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전쟁
로렌스 H. 킬리 지음, 김성남 옮김 / 수막새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이 책의 원제다. 직역하면 원시전쟁 : 평화로운 야만인의 신화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역자는 좀 더 강렬한 표현을 썼다. 원시전쟁 :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라고 말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 '뭔가'의 억제와 통제 속에서 형성된 시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문구였다. 그밖에 '구멍이 뚫린 두개골', 'Black & Red'가 조합된 표지와 함께 제목 하나만으로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를 전해주는 강렬함이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의 저자인 로렌스 H. 킬리는 선사시대 고고학 전공자로서 수많은 유적들을 조사하면서 전쟁의 흔적들을 끊임없이 발굴한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선사~고대인들의 삶은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전쟁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사회 활동이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물론 저자 역시 학부 졸업논문을 쓸때만 해도 '중미 지역의 초기 문명들이 평화로운 환경에서 발전했다'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고고학계에서 '전쟁'이라는 주제를 의도적으로 싫어해 연구에 많은 지장이 있었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전쟁狂이거나 호전적인 인물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인류의 삶 속에 끊임없이 있어왔던 전쟁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런 전쟁을 제어하고 인류 사회를 보다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다. 그러한 저자의 오랜 경험과 학술적 고민이 만들어낸 연구 성과가 바로 이 책인데, 무려 20여 년전에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서야 번역서가 국내에 나온 것이 참 씁쓸했다(필자는 역자의 소개를 받아 이미 수년전에 이 책을 읽은 바가 있는데, 영어 실력이 부족해 그 당시 상당히 고생했던 기억이 났다).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평화 모두를 알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그런 고민을 하면서 첫장을 넘겼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럼 목차부터 한번 살펴보자. 첫장에서 저자는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과거'라는 제목을 달고 원시전쟁의 개념과 원인, 원시전쟁을 바라보는 서양학계의 상반된 시각 등을 소개하고 있다. 어째서 오늘날 우리가 원시전쟁은 별거 없었고, 위험하지도 않았으며,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주제라고 인식하게 되었으며, 원시시대는 평화로운 시대였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과 연구사 검토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싶다.

 

원시전쟁을 바라보는 2개의 상반된 시각은 '토마스 홉스'와 '장 자크 루소'부터 시작한다. 2명 다 중-고등학교 철학(및 도덕) 시간때 배운 인물인만큼 그들의 명언부터 먼저 소개하도록 하겠다.

 

먼저 홉스는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요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원초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유를 포기하고, 중앙집권적 권력(군왕)의 통치를 수용하는 '계약'을 맺어야만 한다고 했다. 홉스의 저서『리바이어던(The Leviathan)』, 그리고 '성악설' , '왕권신수설' 등이 이것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그에 반해 루소는 문명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대신 인간의 성스러움을 내세웠으니 '고귀한 야만인''황금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성선설'과 결부되며, 중앙집권적인 권력 대신 국민의 자발적 합의에 의한 정치체, 즉 '직접민주주의'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겠다(로크는 둘 사이의 중간적인 입장에서 큰 의미가 없으니 제외한 듯 싶다). 이를 통해 보면 둘의 대립각은 딱 하나다. '원시사회의 인간이 평화로운 상태였냐? 폭력적인 상태였냐?' 그렇게 원초적인 인류 사회에 대한 대립은 시작된다(자아! 독자 여러분들은 각자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그러면서 저자는 얘기한다. 홉스와 루소 이후 신홉스주의와 신루소주의가 등장하고, 인류학계와 고고학계, 민족학계와 민속학계에서 끊임없이 전쟁과 인류사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결국 원시전쟁은 위험하거나 중요하지 않았으며, 원시사회는 평화로웠다는 '신루소주의'적인 사상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말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전쟁과 문명에 대한 신루소주의적인 시각은 폭넓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학계에서는 의도적으로 전쟁과 폭력에 대한 증거를 없애버리고 부정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아마 전쟁의 흔적인 무기를 모두 제의와 위세품으로 해석하고, 방어용 해자를 구획과 제의의 공간으로 해석하는 식의 접근을 말하는 것일게다). 그러면서 저자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만약 원시사회가 문명사회와 접촉하기 전에 진정으로 평화로웠다면, 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이다. 오히려 전쟁에 대한 증거를 적극적으로 찾아내 해석하고, 전쟁의 실상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전쟁이라는 병폐를 없애는데 여러 학문(민족학 · 고고학 · 인류학 등)이 기여해야만 한다고 얘기하면서 저자는 수많은 전쟁의 증거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전쟁의 광범위함과 중요성 / 전술과 무기 / 전투의 형태 / 원시전사 對 문명세계의 병사 / 전쟁과 살상 / 원시전쟁의 이해득실 / 원인에 대한 논쟁 / 전쟁의 배경 / 평화에 대한 희망과 그 취약함 /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과거의 뿌리

