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칼럼을 읽었습니다.
하나는 장정일씨의 <장정일의 책 속의 이슈: 주체의 해석학>
이란 칼럼입니다. 미셸 푸코의 후기 저작인 <주체의 해석학>을 다룬 칼럼이지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26336.html
이 컬럼에서 그는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근대적 주체인 데카르트적 주체,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의해서 성립되는 '자기인식'의 주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배려'로서의 주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자기배려'란 말그대로 자신에게 몰두하는 행위들 예컨대 "연애,우정, 가정경제,건강법에서부터 용기있게 말하기, 스승의 말 경청하기, 분노와 슬픔 다스리기,타인의 시선과 사소한 호기심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 등등"과 같은 구체적 삶의 기술이나 지혜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자기 자신을 수련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자기수양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를 실천과 인식간의 이분법으로 생각해 보자면 자기배려는 전자에 자기인식은 후자에 해당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자기인식(인식)이 자기배려(실천)에 종속되는 덕목으로 존재했었는데 기독교신학이 득세하면서 육체보다는 정신을 중요시하는 풍토에 의해 이러한 "자기배려"와 같은 덕(의 중요성)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거나 망각되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리스 문화를 신학적으로 전유하면서 육체보다는 정신을 우선하고, 주체의 자기배려를 신에 대한 헌신에 맞서는 일로 죄악시"하게 되었다는 관점이지요. 이러한 푸코의 기독교해석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푸코나 니체에게서 기독교적인 신(종교)의 죽음이나 그것의 극복이야말로 진정한 "자기배려"의 과정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또 하나의 해석이 있습니다.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읽은 중대대학원신문에 실린 지젝관련 칼럼입니다.
http://blog.aladin.co.kr/mramor/3836735
이 컬럼은 지젝의 기독교해석을 다룹니다. 그는 지젝을 현대의 냉소적인 자유주의적 세계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기독교와 같은 보편종교가 가진 전복적 힘을 도입할 것을 주장합니다.
오늘날 후기자본주의세계는 지젝에 의하면 하나의 도착perversion의 일종입니다. 가령 현대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타자 즉, 자신에게 법적 위계적 질서를 강요하는 타자의 명령을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도 여기에 해당하지요.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문제가 많은 질서임을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에 일정한 거리두기를 합니다. 그것이 "냉소"입니다. 더이상 자본주의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하고"있지요.
"냉소적 이성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그것은 계몽된 허의의식의 역설이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 뒤에 숨겨져 있는 어떤 특정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하진 않는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62쪽)
지젝이 보기엔 서구식 자유주의나 "사민주의"도 이러한 냉소주의의 함정에 빠진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보편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만(자기인식) 그것과 실천적으로 단절하려는 삶의 기술(자기배려)를 연마하려는 노력은 부재합니다. 근대적인 계몽과 이성에 의해서 도달한 냉소적 현실 인식은 단지 자기인식이나 앎에만 머물고 있을 따름이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공구하려는 삶의 노력은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냉소주의가 만들어낸 일종의 "쾌락"은 결과적으로 "향락Jouissence이었기에 가능한 이데올로기입니다. 향락 즉, "즐겨라"라는 초자아의 명령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부터의 금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들이 예컨대 "웰빙강박, 카페인없는 커피, 다이어트와 채식"과 같은 것들이지요. 보다 잘 즐기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지켜야 할 금기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모든 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쾌락의 과잉"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므로 말이지요.
