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 『맥베스』를 흥미롭게 읽었다. 유명한 작품이지만 코멘트를 하고 페이퍼를 써야 한다는 부담이 시너지로 작용하여 좀 더 꼼꼼히 읽게 되었다. 인물에 대한 평가에 있어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는데 대개의 수강생들은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맥베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햄릿의 복수심과 오셀로의 질투심에는 공감과 동정을 표했으나 맥베스의 야심에 대해서만큼은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부적합하다는 평가가 전반적이었다.

  결국 어쩌다보니 맥베스를 쓸쓸히 옹호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는데 바라던 왕좌에 올랐지만 환영과 불안에 시달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함께 싸워줄 벗 하나 없이 홀로 죽어간 맥베스는 안개 속을 칼로 휘저으며 나아가는, 삶의 허무를 알고도 그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인간 운명의 상징처럼 보인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운명, 다가오는 몰락의 기운 앞에서도 깊은 통찰과 강건한 기개를 보여준 맥베스는 햄릿과 오셀로에 비해 보다 성숙한 영웅이다. 이런 요지의 페이퍼를 쓰게 되었는데 나는 나의 무엇이 거의 비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맥베스를 이해하게 만들었을까, 스스로 의아해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서 올 겨울에 〈하얀 거탑〉을 다시 보게 되었다. 방영 중에는 거의 챙겨보지 못해서 이번에는 마음먹고 제대로 보았다. 마지막 회를 보면서는 정초부터 어찌나 울었는지 뒷북을 쳐도 참 요란하게 친 셈이다. 외과의 장준혁을 연기한 김명민은 불과 얼음을 한 얼굴에 지닌 뛰어난 연기자였고 FM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체격은 다양한 슈트와 타이를 멋지게 소화해냈다. 지휘봉과 메스, 둘 다 어울리기란 힘들 법도 한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단히 노력하는 배우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다음 역할을 기대한다.

  그가 연기한 장준혁은 한 마디로 개천에서 난 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가 용 중의 용이라는 것과 근본이 개천임을 바꿀 수 없음에 있다. 비상한 두뇌와 수술실력 만큼은 장준혁을 따라올 자가 없다. 그것이 첫 번째 문제이고 근본이 개천이다 보니 넘어야 할 산이 많고 개천의 정기로 인해 당최 뼛속까지 차가워질 수가 없다. 그것이 두 번째 문제이다. 그가 조금 더 못났든가, 조금 더 독했다면 조금 더 오래 살았을 것도 같다. 암세포들이 뱃속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며 번식하는 동안 그는 여느 때처럼 수술을 하고 법정에 선다. 마지막엔, 자신의 몸을 잠식해오는 암덩어리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시신을 기증하기까지 한다. 슬픔이라고도, 참회라고도 할 수 없는 눈물은 오직 혼자 있을 때만 흘린다. 그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의 조용한 죽음 앞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Power is nothing without control. 이 말처럼 컨트롤 할 수 없는 천재의 삶은 그저 무(無)일까.

  좀 더 어릴 적엔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지를 않아서 사주팔자나 점성술 등에 관심도 많았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내가 가고 있는 길에 확신이 안 설 때 특히 많이 이끌렸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운명이 어떠한가, 보다는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가 어떠한가, 라는 생각이 든다. 맥베스와 장준혁은 주어진 운명을 사랑했다. 행위의 도덕성과는 별도로 적어도 현실을 탓하면서 주저앉지 않았다. 비운의 영웅이긴 해도 비겁한 영웅은 아니었던 셈이다. “바람아, 불어라. 파멸이여, 오라. 갑옷을 걸치고 죽을 것이다.” 평범한 나는 이 안온한 삶에 자족하면서도 맥베스의 비장한 외침에 설레고 긴장한다. 방식이 다를 뿐. 최선을 다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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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9-01-0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이 어떠한가, 보다는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가 아떤한가. 크.. 소주 한 잔 들이키면서 해야 하는 말 같아요. 너무 와 닿네요. :) 이 글 너무 좋네요!!

깐따삐야 2009-01-09 10:29   좋아요 0 | URL
음... 알 것 같아요. 장미님이 쐬주가 고프셨군요!!

Mephistopheles 2009-01-09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잠깐 검은 가운을 입고 짙은 프란체스카풍 화장을 하고 타롯카드로 점을 쳐주는 점성술사 깐따삐냐님을 상상했습니다만...(제법 잘 어울린다는..ㅋㅋ)

깐따삐야 2009-01-09 10:30   좋아요 0 | URL
꼬깔모자에 빗자루까지 타고 다니면 딱이겠죠? ㅋㅋ

웽스북스 2009-01-10 15:07   좋아요 0 | URL
꼬깔모자에 빗자루. 하하하. 못살아. 대박 대박. ㅋㅋ

레와 2009-01-0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깐따삐야님의 글이 참 좋답니다. ^^

깐따삐야 2009-01-10 23:17   좋아요 0 | URL
글이 좋으신 거구나.ㅠ ^^

웽스북스 2009-01-10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하얀거탑. 저도 얼마전에 민좌 때문에 다시 봤어요. 그거 보고 나름 느낀게 많아 장문의 길을 준비했었는데, 준비만 하다가 그만뒀었네요. 전 사람들이, 심지어는 이선균조차 아무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최도영도 정말 좋았답니다. 하하.

