는 실재가 아닙니다. 바디우가 <존재와 사건>에서 “하나로 셈 되어지는” 대상으로 분류한 것과는 다른 탈총체화의 경로를 걷는 절대자인 것이지요.

개연적 추론이 유의미해지기 위해서는 전체를 인식가능한 확률적이고 개연적인 “하나로 셈하기” 과정이 불가피하지만 그 결과 얻어지는 세계는 일의적 세계가 아닙니다. 대상의 인식가능성은 개연적 추론이 도달하는 필연성에 의해서 획득되는 동시에 탈총체화되는 우연성이라는 성격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지요. 메이야수는 이러한 실재의 특성을 바디우가 그랬던 것처럼 칸토르(칸토어)의 집합론을 통해서 논증합니다.

그 결과 메이야수가 도달한 결론은 일종의 세계의 “우연성의 필연성”입니다. 합법칙적으로 인식 불가능한 대상(우연성으로서의 대상)을 개연적 추론이라는 필연성을 통해서 논증하기. 그러나 그로부터 얻어지는 총체성은 탈총체화된 절대자입니다. 이러한 절대자를 사유하는 철학은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독단주의나 상관주의 철학이 철학 혹은 과학과 종교를 분리함으로써 야기한 종교의 신비화와 상대주의 혹은 상관주의 철학의 무비판성 그리고 과학의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이 될 수있는 기초가 됩니다.


2. 다음으로 흥미롭게 읽고 있는 책은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만들어진 신>이라는 저작을 써서 종교를 비판해온 도킨스와 <신은 위대하지 않다> 혹은 테레사수녀를 비판한 <자비를 팔다>라는 책을 썼던 히친스를 “디치킨스”라는 합성어를 사용해서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도킨스의 종교비판을 종교와 과학처럼 근본적으로 상이한 대상을 혼동한 일종의 “범주의 오류”에 빠진 책이라고 비난합니다.

“세상 곧 우주가 필연적인 게 아니기에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 추론해낼 수 없다. 그 대신,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관찰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의 역할이다.” (<신을 옹호하다>.테리 이글턴. 20쪽)      

부연하자면 이글턴은 (기독교의) 신은 세상을 과학이 추론할 수있는 합리적인 필연이나 세속적인 필요나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성경에 의하자면 신은 “동기 없는 행위, 무상의 행위”라는 “아찔한 우연성”을 통해서 세계를 창조하였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도킨스와 같은 무신론적 과학자의 시각을 통해본 종교는 합목적적이고 합리적인 필연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에 다만 기각되어야만 하는 신념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디치킨스류의 비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도 이야기했다시피 이는 종교와 과학의 근본적 차이를 망각한 비판일 뿐이므로 아무리 과학이라는 현미경을 통해서 종교를 들여다 보려고 해도 종교가 가진 근본적 토대를 비판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글턴의 논점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이글턴의 관점은 앞서서 제가 소개한 메이야수의 철학에서 보자면 데카르트적 독단주의나 혹은 상관주의적 철학의 입장을 반복하는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종교와 과학간에 넘을 수없는 차이를 설정하고 후자의 논증의 방식으로 전자를 비판하면 안된다고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저로서는 이러한 이글턴의 포지션은 도킨스류의 종교비판에 대한 탁월한 반비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바디우나 메이야수처럼 철학과 수학 혹은 과학의 가능성과 공통된 지반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획득되는 존재론적 토대를 확인하는 방식만이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비판이 될 수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몇가지 참조해야 될 구절들이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미국과 한국등에서 문제가 되는 기독교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글턴은 맑스가 종교는 “영혼없는 상황의 영혼”이라고 했을때 전제했던 종교가 세속적 “실리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종교, 즉 영적인 것을 현실에서 분리하여 감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유형의 종교”(같은 책 59쪽)였음을 이야기합니다. 세속적인 실리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종교를 통해서 영혼의 위안이나 안식을 구하려는 역설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최근의 뉴에이지 스타일의 종교가 유행인 것도 (혹은 서양에서의 불교유행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이러한 종류의 것으로 생각가능하지요. 
 

반면 이슬람 근본주의나 기독교근본주의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찾는” 방식이 아니라 대중적 운동이나 테러와 같은 저항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기본적으로 “반정치적”이라는 것이 이글턴의 분석입니다. 이와같은 종교를 통한 반정치가 가능한 배경에 그는 문화주의culturalism의 과잉을 지적합니다. 문화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이유는 “기존정치에 대한 환멸의 산물”을 예로 듭니다. “요컨대 기독교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급진주의도 정치를 종교로 대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정치는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했지만 종교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지요. 궁핍한 경제적 조건에 내몰려 정치적 무관심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대중들이 흔히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맹신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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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 2010-08-20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메이야수의 책은 언제 한번 읽어보고 싶던 책이라 뭐 읽어봐야 더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겠지만,
"이는 마치 인간의 유한한 경험의 한계 내부에 세계를 고정시키고 그 밖의 외부를 "유폐적 외부"로서 인식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러므로 비존재하는 무엇으로 간주하는 상관주의철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독단주의철학과 칸트 이후의 상관주의 철학은 인간의 인식가능성 내부의 세계와 인식 외부의 실재(이거 오타 맞죠? 인식외부의 '실재'라니...)간에 뛰어넘을수 없는 간극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게 됩니다"
칸트의 철학이 순수이성의 사용의 한계를 설정하였던 것이 물론 그 의도가 '절대자'를 인식불가능한 외부로 대피시켜드린 것일 수는 있어도, 그게 간극을 설정했다고 보는 것은 억지스럽습니다. 칸트 자신이 서문에서인가 말했듯이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는 일이 없도록 이성 사용의 한계를 긋고자 한 시도이니까요.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메이아수는 우연성이야 말로 절대자이다라는 식의 해석 같은데, 우연성의 필연성이든 그냥 우연성이든 그건 절대자의 의미를 그냥 해체하는, 뭐 굳이 절대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비유하자면 칸트는 신을 안보이는 곳으로 피신시켰다면, 메이아수는 신을 죽여놓고는 신자들을 데려와서는 '아무거나' 붙잡고서 이게 당신들의 신이지 않소? 우리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소 라고 말하는 꼴 같네요.

yoonta 2010-08-20 14:43   좋아요 0 | URL
1."인식외부의 실재"라는 표현은 메이야수의 '선조성'개념에 따른다고 보심 되겠습니다.

2. 메이야수에 따르면 칸트의 비판철학은 "약한 상관주의"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이 또한 메이야수의 관점에 따르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저의 글에서는 이부분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으니 자세한 설명은 책을 직접보시는게 좋을거 같아요. 저의 이해가 메이야수의 이야기를 자칫 왜곡할 수도 있으니까요.

3. 절대자란 표현을 고수하는 것은 '실재'에 대한 그의 실재론적 포지션 때문이겠지요. 메이야수가 절대자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역시 책을 보시는게 좋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