 

원시전쟁(혹은 문명 이전의 전쟁), 인류의 전쟁 본능 등에 대해 다룬 여러 책들이 있지만, 이 책은 인류학, 고고학, 민족학적으로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어 굉장히 풍부하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례들을 (위에서 보는 것처럼) 세부적인 항목들로 나눠 하나하나 분석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느낌'과 '상식'적인 시각에서 전쟁을 다룬 연구성과들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책 제일 뒷면 부록에 실린 여러 전쟁 관련 도표를 보면 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나름 전쟁고고학을 공부하는 필자 입장에서도 이런 식의 접근 방법은 적절한 것이며,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읽으면서 기존에 필자가 갖고 있던 생각과 다른 것도, 같은 것도, 몰랐던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몇몇 부분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대신하도록 하겠다.

 

Ⅱ. 전쟁의 광범위함과 중요성

 

 전쟁은 보편적 현상인가?

 

평화주의적 사회집단은 드물기는 하지만 모든 사회적 · 경제적 발전 단계에서 발견된다. 완전히 평화로운 농경집단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모든 형태의 폭력을 금기한 말레이시아의 세마이 족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1950년대 말레이의 공산 게릴라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들이 영국에 정찰병으로 고용되었다는 것이다. 세마이 족은 병사로서 다른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게릴라들이 그들의 동족을 죽이자 매우 적극적인 전사로 변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후 그들은 다시 평화로운 농경민으로 돌아갔다. 또한 스웨덴과 스위스는 과거 200년간 단 한번도 전쟁을 벌어지 않은 현대 국가 중 하나다. 18세기까지 가장 호전적은 사회 중 하나였으며, 호전적인 종족으로 꼽히는 바이킹족의 고향이 스웨덴이며, 오늘날 세계에서 손꼽히는 무기 수출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즉, 평화로운 사회집단은 어느 발전 단계에서건 나타나지만, 그 수가 매우 적을 뿐더러 세마이족이나 스웨덴과 스위스처럼 '평화 ↔ 호전'의 사회를 넘나들면서(그 기간이 짧든, 길든)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완전히 평화로운 집단도, 완전히 호전적인 집단도 없으며, 전쟁은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을 뿐이다.

 

Ⅲ. 전술과 무기

 

 원시부족의 무기

 

발사무기(화살)는 원래 사냥에 사용되던 도구였다. 전투용 화살은 의도적으로 화살촉을 약하게 만들거나 자루에 약하게 결합시켜 자루가 뽑힐 때 화살촉 전부 혹은 일부분이 상처에 남도록 만들었다. 북아메리카 캘리포니아의 윈투족과 몇몇 부족은 사냥할 때는 화살촉을 자루에 단단히 묶고 옆에 홈을 판 화살을 썼지만, 전투 시에는 느슨하게 묶은 화살을 사용했다. 남아메리카 인디오들도 화살대에서 쉽게 분리되는 화살촉을 사용했으며, 마르케사스 제도의 부족과 카나리아 제도의 구안체 부족은 창촉을 창대에 약하게 묶어 부러질 경우 상처에서 빠지지 않도록 고안된 창을 사용했다. 그밖에 독을 바른 발사체 무기를 사용한 부족들 역시 상당히 많았다.

 

한국 고고학계에서 진행되는 석촉 연구에 있어 형태의 차이는 지역적 · 시기적 차이를 반영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처럼 실질적인 기능의 차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그런 관심조차 없으니). 더불어 석촉은 기본적으로 사냥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며, 전투용 무기로서의 석촉이 연구되는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환호 혹은 목책으로 둘러싸인 취락을 공격하는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화살이며, 기습 혹은 매복에 가장 적합한 무기 또한 화살이다. 단순히 사냥하는데 필요한 도구로만 쓰인건 아니라는 소리다.