깐따삐야 2009-01-10 23:19   좋아요 0 | URL
이선균은 일단 목소리가 죽음~이죠. 곁에 있는 사람 살짝 김빠지게 하는 캐릭터이긴 한데 저렇게 꼼꼼하고 속 깊은 친구 하나 있었음 좋겠다, 하고 생각했어요.^^
 

1. 지구가 멈추는 날  

 



우리 키아누 리브스는 자꾸 이러시다가는, 조만간 신흥종교의 교주님 되시겠다.

그나저나 지구가 멈추기 전까지는 사람은 안 변한다, 요게 메시지인가. 그러니깐 지구 멈추기 전에 다 같이 잘 좀 하자는 건가.  

 우리 키아누 리브스가 설마하니 메시지'만' 좋은 영화에'만' 출연하기로 한 것인지. 허공을 휘저으며 총알을 피하던 날렵함은 어디로 갔을꼬.  

구원자로서의 역할은 매트릭스의 네오까지가 딱, 좋았다는.  





 

 

2. Twilight 


 

 

천둥칠 때 뱀파이어 가족이 야구하는 장면만 재밌었다. 

그런데 뭐랄까, 다 보고 난 느낌은 다소 생뚱맞게도,

건전한 이성교제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십대용 영화랄까.  

멜로인지, 액션인지, 판타지인지, 그걸 모두 섞은 것이라기엔 너무나 미흡하고 그냥 얼굴 허연 두 주인공을 보면서, 로미오와 줄리엣 역할을 맡기면 어울리겠단 상상만 했다.   

딱 고로코롬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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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1-0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하긴 키아누 리브스는 콘스탄틴에서 조차도 살인성인을 통한 인류의 구원자로 묘사되버렸죠.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배우만큼은 용서해주세요.....

깐따삐야 2009-01-03 00:22   좋아요 0 | URL
1. 인류 구원도 좋지만 배우로서의 자기 자신부터 좀 돌아보고 구원했음 좋겠어요.
2. 제니퍼 코넬리 팬이신가보죠? 아니면 줄리엣 닮은 저 아가씨? 남자배우들이 넘 멋있어서 묻히던데요. 흥!

Mephistopheles 2009-01-03 00:36   좋아요 0 | URL
제니퍼 코넬리도 좋아하는 배우이고 크리스틴이라는 저 배우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다죠...아니 그럼 제가 저런 기생홀애비같이 생긴 남자주인공에 관심이 갈꺼라 생각하십니까?

깐따삐야 2009-01-05 11:56   좋아요 0 | URL
마님한테 이를 거에요!

라로 2009-01-0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간에 들어와야 두분을 다 만나는 군요~.ㅎㅎ
두분 반가와요~.^^
그래도 트와일라잇은 용서해주세용~.나름 틴스럽잖아용~.^^;;;

깐따삐야 2009-01-05 11:59   좋아요 0 | URL
앗, nabi님이시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한텐 그냥 그랬어요. 그나저나 뱀파이어도 한번 해볼만 하겠던데요. -_-

웽스북스 2009-01-03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전한 이성교제요? 어머, 저요 ㅋㅋㅋ

깐따삐야 2009-01-05 12:00   좋아요 0 | URL
나이 서른에 대체 이 댓글은 어떻게 응대를 해야 하는 건지 원. ㅋㅋㅋ ^^

웽스북스 2009-01-05 12:54   좋아요 0 | URL
ㅋㅋ 깐따삐야님, 나이 서른에 이정도 지혜는 갖춰놓으셨어야죠 ㅋㅋ

마늘빵 2009-01-0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구가 멈추는 날은... 저도. 100분짜리 영화가 세 시간처럼 느껴졌어요.

깐따삐야 2009-01-05 12:0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요. 끝까지 기대하면서 봤는데 고작 100분짜리 영화가 그렇게 지루하기까지 하다니. 키아누 리브스한테 전화하고 싶었어요.

2009-01-03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5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09-01-03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트와일라잇 보면서 천둥칠때 야구경기 하는 부분에서 많이 웃었어요 ^^
글고 늘 헷갈리는게 '키아 누리브스' 냐 '키아누 리브스' 냐 라는거.. -_-;;

깐따삐야 2009-01-05 12:10   좋아요 0 | URL
투수 뱀파이어도 나름 귀엽더라구요.^^
하하핫! 무스탕님이 저를 웃겨 주십니다. 계속 이런 영화만 찍다가는 머잖아 키아 누리브스교를 창시할지도 모르죠.

