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의 모든 것
폴 반 지음, 고은별 외 옮김 / 루비박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번역판 제목은『고고학의 모든 것』이며 원제는『The Illustrated World Encyclopedia of Archaeology』이다. 직역하면『삽화로 보는 세계 고고학 백과사전』정도가 될 텐데 너무 의역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차라리 이 책의 엮은이(폴 반)가 콜린 렌프류와 함께 쓴『현대 고고학의 이해(Archaeology : Theories, Methods and Practice)』에 그 제목을 붙이는 것이 더 나을 것도 같다.

일단 책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 책은 폴 반이 지은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관련 전공학자들이 일정 분량의 글을 작성하고 폴 반이 엮은 것이다. 아무리 폴 반이 대단한 고고학자라 하더라도 전 세계 고고학 연구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하고 그와 관련된 세부적인 자료들을 갖고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김원룡 선생님이 고고학, 역사학, 미술사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얻으며 관련 연구 성과들을 여럿 내놓았지만, 이제는 한국 고고학계 역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성장했기 때문에 1명의 연구자가 연구 성과를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실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부터 여러 학자들의 연구 성과 및 여러 발굴현장의 정보를 담은『한국의 고고학』,『한국 고고학저널』이라는 고고학 잡지가 주류성에서 발간되고 있는데, 그것들 중에서 괜찮은 주제들을 골라 이처럼 책으로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암튼 다시 돌아와서, 이 책은 폴 반이 엮고 관련 전공자 4명이 각 파트별로 번역을 한 책으로서 정말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다가 내용도 어렵지 않아서 비전공자들이나 일반 독자들이 읽는데 전혀 부담이 없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외국 고고학 서적의 번역서가 국내에 많이 없는 편인데, 국내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스터디 형식으로 모여서 원서를 번역하고 원고를 다듬어서 책을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암튼 먼저 간략하게 책의 전체적인 구성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고고학자들’과 ‘고고학 유적지’로 크게 나뉜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다시 ‘고고학의 아버지’, ‘고고학의 선구자들’, ‘현대의 고고학자들’ 등 시기별로 나뉘고, ‘고고학 유적지’는 ‘아프리카’, ‘중동’, ‘지중해’, ‘유럽’, ‘극동’,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등 지역별로 나뉘었다. 이러한 구성 자체가 기존의 다른 책들과는 전혀 다른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시중에 큼직한 삽화들이 가득한 고고학 관련 서적들은 많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만 봐도 브라이언 페이건의『DISCOVERY!』를 꼽을 수 있겠다. 단순히 유적지만 본다면 이 책만큼 괜찮은 책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책들의 대부분은 고고학 유적지를 여러 삽화로 소개한 것들이며, 고고학자에 대해서 그렇게 소개한 책은 별로 없다. 그것도 시기별로 나눠서). 굳이 꼽자면 최몽룡 선생님의『인물로 보는 고고학사』(모든 교과과정의 교과서처럼 읽혀지는 그다지 재미없는 책)가 있겠지만, 삽화도 별로 없고, 각 시기별로 중요한 1~2명의 학자들만 소개하고 있어 전문성은 띄고 있지만 대중성은 갖추지 못 했다고 할 수 있다. 하물며 이 2개의 주제를 하나의 책에 넣고 다룬 것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책을 처음 본 순간 목차에서부터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은 책을 읽으면서 더욱 강하게 생겨났다.

