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역사 기행 - 한반도에서 시베리아까지, 5천 년 초원 문명을 걷다
강인욱 지음 / 민음사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진작 읽고 서평을 미뤘다가, 최근에 이 책이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러시아 번역서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더 미루지 않고 서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몇번 언급했지만, 강인욱 선생님은 국내 고고학계에서 <북방고고학>(정확한 학술적 표현인지 모르겠지만)을 전공하는 몇 안 되는 연구자이면서, 러시아에서 유학한 독특한(?) 이력과 함께 러시아 지역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몇 안 되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얘기하자면, 학술논문 이외에 칼럼으로 고고학의 대중화에 힘쓰며, 이처럼 비전공자들을 위한 개설서 출간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그렇다고 전공자는 보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a). 이 책은춤추는 발해인이후 강인욱 선생님이 내놓은 2번째 개설서이다. 이전 책에 비해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책이 담고 있는 시공간적 범위도 거시적 안목에서 다루고 있어 통사적인 시각과 미시적인 시각을 고루 갖춘 책이라고 할 수 있다(책 앞쪽에 초원문명을 표시해둔 지도를 보면, 이 책의 스케일이 어떤지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책이나 영화 등을 볼때 2가지 종류로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가 '초반에 흥미를 끄느냐?' 아니면 '초반에 다소 지루하지만 반전이 있느냐?'인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전자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유라시아, 중앙아시아, 초원, 북방, 실크로드, 초원의 길(초원로드) 등을 다루는 책에서 하는 얘기는 대동소이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주제로 묶느냐, 어떤 자극적인 요소를 부각시키냐, 어떤 새로운 시각으로 다루느냐 등에 따라 그 책의 학술적 가치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어떤 새로운 시각으로 유라시아를 다루느냐>에 입각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강인욱 선생님은 책 초반에서 초원 문명이 기존의 주요 문명(소위 4대 문명)과는 다른 패러다임에서 발생하고 발달했다는 점에서 이를 <제5의 문명>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일단 책을 보는 독자들은 뒷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무한한 상상력을 갖고 책장을 넘기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초원(북방)문명의 독자성과 중요성을 소개한 논문이나 책도 많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연구자도 많았지만 과감하게 이를 <제5의 문명>으로 떼어내서 단독으로 다루자는 사람은 못 봤으니깐 말이다(물론 기존의 4대 문명이라는 구분도 문제가 많은만큼, 초원문명 전체를 묶어서 제5의 문명으로 구분하는 것도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은 구석기시대 초원 문명의 발흥부터 시작해, 말과 전차를 매개체로 각지에 초원 문명의 위력(?)을 전파하는 과정을 다이나믹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부의 주요 내용은 말과 전차, 기마인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2부는 중원 왕조와 초원 국가와 관계를 그려내며, 중원인의 시각이 아닌 초원인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뒤이어 3부는 신라, 4부는 고구려를 다루면서, 5부에서는 한국과 초원에 대한 담론을 소개한 채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초원의 역사와 한국사를 이렇게까지 긴밀하게 결부시킨 책 또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에 대한 총론은 이 정도로 간단하게 하고, 세부적으로 필자가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들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1. <내시>와 초원 문명

내시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수메르문명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밖에 아시리아를 비롯한 근동지역에서도 내시는 존재하며, 구약에도 관련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내시라고 하면 여자 같고, 남성성이 제거되고, 권력의 암투에만 찌든 중원 왕조의 내시를 떠올리곤 한다(물론 명대 내시는 무림의 고수로 많이들 묘사하지만). 저자는 이 내시가 기마인들에게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으로 이해하면서 크리스토퍼 벡위드가『중앙유라시아 세계사』에서 언급한 주군의 친위부대인 '코미타투스'와 연결짓고 있다. 즉, 종족 번식과 재물, 권력을 포기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자신의 전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한 초원의 진정한 전사일수록 내시로 불리는 신체적 특징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필자는 고구려에 內官이 없었다는 기록에 의문을 갖고 나름의 생각을 정리했던 적이 있는데(클릭), 강인욱 선생님의 책을 보면서 관련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암튼, 내시의 기원을 살펴봄으로써 초원 문명의 특수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로 내시도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2. <늑대>와 초원 문명