다락방 2009-01-04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아. 깐따삐야님. 전 트와일라잇 두번 봤는데 orz

깐따삐야 2009-01-05 12:12   좋아요 0 | URL
아아아아아아. 다락방님. 빛을 받으면 다이아몬드 피부로 변하는... 샤방샤방한 꽃총각 뱀파이어 땜에 그러셨던 거죠?! 저는 그 총각이 냄새 참는 장면에서 혼자 막 크게 웃고 그랬답니다. -_-a

레와 2009-01-0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트와일라잇 세번째 볼려고 벼르고 있는 1人.

키키...^^;;

깐따삐야 2009-01-07 11:51   좋아요 0 | URL
세번!! 그 영화의 무엇이 다락방님과 레와님을...? 흠.
 

#
  손 빠른 엄마는 내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만두를 잔뜩 빚어 놓으셨다. 집에서 빚은 만두를 살짝 익혀서 냉동실에 보관하면 오랜 기간 처음 맛 그대로 먹을 수 있다. 엄마가 육수에, 계란지단에, 파까지 다 준비해 놓으셔서 나는 그대로 가져와 떡국 몇 개 넣고 보글보글 끓이기만 하면 되었다. 남편이 방학해서 매끼 챙겨먹는 일이 신경 쓰였는데 잘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전보다 핼쑥해진 엄마 얼굴이 계속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내가 서른이 된 것만 생각하느라 엄마 연세가 한 살 더 느는 걸 생각 못했던 것이다.

 매일 얼굴 마주하고 살 때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요즘은 어쩐지 볼 때마다 엄마가 늙는 것 같다. 아빠는 내가 결혼한 후로 영리하게도 한결 낮은 자세로 임하시는 모양인데 그냥 낮은 자세에만 충실하실 뿐. 엄마의 나이 듦을 막지는 못하는가 보다. 가까이 살아서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혹시 편찮으시기라도 하면 가볼 수 있으니 다행이긴 한데, 엄마는 일도 다니시면서 딸내미 반찬 챙기랴, 사방에서 투덜거리는 것 다독거리랴, 입 짧고 철없는 아버지 챙기랴, 너무 힘드시다. 그래도 엄마는 걱정 마라, 라고만 하시니 엄마가 뿔났다, 의 집나간 김혜자는 그래도 믿을 만한 구석이 있어서 그랬구나 싶어 할 노릇을 넘치게 하고도 집도 못 나가는 엄마가 더 안쓰럽다. 

#
  새해 첫 독서로 『치유하는 글쓰기』를 집어 들었는데 책 내용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데 내 마음이 좀 특별해졌다. 엄마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 신문사에서 기자 몇 명이 겁나먼 촌마을의 우리 집에 찾아왔었다. 생활수기에 당선된 엄마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이 책을 읽다보니 당시에 엄마가 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엄마는 대학노트에 한 달 가량 뭔가를 계속 써내려갔는데 엄마도 일기 써? 라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말하거나 뭘 계산중이라고 하시면서 안 보여주셨다. 고향에서 엄마는 똑똑하고 재미있기로 유명했는데 엄마의 자존심은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기보다는 치유하는 글쓰기를 택했던 것이다. 기자들이 다녀간 후, 엄마의 수기는 밭이랑에서 활짝 웃는 엄마 모습과 함께 신문에 크게 실렸다. 막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참고 우리 엄마, 참 잘 썼다, 라고만 했던 기억이 난다. 마을 어른들까지 오셔서 칭찬해주시고 난리였는데 엄마는 서울에서 있었던 시상식에 부득부득 혼자 가셨다. 아침 일찍 채비를 하시면서 아빠에게는 결근하지 말기를, 우리에게는 저녁 때 올 테니 학교 잘 다녀오라고 당부하시곤 상패와 상금을 안고 씩씩하게 돌아오셨다.

 그 후로 엄마는 신문에 수필을 몇 편 더 싣게 되었고 활짝 웃는 엄마 얼굴을 신문지면에서 볼 때마다 마냥 자랑스러웠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어려서 그저 그뿐이었는데, 멀리 시집 와서 말 통하는 사람 하나 없고, 생활은 고단하고, 엄마가 참 외로웠겠구나, 하는 깨달음. 나중에 물었을 때, 엄마는 상금이 커서 마음먹고 써봤다, 절박하면 글도 나오더라, 고 단순명쾌하게 대답하셨지만 이제는 그 이상이었음을, 잘 알 것 같다.