책의 가장 첫 부분은 ‘고고학의 아버지들’, 즉 고전고고학자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다(폴 반은 이들을 두고 대부분 독학으로 고고학을 터득했을 아마추어라고 당당히 말한다). 이집트의 보물약탈을 언급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조반니 벨조니, 로제타스톤을 해석한 천재적인 언어학자인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크노소스를 발견했지만 성급한 복원활동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비난받고 있는 아서 에번스 경, 프랑스의 선구적인 선사학자였던 에두아르 피에트, 군인 출신의 이점을 살려 새로운 발굴 작업의 기준을 세운 오거스터스 피트 리버스(그가 기증한 유물이 기반이 된 피트 리버스 박물관은 유물의 기능별로 전시되어 있는 독특한 구성인데, 한번 꼭 가보고 싶다),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것으로 너무나 유명해진 하인리히 슐리만, 과학적인 고고학의 시대가 오기 전 과학적인 방법을 제시한 톰센과 워새 등 고고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알 수 있는 이름이 대거 등장한다. 왜냐하면 이런 인물들은 이런 대중서적에서뿐만 아니라 수업시간에도 여러 번 듣고 외우고 시험까지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이집트를 발굴했던 프랑스와 달리 아시리아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발굴하면서 경쟁했던 영국의 지원을 받은 헨리 레이어드, 이집트 고대 유물 관리청의 초대 청장으로서 이집트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힘썼던 아귀스트 마리에트(30쪽을 보면 영문 이름이 사진에 지워졌다. 개정판에서 이 부분이 고쳐지길 바란다),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지를 발굴한 자크 드 모르강,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베히스툰 비문을 연구한 헨리 롤린슨, 알타미라 동굴을 연구한 산스 데 사우투올라, 미국 고고학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에프라임 스콰이어, 남아메리카 고고학에 과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한 막스 울레(53쪽의 그가 조사한 파차카마크의 잉카 무덤 사진을 보면 각 유물마다 주기표를 하고 사진 촬영을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연구에도 적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 필자가 처음 보는 인물들도 많이 있었다. 물론 필자의 공부가 짧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매일 달달 외우면서 머리로만 이해했던 인물들 이외에 더 많은 선구적인 고고학자들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러면서 책은 20세기 초반 최초의 진정한 전문적인 고고학자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우리가 흔히 외우는 신고고학 혹은 과정주의고고학, 탈과정주의고고학 시대의 유명한 고고학자들이 별로 안 나온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해서 봤더니만 이 책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굴성과를 냈거나 뛰어난 학술성과를 내놓은 사람들만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고 삽질을 하고 유물을 만지고 사진촬영하고 실측을 하면서 몸으로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만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과과정에서 매번 외우는 고든 차일드나 테일러, 이안 호더 같은 이름이 없는 것만 봐도 이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순간 ‘그래~고고학은 역시 현장에서 경험한 것이 더 값지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국내 학계 역시 외국에서 유학을 갔다 온 학자들이 더 높이 평가받고 더 많은 학술성과들을 내놓는데 반해 평생을 땅만 파고 발굴조사를 진행해 온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평가받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발굴 잘 한다고 교수 자리를 덥석 주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암튼 시간이 뒤로 흐를수록 필자가 아는 학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고고학의 선구자들’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끽해야 람세스 2세의 고분을 발굴해서 유명해진 하워드 카터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학자인 리 지, 인도 탁실라 유적에서의 연구로 유명해진 존 마셜 경, 이집트학의 대가이자 야외고고학의 방법론을 변화시킨 플린더스 피트리 경 정도였다.

특히 이 단락에는 여자 고고학자들이 많이 소개되어서 눈길을 끌었다. 일단 대짐바브웨 유적을 조사함으로써 유명해진 거트루드 캐턴-톰프슨을 꼽을 수 있겠다. 몇 년 전에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아프리카의 고대 문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 잠깐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아프리카의 대짐바브웨 유적을 조사함으로써 아프리카 사람들이 원래부터 열등하고 저급한 민족이 아니라 예전에는 다른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대 문명을 이룩했던 사람들임을 역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연구는 당시에는 비난받고 수용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밖에 이스라엘의 카멜 산에서 중요한 구석기시대 동굴을 발굴한 도러시 개로드, 그리스와 에게 해의 섬, 아나톨리아에서 선구적인 발굴 작업을 수행한 위니프레드 램 등이 소개되었다. 특히 그녀는 스파르타의 역사 유적 발굴에도 참여했었다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스파르타의 역사는 꽤 알려져 있지만, 어떤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있고 어떤 유적들이 있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밖에 아메리카의 고고학자 하면 신고고학 시대의 미국 학자들만 알고 있었는데, 앨프리드 빈센트 키더(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미국 고고학자의 한 사람으로 신 고고학자 테일러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대부분 테일러는 알지만 빈센트 키더는 모른다)나 페루의 훌리오 C. 테요(페루에서 최초로 교육받은 고고학자이자 페루인들에게 있어 고고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같은 학자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 좋았다. 