늑대와 초원 문명을 떠올리면, 흔히들 흉노/돌궐/몽골/로마의 조상과 관련된 동물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새나 말, 민물어류 등이 등장하는 부여/고구려/신라의 건국신화와는 확실히 다른 점이다. 신바빌로니아의 네브카드네자르 2세(유다 정벌과 공중정원으로 유명한)를 구약『다니엘서』에서는 '교만한 죄로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7년 동안 반짐승이 되어 왕궁 주변을 미쳐 날뛰었다'고 기록하고 있단다. 이에 대해 저자는 왕이 벌판을 뛰어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일종의 의례 행위였다고 추정하였다. 일정 기간 벌판에서 심신을 단련하는 과정을 통해 강력한 리더쉽과 정신력을 키웠다는 것이다. 실제 네브카드네자르 2세가 7년간 미치광이로 지냈다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겠지만 그러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후 17~18세기 소빙기가 찾아온 유럽에서 늑대인간 설화 관련된 미신이 성행하면서 늑대는 야만과 공포의 상징으로 부각되었지만, 늑대는 사실 초원의 거친 야생과 강력한 초원의 군주를 상징하는 키워드였던 셈이다.


3. <秦>과 초원 문명

전국시대 최강국으로 부상하면서 결국 최초로 중원을 통일한 秦. 진의 역사를 대표할 키워드 몇개를 꼽아보면 병마갱, 시황제 등등이 있을텐데, 저자는 그중에서 초원 문명과 관련된 서융을 선택했다. 진시황의 14대조인 진 경공의 무덤(진공대묘) 발굴이 불발로 끝나면서 진의 위대함을 밝혀줄만한 고고자료는 사라졌지만, 2006년 7월부터 조사 중인 감숙성의 마자위안 유적이 조사되면서 정작 진을 괴롭히던 西戎의 무덤 안에서는 화려한 유물들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자위안 무덤은 기원전 4~3세기대의 것으로서 이미 진에 복속된 이후의 서융 무덤이다. 그 안에는 지금껏 중국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계통을 달리하는 고도의 세공 기술로 만들어진 금 · 유리 제품들이 있었으며, 특히 중원에서 이전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누금세공기법으로 만들어진 황금 유물들이 있었다. 초원문명이 어떻게 중원문화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 힘이 이후 진의 통일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진나라의 예가 변방에서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국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챕터를 마무리하고 있다. 


4. <칼>과 초원 문명

헤로도토스의『역사』에 따르면, 스키타이족의 동검은 군신 아레스의 상징물로서 아케나케스(Akinakes) 또는 아키나크(Akinak)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들은 아레스의 신전을 만들고 그 앞에 나무 다발을 쌓고 그 위에 오래된 금속으로 만든 칼을 세웠다고 한다. 제사에서 포로나 희생 동물을 죽을 때는 반드시 그 칼을 썼으며, 포로의 목을 친 후에는 그 피를 칼에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시선을 동쪽으로 돌려, 흉노 문화에도 이와 비슷한 동검 숭배 흔적이 있음을 지적한다. 흉노족의 동검은 經路라고 불렸으며, 흉노 선우가 중요한 맹세를 할때 경로로 백마를 죽이고 그 피를 술에 섞어 마셨다고 한다. 한편, 흉노는 두가지 신을 섬겼는데, 하나는 불상 비슷한 금제 인물상인 휴도금인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경로였다. 저자의 시각은 주나라의 輕呂를 지나 청동기시대 한반도의 고인돌에 매장된 비파형동검을 거쳐, 일본 가미고덴 유적에서 발견된 초원식 동검의 거푸집에까지 이른다. 초원문명의 칼을 중요시 여기고 숭배하는 문화가 대륙을 관통해 바다 건너 일본 열도까지 전파된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뒤이어 계림로 보검의 주인이 누구인지 고민하면서 저자는 자연스럽게 유목민의 필수품인 동복을 통해 부산을 초원과 바다를 한데 품은 지역으로 묘사하기까지 한다. 초원문명이 저 멀리 전혀 다른 문화를 이루며 살아온 대한민국 제2의 도시에서 살아 숨쉰다는 설정은 사실 여부를 떠나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로운 느낌이 들게 한다. 우리 삶 속에 알게 모르게 초원문명의 유산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5. <고구려>와 초원 문명