#
  남편이 타이어를 바꿀 때가 됐다고 해서 집 근처 가게에 들렀는데 흥정하는 과정에서 역시 내가 엄마 딸이구나, 싶어 또또 엄마 생각을 했다. 남편과 나는 좀 더 깎아보려고 하고 아저씨는 더 이상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는데 잠시 불을 쬐러 들어온 참에 남편한테 그랬다. 내가 타이어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저 정도로 나올 땐 더 이상 안 깎는 게 좋다, 좋은 걸로 잘이나 해달라고 해라, 손 볼 데 있음 손봐달라고 하고. 남편은 한꺼번에 목돈이 나가는 게 못내 아쉬운지 더 어떻게 해보려는 모양인데 사람이 자꾸 그러면 아무리 손님이라도 천하에 밉상이 되는 거라고, 연초에다가 날도 추운데 자꾸 실랑이하지 말고 그만 하라고 했다. 남편은 자기편을 안 들어주니까 조금 삐쳐있는 것 같더니 나중에 차에 오르고는 딴소리를 한다. 그래도 여기가 다른 데보다 조금 더 싸고 서비스도 좋은 것 같네. 그래요, 이제 얼굴도 익혔고 집 근처니까 단골해서 서비스도 받고 그래요. 그리고는 나보고 자기보다 배포가 더 큰 것 같단다. 갑자기 목돈이 나가는데 하면서. 그래서 돈보다 중요한 건 당신의 안전, 이라는 맥심을 날려주셨다. 쿡쿡.

 사실 바가지를 쓴 것 같지도 않지만 내가 잘한 건지도 감은 안 온다. 하지만 엄마는 누구한테든 지나친 미움을 사지는 말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누구보다 알뜰하신 분이지만 파 한 단을 살 때도 사는 사람, 파는 사람, 모두가 기분 좋게 거래하신다. 간혹 엄마가 실랑이를 하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곁에서 봐왔다. 엊그제는 요즘처럼 살기 어려울 때는 다들 날카로워져 있을 때라 서로서로 더 조심해야 한다, 고도 하셨다. 내가 좀 단순하다보니 오늘 대책 없이 헐렁해진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저씨는 꼼꼼히 이것저것 더 알려주시며 앞으로의 서비스를 약속하셨고 남편은 또 뭘 바꿔야 한다며 내일 다시 그곳에 갈 거란다. 아까 이것저것 손 볼 때 다 같이 하지. 쯧!

  이렇게 연초를 엄마 생각으로 보내고 있다. 효도하는 한해를 보내지도 못할 거면서 상상력은 풍부해가지구 생각만 요란하게 한다. 코앞에 살면서 엄마 보고 싶다고 징징거리면 꼴불견이라고 할까봐 남편 몰래. 어쨌든 난 울엄마 딸이고. 엄마 보고 싶을 뿐이고. 엄마! 엄마~ NAN 뉴스의 안상태 기자는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왜 위기에 처하면 엄마 소리부터 나오는지.  

 올 한해 다른 소원보다도, 부쩍 여위신 엄마가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이런 당연한 바람조차 나 자신을 위해서인 것 같아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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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1-03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깐따삐야님 글솜씨는 유전이였군요....

깐따삐야 2009-01-03 00:26   좋아요 0 | URL
근데요, 유전보다 무서운 게 습관인 것 같아요.

웽스북스 2009-01-03 01:48   좋아요 0 | URL
음. 그러게요. 저도 읽으면서 그 생각 했어요.
역시 어머님의 포쓰가 늘 만만치 않게 느껴졌었고,
아무래도 최근 여러 글들의 정황으로 보아
깐따삐야님은 어머니를 똑 닮은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하하.

깐따삐야 2009-01-05 12:14   좋아요 0 | URL
남편이 그러더라구요. 말하는 게 장모님이랑 똑같다구. ㅋㅋ

순오기 2009-01-1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딸이 스무해를 살고 나니, 지가 엄마 닮았다고~~ 어쩔 수없이 인정한대요.
왜 엄마가 하는 말이나 생각까지 따라 가는지 모르겠다고~~ㅎㅎㅎ
'엄마(나)도 엄마(외할머니)처럼 안 살 거야~ '소리치던 시절이 있었는데, 나도 꼭 따라하더라는 얘기를 했더니 세넘들이 모두 뒤집어 졌어요.ㅋㅋㅋ
오늘은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면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하던 잔소리였을 거라며, 엄마도 우리처럼 자랐을 모습이 짐작이 된대나 뭐래나~~~ ^^

깐따삐야 2009-01-13 00:10   좋아요 0 | URL
딸들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외모는 아빠를 닮을 수도 있는데 성격이나 습관 만큼은 엄마를 닮을 수밖에 없는 운명! ^^
 

  논문 인준서에 도장을 받고나면 속이 다 후련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똑같은 글을 몇 번이고 계속 읽다보면 멀미가 날 것 같은데 요즘 좀 그랬었다. 자꾸 보아도 질이 향상되지는 않고 양만 늘려봤자 누더기가 되어버리니 심란하여라. 더 손보아야겠지만 끝난 것은 끝난 것이니 우리 방 사람들끼리 모여 조촐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P언니는 귀여운 딸내미가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갈 것이고 J선생님과 나는 새 학교로, K는 그새 취직을 했다. 우리 방 멤버들은 각자 개성이 강하면서도 단합이 잘 되어서 사람들이 부러워하곤 했었는데 논문도 참 각양각색으로 썼다.