또 특이하게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남편 맥스 맬로완 경이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에 길이 남을 공헌을 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고고학자들’을 보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유명한 유적들은 알고 있어도 그 유적들을 누가 발굴조사했는지를 그동안 몰랐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타즈매니아와 아넘랜드 등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유적들을 연구한 사람이 라이스 존스라는 것도 처음 알았으며(‘화전 농경’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고 한다. 신기했다),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성곽유적인 예리코 유적을 발굴한 것이 캐슬린 케니언이라는 영국의 여자 고고학자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그러고 보니 예리코 유적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이 들어봤어도 케슬린 케니언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동아프리카에서의 인간 기원에 대한 연구 자체와 동일시되어진 리키 가족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음으로써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 밖에 에스파냐 정복 당시의 잉카 문명에 대한 국제적인 표준 참고서라고 불릴만한 논문을 작성한 존 하우랜드 로, 선형문자B를 해독한 유명한 언어학자인 마이클 벤트리스 등 유명한 학자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밖에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는데, 바로 그리스 고고학자 스피리돈 마리나토스였다. 1901년생인 그는 19세가 되던 해(1919) 아테네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던 학부생임에도 불구하고 유물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29년(29세) 대학원 과정을 밟던 중 크레타 섬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장이 되었다. 더불어 그가 1970년대 초 테르모필레 전쟁 유적을 찾았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마라톤 전쟁 이후에 축조된 고대 분묘군 역시 그가 발견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죽음마저 고고학자다웠는데, 1974년 10월 아크로티리에서 고대의 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사고로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마치 어린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까지 올라갔지만 모함을 받아 숨을 거둔 남이 장군이 생각났다. 정말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만큼 필자 역시 저런 삶을 살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 봤다.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이력을 가진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마리아 라이헤였다. 그녀는 세계적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페루의 나스카 라인을 연구하는 데만 50년 이상을 헌신했다고 한다. 나스카 라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외계인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거세게 있었던 만큼 학술적으로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줄 알았다. 엄밀히 말하면 딱히 특별한 유물도 없고, 지표 밑으로 어떤 유구를 조사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지표 위에 그려진 선형 유구만으로도 수십 년간 연구가 진행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마 한국 고고학계와 다른 풍토를 가진 외국 고고학계의 특징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세계적으로 그녀가 인정받는 고고학자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이처럼 수많은 고고학자들을 차례로 소개한 다음 폴 반은 각지의 고고학 유적지에 대해 차례대로 소개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책에는 다양한 유적지들이 소개되고 있어 독자들은 전 세계를 책 1권으로 돌아보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특히 각 단락의 앞부분에 그 지역의 전체 지도와 유적 위치도를 소개하고 있어 처음 보는 유적지라도 대강 그게 어디 붙어있는지 알게 하여 독자를 배려하게끔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책의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9~10쪽).

이 정도 두께의 책에는 전 세계의 수많은 중요 유적과 유물들에 대해 개략적인 것만을 기술할 수밖에 없다. 지구상의 일정 기간이나 일정 지역에 대해서만 다루더라도 이 같은 책 여러 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선정한 유적지는 세계의 여러 위대한 고고학적 보물들에 대해 다른 어느 책에도 비할 데 없는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극동의 신전에서 유럽의 동굴벽화에 이르기까지, 또 중앙아메리카의 수수께끼 같은 도시들에서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테라코타 군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것이다. 

이 멋진 여정은 북쪽에는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있고, 남쪽에는 선사시대 동굴이 있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된다. 뒤이어 우르크나 수사와 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이 있는 중동의 고고학 여행이 펼쳐진다. 

