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 『맥베스』를 흥미롭게 읽었다. 유명한 작품이지만 코멘트를 하고 페이퍼를 써야 한다는 부담이 시너지로 작용하여 좀 더 꼼꼼히 읽게 되었다. 인물에 대한 평가에 있어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는데 대개의 수강생들은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맥베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햄릿의 복수심과 오셀로의 질투심에는 공감과 동정을 표했으나 맥베스의 야심에 대해서만큼은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부적합하다는 평가가 전반적이었다.

  결국 어쩌다보니 맥베스를 쓸쓸히 옹호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는데 바라던 왕좌에 올랐지만 환영과 불안에 시달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함께 싸워줄 벗 하나 없이 홀로 죽어간 맥베스는 안개 속을 칼로 휘저으며 나아가는, 삶의 허무를 알고도 그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인간 운명의 상징처럼 보인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운명, 다가오는 몰락의 기운 앞에서도 깊은 통찰과 강건한 기개를 보여준 맥베스는 햄릿과 오셀로에 비해 보다 성숙한 영웅이다. 이런 요지의 페이퍼를 쓰게 되었는데 나는 나의 무엇이 거의 비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맥베스를 이해하게 만들었을까, 스스로 의아해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서 올 겨울에 〈하얀 거탑〉을 다시 보게 되었다. 방영 중에는 거의 챙겨보지 못해서 이번에는 마음먹고 제대로 보았다. 마지막 회를 보면서는 정초부터 어찌나 울었는지 뒷북을 쳐도 참 요란하게 친 셈이다. 외과의 장준혁을 연기한 김명민은 불과 얼음을 한 얼굴에 지닌 뛰어난 연기자였고 FM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체격은 다양한 슈트와 타이를 멋지게 소화해냈다. 지휘봉과 메스, 둘 다 어울리기란 힘들 법도 한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단히 노력하는 배우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다음 역할을 기대한다.

  그가 연기한 장준혁은 한 마디로 개천에서 난 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가 용 중의 용이라는 것과 근본이 개천임을 바꿀 수 없음에 있다. 비상한 두뇌와 수술실력 만큼은 장준혁을 따라올 자가 없다. 그것이 첫 번째 문제이고 근본이 개천이다 보니 넘어야 할 산이 많고 개천의 정기로 인해 당최 뼛속까지 차가워질 수가 없다. 그것이 두 번째 문제이다. 그가 조금 더 못났든가, 조금 더 독했다면 조금 더 오래 살았을 것도 같다. 암세포들이 뱃속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며 번식하는 동안 그는 여느 때처럼 수술을 하고 법정에 선다. 마지막엔, 자신의 몸을 잠식해오는 암덩어리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시신을 기증하기까지 한다. 슬픔이라고도, 참회라고도 할 수 없는 눈물은 오직 혼자 있을 때만 흘린다. 그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의 조용한 죽음 앞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Power is nothing without control. 이 말처럼 컨트롤 할 수 없는 천재의 삶은 그저 무(無)일까.

  좀 더 어릴 적엔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지를 않아서 사주팔자나 점성술 등에 관심도 많았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내가 가고 있는 길에 확신이 안 설 때 특히 많이 이끌렸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운명이 어떠한가, 보다는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가 어떠한가, 라는 생각이 든다. 맥베스와 장준혁은 주어진 운명을 사랑했다. 행위의 도덕성과는 별도로 적어도 현실을 탓하면서 주저앉지 않았다. 비운의 영웅이긴 해도 비겁한 영웅은 아니었던 셈이다. “바람아, 불어라. 파멸이여, 오라. 갑옷을 걸치고 죽을 것이다.” 평범한 나는 이 안온한 삶에 자족하면서도 맥베스의 비장한 외침에 설레고 긴장한다. 방식이 다를 뿐. 최선을 다하고 볼 일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시장미 2009-01-0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이 어떠한가, 보다는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가 아떤한가. 크.. 소주 한 잔 들이키면서 해야 하는 말 같아요. 너무 와 닿네요. :) 이 글 너무 좋네요!!

깐따삐야 2009-01-09 10:29   좋아요 0 | URL
음... 알 것 같아요. 장미님이 쐬주가 고프셨군요!!

Mephistopheles 2009-01-09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잠깐 검은 가운을 입고 짙은 프란체스카풍 화장을 하고 타롯카드로 점을 쳐주는 점성술사 깐따삐냐님을 상상했습니다만...(제법 잘 어울린다는..ㅋㅋ)

깐따삐야 2009-01-09 10:30   좋아요 0 | URL
꼬깔모자에 빗자루까지 타고 다니면 딱이겠죠? ㅋㅋ

웽스북스 2009-01-10 15:07   좋아요 0 | URL
꼬깔모자에 빗자루. 하하하. 못살아. 대박 대박. ㅋㅋ

레와 2009-01-0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깐따삐야님의 글이 참 좋답니다. ^^

깐따삐야 2009-01-10 23:17   좋아요 0 | URL
글이 좋으신 거구나.ㅠ ^^

웽스북스 2009-01-10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하얀거탑. 저도 얼마전에 민좌 때문에 다시 봤어요. 그거 보고 나름 느낀게 많아 장문의 길을 준비했었는데, 준비만 하다가 그만뒀었네요. 전 사람들이, 심지어는 이선균조차 아무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최도영도 정말 좋았답니다. 하하.

깐따삐야 2009-01-10 23:19   좋아요 0 | URL
이선균은 일단 목소리가 죽음~이죠. 곁에 있는 사람 살짝 김빠지게 하는 캐릭터이긴 한데 저렇게 꼼꼼하고 속 깊은 친구 하나 있었음 좋겠다, 하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