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
이희진 지음 / 소나무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하아~정말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서평 하나를 쓴다.
얼마전 이 책의 저자이자『전쟁의 발견』의 저자인 이희진 선생님과 온라인상에서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아직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는 못 했지만). 예전에 필자가『전쟁의 발견』에 대한 서평을 쓴 바가 있었고, 그 서평에 대해 서로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인데...저자의 학문적 스타일이 어떤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대화가 엇나갈 수도 있겠다~싶어서 또 다른 책을 하나 구입해보게 되었다. 일단 이 2권의 책 말고도 여러 책들을 쓰셨지만, 일단은 이 책 하나만으로도 저자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책을 구입해놓고는 이래저래 송년회다, 신년회다, 종무식이다, 시무식이다...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서야 겨우 서평을 쓰게 되었다. 

암튼...딱 제목만 봐도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새삼 논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한 책 표지의 신공황후가 그려진 우표만 봐도 그렇고 말이다. 이 책의 목차는 크게 제1장 식민사학 왜 문제인가?, 제2장 한국 고대사 학계에 침투해 있는 식민사학의 논리, 제3장 깡패 논리로 심어지는 식민사학 이렇게 3개로 구분할 수 있겠다. 제1장에서 저자는 식민사학이 무엇인지, 일종의 개념 정리를 하고 있다. 그 다음에 그러한 식민사학이 한국 사학계에 어떤 식으로 투영되었는지, 한국 사학계가 어떤 식으로 식민사학의 잔재 속에서 허우적대는지를 학문적인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어가면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왜 이렇게밖에 될 수 없는지, 왜 이런 현실이 오늘날 계속되고 있는지...비판적인 시각에서 살펴보고 있었다. 이 정도만 말해도, 왠만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와! 정말 이런 내용을 책으로 써낸 사람이 있단 말이야!!!'라고 느끼면서 놀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있다. 그리고 그 문체가 상당히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데다가 실명을 거론하고 있어서 더더욱 놀라운 글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딱 책 표지만 살짝 넘겨서 나오는 저자의 약력만 보고도 앞으로 나올 책 내용이 기대되서 두근두근거렸다.

- (전략) 하필 역사학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한국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 와중에 못 볼 꼴을 많이 보게 될 고대 한일 관계사 분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중략)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고대사 연구자들이 얼마나 일본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뭘 모르던 시절,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되는 미천한 신분을 깨닫지 못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여기저기 발설한 죄로 지금까지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이러한 인생역정과 관계가 깊다 -

우리나라의 그 어떤 역사학자가 이런 내용을 거침없이 책 표지의 '저자 소개'에 쓸 수 있겠는가. 그것도 인터넷상에서 활약하는 아마추어나, 되도 않는 대륙삼국론 등을 주장하는 재야사학자가 아닌 정식으로 대학원에서 석 · 박사 학위까지 받으신 분이 말이다. 이전에 책을 읽을 때는 이런 분인 줄 몰랐는데, 이 책을 읽으니 저자에 대한 상당한 호기심이 갔다. 아무리 비주류 사학자라고는 하지만, 정말 이런 책을 내고도 별탈이 없을까? 싶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한국 고대사학계가 어떤 곳인지는 필자도 대강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튼, 그렇게 한장 한장 책장을 넘겨봤다. 

일단, 제1장에서 가장 눈여겨본 부분은 식민사학의 갈래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었다.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야 원체 유명한 식민사학자니깐 알고 있었지만,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에 대한 내용은 몰랐던 부분이라서 적이 놀랐다. 그는 단지 꼴통 보수학파와 달랐을 뿐, 그 역시 식민사학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바로 저자의 주장이었다. 단지 그가『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보자고 했을 뿐, 오히려 더 교묘하게 식민사학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李弘稙의『韓國古代史의 硏究』를 실례로 들면서 쓰다를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한 '양심적인 학자' 쯤으로 기억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식민사학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교묘하고, 깊숙하게 한국 고대사학계에 스며들어 왔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한국 고대사 학계의 기득권층을 규탄(비판이 아니라 거의 규탄 수준이었다. 필자가 느끼기에는)하는 내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는 내용들이다. 이병도 선생님, 그리고 서울대학교,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줄줄히 졸업해 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는 역사학자들까지...그러면서 저자는 창의력이 말살된 학풍은 식민사학을 재생산할 뿐이며, 남의 연구를 베껴 먹는 성향이 곧 식민사학을 재생산하는 것과 맞물려 학계를 좀먹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학계, 특히 고대사 학계의 식민사학 문제는 식민사학 자체의 논리보다 학계의 구조적 비리와 훨씬 더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그 식민사학의 잔재를 체계적으로 추적해서 청산하기 어렵다는 저자의 지적이 피부에 와닿는 듯 했다. 