먼저 아프리카를 살펴보자. 아프리카에서 필자가 알고 있는 고고학 유적이라면 인류의 기원을 알려주는 구석기시대 유적과 나일강 주변에 위치하고 있던 이집트 유적들이었다. 실제 책에는 스테르크폰테인, 스와트크란, 크롬드라이와 같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이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적과 중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된 블롬보스 동굴, 선사시대 대초원지가 펼쳐져 있던 사하라의 자연환경을 묘사한 바위 예술 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자, 사카라, 아비도스, 카르나크, 왕가의 계곡, 아마르나, 아부심벨 등 유명한 이집트 유적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특히 필자는 자위예트 음므 엘-라크함이라는 지역에서 확인된 이집트의 요새 유적이 눈에 확 들어왔는데 이는 이집트 신왕조 시대의 것으로 인접한 리비아 부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람세스 2세가 기원전 1,280년 경 만들었다고 한다. 요새는 인상적인 축성술로 지어졌는데, 육중한 출입구를 포함해서 행정관의 저택과 같은 다기능적인 건축물, 대규모 수비대가 자급자족하는데 필요한 제빵소, 양조장, 수십 개의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군사 요새는 전 세계적으로 발견된 사례가 많지 않은데 그나마 유럽에서는 로마의 군사요새가 많이 확인되는 편이며, 나머지 지역에서는 간헐적으로 확인될 뿐이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한반도 중부에 고구려 것으로 보이는 다수의 군사 요새가 확인되고 있어 학계의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는 실정이다. 고구려 보루라고 불리는 이 유적들은 수십 곳에 달하는데 문헌에 기록된 바도 없고,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 등지와 비교할만한 자료가 없는 관계로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로마를 비롯한 다른 문화권의 군사 요새에 대한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 보루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는데, 이집트에서도 이와 같은 군사 요새가 확인된다고 하니 자연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널리 알려진 문명이나 문화라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발굴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만큼 최신 자료들을 섭렵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참고로 이 이집트 요새는 94년부터 작업하고 있다고 하니 거의 최신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그밖에 메로에 유적에 대한 내용도 나왔는데, 이곳은 쿠시의 두 번째 독립왕국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메로에 제국(기원전 300년~기원후 300년 경)의 쿠시 왕들은 이집트가 허약한 틈을 타서 이집트를 정복하고 제25왕조(신 왕국 이후 제3중간기에 제21~25왕조가 포함되어 있으며 기원전 1,075~715년 사이에 해당한다)의 왕으로서 북아프리카를 통치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규모면에서는 작지만 그와 같은 양식의 무덤들이 발견되었으며, 도시의 신전에서는 이집트 신과 토속 신에게 봉헌한 흔적들이 다수 확인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크리스티앙 자크의 역사소설『블랙 파라오』를 보면서 누비아인, 리비아인 등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런 흑인과 백인, 황인종이 공존하는 이집트사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이집트사가 다양하고 박진감 넘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후기 철기 시대의 유적지인 대짐바브웨와 마푼구베 유적은 고대 아프리카인들이 상당히 발전된 복합사회를 형성하고 넓은 영토를 보유하였으며, 그 안에서 여러 정치적 활동을 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물론 기원후(13~15세기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왕국 혹은 제국으로 불릴 정도의 정치적 집단을 형성했던 것은 아니지만 도시국가 수준 이상의 정치집단을 형성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아프리카인들이 혈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원래 저급한 민족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아프리카의 뛰어난 유적들이 왜 갑자기 쇠퇴했는지,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밖에 필자는 나이지리아의 남서쪽에 위치한 이페와 베닌 시 유적을 보면서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도 문명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이지리아의 고고학적 성과는 처음 보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은 2000년 초에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차후 아프리카 각지가 발굴조사되면 더 많은 유적들이 확인되어 아프리카의 고대 문명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중동인데 뭐 다들 알다시피 이곳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문명이 탄생한 곳이며, 아프리카의 인류가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관문이다 보니 구석기시대 유적 또한 다수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명들과 이 지역에 위치했던 페르시아라는 거대 제국의 흔적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것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 하게 한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오늘날과 비교해 전혀 부족함이 없는 잘 발달된 문명사회가 그 지역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꼭 한번 중동 지역의 여러 유적지들을 가보고 싶은 필자인데, 그 중에서도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관련된 유적지들은 반드시 둘러보고 싶다. 오늘은 메마른 사막 지대에 드문드문 넓은 초원만 펼쳐져 있는 이곳이 어째서 예전에는 인류 문명이 가장 발전했던 곳이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직접 그 곳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결론내리고 싶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도시국가로 불리는 우르크부터 살펴보자. 이곳은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묘사되어 있으며, 성서에도 나와 있는 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다. 기원전 6,000년 경 각지에 있던 여러 마을들은 기원전 4,000년 경 통합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3,500년경에는 그 면적이 250헥타르(2.5㎢), 기원전 2,800년경에는 550헥타르(5.5㎢)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5.77㎢)의 면적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서 지금으로부터 거의 5,000여 년 전에 이 정도 크기의 복합사회가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원전 6,000년 이전~기원전 2,000년까지 지속된 우가리트의 경우 도시의 경우 무려 8,000명의 사람이 살았던 거대한 도시였음이 밝혀졌다. 