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 잃어버린 도시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6
클로드 보데 지음 / 시공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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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 디스커버리 전질을 사고, 처음으로 책을 읽었다(이노무 게으름). 이번 주제는 필자 개인적으로 많이 접하지 못 했던 '마야'에 대한 것이었다. 마야하면 딱 생각나는 것이, 아즈텍과 같이 중미에서 존속했던 고대 문명이라는 것, 인신공양과 희생, 거대한 피라미드를 가진 문명, 수많은 소국들이 난립하며 경쟁하던 문명...뭐 이런 것들일 것이다. 또한, 마야 문명은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에서 나름 잘 소개된 적도 있었는데, 몇권의 세계사 책에서 본 것 말고(예를 들면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와 같은 책), 마야에 대한 전문 연구서는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이번에 읽은 책은 필자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먼저 이 책의 성격을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이전에 소개했던 총서 2권『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와 비슷하다. 그 책에서도 이집트史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기 보다는 이집트사가 다시 세상에 어떻게 알려졌고, 근-현대를 거치면서 이집트가 어떻게 복원되고, 연구되고, 약탈당했는지 등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번 책에서는 마야가 그 주인공이었다(개인적으로 이집트의 경우, 마야보다는 접했던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큰 상관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마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던 차라 다소 아쉬웠다). 그럼 책 얘기를 좀 해 보기로 하자.

일단, 이 책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잃어버린 도시'라...전세계적으로 쇠퇴한 이후 사라지고, 그 역사를 알려주지 못 한채 파묻혀있는 도시가 얼마나 많겠느냐만은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만큼 이런 표현이 잘 어울리는 것도 또 없을 것 같다. 남들은 말타고 철기를 사용하면서, 한참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시기까지 석기를 쓰고, 수레(장난감으로는 썼지만)나 말도 사용하지 않고, 그들 고유의 전통을 지키면서 천년이 넘는 시간을 지내왔다는 것이 정말 신비하고 이상하기까지 할 정도다. 더군다나 마야의 여러 도시유적들은 각 도시국가들의 지나친 대립(전쟁과 노예확보, 인신공양, 거대한 피라미드와 신전 축조)과 각종 이상기후(가뭄, 농경 실패 등)와 맞물리면서 버려지고, 쇠퇴하고,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지지 않았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대국가의 멸망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 또한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마야 문명과 외부인의 첫 만남은 상당히 흥미롭게 진행된다. 콜럼버스가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착해 이 곳을 서인도제도라고 굳게 믿은후 9년이 흐르고...자마이카 해안을 따라 표류하던 유럽인들은 마침 신에게 바칠 희생양이 필요하던 인디오들에게 좋은 제물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중 대부분이 죽고 딱 2사람이 살아남았는데, '게르니모 드 아길라르'는 족장에게 온갖 충성을 바쳐 노예로 살아남았고, '곤잘로 게레로'는 전사가 되어 부족 간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장이 되었고, 원주민 여성과 결혼하여 철저히 그들과 동화되었다. 마치 동방 끝자락에 위치한 미지의 나라 조선에 와서 한문 이름도 새로 받고, 현지처를 얻어 살았던 몇몇 유럽인이 생각났다. 그렇게 보면 거리상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유럽과 미지의 세상이 만날 수 있는 한줄기 연결고리는 일찍부터 존재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곧 스페인에 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뭐 이미 유명한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이끌고 온 원정대는 노예사냥과 황금광산을 찾기 위해 유카탄 반도에서부터 시작해 내륙으로 약탈권을 넓혀 나갔다. 그의 원정대가 귀국한 이후에는 쿠바 총독이었던 '디에코 벨라스케스'가 자신의 조카 '후안 데 그리할바'에게 군함 4척과 장정 200명을 주고 황금을 찾아오라고 지시했으며, 참포톤이라는 곳에서 스페인군은 현지 인디오에게 패배를 하게 된다. 이윽고 아즈텍과 마야 문명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스페인은 더 강력한 원정대를 조직해 그들을 정복하기를 열망했다. 탐욕스러운 벨라스케스 총독은 그의 충성스런 부관 '코르테스'에게 멕시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그리고 1519년 2월 18일, 코르테스는 11척의 군함에 508명의 병사와 말 16필을 싣고 원정을 떠난다. 그리고 2년 뒤에 아즈텍 제국은 코르테스에게 멸망당한다(참 이런거 보면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수백년간 존속하던 거대 국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 말이다). 

하지만...스페인이 유카탄 반도 전체를 차지하는 데에는 이후 20여년이라는 시간이 더 소요됐다.