  오늘 어느 교수님 한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현직 교사면 교육 쪽으로 논문을 써보지 그랬냐고. 칭찬하실 땐 언제고 지금에 와서 토대를 뒤흔드는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괜한 오해일까. 마치 의무 방기라도 한 것 마냥 책망하는 어조가 마음에 걸렸다. 사실 예까지 와서 들으나마나한 제안이지만 약간의 아쉬움을 내비치며 성의 있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영어교사로서 영문학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교양을 쌓고 연구하는 것이 왜 아쉬운 일이 되어야 하는가. 지난해 수강했던 교수님의 영시 강의는 매우 양질의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마주한 비좁은 틀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런 면으로 볼 때 지금의 지도교수님을 만난 것은 참 행운이었다. 리처드 로티와 이외수를 좋아하시는 교수님은 삐딱한 괴짜 성향을 점잖은 체구와 긴 침묵 속에 감추고 계신 분이다. 오리엔테이션 날, 교수님들 모두가 환영인사 차 강의실을 방문하셨는데 눈에 띄게 훤칠해서이기도 했지만 고집스런 세계를 단단히 담은 눈빛이 인상에 남았더랬다. 난 계획서에 테네시 윌리엄스를 써냈고 교수님의 지도 학생이 되었다. 교수님의 강의는 힘이 있고 현대적이었다. 때로 본인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흥분하시는 모습이라든가, 어색한 유머, 수줍은 배려들이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지도교수님과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도 간혹 봐왔는데 그런 부분에 있어 우리 방은 참 무탈했던 것 같다. 교수님이 별다른 터치 없이 우리의 개성을 인정해주시듯 우리 역시 교수님의 개성을 즐거워한 덕분이었다.

  다들 2년이 금세 가버렸다며 곧 졸업임을 아쉬워하는데 교수님은 문득 그런 말씀을 하셨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꾸 도전하는 삶을 살라고. 안정적인 것도 좋지만 모험 속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성취감은 매우 즐길만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공부를 더해보는 것이 어떠냐며 부추겨대는데 이 대목에서 왜 나는, 멀리 사는 애인이 보고 싶어 한밤중에 집을 나서는 불온한 상상을 했을까. 금강석을 들이대도 돌멩이로 알아먹는 저렴한 수준이라니 원.

  곧이어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까지도 모든 것을 수치화, 계량화시켜야만 안심하고 신뢰하는 학문 풍토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들이 오가다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교수님은 전부터 관심이 많으셨는지 자유로운 학문 커뮤니티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셨다. 왜 아니겠는가. 대학은 좋은 직장임에 틀림없지만 제약이 많다. 그리고 제도는 틀 안의 자유만을 인정한다. 그 결과, 순수한 사랑의 대상이 변화가 아니라 변질되는 순간을 목격해야 하고 그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안정의 욕구란 그렇게 쉽게 저버릴만한 것이 아니라서 짐짓 괴로움을 잊는 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열심히 잊는 채 하다보면 실제로 잊기도 한다.

  연말에 귀 좀 가려우시겠으나 역시 모임의 갈무리는 세기의 꼴통령, 이명박으로 맺음하고 마당에 나와 눈발 폴폴 날리는 밤풍경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많이 떠들고 많이 웃었는데도 교수님도, 언니들도, K도, 나도. 모두가 고즈넉해 보이는 밤이었다. 춥고 눈 오는 밤의 뒷모습이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가능성도 알지만 스스로의 한계도 잘 아는구나.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위해 건배할 줄 알다니.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당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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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2-31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인한 깐따삐야님. 올해의 마지막 새벽이라니. (네꼬님 집에 단 덧글 보고 쿵! 했지요) 덕분에 얼른 자려던 마음이 그만 아쉬워져버렸어요. 으흑. 이를 어째.

무사히 잘 마치신거 정말 축하드려요 ^_^ 난 올해 깐따삐야님 덕에 알라딘 마을을 좀 더 사랑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고맙기도 하구요 ^^ 이 새벽이 지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자리에 있어요. 우리. 흐흐흐. 굿나잇. 입니다.

Mephistopheles 2008-12-31 15:10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20X4-30+45-65는 뭘까~~~~요?

깐따삐야 2009-01-01 10:40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네꼬님 글에 댓글 달고 난 바로 자버렸는데. 웬디양님이 못 자고 있었군요! 저런저런. 바쁘단 핑계로 서재활동을 제대로 못했는데 언제 다시 들러도, 여전히 따듯하고 부지런한 웬디양님을 만날 수 있어서 참 좋아요. 새해 복 많이 받고 올 한해도 열심히 달리자구요.^^

메피님- 간장게장+명동칼국수+등갈비는 뭘까~~~~요? 흥흥!

Mephistopheles 2009-01-01 13:01   좋아요 0 | URL
간장게장+명동칼국수+등갈비=급체 입니다. 호프만식 산술논리도 따지면 소화불량이고요.

깐따삐야 2009-01-02 23:25   좋아요 0 | URL
메피님, 급체하나 좀 봐주세요. 갑자기 증명하고 싶어지네. 먼저 좀 사주시구요?