그밖에 기원전 4,2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흔적이 확인된 수사는 이후 페르시아에 정복당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번성했는데 오늘날 확인된 수사 유적은 무려 550만 헥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고원 지역에 펼쳐져 있는데(55,000㎢) 인류가 무려 5,500여 년간 살았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기원전 3,000년 경 어느 왕국의 대규모 보관소였던 것으로 알려진 에블라 유적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모두 기록을 남겼던 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의미 있는 유적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점토판이라고 하는 특수한 재질과 중동 지역의 고온 건조한 기온 덕분에 오늘날 수만 개의 점토판이 살아남아 연구에 활용되고 있지만 그 당시부터 이미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 놀랄만한 일임에 분명하다(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넘기다가 205쪽의 발굴 작업 사진-사실은 쉬는 시간을 찍은 사진인 듯함-을 보면서 풋! 하고 웃음을 금치 못 했다. 누워서 쉬는 인부나 쉬는 시간임에도 일을 하는 인부들의 모습 등이 한국의 발굴현장과 너무나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칼후 유적이었다. 아시리아에 대해서는 세계사 교과서에 기록된 것 이상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는데, 기원전 9~8세기에 이미 이 도시는 무기창고(샬마니저르 요새)를 포함한 360헥타르(3.6㎢)에 달하는 거대 도시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한때 히타이트사에 푹 빠져서 이런저런 고고학 관련 서적들을 뒤적거린 기억이 났다. 중동 지역의 여러 문명들은 확실히 이른 시기에 형성된 만큼 다른 지역보다 많은 부분에서 선진적이었는데, 그에 반해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들은 많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점토판도 없고, 기록도 많이 없는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연구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었다. 특히 칼후 유적에서는 무기고 요새인 샬마니저르 요새가 확인되었는데 30헥타르(0.3㎢ ≒ 9,100평)에 달하는 이곳에서는 아시리아 군대의 구성과 말, 무기에 대한 세부사항 및 세금 징수와 법률 업무에 대해 기록한 점토판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저 이런 글을 보면 한없이 부럽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하아~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것들이 확인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또한 신(新) 바빌로니아 왕국의 중심부였던 바빌론과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를 비롯한 나바테아인들의 수도 페트라까지 중동 지역의 유적들은 아프리카의 것과 달리 크고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또한 매력 있었다. 특히 페트라는 ‘사막의 도시’라고도 불리는데 그런 메마른 지역에 나바테아인들은 댐, 저수지, 파이프, 수로 등 물을 조절할 수 있는 복잡한 체제를 만들어냈다.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고 얼마나 화려한 문명을 남겼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그 다음 지중해로 넘어오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여러 유적들을 만날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수렵 채집인들의 의식용 유적이었던 괴베클리 테페였다. 부싯돌에 지나지 않는 도구와 불, 물을 사용할 수 있던 이 지역 사람들은 지역 기반암으로부터 7톤에 이르는 석회암의 벽돌을 깎아 둥글게 쌓고 거대한 벽돌을 운반한 뒤 그 돌 건조물 안에 곧게 쌓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동굴 건조물들은 놀랍게도 기원전 9,600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선사시대 수렵채집민들도 건축물을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준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밖에 이 지역에는 크노소스로 불리는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안에서 발견된 선형문자A와 선형문자B는 고대 미노스인들과 미케네인들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또한 동부 지중해에서 월등한 힘을 가지기 위해 크레타의 미노스인을 쇠퇴시킨 미케네인들이 남긴 유적들 역시 주목되는데 그들은 기원전 14세기 반경 1㎞에 달하는 요새화된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왕궁-요새 간의 네트워킹을 처음으로 구축하면서 지중해의 무역을 지배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유적은 울루 부룬에서 확인된 기원전 14세기 후반기의 난파선이었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 경남지역에서 확인되는 철정처럼 당시 이 지역에서는 ‘귀가 있는 금속 비스킷’이라고 묘사된 구리 주괴가 확인되었는데 그 수량이 자그마치 10톤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양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신안 앞바다를 비롯한 각지에서 고려~조선시대 선박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청동기시대 선박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물론 신석기시대 배는 확인되었지만) 차후 우리나라에서도 이른 시기 선박이 확인된다면 이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외에도 그리스-로마 지역의 여러 유적들이 소개되어 있었지만 필자에게 크게 와 닿는 것은 없었다. 그간 다른 책에서도 많이 보고 외국 여행을 갔다 온 사람들이 필수 관광코스로 반드시 가는 곳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도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튀니지 해안에 위치한 카르타고 유적이라든가, 헤롯왕때 건설되어 유대인들의 처절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마사다 요새 등은 꼭 가보고 싶기도 하다. 