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나무 카르페디엠 16
카롤린 필립스 지음, 전은경 옮김 / 양철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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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엔리케의 여정>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남미의 많은 나라에서 목숨을 걸고 미국 국경을 불법으로 넘으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민자를 부양할 수 있는 나라가 조국이다.” 이 말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최소한의 먹을거리와 자녀의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는 나라를 모든 사람은 원한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해 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자녀의 미래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미국의 국경을 몰래 넘어야만 했다. 무사히 미국으로 숨어들은 사람들은 남아있는 가족을 위하여 돈을 벌었고 일부를 꼬박꼬박 보내왔다. 그것은 멕시코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먹을 것이 되고 교육비가 되었다.

혹자는 좀 굶더라도, 교육을 못 받더라도 불법적 이민을 감행하지 않으면 가족이 해체되는 상황은 면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부모가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자식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눈물을 머금고 자녀를 부잣집에 수양딸, 아들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눈물 나무>의 상황은 우리의 그 어려운 시절보다 더한 상황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른들이고 큰 아이들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의 열차’를 타야 했고 죽음의 국경선을 넘어야만 했다.

루카의 엄마, 형, 누나도 그렇게 미국 속으로 스며들었다. 먼저 간 가족들의 뒤를 따르던  에밀리오 형은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코요테가 되어 있었다. 가장 나중까지 남아있던 루카는 가족을 찾아 미국 국경을 넘어가다 코요테가 되어 있는 형을 만나고 실종 되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알게 된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형에 대한 이해를 하려는 노력에 앞서 형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믿는다. 우여곡절 끝에 루카도 미국으로 들어 와 엄마 곁에 머물게 되었다.

해피엔딩? 

‘너희들이 저임금 일하는 바람에 우리의 노동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앗아가고 있다.’

‘너희들은 세금도 내지 않는다.’

...........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활동이 자유롭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많은 시민권자들은 주장을 한다. 미국에서의 그들의 역할은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편안하고 윤택한 삶을 받쳐주는 지렁이였다.

그들은 분명 미국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겉으로 들어나서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은 하면서도 그들이 빛으로 한발 가까이 다가서기만하면 그들은 한 치의 용서가 없었다.

언제 이민국직원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 하에 그들은 늘 불안했다.

강화된 새 이민법 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새 이민법은 불법체류자를 숨겨주거나 돕는 사람 역시 범죄자로 취급을 했다. 루카의 이종 사촌 형은 루카 가족(엄마, 누나, 형, 형수)이 한집에 사는 것이 불안했다.

 결국 두려움은 이민당국에 이모(루카의 엄마)를 고발 했다. 그 결과 자신의 엄마와 이모(루카의 엄마)가 추방을 당했다. 미국으로 갈 때 그리도 높던 국경이 루카가 멕시코로 돌아올 때는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았다. 루카는  엘 아르볼 데 라그리마스(눈물의 나무) 아래서 엄마와 이모를 기다린다.

엘 아르볼 데 라그리마스는 멕시코인들의 수만은 눈물과 이야기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한다.  사람들의 눈물과 이야기를 먹고 자라는 엘 아르볼 데 라그리마스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심정일까?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먹고 자라면서 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그들 곁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슬픔을 지켜봐주는 것 밖에 더 이상 어떻게도 해 줄 것이 없는 엘 아르볼 데 라그리마스의 눈물을 보는 듯하다.


---------------------- 이 책은 리더스 가이드 이벤트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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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면? - 미국을 제대로 보기 위한 가치 있는 가정들 라면 교양 1
김준형 지음 / 뜨인돌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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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고들 한다. 역사를 되돌릴 수 없다는 면에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어도, 뒤집어 보고 다른 가정을 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 갈수는 있습니다. 이는 지나간 과거보다 미래를 더 잘 살아내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현 국제정치의 가장 큰 테마인 유일 패권국가, 미국을 뒤집어 보고자 합니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

미국이 세계 최강이라 아니라면 미국은 세계에서 그렇게 욕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을 한다. 미국의 강력한 영향 하에 우리가 있지 않다면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아니, 이런 가정 자체를 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미국을 유일 패권국가로 전제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솔직히 <미국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면>이란 책 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정말 미국이 세계 최강일까?’ 자문 해봤다.  전 세계에 미국의 영향이 안 미치는 곳이 어디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정말 미국이 모든 면에서 세계 최강이야?’ 되물어 본다.