2008-12-31 0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1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08-12-31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 말이 멋진데요.
'소주 한 잔 했더니 사랑이 입 안에서 폭발하누나' 왠지 낭만적이고 문학적으로 보여요.
저는..소주 먹으면 무조건 입 안에서 폭탄이 터질 것 같다죠. -_-
새 해에는 예전처럼 다시 깐따 동상을 자주 봤으면 좋겠습니다.^^

깐따삐야 2009-01-01 10:57   좋아요 0 | URL
술이 달게 느껴지는 자리가 있잖아요. 그 날도 그랬는데 많이 마시면 정말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아서.ㅠ 누군가 대학원의 인간관계는 정치적이라고 그러던데 그것도 사람따라 상황따라 다른가봐요. 저는 무조건 아쉽기만 하고 이제 곧 졸업이면 보기 힘들어진다는 생각에 맘도 짠하고 그랬답니다. 에휴.

새해엔 엘신님과 더 자주 보고 사랑과 폭탄을 주고 받으며(어째 좀?) 즐거운 수다 많이 나누고 싶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마늘빵 2008-12-31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해진 기간에 맞춰 부랴부랴 바삐 쓰기는 했지만,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죠. 책으로 나온 결과물을 다시 읽어보면 볼 때마다 자꾸 아쉬운 부분이 보인다니까요. 그래서 어떤 분은 나온 뒤에는 다시 들춰보지 않는다구. ^^ 논문 축하, 결혼도 축하, 그리고 이제 서른이던가요. 그것도 축하.

깐따삐야 2009-01-01 11:05   좋아요 0 | URL
전에 아프님이 논문 쓰시면서 페이퍼에 올리셨던 심경들이 고스란히 이해가 되는 한해였어요. 댓글도 공감백배에요. 자꾸 아쉬운 부분이 보이는데 수정보완을 해도 또 아쉽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냥 아예 들춰보지 않는 게 최선인지도 몰라요. 다시 쓰면 더 잘 쓸까요? 그렇지도 않을 것 같아요.

축하 감사해요. 논문은 허접하고 결혼은 아직도 갸우뚱, 서른은 왠지 약올리시는 것 같아 축하 받기 민망하지만.-_- 아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더욱 성장하는 한해 되시길 바래요.^^

무스탕 2008-12-31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로 바빴던 올해였네요.
모두 무사히 잘 마친것 축하해요.
오늘밤은 서방님하고 30기념 한 잔 하셔야죠? ^^

깐따삐야 2009-01-01 11:0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랬음 좋았을텐데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서 10시도 안 되어서 잤다는. 초저녁 잠이 많아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서른은 서른인가 봐요. 아흑!

무스탕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서재에서 더 자주 뵈요.^^


순오기 2008-12-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어떻게 저런 태그를 쓸 수 있을까, 감탄하는 중!
두루두루 축하합니다~
태그패밀리가 다시 뭉칠 수 있도록 알라딘에서 새해이벤트 없을까요?^^

깐따삐야 2009-01-01 11:11   좋아요 0 | URL
술의 힘이죠. 재능보다 강하고 열정보다 뜨거운. 쿡쿡.^^
(실은 동아리 선배 하나가 비슷한 표현을 한 적이 있어요. 헤~)
축하 감사드려요. 순오기님 덕분이에요. 알라딘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계시니 언제 다시 들러도 늘 푸근해진답니다.

아~ 태그패밀리. 지난 겨울의 추억이 새록새록. 그나저나 정말 알라딘 왜 이벤트 안 하는 거죠!! 저도 이참에 폭식투쟁에 들어갈까요!!

웽스북스 2009-01-02 13:25   좋아요 0 | URL
폭식투쟁. ㅋㅋㅋㅋㅋㅋ 아 깐따삐야님. 너무 웃겨요.

깐따삐야 2009-01-02 23:26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도 동참하세요. 겨울맞이 이벤트 이런 것도 하나 없구. 알라딘 너무햇!

웽스북스 2009-01-03 01:59   좋아요 0 | URL
전 서재의 달인인데, 그런걸 해도 될까요? (어머, 이런 ~ ㅋㅋ)

BRINY 2008-12-3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방학을 했는데, 고3의 방학식은 뭐가 뭔지...그 와중에 마지막으로 유리를 깨서 유종의 미를 장식하는 녀석하며...낼모레면 스무살 맞는지...
어느 교대생의 블로그에서 본 [먹고 살려고 교사하지만]이란 말이 계속 맴도는 연말입니다.
깐따삐아님의 새로운 모험을 기대하면서!

깐따삐야 2009-01-01 11:17   좋아요 0 | URL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일 저지를 타이밍을 캐취하는 것 같아요. 꼭 방학식 하는 날 유리를 깬다죠. 이제 저도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갑자기 긴장되네요. 으이궁!