이 책의 4부는 고구려와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제목은 자극적이게도 '고구려, 초원을 탐하다'이다. 도발적이지 않은가? 저자는 고구려의 음식으로 소개된 맥적(꼬치구이)이 중국에서 유행하였다는 말로 시작하여, 중장기병이 사용하는 철제 등자의 기원이 중국인지, 아니면 고구려인지 과감하게 의견 제시를 한다. 그러면서 1924년에 조사된 알타이 쿠디르게의 무덤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등자와 비슷한 형태의 등자를 언급한다. 이후 1968년에도 투바 울룩-코룸 유적에서 5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식 등자가 마구와 함께 발굴되었는데, 이와 같은 고구려식 등자(혹은 극동식 등자)가 시베리아 초원 지역에서 20여 점이나 발굴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고구려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유연이 고구려의 철기 제작기술을 받아들이고, 유연에서 독립한 투르크는 유연을 무너뜨리고 초원에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후 유연의 일파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바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니(뒤에서 저자는 철륵 또한 투르크계통의 유목문화에 고구려의 선진 무기를 결합하여 세력을 키웠다고 적고 있다), 고구려의 등자가 세계사를 뒤흔든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뒤이어 저자는 고구려의 지두우 분할 작전이나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의 벽화 내용을 증명해줄만한 추가 자료가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챕터를 마무리하고 있다.


6. <한국사>와 초원 문명

이 책의 총평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한국사 혹은 한국문화에 깃든 초원문명을 총정리하고 있다. 반구대와 알타이 암각화의 유사성부터 시작해서, 고려때 입었던 도포의 일종인 철릭(원나라풍 의복), 초원에서 각지로 뻗어나간 만두, 초원과 농경의 장점을 적절히 조합해 만들어낸 한글, 한반도를 포함한 만주, 초원지역, 사천성, 운남성 지역을 아우르는 반월형 문화 전파대,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한민족 북방기원론, 일제의 기마민족설까지 한국사를 포함한 초원문명 제반에 대한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이어나갔다. 이 책의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책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를 정하자면 <초원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자>일 것이다. 저자는 과대전파주의자도, 그렇다고 국수주의자도 아니다. 그저 보다 넓은 시각과 안목으로, 당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신라 적석목곽분의 기원, 가야-신라 지역에서 확인되는 북방문화의 흔적 등을 연구하고 관심갖는 모든 사람들에게 警鐘을 울릴만한 지적이라 생각한다. 


서평을 쓰면서 필자의 흥미와 관심이 집중된 부분, 특히 주목했던 부분들 위주로 서술하고 있지만 책 안에는 이보다 다양한 내용들이 담겨 있기에, 유라시아 혹은 북방(초원)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혹시 책의 내용을 잘못 이해해 2차적으로 이 책의 내용을 접한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사항이 발생하면, 이는 모두 책의 내용을 제대로 소화해 전달하지 못한 필자의 잘못일 것이다. 하지만 책 마지막의 '러시아 유학 시절, 뱌체슬라프 몰로딘 교수님은 자기가 공부한 것을 20분 안에 일반인에게 이해시키지 못하면 공부를 잘못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0분 안에 독파하기에는 분량도 길고 주제도 어렵지만 편하게 읽어 주시길 바란다'고 쓴 저자의 말대로 딱 20분까지는 아니지만 지루하지 않게 책을 읽어 나갔고, 책 초반부를 읽으면서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만은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이 책을 통해 잠시나마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저 멀리 유라시아까지 넓힐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