역사상에 패권 국가는 둘 뿐인데. 로마 제국과 미국이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한다.

제국은 침략을 통한 식민지 복속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힘과 권력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패권은 단순히 힘과 권력을 갖는 게 아니라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훨씬 더 월등한 국력을 갖고 있어 상대국의 행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월등한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 정치의 규칙을 결정하고 그 규칙을 실행하도록 강제 할 수 있는 나라를 패권국가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미국은 분명한 패권국가다.

미국이 패권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 2차 세계 대전 때문이다. 유럽의 열강들이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을 당시 미국은 영국의 군수품 기지역할을 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를 제치고 패권주의의 길을 가고 싶어 했다. 독일은 영국으로 들어가는 물자공급을 끊기 위하여  ‘U-보트 정책’의 일환으로 모든 선박들을 공격했다. 영국의 군수품 기지 역할을 했던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개입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미국은 ‘착한 세계의 경찰’이란 이미지를 얻게 된다.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미국은 패권적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과거의 제국주의가 개별적인 정복과 착취로 이루어졌다면 전후의 자본주의 질서는 전국을 연결하는 거대한 네트워크 성격이 짙었다. 냉전시대의 미국은 상대를 충분히 제압할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리해서 상대를 제압하기보다는 상대의 위협을 과장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한편 덩치 큰 국가들을 건드리기보다는 작은 나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길들이는데 힘을 쏟았다.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착한 세계경찰의 이미지를 갖고 있던 미국은 도덕적임을 강조하며 세계경찰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강고히 하는 대외정책을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9.11 테러는 그동안 세계의 경찰임을 자처하고 있던 패권국가 미국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누구도 감히 미국을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은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마치 성전을 치르듯 9.11의 배후라고 생각 되었던 오사마 빈라덴이 숨어들었다는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지속 될수록 그동안 미국이 쌓아온 이미지와 상반된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세계인들은 너무 많이 보게 되었다.

과거엔 물리적 힘에 의하여 국가 균형이 유지되었다면 전후에는 자본주의시대는 힘의 균형은 강력한 국가에 편승해서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려는 방향으로 균형추가 움직였다. 더 이상 미국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국가의 이익과 안전 앞에는 무력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은 언제나 안보를 담보로 우리를 억압해 왔다. 걸핏하면 혈맹관계를 들먹이지만 그것은 동등한 위치에서의 혈맹관계라기 보다는 미국이 절대 우위를 가진 관계다. 이런 관계 속에서 치러지는 모든 국제 관계는 언제나 그 기준점이 미국이 되어있지 결코 상대국의 입장이 고려되어 있지 않다. 한나라가 독립을 했느냐 아니냐는 외교권의 유무라고 한다. 그런데 한미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 대외정책의 자유가 정말로 있는지 의심스럽다.

지금은 변화하는 시대다. 미국 일방적 보장 동맹을 더 이상은 허용하질 않는다. 이제 일방적인 시혜를 주기보다는 준만큼(아니 그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방적 동맹이 아니라 상호적인 동맹 관계로 변하고 있다면 주종관계 같던 우리의 한미관계도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린다면 서서히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광대가 줄을 무서워하면 그는 더 이상 줄에 오를 수 없다고 한다. 예인의 경지까지 오른 광대는 줄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비록 언제부터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미국이 늘여 놓은 줄 위에 올라 서 있는 광대가 분명하긴 하지만 줄을 더 이상 두려워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신명나게 놀 줄 아는 예인으로 거듭날 것을 믿는다. 왜? 우리는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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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스 VOL. 1] 서평단 알림
트레이스 VOL. 1 팝툰 컬렉션 3
고영훈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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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들이 먼저 보았다. 2권을 사야 한다고 말을 한다. 뭔일이 일어나려다가 만다고......