특히 마사다 요새는 요세푸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집단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마무리되고 있지만, 실제 발굴 결과, 시신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고 오히려 로마 주둔군이 반란 진압 후 이 곳에서 일부 기간 주둔했음을 알려주고 있다니 과거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의 차이점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려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지중해를 지나 보다 북쪽의 유럽으로 가면 유적의 연대가 다소 늦어지게 된다. 물론 라스코 동굴 벽화나 메치리히의 매머드 뼈로 만든 주거지, 5,300여 년 동안 얼음 속에 갇혀 있었던 아이스맨과 같은 선사시대 유적들도 확인되고 있지만 그 이외에는 로마시대 혹은 그 이후의 유적들이 대부분이다. 필자는 유럽의 역사를 두고 네안데르탈인과 그 뒤를 이은 정복자 호모 사피엔스가 살았을 무렵에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앞서나갔고 활기찼던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 문명이 발생하고(이는 인종 차이라기보다는 환경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지만) 곧 이어 유라시아 전반적으로 고대 문명이 싹을 띄우는 동안 유럽은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 했다고 본다. 물론 어느 정도 자체 발전하는 성과는 확인되고 있지만 동시대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유적들은 상당히 인상적이고 매력 있게 다가온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유럽의 유적지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베스트 3을 꼽는다면 단연코 스톤헨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간 무수히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수많은 가설과 이론들이 뒤바뀌고 새로 정립했지만 아직도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유적이 바로 이 곳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수차례 개 · 보수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는데 그간 제사유적이자 천문학적 기능을 담당했다고 널리 알려져 왔다. 하지만 최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주장이 비판받는다고 하니 이 또한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밖에 다뉴브 강 일대의 호이네부르크는 유럽의 초기 철기시대 요새로서 당시 이 지역의 켈트족 족장이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였음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폴란드의 비스쿠핀 유적 역시 마찬가지인데 700~1,000명가량의 거주했던 이 요새화된 마을 역시 당시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서턴 후 유적은 리처드 루드글리의『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라는 책과 여타 책들을 통해서 처음 접하고 ‘와~신기하다!’라고 했던 곳이다. 영국에 대해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가 등장하고 이후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어갈 무렵에도 여전히 아더왕과 관련된 전설과 신화가 판을 치던 조금 판타스틱(Fantastic)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배를 무덤으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독특하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확인된 부장품이 굉장히 화려해서 당시 앵글로색슨 귀족의 삶이 상당히 수준 높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리처드 루드글리 역시 기존에는 중세 암흑시대라고 일컬어졌던 시기가 사실은 더 발전된 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한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그 시대에 대한 재평가가 필수적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서턴 후 무덤은 이후에 사형을 집행하던 장소로 사용했다고 하니 그 또한 흥미로웠다. 이렇게 서턴 후 유적을 마지막으로 신비로운 유럽의 고고학 유적지들을 다 둘러봤다.  

이제 드디어 극동으로 넘어왔다. 여기에 중국과 일본은 있지만 한국은 없다. 그게 속상하기도 하고 한국 고고학의 위상이 이 정도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군다나 폴 반은 최근 일본이 자국 내 발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진행 중인 고고학 발굴 작업에 기금을 댈 정도로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어 조금 씁쓸하기까지 했다. 또한 우리나라에도 유학파 고고학자들이 많은데 그들은 왜 세계 유수의 학자들과의 교류가 없는지도 궁금하다. 이런 책을 서술할 때 폴 반에게 한국 고고학자들도 자국 내 유적에 대한 글을 적어서 보냈을까? 아니면 폴 반은 그러한 자료의 요청을 시도했을까? 그냥 이런 생각들이 들면서 한국의 유학파 고고학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학술사업에 뛰어들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학을 갔다 와서 그 공부한 성과를 국내에서만 써 먹으면 아깝지 않을까~싶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나라는 빠진 극동 지역의 유적지를 둘러보자.

일단 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인류의 화석인 베이징원인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다. 몰랐는데 두개골 화석 5점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안전성을 이유로 미국에 보내졌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 남아있는 두개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개된 발굴을 통한 것이라고 한다.  

또 남아시아에서 알려진 유일한 고대 농경 정착지인 메르가르는 처음 본 자료였다. 이곳은 기원전 7,000년경의 촌락 유적지인데 하라파 시대(기원전 2,500년 경~기원전 1,900년)에 인접한 마을인 나우샤로로 인해 쇠퇴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곳에서 구슬에 구멍을 뚫을 때 사용한 돌송곳이 치통을 치료하는데도 쓰였다는 점이다. 신석기시대때 사람들이 이미 충치로 인한 통증을 덜기 위해 치아를 치료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의료 수준이 상당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다.  