우리부터 잘해야겠지만 우리를 정말 갈 데까지 몰고가는, 인간의 한계에 다다르게 만드는, 그런 일들이 좀 없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BRINY님도 방학 동안 재충전 하시고 다시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학교로 돌아가시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Mephistopheles 2008-12-3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생각 했는걸요..삶이 모험인 사람이야 지루한 삶은 아닐지라도 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나 본인 스스로는 굉장히 피곤한 삶이 아닐까 하고요.^^

암튼 깐따삐야님 논문하고 일단은 빠이빠이하는 거겠죠.?? 축하드려요..^^

(대체 소주 마시고 뭘 한겨??)

깐따삐야 2009-01-01 11:22   좋아요 0 | URL
그건 그래요.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이 고생하겠죠. 그나저나 모험의 의미란 여러가지니깐 작은 것이라도 목표를 세우고 도전해보는 삶, 좋은 것 같아요.

일단 빠이빠이 하고픈데 그게... 그래도 감사해요.^^

소주 마시고 집에 와서 술주정 좀 하다가 잠들었어요. 그러고나니 새해네요. 흐흐. 메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저도 달인 될 수 있도록 많이 부추겨 주세요. 네?

Mephistopheles 2009-01-01 13:00   좋아요 0 | URL
제 서재에 오셔서 일수 찍으세요...ㅋㅋ

웽스북스 2009-01-03 01:48   좋아요 0 | URL
오홋, 그것 강추!
 

  한번 쯤 이십대를 돌아보며 글을 쓰고 싶었다. 꼭 글로 남기지 않아도 이맘때면 한 해를 돌아보고 정리하곤 했었는데 올해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면서 또 다른 무언가가 뭉텅이로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경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 곧 서른이 되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서른 살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싱겁고 담담하다. 많은 시인들이 서른을 이야기했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청춘의 송가로 유명해졌지만 내 코앞의 서른은 대단히 아쉽거나 비장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나이 한 살 더 먹는구나, 하는 느낌. 오히려 스물대여섯 즈음에 상상했던 서른이 훨씬 더 의미심장했다. 연애를 할 줄도 알고, 직장에서도 노하우가 쌓여가고, 믿을만한 친구 서너 명에, 가족들 사이에서도 더 이상 철딱서니 막내가 아닌, 적당히 무르익었으되 노티나지 않는.

  그런데 현실의 나는? 연애를 할 줄 몰라 그냥 결혼해 버렸고, 내년에 돌아갈 직장이 낯설지나 않을까 염려되고, 믿을만한 친구 서넛과는 연락 한 지가 오바마 당선 전이고, 가족들 사이에서는 소꿉놀이 중인 막내로 취급받는 등 적당히 노티는 나되 결코 무르익지는 않았다. 서른이 되면 한 가지 정도는 자신 있을 줄 알았는데 나이 삼십에 그것도 못해? 라는 말은, 텔레비전에서도 나오고 책에도 쓰여 있고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그 말은, 함부로 으쓱거리는 삼십대의 어깨를 짓누르지 않던가. 이렇듯 환상을 빼니 부담만 남는 인색한 현실이라니.

  한편 나의 이십대는 전반적으로 고독했었다. 밖에서 비춰지는 모습과는 별개로 내면을 지배했던 대개의 정서가 그랬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 고독을 즐기고 사랑했던 것 같다. 삼한사온이라는 겨울날씨 마냥 사흘 동안 사람들과 어울렸다면 나흘 정도는 방콕해서 스스로를 감금시켜줘야 하는. 언젠가 내리 며칠을 밖으로 돈 기억이 있는데 한 사나흘 쯤 지나자 가슴이 휑한 것이 빈털터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는 오래 굶주린 사람처럼 집밥을 먹어주고, 가족들에게 은근히 잔소리를 청하고, 좋아하는 책들을 부둥켜안고 방을 뒹굴며, 수첩이나 모니터에 대고 하소연을 해야 한다.

  그 와중에도 한 가지 특이할만한 것은, 거의 강박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성실성의 문제다. 내 청춘의 장점이자 단점은 쉬지 않는다는 것.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난 다음날에도 과제물 기한을 맞추기 위해 자료를 찾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눈물이 앞을 가릴지언정 내 앞길을 가리게 놔둘 수는 없다는, 사뭇 비장해 보이지만 소심함에서 비롯되는 성실성. 이분법을 즐기는 몇몇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감성적으로 보이는데 현실적이라는 둥, 현실적인 줄 알았는데 감성적이라는 둥, 하나마나한 말을 늘어놓으며 내 정체를 파악하려 했으나 삽질도 그런 삽질이 없다. 저렴한 비유이긴 하지만 삼겹살에 상추를 싸먹든, 상추에 삼겹살을 싸먹든 맛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듯 고기와 채소의 위치를 부지런히 바꿔가며 열심히 살아온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게 없는 건 모험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번쯤 불판을 뒤집을 수 있는 용기,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엉뚱한 언행으로 가끔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지만 그저 소소한 해프닝에 불과했을 뿐. 고루한 공무원 사회에 속한 나는 불판을 뒤집기는커녕 불판 갈아주세요, 라는 호소마저 짬밥 미달로 복화술에 그쳤다. 그래서 더더욱 쌈 싸먹는 테크닉만 향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연애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이 많기도 하고. 나이를 먹고 결혼까지 했는데도 역시나 사랑 앞에 쿨해지기란 그른 모양이다. 다만 아무개의 연애사란 아무개의 혁명사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 사람을 가장 많이 키우고 변화시키는 건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와 자아, 나와 타인, 타인과 타인의 자아가 끊임없이 접촉하고 길항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나로서 사랑하고 사랑 받으면서도,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 기이하고도 값진 체험을 무엇에 비견하랴. 아마 나는 누군가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준다고 해도 똑같이 어리석고 미숙한 연애를 반복할 것이다. 사랑 앞에서 만큼은 그다지 똑똑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각종 인습과 규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데 사랑이라는 불가해한 영역에서마저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한다면 차라리 사막, 이다.