아이들이 읽고 한참 후에 읽었다.

연속극.... 딱 그쯤에서 1권이 끊겼다.

내일을 기대한다는 멘트가 나올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권을 보지 않는다면 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만화로 들어갔다.  1부 놓쳐야하는 것, 2부 거지, 3부 장미, 4부 난

아직도 만화는 연재 중이다.

내가 읽은 단행본 트레이스 1은 '1부 놓쳐야 하는것' 의 4/5를 담고 있다고 해야한다.

너무 상업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 만화로 전체로 보면서 잘 만든 만화라는 생각이 들긴했다. 그림도 구성도.....

기회가 되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서평도서로 선정하기엔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정말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미리보기하는 것 만치도 보여주지 못했다.

몇사람이 같이 이 책을 보았는데 '그래서 뭐 어쨌다는거냐고?'라는 반응이었다.  차라리 1부의 에피소드를 다 보여주고 2부를 예고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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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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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안미란씨의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을 읽게 되었다. 많은 이야기 중에 미래에는 부를 판단하는 가치 기준에 먹을거리가 충분히 포함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자들은 좋다는 것을 찾아 얼마든지 돈을 지불할 수 있겠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몸에 좋은 것, 맛이 있는 것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몸에 좋고 맛있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많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배고픔을 면할 음식이 주어지는 것이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많은 시민들이(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고 ‘검역 주권을 찾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와중에 나는 <죽음의 밥상>을 읽는다.

현대인은 바쁘다. 어른들은 어른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바쁘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삶을 꾸려가고 있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좀 더 여유가 있어 의식주와 사람의 질에 다른 의미와 가치를 두는 사람도 있다. <죽음의 밥상>은 매일을 벅차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보통의 가정, 그보다 좀 여유가 있어 먹을 것에도 건강이라는 측면을 좀 더 강조하여 먹을 것을 구입하는 가정,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완전히 채식을 하는 가정을 모델로 그 가족들이 먹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을 취재하는 형식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먹는 것에 대한 윤리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들의 식탁에 빈번하게 오르고 있는 많은 고기(육 고기든 물고기든)가 이미 자연 상태에서 상당히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만은 제 7의 죄악이라고 한다고 한다. 처음 듣는 소리지만 뜨끔했고, 맞는 말일 거라 생각 한다. 소비는 수요를 창출했고 수요는 공급을 창출했다. 많은 고기들이 필요했고 대량 사육을 하되 더 많은 이윤의 창출을 위하여 동물들의 사육조건은 자연스러움에서 한참 멀어졌다. 자연스러움에서 멀어지다 보니 문제점이 나타나고 그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근본적인 것들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것들을 응급처치 식으로 하게 되고 그것은 또 연쇄적으로 다른 문제점들을 야기한다. 생명 유지를 위한 기초원인 우리의 먹을거리는 이제 단순히 생명에너지로서의 먹을거리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먹되 무엇을 먹는가가 중요하게 되었다. 건강한 먹을거리와 맛을 가치 기준에 두고 소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죽음의 밥상>에서는 건강한 먹을거리와 맛 말고 다른 것도 생각하라고 주문을 한다. 우리가 먹는 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재고-윤리적인 잣대를 드려대며-를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건강한 먹을거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건강하냐고, 그 먹을거리를 위하여 인간들이 행하는 비윤리적인 것도 아느냐고 묻고 있다.