그 밖에 인도 지역의 몇몇 유적들을 추가적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먼저 이름은 많이 들어본 하라파-모헨조다로 유적이 어떠한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하라파의 벽돌로 만든 작업장 바닥은 정말 특이했는데 그 위에서 무슨 작업을 했을지 궁금했다. 이들 유적은 신석기시대 때부터 번성했는데 이미 문자를 사용하고 도량형이 통일되었으며, 거대한 성채로 둘러싸여 있었고, 뛰어난 하수시설까지 갖춘 곳이었다. 1986년부터 2001년 사이 파키스탄-미국 합동 발굴팀이 최신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발굴한 결과, 하라파에는 최소 3개 또는 그 이상의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있었다고 하니 자못 그 위상이 당시 대단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마우리아 왕조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 유적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처음 보는 유적이었다. 기원전 300년 경 찬드라굽타 왕의 궁정에 특사로 파견된 그리스의 역사가 메가스테네스는 파탈리푸트라를 보고 570개의 탑과 64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쓰고 있는데, 실제 발굴 결과 그에 상응하는 거대한 성벽이 확인되었다고 하니 이 역시 대단했던 마우리아 왕조의 역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다음 나온 것은 역시 진시황릉이었다. 이미 너무나도 많이 알려져 있고, 너무나도 많은 연구가 진행된 진시황릉은 분명 고대 중국의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국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와 더불어 일본의 나라 유적도 소개가 되었는데, 317쪽 Tip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1963년 황궁 전 지역을 역사지구로 지정하고 인근의 땅을 매입하고 보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동서 길이 4㎞, 남북 길이 5㎞에 달하는 도시의 전모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 딱 풍납토성이 떠올랐다. 한 20만 평정도 되는 풍납토성을 두고 국가는 보존이다, 보상이다, 문화재 조사다 뭐다 간섭을 안 하고 있다. 아니 관심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건가? 일본에 비해 너무나도 비교되는 대상이다. 일본은 600만 평이 넘는 땅을 매입해서 보존처리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풍납토성의 유구가 생각 없는 포클레인에 의해 짓뭉개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와 더불어 거론되는 것이 앙코르와트 유적지였다. 너무나도 유명한 3곳의 유적지는 오늘날 각 나라에 엄청난 이익을 갖다 주는 관광자원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세계적으로 알려질 만한 유적지가 없다는 의미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아직 저급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심히 좋지만은 않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루빨리 우리 문화재를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서 문화 콘텐츠로서 잘 활용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은 오세아니아의 주요 유적들이다. 필자는 그간 오세아니아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그 역사 중 흥미로운 것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이스터섬 정도를 빼놓고 말이다). 그러던 중 제레드 다이아몬드의『총, 균, 쇠』를 읽고는 오세아니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호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석기(5만년 이전으로 보이는)가 발견됨으로써 이 지역이 아프리카만큼이나 인류가 일찍부터 생활했던 대륙임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 거대한 문명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유적이 바로 호주의 메말라버린 뭉고 호수이다. 이곳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火葬)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이미 수만년 전에 화로 옆에서 석기를 이용해서 사냥감을 가공한 흔적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93개의 인공 섬이 자리 잡고 있는 난 마돌이라는 유적도 특이했다. 이들은 산호와 잡석으로 채운 거대한 현무암으로 축조되었는데 전체 면적은 약 81헥타르(0.81㎢)에 해당한다. 약 2천 년 전 최초로 거주지로 사용된 난 마돌에는 1,000년 무렵 최초의 인공섬이 조성되었고 1200~1600년 무렵 난다우와스 무덤군과 같은 거대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바다 가운데 자리한 섬이라는 특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다른 독특한 문화적 양상은 확실히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 하게 하는 것 같다. 또한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뉴칼레도니아에서 확인된 라피타 문화를 보니 마치 죠몽토기처럼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한 토기들이 출토되어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아메리카의 주요 유적을 소개하는 것으로 폴 반은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아메리카 하면 마야, 아즈텍, 잉카 등 고대 문명의 흔적들을 많이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인디언들의 선조가 남긴 뛰어난 문화유산들도 많으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일단 중앙아메리카로 한번 가보자. 

그 곳에는 촐룰라라고 하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그레이트 피라미드가 위치한 당대 중요한 거점도시 유적이 있다. 이곳은 케찰코아틀 신을 모시는 의식의 중심지로서 기원전 1,000~500년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선(先)-콜롬비아 시기 내내 지속적으로 번창한 곳이다. 또한 마야의 중요한 도시였던 티갈의 경우 대광장에 있는 2개의 피라미드식 사원이 압권이다. 기원전 700년에 이미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고 보지만 그 성격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으며, 기원전 350년부터 기원후 900년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도 밀림을 벌목하고 유적을 발굴하고 있다고 하니 그 안에서 고생할 연구자들에게 심심한 노고의 말씀을 전한다. 그밖에 기원후 100년 즈음부터 600년 사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 도시 ‘테오티와칸’과 마야의 제의가 이뤄진 ‘치첸이트사’, 아즈텍 제국의 수도로서 인구 25만 명 이상이 거주했던 ‘테노치티틀란’까지 극동 지역 못지않은 거대한 인공 건조물들을 다수 포함한 유적들을 차례대로 소개하고 있었다. 인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특정 인종의 능력이 우수해서 그 결과 오늘날 국제 역학관계의 판도가 결정 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정관념으로 과거를 바라봐서도 안 되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의 증거는 이러한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들을 보면 더욱더 절실히 느낄 수가 있다. 