1521년 8월 13일, 아즈텍의 수도는 시체와 폐허의 더미에 불과했으며, 1523년 멕시코 서부와 남부가 스페인에게 정복되었다. 1525년, 코르테스는 140명의 병사와 3,000명의 인디오 전사 및 짐꾼, 150마리에 이르는 말과 돼지 및 각종 군수품을 싣고 온두라스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무려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1546년, 스페인은 유카탄 반도 북쪽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거느렸던 투툴 시우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1696년 이트차 호수의 가장 큰 섬에 타야살이라는 수도를 건설하고 세력을 떨치던 이트차족이 스페인에게 굴보가였다. 중앙아메리카가 스페인에 의해 급속하게 정복당하던 시기 이처럼 몇몇 도시들은 17세기 말엽까지도 저항을 계속 했다. 그동안 마야 문명에 대해서 아즈텍 문명보다 덜 중요하게(?) 취급했던 것이 사실이며, 그들의 역사에 대해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즈텍 제국이 스페인에게 굴복하면서 중앙 아메리카 지역도 자연스레 스페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직 현지 주민들은 새로 들어온 외부인들을 환영하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의 삶과 전통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복과정 속에서 밀림 속에 버려졌던 마야 문명의 거대한 건축물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사려 깊은 민족지학자이자 동시에 냉정한 종교재판관이었던 '디에고 데 란다(1524~1579)'였다. 1535년 최초로 이곳에 도착한 프란체스코회의 사제들이 마야의 우상을 파괴하고, 신전을 불사르고, 원시 제전이나 희생 의식을 치르는 자들은 극형에 처하고, 원주민의 전통적인 문화를 파괴했던 것과 달리 란다는 마야 문명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지만은 않았다. 그는 마야 문명과 용기, 절제, 의지, 서로 화합하는 기독교적 미덕을 보여준 원주민들을 찬사했으며, 그를 선진문명의 창조자로 인식하였다(영화 <콜럼버스> 등을 보면 당시 스페인인의 악랄한 모습이 잘 묘사되는데, 그래서인지 란다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정말 의외였다). 하지만 란다가 둘러본 버려진 도시 유적은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것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유럽인에 의한 마야 문명 탐험기가 시작된 것이다.

