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문명의 탄생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5
피에르 레베크 지음 / 시공사 / 1995년 2월
평점 :
품절


올해 예비군 훈련의 마지막은 그리스 문명과 함께 했다. ^^
이 책의 원제목은 'La Naissance do la Grèce'. 즉, 번역된 제목 그대로 그리스 문명의 초창기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선사시대부터 다루는 것은 아니고,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책표지를 넘기면 크노소스 궁전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거대한 크노소스에서 발견된 황소 머리 모양의 술병, 아서 에번스가 도안한 크노소스 궁전의 화려한 복원도가 쫙 펼쳐진다. 마치 그리스 문명은 미노아 문명 아니면 없었다! 라고 과시하듯 말이다. 저자는 '미궁'으로 대표되는 설계법이 크레타인만이 가진 독창적인 설계법이라고 하면서, 궁전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칭찬하였다. 뭐 미노아 문명 하면 크노소스 궁전이 연상되고, 다시 미궁과 프레스코화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뒤이어 미케네 문명과 아카이아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그리스 문명은 아카이아인의 대외정보과 해상활동부터 시작되었다고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저자는 헤라클레스나 야손의 모험담이 다 아카이아인의 대외활동과 연관있는 신화적 이야기라고 하고 있다. 그동안 헤라클레스나 야손의 이야기를 그냥 한 영웅의 이야기(그렇다고 너무 허구는 아닌) 정도로만 인식했는데, 그것이 그 민족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다른 시각으로 신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저자는 트로이 전쟁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본토를 오래도록 비우고도 무사히 원정을 마칠 수 있었던 점, 근접한 히타이트 제국에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그들이 강력한 존재였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간 트로이 전쟁은 지중해 일대에서 벌어진 일개 전쟁이며, 규모가 그렇게 크지도 않았을 뿐더러 세계사적으로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냐~싶었는데, 히타이트 제국과 연결시켜 생각하니 그 또한 다르게 보였다. 당시 히타이트의 문헌을 보면 아키야와(Akhkhiyawa: 아카이아인의 나라)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히타이트 제국의 대왕이 아카이아 왕을 자기와 동등하게 취급했다고 하는 것 또한 처음 알았다. 암튼, 여기에서도 저자는『오디세이』와『일리아드』가 헤라클레스, 야손의 이야기처럼 아카이아인의 대외활동과 관련된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책의 초반부에서 필자가 그동안 갖고 있던 생각과 다른 좀 더 신선한 생각들이 등장하고 있어서 상당히 집중하면서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중심은 그리스인의 정신세계(주로 종교와 신화), 식민지의 확장과 연결되는 민주주의(를 비롯한 정치제도의 변화상)로 옮겨간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신화가 주변 지역(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기타 동방사회 등)의 신들을 끊임없이 흡수하고 이를 재생산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아카이아의 신앙과 미케네 신앙은 크레타의 신비주의에 기반한 신앙과 맞물려 새로운 종교를 낳게 되니, 인도-유럽신인 제우스와 지중해의 신인 헤라가 부부로 맺어지게 된다. 이런 흔적은 우리나라의 민간 신앙에서도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런 부분을 역사적 사실과 적극적으로 연결시켜 해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없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영웅이라는 낱말이 크레타에서 온 것도 놀라웠다. 흔히 영웅이라고 하면 그리스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레타에서 영웅이란 '자손이 정성껏 바치는 제사를 받아 무덤 너머까지 그의 권능을 행사하여 사후에도 생전에 다스리던 공동체를 보호해 주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인데 이 정도면 거의 조상신이나 마찬가지다.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이 인간과 신의 중간적 존재로서 계속 사랑받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필자가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그들의 세계(동양식으로 하면 천하)를 키워가는 대목이었다. 자급자족 체계가 무너지고, 각 도시국가들마다 경쟁적으로 상업활동에 뛰어들면서 각지에 식민지가 세워지게 된다. 실상 그리스는 곡물을 재배하기 어려운 땅이며, 목재나 구리, 주석 등의 천연자원도 나지 않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들은 철제 농기구를 이용해 포도와 올리브 경작지를 크게 확충했고, 금속이나 구운 흙, 직물을 재료로 매우 정교하게 제작한 상품과 포도주, 올리브 기름 등을 수출상품으로 개발하여 활발하게 돈벌이(?)에 나섰던 것이다. 필요성에 의해 상업이 발달한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농업이 중요한 생업경제의 하나지만, 한편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업경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윽고 흑해는 그리스인의 내해가 되었으며, 이는 지중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코트도르 지방의 빅스에서 발굴된 켈트족 왕녀의 무덤에서 발견된 각종 그리스풍의 유물을 통해 그리스인이 당시 갈리아 지방과 영국까지도 교역로를 넓혔음을 알 수 있었다(그리스인이 당시 거기까지 갔다는 것이 상당히 신선했다. 그렇게까지 멀리 갔을 줄 몰랐기 때문에).