 

우리가 마트에서, 정육점에서 흔하게 구입하는 제품의 거의 다수가 공장제 농업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 자연스럽지 못한 생장조건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는 가축들의 생명유지를 위하여, 상품성을 위하여 동물에게 엄청난 가혹행위, 비윤리적인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야채 또한 자연스런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재비하기보다는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대량 살포하여 길러지고 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길러진 고기와 야채는 보기 좋은 상품으로 마트로 나오게 된다. ‘완전 천연제품’이나 ‘농장에서 갓 들여온’ 같은 문구에 우리는 가끔 현혹당한다. 근사하게 포장을 하고 근사한 문구를 붙여 마치 최상의 상품인 척 하지만 그것은 농장의 상품을 치장하기 위한 상투적인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근사한 포장화 화려한 말잔치에 현혹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공장식 식품의 배경에는 싼 먹을거리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가 있다. 큰 틀에서 볼 때 공장식 농업 식품이 유기농 식품에 비하여 결코 싸지 않다고 한다. 건강한 먹을거리를 찾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다. 그러나 식비를 추가로 지불하지 않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구입하기하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호주머니의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약간의 추가 비용을 지불하면서 유기농 식품을 구하려는 게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것도 싼 가격과 편리라는 장점 앞에서는 여전히 맥 못 추는 소비형태다.

책을 읽고 난 다음도 소비 형태는 변하지 않지만 먹을거리에 대한 생각자체는 많이 변했다. 가급적 제철 식품을 구할 것, 먹을 것 자체에 대한 경건함을 잊지 말 것, 지나치게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지 말 것을 책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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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후안 데 파레하 - 신분을 초월한 사제지간의 우정과 예술이야기
엘리자베스 보튼 데 트레비뇨 지음, 김우창 옮김 / 다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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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식은 속에는 <바로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궁정의 시녀들’ -> 화가 벨라스케스 이런 도식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를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벨라스케스라는 화가를 알게 되었고 ‘궁정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 후안 데 파라하>는 벨라스케스의 노예이자 친구인 후안 데 파라하의 전기라는 말을 듣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후안은 노예로 태어났다. 영리해 보였던 후안은 안주인에게 글을 배웠다. 안주인가족이 흑사병으로 모두 죽자 후안은 전 재산과 더불어 마드리드에 있는 화가 돈 디에고 로드리게스 이 벨라스케스에게 상속이 되었다.

새로운 주인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궁정화가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후안은 벨라스케스 옆에서 물감을 짜주고 붓을 씻어주는 등 주인이 그림을 그릴 때 그 곁에서 시중을 들어 주는 일을 맡게 되었다. 주인의 곁에서 주인이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보던 후안은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후안은 벨라스케스에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을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난 네게 그림을 가르칠 수 없어. 섭섭하지만” 이란 말을 듣게 된다.  후안은 주인이 왜, 어째서 자신에게 그림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을 했을까 생각 한 끝에 주인이 자신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슬퍼한다. 그 슬픔은 주인에 대한 애정까지도 좀먹으려 하고 있다.

문하생이 없었던 벨라스케스를 보면서 후안은 주인이 문하생을 가르치는 것을 싫어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벨라스케스가 문하생을 받고 그 문하생들과 더불어 일을 하게 된 것을 알고 놀란다. 마님으로부터 궁정에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그들이 부탁하는 바를 거절 할 수도 없었으며, 많고, 바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도 사람들이 필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주인에게 그림을 그리기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했다가 거절을 당한바는 있지만 후안은 다시금 마님에게

“저도 그림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나 마님은 

“그럴 수 있다면 나도 기쁘겠다. 하지만 스페인에는 노예가 예술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단다.”-84쪽-

후안은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이유를 이제 분명하게 알았다. 후안은 인간으로 존중 받고 있으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에 주인네 부부와 사는 것이 행복했다. 주인이 자신의 뜻으로 후안에게 그림 가르치는 것을 거부 한 것이 아니라 법 때문에 할 수 없이 취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85쪽-

주인이 후안에게 보여준 신뢰와 애정은 후안이 자신이 그분들의 노예라는 사실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노예라는 사회적 신분은 후안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게 했다. 후안은 노예라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슬픔마저도 없을 수는 없었다.