1746년, '안토니오 데 솔리스' 신부는 형제들과 그들의 아내, 여러 명의 조카를 이끌고 팔렌케의 산토도밍고에 도착해 마야의 환상적인 석조 건축물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솔리스 신부는 '라몬 오르도네스'에게 팔렌케의 유적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과테말라 총독이었던 '돈 호세 에스타체리아'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총독은 1784년 지방 관리였던 '호세 안토니오 칼데론'을 부랴부랴 팔렌케에 급파한다. 그리고 행정관리였던 그는 거기에서 18개의 궁전과 22개의 장대한 건축물과 168채의 가옥이 포함된 220개에 달하는 건물의 목록을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놀랍지 않은가? 18개의 궁전과 168채의 가옥이라니...수백명의 주민이 거주했던 거대한 도시가 발견된 것이다!). 그러자 이듬해 총독은 건축가인 '안토니오 베르나스코니'를 다시 팔렌케로 파견한다. 마치 일제강점기 당시 건축가와 화가로 구성된 전문 현지조사팀이 한반도 각지에서 연구활동을 벌인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작성된 연구보고서가 당시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이었던만큼, 이 무렵 스페인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 역시 이후 마야 문명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점점 중앙 아메리카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일단 스페인 왕 샤를 3세가 중앙아메리카의 유적과 유물을 보고 싶어했고, 베르나스코니가 죽고 난 다음 새로 과테말라 총독이 된 '안토니오 델 리오' 대위는 조직적으로 유물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델 리오는 '이런 우수한 문명을 미개한 현지 원주민들의 선조가 창조해 냈을리 없다~이는 고대 로마인이 우연히 이 곳에 도착해 전수해 준 것이다.'와 같은 제국주의 유럽인들이 늘 언급하는 과대전파론적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후 새로운 스페인 왕이 된 샤를 4세의 명을 받고 '기예르모 뒤페' 대위가 멕시코를 방문한다. 그는 1805~1807년 사이 3차례에 걸쳐 고고학적 탐사를 실시했고, 그때 동행한 멕시코 출신 삽화가 '루시아노 카스타녜다'는 각지에서 훌륭한 삽화들을 그려 오늘날까지 남게 되었다. 그는 이전까지 작성된 삽화에 비해 훨씬 우수한 작품들을 남겼지만, 아직까지도 삽화 곳곳에는 화가의 상상력이 동원된 흔적이 역력했다. 즉, 19세기 초만 해도 마야 문명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은 존재하지 않았단 뜻이다. 이후 멕시코 일대의 유적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게 되었고, 1828년 프랑스의 '앙리 바라데르'가 뒤페와 카스타녜다의 자료를 접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윽고 멕시코 일대의 유적에 대한 각종 저서가 출간되면서 당시까지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된 이집트와 인도의 고대문명만큼이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봤을때 여러 학자들의 논문에서 근거자료로 활용된 자료들을 작성한 뒤페는 당시까지 중미 고대 문명을 연구한 사람 중 가장 분별력이 높고, 학구적 열망이 높았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1827년 중앙아메리카 연방에서 일하던 '후안 갈린도'는 코판에서 한달 넘게 머물면서 각지의 건조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스케치를 남기게 되었다. 그의 연구성과는 당시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컸던 파리 지리학회에도 여러번 소개될 정도였으며, 그는 중앙 아메리카 각지의 보고서와 함께 지도까지 작성했다. 하지만 마야 발견의 위대한 예술가이자 최후의 위대한 탐험가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뭐니뭐니해도 '장 프레데릭 막시밀리안 드 발덱' 백작이었다. 100살이 넘은 나이에도 70대의 모습을 유지한 그는 정열적인 탐험가로 세상 모진 풍파를 다 겪은 인물이었던 그는 경력도 화려했다(물론 일부 뻥도 좀 포함되었을 듯). 그는 희망봉을 탐험했으며, 42차례나 혁명운동에 참가했고, 프랑스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가했는가 하면, 사략선을 타고 인도양에서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는 19세기 전반부에 크게 활동했으며, 마야 문명과 힌두, 헤브루, 그리스, 이집트 문명과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멕시코에서 무려 11년을 보낸 그가 남긴 유카탄 반도의 아름다운 삽화들은 이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19세기 초중반이 되면 이제 마야 문명은 낭만주의 예술가나 탐험가가 아닌 진정한 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존 스테판스'는 이미『이집트, 아라비아, 페트레아와 성지 여행기』,『그리스, 터키, 러시아, 폴란드 여행기』를 써서 유명했는데, 어느날 발덱 백작이 쓴『유카탄 지역의 진기한 여행』의 복사본을 발견하고 3번째 책을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런던에서 만난 젊은 건축가 '프레드릭 캐서우드'와 함께 중앙 아메리카로 떠난다. 그 둘의 결실은 1841년『중앙아메리카, 치아파스, 유카탄 여행기』로 출간되었는데 이 책에서 고고학적 서술은 1/3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험담으로 가득했다(어쨌든 책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캐서우드의 예술적 정확성은 스테판스의 엄격한 서술방식에 잘 부합하면서 당대의 새로운 기준을 설정했지만, 여전히 삽화에 있어 어느 정도의 상상력은 가미가 되었다. 암튼, 그들이 1842년에 출간한 책은 무려 44곳의 유적지에 대한 고고학적인 내용과 삽화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책은 19세기 내내 매년 재판을 찍을 정도로 호황이었다. 그만큼 스테판스가 마야 고고학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시각으로 넘어간다. 지금껏 마야의 도시 유적(건축물이라든가, 도시 그 자체라든가) 혹은 마야인들의 문화와 풍습이 주된 관심사로서 연구되었다면 이제는 마야의 고문서가 주인공이다. 마야 문헌은 크게 세 종류인데, 마야의 상형문자로 쓰인 필사본과 스페인 정복 이후 토착민이 쓴 것을 라틴 문자로 번역한 것, 스페인 정복자들과 사제들 혹은 관리들이 쓴 연대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중 주목되는 것이 바로 첫번째 정복 이전 마야인이 남긴 그들 고유의 문자기록들이었다. 현재 마야인의 기록은 3개의 사본만이 남아 있는데(4번째 사본이 최근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첫번째는 1739년 드레스덴 왕립 색슨 도서관장이었던 요한 괴체가 빈을 여행하는 동안 구한 '드레스덴 고문서 사본'과 1815년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 중이던 에드워드 킹, 즉 젊은 킹스버로 경이 수집 및 재정리한 '킹스보러판'이다. 두번째는 1859년 동양학과 아메리카학을 연구하던 젊은 연구자였던 프랑스의 레옹 드 로스니가 파리 국립도서관 휴지통에서 발견한 '페레시아누스 사본' 혹은 '파리 사본'이며, 세번째가 바로 브라쇠르 드 부르부르 신부가 어렵사리 찾아낸 '치말포포카 고문서'였다. 특히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인디오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언어와 역사, 문화에 대한 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여기에서 내용은 다소 뒤에 나오는 부분이지만, 고문서에 대한 연구는 이후 마야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각종 기록과 삽화, 고문서 등이 연구되면서 마야 문명에 대한 전모가 하나둘씩 밝혀지던 그때 새로운 발명품은 마야 역사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을 불러 일으켰다. 그건 바로 1839년 8월 은판 사진술이 출현한 것이었다. 이미 앞서 언급한 스테판스와 캐서우드도 사진기를 동원한 적이 있지만, 흡족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 결국 삽화로 대체하였고 초보적인 사진술은 환영받지 못 했다. 하지만 스테판스의 책을 읽고 감명받은 '데지레 샤르나이'는 1858년 멕시코로 떠나 47장의 사진과 사진 석판 2본을 첨가한 커다랗고 값비싼 사진집을 작성하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2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진가이자 고고학자로 활동했던 그가 새롭게 시도한 것은 사진술 말고 하나가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주형을 뜨는 것이었다. 샤르나이는 영국의 젊은 신사 '알프레드 모슬레이(그 역시 스테판스의 저작을 보고 이 일에 뛰어들었으니, 그가 남긴 업적이 어느 정도였는지 재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의 후원을 받아 각지에서 건축물의 주형을 뜰 수 있었다. 솔직히 이 주형을 뜬다는 것은 그렇게 익숙치가 않았다. 일제강점기때에도 유물이나 건축물을 직접 반출해가는 경우는 있어도 주형을 뜨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이는 아마도 우리 고대문화에 있어 부조나 조각 등을 많이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암튼 당시 유럽에서는 이 방법이 크게 유행한 것 같다.

