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전쟁의 기술 - 한국사의 판도를 바꿔 놓은 36가지 책략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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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평을 쓰는 것 같다.
게으름이 하늘을 찌를듯해 나 스스로에게 죄스러운 기분까지 드는 요즘이다.

그러던 찰나에 우연히 검색해서 얻은 책이 하나 있다. 일단 제목만 보면 무슨 내용인지 대강 짐작은 간다. 일단 한국사 중에서 전쟁에 대한 언급이 있을 테고, 무슨 전략 · 전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현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은지 등등에 대해 얘기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책장을 열어봤다.

오~좀 의외였다. 다소 식상한 주제일 수도 있는『孫子兵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알겠지만,『손자병법』이라고 치면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나온다). 집에도 관련 서적이 몇 권 있었기 때문에 조금 실망하는 눈빛으로 책장을 넘겼다. 흐음~그런데 의외로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손자병법』을 한국전쟁사와 연결시켜 註解(라고 해도 될라나?)한 책은 지금까지 못 봤기 때문이다(혹시 있다면 그 책을 쓰신 저자분께 죄송하고, 무지몽매한 필자가 깨우칠 수 있게 그 책을 추천해주시기 바랍니다). 굳이 따진다면 중국에서는 이런 종류의 책이 나오긴 했다(물론 자기네 나라에서 나온 책이니깐 자기네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馬駿이 쓰고 임홍빈이 번역한『손자병법 교양강의』가 그것인데, 기억으로는 그냥 무리 없이 읽혔던 책이었던 것 같다.

암튼 이 책으로 다시 돌아오자. 앗! 저자가 누군가 했더니『조선 지식인의 독서 노트』,『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등을 쓴 사람이 아닌가. 이 책들은 필자가 쉬엄쉬엄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 책도 그만큼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뭐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특정 작가 혹은 저자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가 생기면, 그 사람이 쓴 다른 책에 대해서도 그 이미지를 투영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 사람이 쓴 책에 대해 철저하게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려 한다고나 할까?). 암튼 약간의 호감을 갖고 책장을 하나하나 넘겨봤다.

프롤로그를 지나서 목차를 봤다. 재밌었다. 손자병법의 본래 목차는 시계편, 작전편, 모공편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책에서는 그러한 순서를 다 바꿔버렸다. 시계편은 ‘전략의 조건’으로 고쳤으며, 세부 테마는 ‘깊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라’, ‘나의 적이 절대로 알지 못하게 하라’, ‘승산이 없다면 섣불리 나서지 마라’ 등으로 고친 것이었다. 일단『손자병법』의 내용을 소개하는데 있어 한국식(?)으로 고쳤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 말은 그만큼 원서를 충분히 읽고 이해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소개하고 있는 내용들도 참신하고, 흥미로운 것들이 많아서 읽는 내내 책장 넘어가는 속도도 모를 정도로 읽어나갔다.

그럼 내용 일부를 살펴보면서 필자가 생각하는 잘한 점, 아쉬운 점, 나쁜 점을 하나씩 훑어보자.