이외에도 미국 뉴멕시코 주의 차코 캐니언을 보면 기원후 850~1,250년 무렵 푸에블로(아너사지) 인디언들의 선조들이 지냈던 몇 개의 큰 촌락 유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의 푸에블로 보니토 유적과 함께 이들 인디언 선조들이 만든 유적은 잘 설계된 댐과 도랑을 갖추고 있었고, 645㎞가 넘는 도로망도 갖추고 있었다. 1980년대에 나사(NASA)는 차코 캐니언에 대한 적외선 위성 스캔을 실시했고, 그 결과 협곡과 도로의 포괄적인 연결망이 잘 드러나게 되었다. 이들 도로의 특징은 장애물이 있어도 무조건적으로 직선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운송수단이 없고 도보로만 이동했던 차코인들의 실용적인 측면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선조가 살았던 또 하나의 유적이 바로 메사버드 유적이다. 반지하 흙집과 석조 룸블록을 비롯해서 제의적 용도로 이용했던 원형으로 된 지하 키바들과 대규모 석조 저수시설들은 이 유적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수준 높은 삶을 영위했음을 알려주는 것들이었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유적과 함께 북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또 다른 흔적은 바로 미시시피 강 유역의 카호키아 인디언의 선조들이 남긴 유적들이다. 기원후 700~1,400년 무렵 번성했던 카호키아 유적은 그 면적이 약 15㎢에 달했으며, 몽크 마운드와 같은 거대한 인공 건조물들을 남겼다. 당연히 19세기 미국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이런 거대한 고대 유적을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오늘날 그레이트 서펀트 마운드처럼 거대한 유적들은 모두 이 지역에 살았던 인디언의 선조들이 남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마 19세기 유럽에서 이주민들이 대거 넘어오지 않고 500년 혹은 1,000년가량이 더 지났다면 어떠했을까? 그럼 제2의 잉카, 아즈텍 제국이 탄생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특이한 유적도 2군데 소개되고 있었다. 하나는 랑즈 오 메도스 유적인데 바로 콜럼보스보다 500년 앞선 11세기에 신세계에 정착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정착촌 유적이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전설에 따르면 바이킹의 영웅 붉은 에릭은 기원후 982년 홀연히 사라져 빈랜드라는 숲으로 뒤덮인 땅에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뉴펀들랜드 섬 일대라는 것이다. 실제 발견된 유물, 유적들은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후 11세기경의 전형적인 바이킹들의 유산으로 판명되었다. 이제 이 가설은 어느 정도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기에 이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또 하나는 리틀 빅혼 전투가 벌어진 곳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라 놀랐다. 어떻게 평야지대에서 벌어진 싸움의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남는단 말인가? 카스터가 이끄는 제 7기병대 대원 647명은 리틀 빅혼 강둑에 사는 인디언 마을을 공격했다가 210명이 몰살당하는 대패를 당한다. 그리고 그 사건의 전말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표조사 결과, 전투에 사용된 총알과 화살촉 등이 확인되었고 유물 분포 분석 결과 커스터가 자신의 기병대를 3개 편대로 나누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더 자세한 연구를 통해 개개인의 전투 위치와 기병대와 인디언 부대의 이동 경로에 대한 가설까지 세울 수 있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전체적인 조사 과정이나 보다 세부적인 자료들을 소개하지 않아 필자의 궁금증을 계속 증폭시키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러한 전쟁의 흔적을 전쟁터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밝힐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특이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는데 소위 말하는 관산성 전투와 같은 엄청난 규모의 전투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조사를 꿈도 못 꾸는 실정이다. 차후에 이런 부분은 외국의 연구방법론을 공부하면 어느 정도 해답이 보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이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왔다. 정말 숨 가쁘게 세계 고고학자들과 세계 각지의 중요한 고고학 유적지에 대해 알아봤다. 이 책의 맨 앞을 보면 책에 소개된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 세계 고고학 연표가 그려져 있고 맨 뒤에는 책에 나오는 어려운 용어가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책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책에 나온 삽화도 전체적으로 새로운 자료들이 대부분이어서 좋았던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은 각 유적을 소개하면서 유적 전경을 찍은 사진을 실은 것도 있지만 아닌 것도 많아서 전체적으로 그 유적을 이해하는데 힘들었던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분량의 책에 그 많은 것들을 다 담을 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최신의 자료들을 대중성 있게 편집해서 최대한 자세히 소개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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