  다가올 삼십대는 거창한 건 됐고 그저 또 열심히 쌈을 쌀 계획이다. 그게 나의 한계이자 설계인 셈. 다만 이십대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삽질의 폭을 ‘나’에서 ‘삶’으로 보다 깊이, 보다 넓게 확장시켜야겠단 생각이 든다. 한편 아무리 결혼했어도 고독은 내 몫이고 내 쉼터라는 점은 변함없다. 하지만 고독을 즐길지언정 방치해선 안 될 동지가 하나 생겼기에 그를 자극시키고 부추기는 일에도 힘써야겠다는 다짐. ‘생산적으로 빈둥거리는 법’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시켜줄까. 곧 서른임에도 비록 어른은 못 되었지만 삶에 관해 덜 칭얼거리게 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서른아홉의 끄트머리에도 한번 쯤 삼십대를... 이라고 쓰게 될는지. 좀 더 나이를 먹어서도 평범한 삶에 그 정도의 예우를 해줄 수 있는 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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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12-26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심대에는 상추위에 삼겹살만 올리지 마시고 항정살도 올리고 차돌박이도 올리고 우삼겹도 올리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용..아 오리로스도 올리면 맛있다는..맞다 맞다 하얀 장갑 끼고 뜯어 먹는 등갈비도 제법 맛있어요.(등갈비는 최근에 먹어 본 고기~~ 기똥차요~)

깐따삐야 2008-12-26 16:01   좋아요 0 | URL
홀로 기똥차다 하지 마시고 좀 사주세요. 철없던 깐따삐야 서른 된 기념으루다가. 저 갈매기살도 좋아하는데? ^^

레와 2008-12-26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배고파라~. ㅡ.ㅜ

깐따삐야 2008-12-29 13:41   좋아요 0 | URL
점심 드셨죠? 레와님.^^

까랑 2008-12-26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깐따삐야님 글을 읽다 보니, 갑자기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한 일화가 떠오르네요.

한 수녀가 수도원에서 주어진 일과로 잔디밭의 잡초 뽑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잡초'라고 부르기엔 너무 아까운 식물을 마주한 거에요. 빨간 열매가 달린 딸기... 초록과 빨강의 보색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에 반해서 뽑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다가, 원장수녀님께 여쭤봤다지요. '예쁘니까 그냥 둘까요?' 하고...

그 딸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원장수녀님의 말씀은, '그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였다는군요.

딸기밭이 아닌, 하다못해 관상용 화분도 아닌, 잔디밭에 있음으로 인해서 뽑혀야만 했던 그 딸기를 보고 그 후로 늘 자신의 '있어야 할 자리'를 묵상했다는...

하나 덜 채워진 아홉에서 다 채워진 열로 넘어가면서 한번쯤 자신의 '있어야 할 자리'를 묵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쵸? ㅎㅎ...

(있어야 할 자리는 사실 제 삶의 화두나 마찬가지랍니다. 짤린 수녀 까랑 드림. ㅋㅋ)

깐따삐야 2008-12-29 13:45   좋아요 0 | URL
있어야 할 자리, 그렇죠. '상생'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하구요. 그나저나 까랑님! 저는 늘 있어야 할 자리, 에만 있었던 것 같단 말여요, 라고 써놓고 보니 정신은 늘 딴 데 가 있었던 것 같기도...-_-

까랑님의 삶의 화두라니. 짤린 수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 들려주세요.^^

순오기 2008-12-2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물아홉이라~~ 더하기 스물이구나~~ 털석!

깐따삐야 2008-12-29 13:46   좋아요 0 | URL
으쌰으쌰. 일단 일으켜 드리고... 순오기님처럼 알차게 세월을 보내면야 뭐가 아쉬울까요.

무스탕 2008-12-2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물아홉이라~~ 띠동갑 이구나~~ 털석!

깐따삐야 2008-12-29 13:48   좋아요 0 | URL
아니 무스탕님마저. 일으켜 드리고... 그냥 동갑이라고 해드릴게요. 앞으론 말도 놓구요. ㅋㅋ 많이 컸죠. 깐따삐야. -_-

2008-12-27 0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9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