마님은 후안이 색채를 사알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때문에 수놓을 때 후안이 색실 고르는 것을 도와 달라고 했으며 벨라스케스가 화실에서 색체를 연구할 때 쓰는 비단이 들어 잇는 궤짝을 후안 혼자 관리 하게 해 주었다. 후안은 주인의 옆에서 주인이 하는 작업을 도우면서 주인이 하는 일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한편으로 

“ 예술은 진실해야 한단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서 가장 엄격히 진실에 기초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만약 예술이 진실하지 않으면 그건 값어치 없는 것” - 92 쪽- 같은 벨라스케스의 생각도 배웠다.

네덜란드 화가 루벤스가 방문을 했을 때 벨라스케스는 배울 기회를 얻는 것을 기뻐했고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려 노력을 했다. 예술에 더 잘 봉사하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그림 그림에 대한 자만심에 빠져 있던 한 문하생에게 벨라스케스는
“예술은 진실이야. 장식이 없는 진실, 감상이 끼지 않는 진실이라고.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야.” - 113쪽 -

“예술은 진실이다. 예술을 섬기고자 나는 절대로 속임수를 쓰지 않으리라.”-114쪽-

가르침을 주는 것도 후안은 보았다.

벨라스케스와 후안이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후안은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을 베끼는 것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난 그 화가들에게서 배우고 싶단다. 베기는 것이 어떻게 공부가 되느냐고? 그건 마치 과거에 살았던 화가들에게 교습을 받는 거나 마찬가지야. 화가들의 색체를 골라 사용 한법, 그림자를 만든 방법, 헝겊 휘장을 그린 방법, 그 모든 것을 베기면서 배우는 거라고. 그건 마치 과거의 거장들이 내 어깨너머에 서서 나를 인도하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경험이지.” -141 쪽-

후안은 이 말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화가의 그림을 베낌으로서 그림을 배울 수 있다면 나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후안은 그림을 몰래 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금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몰래하는 것은 짜릿한 기쁨이다. 그러나 그 짜릿함의 내면에는 수많은 갈등들이 도사리고 있다, 후안은 위대한 스승의 그림을 보아왔고 예술 형태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주인과 다른 식으로 그림 그리는 무리요의 그림을 보고 주의 깊게 베꼈다. 또한 독자적으로 물감을 실험 했고, 빛과 그늘, 원근법에 대하여 연구했다. 후안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기쁨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어느 날 후안은 자신이 그린 성모 마리아상을 보고 놀랐다. 자신과 같은 흑인 마돈나를 그려 놓은 것이다.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후안은 혹시 자신이 스스로를 주인과 같은 자리에 갖다 세워 놓으려 한 것이 아닐까? 주인이 그의 종족인 스페인 사람들을 위엄 있고 기품 있게 그릴 수 있듯이 나는 나의 종족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후안은 고통스러웠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법에 대한 죄지 하느님에 대한 죄는 아니라며 하느님을 찾아 위로 받으라는 바톨로메의 충고를 받고 후안은 신앙적으로 안정을 찾는다.

후안은 계속 그림을 그렸고 자기가 그린 그림을 스승의 그림 사이에 끼워두어 왕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왕은 그 그림을 알아보았고 왕이 후안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 사이 주인 벨라스케스는 후안을 노예에서 해방시켜주는 문서를 써 줌으로서 후안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법에 위반되지 않게 해 준다. 

후안은 이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노예는 예술에 종사  할 수 없다’는 법은 더 이상 후안이 그림 그리는 것을 구속하지 않는다. 후안은 벨라스케스의 조수로 계속 벨라스케스의 곁에 머문다. 그리고 벨라스케스가 죽을 까지 그의 곁에서 그의 친구로 그의 조수로, 그의 동료로 머물다 자기의 길로 가는 것으로 이 책을 마무리를 하고 있다.

책을 보면서 후안과 벨라스케스가 보여주는 신뢰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어왔다. 벨라스케스는 노예인 후안을 노예로 대하지 않았다. 또 후안은 또 주인의 친절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볼 줄 알고대할 줄 아는 두 사람,  제대로 된 것을 줄 줄 알고 주는 것을 제대로 받을 줄 아는 두 사람 모두 멋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안의 입을 통하여 벨라스케스를 보게 되었다. 사람의 관계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으며 둘의 관계가 많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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