이윽고 1884년 '테오베르트 말러'에 의해 치아파스와 우수마신타 계곡, 페텐에 산재한 소규모 유적들과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유적들(피에드라스 네드라스와 나란호와 같은)이 조사되는가 하면, 이들 연구성과가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등 마야에 대한 연구는 갈수록 활발해졌고, 그렇게 시간은 20세기 초반으로 넘어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보남파크의 화려한 벽화유적이 발견된 것은 1946년이었다. 사진작가 '질리 하르'는 지금까지 아무도 확인하지 못 했던 새로운 유적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학계의 큰 이슈로 자리잡았다. 왜나하면 벽화의 내용은 지금까지 마야 문명에 대한 인식을 100% 뒤집어놓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잔인한 고문장면과 참수형, 희생의식, 전쟁과 노예사냥 등 폭력적이면서도 원시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마야인을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수준높은 문명인이라고 언급하길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루스'는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거대한 피라미드와 비취로 만든 화려한 부장품들이 파묻힌 티갈의 분묘유적 등이 발견되면서 마야 문명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덧붙여 마야의 상형문자에 대한 해석 및 연구도 급진전을 이루게 되었고, 20세기 중반까지도 잘못 알고 있던 마야인에 대해 이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조금씩 하게 된 것이다. 

이상으로 책에 대한 소개는 마치도록 하겠다. 필자가 전체적으로 시기별로 마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사람들을 주욱 나열했는데, 이는 일단 필자 스스로가 마야 문명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특히 마야史보다는 마야 문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과정, 硏究史가 흥미롭기에 좀 주절주절 떠벌린 것이 있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의 업적(업적이 아닌 것들도 더러 있지만)이 정말 200년 남짓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것도 재밌었다. 더 나아가, 그 200년간의 업적은 최근 수십년동안 얻은 업적에 비한다면 아주 작은 것들에 불과했으며, 인류는 비로소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마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웠다. 마야인이 본능적이며, 폭력적이며, 오만한 민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불과 60여년 전이라니. 

그리고 책 뒷면에는 늘 그렇듯이 원서로만 접할 수 있는 그런 자료들의 단편이나마 소개되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스테판스나 갈린도의 보고서 혹은 책의 내용 일부, 레옹 드 로스니의 상형문자 연구성과, 그리고 마야의 20진법 및 그들의 상형문자를 이해하는 최근의 연구성과와『포폴 부』라는 현전하는 마야-키셰족의 경전에 나오는 그들의 신화 등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당시 유럽인들이 그린 여러 삽화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대 이집트를 묘사한 삽화도 많지만 이 책에서는 특히 삽화의 변천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한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즉, 애초의 삽화와 지금의 삽화, 마치 3D로 복원한 듯한 선명한 최근의 모습까지를 비교하고 있으며 각 삽화를 남긴 사람들의 잘잘못까지 언급하고 있었다(예를 들면 상상력이 많이 가미되었다든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수준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점 등). 또한 이집트의 상형문자와는 또 다른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마야의 상형문자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위해 삽화가 다수 삽입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거기다가 내용 중후반부에 사진술이 발견되면서 마야 문명 연구에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내용 기술과도 어느 정도 잘 부합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마야 유적지를 찍은 흑백사진 몇장과 최근의 컬러사진 몇 장이 전부이고, 대부분은 삽화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어디 인터넷서점 서평을 보니 이 점을 단점으로 꼽던데, 필자는 오히려 색다르고 책의 구성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점은 그만큼 오늘날도 마야에 대한 최신의 연구성과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가 마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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