어떻게 보면 고고학을 전공하는 필자 역시 이러한 역사학계의 문제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 저자는 143~148쪽에 걸쳐 '고고학 팔아 식민사학 비호하기'라는 작은 장을 마련해 고고학을 비판하고 있었다. 저자는 고고학이 역사 해석에 도움을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고 하면서 고고학은 오랜 시간에 걸친 문화 흐름을 보여주는 데 적합한 학문이지,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 정치적 변화를 보여주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치의 영향과 문화의 영향은 다르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 문화의 영향, 냉전 시대 소련에 펩시콜라가 들어간 것, 한국을 좋아하지 않는 베트남에 한류 열풍이 부는 것 등을 이유로 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극단적으로 고고학을 해석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오히려 문헌에 나오지 않는 기간의 일반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문헌사가 아닌 고고학으로 복원이 가능하다.『삼국사기』만 갖고, 삼국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집에서, 무슨 그릇을 쓰면서 살았는지 알 수가 있을까? 전혀 알 수 없다.『삼국사기』에 적힌 기사가『조선왕조실록』처럼 매일매일을 적지 못 하고 있는데, 그 공백 기간의 일까지 문헌만 갖고도 알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고고학은 단순히 오랜 시간에 걸친 문화 흐름뿐만 아니라, 특정 유물과 유구의 변화상을 통해 급진적인 문하의 변화상에 대해서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역사고고학의 경우, 문헌과의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이지만, '문헌에 이러이러한 기록이 있으므로, 그 고고자료는 그렇게 해석되서는 안 된다!' 라는 식의 결론은 도출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특히 토기 같은 경우는 사용자(더 엄밀히 말하면 그 사용자가 속한 공동체에서 그것을 만든 제작자)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으므로 그걸 갖고 사용세력에 대해 구분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물론 저자의 발언처럼 토기만으로 100% 세력을 구분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토기가 출토된 유구의 종류, 공반 출토된 다른 유물까지 같이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과 구소련,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경우, 그러한 고고자료가 나온다 하더라도 이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데에는 당연히 그와 관련된 문헌기록이나 뉴스나 신문같은 언론매체, 수많은 인터넷 상의 자료가 있기 때문에 교차 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고대사에서 그럴만한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없는 부분은?? 믿을 수 있는 것은 고고자료 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고고학을 비판하면서 언급한 학자로는 가야사 연구자이신 金泰植 선생님인데, 솔직히 이 분을 가야 고고학자라고 보는 고고학자는 없을 것이다. 이 분은 사학자이다. 우리나라의 고고학 자료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보고서로 잘 만들어져 전부 공개하고 있는데, 그런 자료를 역사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인용 과정에서 고고 자료의 해석을 고고학자와 다르게 하는 경우다. 물론 별로 해석하지 않고, 보이는 현상들을 나열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봤을때 저자가 김태식 선생님을 언급하면서 고고학을 비판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그건 필자가 인류학자를 거론하면서 문헌사학계를 비판하는 것과 같은 일이랄까? 