먼저 잘한 점이다. 책을 딱 보면 알겠지만 한국사 이모저모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이를『손자병법』과 적절히 연결시킨 저자의 노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기존에 잘 언급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각시킨 점이 주목되는데 소수림왕의 절치부심에 대해 언급한 부분, 광종의 와신상담, 김조순의 정치적 승리, 고려 숙종의 은인자중과 선조의 양위 파동, 황금대왕 최창학의 일화, 유성룡의 후회, 개성상인의 용중지법, 요동공략 이후 고려군의 퇴각 전술, 노론의 왕세제 책봉, 송유진 반란 사건 등이 그러하다(을파소의 신중한 출사에서 최남선이 상상으로 구성했다던 내각은 처음 들어봤는데,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겠다). 저자가 조선사에 대해 많은 책을 쓰고, 애초에 공부를 하려고 했던 분야도 메이지유신을 전후한 일본사였던 것을 보면 고대사보다는 중세 이후의 역사가 주전공 분야가 아닌가 싶다. 다만, 동 · 서양 고전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분야의 책을 써낸 것을 보면 적지 않은 내공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책에서 고대사~근대사까지 넓은 시간 폭을 두고 다양한 아이템들을 선정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손자병법』과 연관되어 처세술과 정치사 쪽을 서술한 내용은 탁월한 내용이 많다. 이는 당시 시대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는데,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런 부분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처럼 잘 정리된 책이 나오면 즐겨 읽는 편이다.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움켜쥐어라’ 테마에 고려 숙종의 은인자중과 선조의 양위 파동을 집어넣은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전에는 그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적의 역량을 분산시켜 격파하라’에서 고려 인종의 분열 전술을 언급한 것도 이채로웠다. 어떻게 보면 항상 피동적인 인물로 역사에 그려졌던 고려 인종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밖에 ‘상대방이 약해졌거나 힘을 쓸 수 없을 때 공격하라’의 정몽주의 무모한 공격 역시 재밌게 읽었다. 단순히 힘없는 구 왕조의 원로대신으로만 여겼던 정몽주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이런 부분은 예전에 이덕일의『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었을 때를 떠올리게 할만큼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럼 이제는 아쉬운 점이다. 목차를 주욱 보면 알겠지만,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딱 하나 등장한다. 바로 ‘전투의 승패는 기세와 타이밍에 달려 있다’의 한니발의 포위 섬멸 작전이다. 이 책의 제목이『한국사 전쟁의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왜 국내의 사례가 아닌 외국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해상전의 교본이라고 할 만한 한산도대첩과 대비시켜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육상전의 교본으로 불릴만한 칸나에 전투를 언급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책의 논지와 맞지 않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차라리 목차에 한산도대첩을 먼저 언급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라든가, 장수태왕의 한성 공함 작전과 같이 포위전으로 볼만한 내용은 충분히 있으니 한국사상의 전쟁을 하나 소개하고, 부차적으로 칸나에를 소개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실제 ‘빠르게 행동하고 빠르게 끝내라’ 테마에서는 광개토태왕을 소개하고, 뒤이어 알렉산드로스를 부차적으로 소개하는 구성을 선보였지 않은가? 그런데 왜 뒤에서는...).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저자가 전쟁이나 전투에 대해서는 그닥 최신 정보를 갖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유명한 고려 말 요동정벌과 같은 경우도 4대 불가론에 대해 찬반 논쟁이 있는 만큼 다양한 견해를 다뤘으면 했는데, 그런 것 없이 이성계의 회군 그 자체에 주목한 면이 강했던 것 같다. 또한 신립의 오판에 대해서도 찬반 논쟁이 있는데, 기존의 통상적인 견해에 주목한 것 역시 그러했다. 부여 대소왕의 죽음은 기록이 워낙 적다보니 意譯한 면이 적지 않았으며, 사지를 선택한 계백의 전략 부분에서도 백제군과 신라군의 병력, 진형, 전투진행과정 등에 대해 다양한 연구 성과가 있음에도 이를 반영하지 않은 것은 아쉬웠다. 필자 생각에는『손자병법』이라는 원저의 인용과,『한국사 전쟁의 기술』이라는 책의 제목에 걸맞으려면 오히려 앞서 언급했던 정치사적인 내용이나 처세술에 대한 것보다는 이런 전쟁 · 전투에 대한 부분이 더 강조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 한 것이 가장 아쉬웠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쁜 점을 언급하고 마무리하자. 확실히 저자가 고대사 전공자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고대사 부분에 취약한 면모가 많이 보였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광개토대왕을 광개토태왕이라고 칭하지 않은 점(광개토태왕이 태왕호로 불렸다는 것은 이미 학계의 정설이다)이 먼저 눈에 거슬렸다. 또한 고국원태왕(이미 태왕호는 그 이전부터 사용했다는 것이 학계의 대세)이 모용황과의 대결에서 패한 것은 그가 과거에 승리한 경험과 선입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는데, 이는 오히려 아주 일반적인 전장에서의 잘못된 전술 채택일 뿐, 고국원태왕 개인의 오만이나 만용과는 상관이 없는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낫다. 차라리 이런 얘기를 하려면, 수-당과의 수십 년에 걸친 육상전에 따라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고 방어력을 강화하는 사이(왜냐하면 고구려는 그렇게 해서 계속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므로), 당에서는 수군을 강화해서 해로로의 直攻을 계획했던 사례를 소개했으면 어땠을까? 그거야말로 거듭된 승리로 인한 경직된 전략 · 전술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또한 모본왕에 대해 소개할 때 당시 고구려가 북평, 어양, 상곡과 태원까지 점령하여 황하의 동쪽 지역을 차지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굉장히 위험한 서술이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점령전을 펼친 것이 아니라 제한적인 약탈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부분들을 필자가 아쉬운 점(이미 저자의 전공이 고대사는 아닌 것 같다는 언급을 했었다)으로 추려내지 않고, 나쁜 점으로 추려냈는가 하면...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어서 다양한 견해가 나오는 부분 혹은 해석상 얼마든지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부분들을 추려냈지만, 여기에 언급한 점은 필자 개인적인 판단에 잘못 해석할 여지가 적은 것들을 한번 골라봤다. 기존의 연구와 다른 견해를 내놓는 것이 나쁜 점은 아니다. 하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기존 연구와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전공서적도 아니고 교양서적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고 본다(각주도 없고, 연구사도 없으며, 치밀한 논지 전개가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손자병법』을 우리식대로 해석한 이 책에 필자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분명 우리의 옛 선조들도(아마 삼국시대 이전부터가 아닐까?)『손자병법』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며, 중국에서 흔히 말하는 古典들을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과거 시험에 필요한 禮書 종류 이외의 兵書, 醫學書, 技術書 등은 이른 시기부터 수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 시험은 안 봐도 상관없지만, 전쟁을 치루고 아픈 사람을 고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은 민족의 自尊에 중요한 부분이니 말이다. 그 당시 우리 선조들도 아마『손자병법』을 우리식대로 이해하고 공부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주해하고, 새롭게 해석을 붙여 글로 남긴 자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말이다. 그렇게 봤을 때 이 책은 현대 한국인이『손자병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좋은 지표가 될 것 같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전체적으로 책은 400쪽이어서 두껍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용이 쉽고 재미있는데다가 각 파트가 끝나면 뒤에『손자병법』원문+해석을 같이 첨부하고 있어 책의 요지를 이해하기 쉬운 구성으로 해 놨기 때문에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안 읽어보신 분들이 있다면 한번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읽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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