 

Ⅴ. 원시전사 對 문명세계의 병사

 

◎ 숨어서 하는 전쟁

 

원시세계에 대한 유럽 문명의 승리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전투 방법과 우수한 무기보다는 우월한 교통 수단과 농업 기술로 나타나는 월등한 경제력과 효율적인 보급체계 때문이었다. 현대전에 있어서 게릴라들이 정규군과 싸워 이긴 사례는 많지 않다. 이는 보급체계가 없거나 현대적인 경제체제에 의한 보급이 끊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명세계의 기강 있는 밀집대형과 난해한 군사기술이 원시부족의 느슨한 방식보다 낫다는 개념은 성립하기도 어렵거니와 차라리 환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미국은 20년 동안 치열하게 싸우고도 동남아시아의 게릴라들을 꺾을 수 없었지만, 걸프전에서는 인도차이나에 동원한 전력의 일부분만 투입하고도 세계에서 가장 병력이 많고 무장이 잘된 정규군 중 하나인 이라크를 궤멸시켰다. 이런 것을 봤을때 과연 전술로 타격하고, 기강으로 지배하여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시전쟁이 지금의 전쟁과 비교해 과연 수준이 낮고, 그 정교함이 떨어진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은 고도로 최첨단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지형, 자연조건, 기후, 인적상황 등 수많은 변수에 의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상 중 하나이다. 오히려 전자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전자기술 자체에 결함이 생긴다면 통신, 감시, 작전 등 모든 분야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면, 전쟁을 수행하는 '인간' 그 자체만 놓고 봤을때 과연 현대전이 원시전쟁보다 더 치명적이고 위험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싶다. 전쟁을 뒷받침해주는 사회의 인프라가 아니라면, 지금의 서구 사회가 이처럼 강력하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 제목이 이를 극명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총, 균, 쇠'라고.

 

Ⅶ. 원시전쟁의 이해득실

 

◎ 영토 획득과 상실

 

국가 이전의 부족전쟁 역시 영역을 변화시키고, 패자에게 빼앗은 땅을 승자가 갖는다는 면에서 문명사회의 전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정복은 차치하더라도 현대 고고학계가 이주와 식민 관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사시대에 이러한 현상이 있었음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고고학자 슬라보밀 벤클은 절멸이나 위력에 의한 강제 이주의 경우에도 고고학적으로는 단지 '승자들이 평화적으로 패자들의 영역에 공존'한 증거로만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게르만계 마르코만니족이 켈트계 보이족을 상대로 거둔 승리에 대한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을 예로 들고 있는데, 고고학적으로는 게르만계 마을과 무덤 형식이 켈트 족들이 살았던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일 뿐이라고 했다. 선사시대에는 매우 독특한 문화집단이 다른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아 영역을 확장하는 일이 많지만, 이러한 영역확장이 폭력적이었는지 아니면 평화적이었는지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고고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주제 중 하나가 점토대토기 집단이 청동기시대 후기(송국리문화 등) 집단과 어떻게 접촉하면서 한반도에 자리잡았느냐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동기시대 후기 집단이 초기 집단에 비해 어떻게 그 세력을 확장했느냐도 비슷한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교류, 이주, 전파 등등 문물의 이동 및 확산에 대해 학계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한다. 다만, 집단과 집단의 충돌(다시 말해서 '전쟁')이라는 측면은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섣불리 손을 못 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대등한, 혹은 어느 한쪽이 우세한 문화(기술력과 경제력, 인구수 등등을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양측이 아무 이유 없이 평화롭게 교류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가 아닐까 싶다. 평화는 그것을 누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을때 이뤄지는 것이지, 마음만 먹는다고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Ⅹ. 평화에 대한 희망과 그 취약함

 

◎ 전쟁은 되고 평화는 안 되는 이유

 

전쟁이 존재하는 사회적인 이유 중 하나는 평화 비용이 너무 비쌀 때가 있다는 것이다. 때론 전쟁을 한다 해도 별반 잃을 것이 없고 오히려 큰 이득을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전쟁은 젊은이들, 특히 미혼 청년들이 시작하고 수행하는데 가장 적극적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전쟁을 통해 잃을 것은 별로 없지만, 승리했을 때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집단에서는 상대적으로 연장자들이 이러한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을 자제시켜야만 했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평화적인 노력의 산물을 소진시키는 동시에 추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평화에 기생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경제적 이익만 갖고 전쟁과 평화를 저울질하면서 선택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왜 평화 대신 전쟁을 택하는가?