이처럼 냉소주의에 의해 균열된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 불러오는 효과는 "인위적으로 법을 세우려는 시도"가 되고 사도-마조히즘적 "도착"이 될수밖에 없습니다. 기성의 제도 기독교도 일종의 도착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미국의 공화당으로 대표되는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사도임을 자처하면서 별인 일이 이라크전쟁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도착이 얼마나 폭력적 일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역사적으로보면 중동과 유럽지역에서의 종교갈등의 역사자체도 이러한 도착의 역사라고 할만 합니다. 도착은 스스로가(혹은 신이) 세운 원칙(혹은 쾌락)만이 맞고 다른 신(혹은 타인의 쾌락)은 틀렸다라는 배타성 혹은 이기주의에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변형된 사도-마조히즘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도착에 대한 해법으로 지젝은 "죽은 신"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지젝에 의하면 제도기독교가 은폐해 온 기독교내부의 숨은 전통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욥에서 그리스도로, 다시말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계시"가 기독교 내부에는 존재하는데 바로 여기에 현대인의 도착적 곤궁을 벋어날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구약의 백미라고 할만한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평생동안 계속된 고초를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고난과 비극을 그자체로 긍정하고 무화시킴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레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욥기 28장 12절~28절)
고난과 고통은 (신의) 지혜를 깨닫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긍정을 통해서 욥은 결과적으로 "신의 자기분열"을 야기하게 됩니다. 신의 무능(현실의 고통과 고난)을 신의 전능(삶의 지혜와 깨달음)함으로 전유하기. 유대교의 역사는 사실 이러한 신의 무능함과 전능함의 "시차적 간극"사이에서 지속되어진 역사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교의 신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서 그 신이 "죽은 신"이었음을 당당히 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마가복음 15장 34절)라고. 그 자신이 인간이면서 신이었던 예수에 의해서 전능한 신의 무력함이 드러난 순간이지요. 이로서 기독교적 신은 그리스도에 의해 자기분열을 완성합니다. 그 결과 전능함으로써 존재하는 초월적 신은 "죽은 신"이 되고 남은 것은 이러한 고난과 고초를 무의미으로 환원함으로써 삶의 지혜를 완성하는 "자기배려"의 기술이 남게 됩니다.
"다 이루었다"(마태복음 19장 28절)
이 순간이야말로 고난과 고통으로의 그리스도적 희생의 삶이 스스로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서 비롯된 자기승리의 과정이었음을 선언하는 순간입니다. 유대교의 욥과 기독교의 그리스도는 이처럼 "죽은 신"을 통해서 다시 부활하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자기긍정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지젝은 이러한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이야 말로 현대의 도착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있는 계기라고 말합니다. "큰 타자의 상징적 허구에 매달리"거나 이데올로기적 도착에 빠지기보다는 현실의 고통과 고난(실재)와 직접 대면하는 용기, 주체의 냉소와 자기분열(자기배려와 인식간의 분열)을 극복 하는 전복적 실천을 강조하였던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독교가 말하려던 (전복적)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실천이야말로 대타자의 상징적 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자기분열의 완성이라는 점을 지젝은 "죽은 신"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P.S. 그런데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에서는 푸코와 라캉의 유사성보다는 하버마스와의 유사성에 더 주목합니다.
"이러한 푸코의 주체개념이 얼마나 엘리트적,휴머니즘적 전통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을 가장 그럴싸하게 실현한 것은 내적인 열정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일종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르네상스의 '전인주의적' 이상이 될 것이다. 푸코의 주체개념은 오히려 고전적인 것이다. 적대적인 힘을 조화시키는 자기-매개의 힘으로서의 주체, 자기 이미지를 복구함으로써 '쾌락의 사용'을 통제하는 방편으로서의 주체, 결국 하버마스와 푸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0~21쪽)
그는 푸코의 "자기배려"를 단지 "적대적인 힘을 조화시키는 주체"로,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하버마스적인 합리적이고 계몽적인 이성으로서의 주체로 바라봅니다. 이것은 다분히 푸코의 "자기배려"라는 개념이 가지는 실천과 인식간의 자기분열적 간극을 배제하는 관점인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배려"라는 개념이 내적으로 가지는 모순과 갈등들을 단지 계몽적 이성 혹은 냉소적 이성으로서의 '인식'주체로만 보려고 한 혐의가 있어 보이는 대목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에서처럼 "자기배려"라는 개념을 실천과 인식간의 분열과 간극을 내포하는 (헤겔적)자기분열의 과정으로 본다면 이것은 완전히 푸코에 대한 오독으로 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푸코의 "자기배려"개념은 하버마스적인 합리적 이성으로서의주체보다는 라캉의 정신분석이 야기하는 본질주의에 더 가까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재와 대면함으로써만 얻어지는 라캉적인 실재의 윤리라는 것이 기실은 푸코의 "자기배려"와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