암튼, 이러한 그리스의 식민지 확장은 단순히 그리스인의 의지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뒷부분(148~149쪽)에 나오지만, 이집트 영토 내의 그리스 조계지였던 '나우크라티스'의 경우, 그리스인이 현지 권력층의 승인을 얻어 개설한 상인들의 조계지였다. 이 곳에는 아프로디테, 헤라, 아폴론, 디오스쿠리 신전 등이 존재했으며, 키오스, 테오스, 포카이아, 클라조메네스 등의 이오니아 도시국가, 로도스, 크니드, 할리카르나스, 파셀리스 등 도리아의 도시국가, 아이올리아의 도시국가 미틸레네가 힘을 합쳐 공동으로 설립했다고 한다. 이 곳은 이집트의 유일한 상업항으로서 이곳을 통해서만 모든 물자가 교역되었다고 하니 그 번영과 부가 대단했을 것이다. 마치 장보고의 청해진과 고려의 벽란도 등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그럼 이런 것을 또 어디에 적용할 수 있을까? 순간 떠오르는 것이 바로 낙랑군이었다. 한때는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한사군의 대표적인 악당(?)으로, 그 이후 민족주의적인 재야사학자들에 의해 창피한 우리 역사, 왜곡된 우리 역사로 인식되었던 낙랑군에 대해 대중국 교섭창구로 인식하는 견해들이 꽤 많다. 필자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고구려 영역 안의 중국인 조계지라고나 할까? 이 부분을 읽으면서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다양한 견해와 유연한 사고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했다.

이후 뒷부분은 페리클레스로 대표되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발달과 직후 무너지는 아테네의 제국주의,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등으로 얼룩진 그리스에 대한 언급이 이어졌다(미술작품과 희극의 내용이 변화하는 것이 그리스의 정세 변화와 맞물린다고 해석한 저자의 주장이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침략에 그리스 문명이 완전히 무너지기까지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중간중간 필자가 기존에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부분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자는 소위 암흑기에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부유한 미케네 왕국이 무너졌으며, 동시기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는 북부에서 내려온 '바다의 민족' 때문에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했다고 적고 있는 부분이다.『고대 그리스의 역사』(토마스 R. 마틴/이종인, 2003, 가람기획, 역사명저 시리즈 13)을 보면 이 책의 저자는 당시 도리아인들은 소규모 그룹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의 대재앙을 몰고 오지는 않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현지 집권세력들 사이의 내분과 과도하게 특화되고 집중된 경제체제 속에서 천연자원을 지나치게 남용한 결과, 그리스 문명이 붕괴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로 인해 용병을 하던 집단들이 순전히 먹고 살 길을 찾아 여기저기 집단을 이뤄 약탈을 자행하고 떠났고 이들이 바로 '바다의 민족' 혹은 '해상민족'이라고 보고 있었다. 즉, 원론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 같았다. 암튼 필자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새로운 외부의 정복집단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리스의 암흑기가 도래했다~라는 주장은 아닌 것 같았다. 실상 해상민족 안에도 도리아인이 포함되어 있었을 테지만, 그들로 인해 미케네 왕국이 무너졌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페르시아와의 대전을 언급한 부분이다. 예전에 살라미스 해전 : 세계의 역사를 바꾼 전쟁(http://cafe.daum.net/yeohwicenter/MqPf/156)을 보면서 '아! 내가 기존에 생각했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이 책에서는 기존의 일반적인 통설처럼 가볍게 다루고 있어서 조금 아쉬웠다. 왜냐하면 살라미스 해전을 중심으로 한 페르시아 전쟁을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후기 그리스사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부분을 빼고는 간단한 개설서(포켓북 형식의)로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풍부한 도판과 간결한 문장, 빠른 전개감 등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의 특징을 잘 살린 책이라고 생각한다(그런 면에서 앞서 언급한 토마스 R. 마틴의 책은 이 책과 정반대의 특징을 가진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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