필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한국 고고학의 태동 및 성장에 있어 일본 고고학(혹은 건축학)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고,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지만(얼마전 전국고고학대회때도 이런 문제에 대한 지적과 비판이 있어왔고), 식민고고학(식민사학처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고고학계의 영향이 적지는 않지만, 고고학이라는 학문 특성상 새롭게 확인되는 유물과 유구를 갖고 논리를 펴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과거 수준에서 발전하지 않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법론적인 부분에서 일본 고고학의 영향을 받을지언정, 연구과정이나 연구성과에 있어 저자가 비판하는 식민사학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골치아픈(?) 문헌사를 공부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기도 하고(필자도 한때는 한국 고대사 전공을 하려고 했으므로), 그러한 식민사학에서 탈피하는데 있어 고고학이 어떤 도움이 될만한 것은 없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제2장에서 저자가 크게 지적한 3가지,『삼국사기』초기기록에 대한 지적, 4세기 백제와 일본의 세력균형에 대한 지적(더불어 천관우 선생님에 대한 지적까지), 신라가 일본에 보인 저자세에 대한 지적은 여러모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일단『삼국사기』초기기록에 대한 지적이야 필자 역시도 저자와 공감하는 부분이며, 실제 고고자료 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다만, 저자가 실례로 들어준 고구려, 백제, 신라 트집 잡기 시리즈(?)는 필자가 그동안 갖고 있던 생각을 정리하는데 유용했다. 특히 노태돈 선생님이 많이 까이셨는데(?), 아마 이는 한국 고대사학계의 큰 기둥으로 남아 있는 '부 체제론' 때문인 것 같다. 이종욱 선생님과 극히 대립적인 이 이론에 대해서 필자 역시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그게 좀 심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그밖에 4세기에 대해서 저자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필자랑 기본적으로 생각이 달라서 딱히 할말이 없다. 왜냐하면 필자는 신공황후의 활약과 칠지도 등을 4세기가 아닌 3세기때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4세기가 한-일 양국의 고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지는 못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하는 4세기 근초고왕에 대한 평가가 심히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4세기에 백제가 영산강 유역 등을 완전하게 병합하지도 못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 재위 시절에 영산강 일대가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직접적인 기사는 없다. 다만,『일본서기』의 신공황후 관련 기사를 4세기로 비정하여 그렇게 해석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고고자료상 4세기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를 통합했다는 근거는 없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고고학이 잘못 해석되었다고 하면서, 식민사학에 일조하였다고 비판하신 것 같은데...오늘날 영산강 유역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그 지역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토기를 비롯한 유물과 그 곳에서 확인된 수많은 고분들을 갖고 그러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4세기에 영산강 유역은 백제에 통합된 지역이 아니었다.' 고 말이다. 

암튼, 이 부분은 나중에 저자와 따로 온라인상에서 얘기를 나눠봐야 할 부분이므로 여기에서는 Pass!

마지막으로 신라가 일본에 저자세 외교를 했다는 의견에 대한 지적, 이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사료 비판에 있어 다소 비객관적인 시각으로 당시 역사를 바라보다보니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 같은데, 김태렴의 구라(?) 사건만 보더라도 당시 신라가 일본에게 저자세로 일관했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삼국시대 내내~통일기까지 한반도 혹은 중국에서 수많은 인력이 일본으로 유입되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일본의 국력이 성장했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성장 원동력의 유입이 곧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또한, 일본이 그렇게 성장할 동안 한반도 내의 다른 정치세력들의 성장이 정체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기 이후 일본의 성장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입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가쁘게 제2장까지 살펴본 저자는 제3장에서 드디어 칼을 뽑아 단죄를 한다! 한국 고대사학계의 온갖 비리와 추악한 실태를 낱낱히 고해 바치고 있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제3장의 제목이 '깡패 논리로 심어지는 식민사학'이겠는가! 깡패 논리라...정말 저자의 호탕함이 절로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제3장의 작은 챕터들을 살펴보면 그걸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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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그동안 이런 글을 썼던 역사학자가 또 어디 있을까? 제3장의 내용은 필자가 100% 경험하지도, 동의하지는 않지만 상당 부분 필자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고, 또 직접적으로 살에 맞닿는 내용이라 더 잘 읽혔다. 특히 심사라는 부분, 뭐 대학원에서 교수님이 지도학생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말이야 예전부터 나온 말이고, 기득권층을 위한 시스템이라든가, 파워와 야합, 학술지 등급제(야합의 길), 야합에서 비호로, 공개 발표(쇼 같지 않은 쇼), 편파 판정, 검증 기피, 패거리 가르기 등등. 어떻게 보면 가려운 곳을 쏙쏙 긁어주고 있는 글이고, 어떻게 보면 감추고 싶은 것을 팍팍 들춰내고 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의 사학계는 어떨까? 라는 생각도 하게끔 만들어준 내용이기도 했다. 분명 다른 나라에서도 자국의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쳐주는 사학과라는 것이 있을텐데 그 나라에서는 이러한 학술 시스템이 어떻게 정비되어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런 면에서 고고학과 관련된 부분은 필자의 생각과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대단히 굉장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그 용기와 자신감에 찬사를 보내고 싶으며, 그러한 배짱과 호탕함을 지닌 저자의 성격에 존경심까지 보내고 싶다. 그렇기에 나중에 저자와 온라인상에서 대화할 생각을 하니, 더 흥분되고 들뜨기까지 하다. 암튼, 나중에 시간을 두고 저자가 쓴 책을 몇권 더 읽어보려고 한다. 어쨌든 간만에 속시원하고 통쾌한 내용의 책을 봐서 아주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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