 

왜 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하는가? 이는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와 맞물리는 질문일 것이며, 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단순히 젊은이(추후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추적 멤버들)의 성장 동력과 호승심 때문에 전쟁은 필요한 것일까? 전쟁을 단순히 경제적인 시각으로만 볼 수 있을까? 100만이 넘는 엄청난 정규군을 유지하면서, 세폐로 막대한 금액을 바쳐 동아시아의 평화를 샀던 송 왕조, 하지만 송 왕조가 해외에 뿌려댄 엄청난 돈은 곧 동아시아 화폐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내수시장과 해외시장의 성장을 가져왔다. 결국 전쟁보다 평화에 드는 돈이 더 많이 들었지만, 장기적으로 평화로 인해 얻은 수익이 더 많은 구조였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평화가 돈이 많이 들지만, 종래에는 그것이 더 이득이 된다~라고 하는 확신과 신념이 자리잡는다면 사람들은 전쟁보다는 평화를 선택할 것이라는 얘기도 된다. 하지만, 그 확신과 신념은 무엇이 보장해준단 말인가? 어떤 사회적 제도, 어떤 정치체제, 어떤 경제적 대가가 필요한 것일까?

 

인류학자들은 지난 두 차례의 전쟁을 통해 홉스와 루소 사이에서 어정쩡한 타협을 이끌어 냈다. 즉, 원시전쟁은 빈번하고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심각하지도 않고 치열하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수많은 민족학적 ·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해 나무창으로 싸웠던 원시전쟁이 네이팜탄으로 싸우는 현대전쟁보다 결코 평화로웠다거나 더 상황이 나았다고 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단지 현대전쟁은 위계적인 정치체에 집중된 자원과 권력을 통해 수많은 국민들을 정당하게 전쟁에 내몰 수 있었으며, 전술적인 우위보다는 보급체계의 숙련 때문에 보다 더 '전쟁'스러워진 것 뿐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원시전쟁은 제한된 역량을 가지고 벌이는 총력전인 셈이다. 워털루 전투 이후의 200년간, 그리고 알렉산드로스(B.C 300년)에서 웰링턴(1800년)까지 약 2천년 이상을 건너뛰면서 서구의 전쟁 방식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이 책은 원시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어찌 보면 인류가 가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폭력성과 전쟁에 대한 생각까지 끄집어 내어 결국 앞으로 인류가 어떻게 전쟁을 생각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하고 있다. 저자는 전쟁을 연구하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으로 다음 것들을 꼽고 있다.

 

첫째, 교역은 폭력 투쟁을 더욱 부추길 수 있으므로, 오히려 주요 교역 대상자들을 보다 세심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둘째, 완벽한 군사적 안보라는 헛된 목표를 위해 순전히 기술과 무기 개발을 하기보다는 경제 발전과 평화적 기술의 진보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현재의 단위들이 상호 적대적인 집단으로 갈라지는 것을 막고, 만들 수 있는한 최대의 사회 · 경제 · 정치적 단위(이상적으로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를 만들어야 한다.

 

넷째, 고고학자들이 생산해내고 해석하는 물리적 정황증거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평화와 전쟁의 비교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학자들이 선사시대에는 전쟁이 일반적이었으며, 중요한 영향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누구나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한다. 전쟁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다 준다 하더라도 전쟁의 참상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호전적인 부족과 집단이라 하더라도, 전쟁에서 늘상 승리만 하는 것은 아니며, 늘 패배했을 때의 고통을 걱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사를 살펴보면 평화로운 기간보다 전쟁을 벌인 기간이 더 많았다. 전쟁이 나쁜 것이며, 불행한 것이며, 수많은 고통과 위험을 낳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인류는 전쟁이라는 방법을 선택하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이지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자진해서 뛰어들어가려고 하는가? 이 책은 그런 고민 속에서 쓰여진 책이며, 그런 고민을 독자와 함께 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는 自問自答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아! 이제는 그 자문자답의 결과를 독자 스스로 갈음하고 정리할 때가 됐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 어째서 우리가 전쟁이라는 주제를 더 자세히 알아야 하며, 전쟁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지 새삼 느끼게 됐다. 단순히 전쟁이 멋있어서, 전쟁영웅이 대단해서, 전쟁에서의 승리가 남겨주는 역사적인 허세감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난 전쟁을 통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 것인가를 고심하고 또 고심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지금 전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며, 주변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화력을 지닌 군사대국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또한 매년 막대한 양의 '전쟁비용'을 들이면서 값비싸고 한시적인 '평화유지'를 이루는 국가이기도 하다는 점을 명심하면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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