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쯤 이십대를 돌아보며 글을 쓰고 싶었다. 꼭 글로 남기지 않아도 이맘때면 한 해를 돌아보고 정리하곤 했었는데 올해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면서 또 다른 무언가가 뭉텅이로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경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 곧 서른이 되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서른 살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싱겁고 담담하다. 많은 시인들이 서른을 이야기했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청춘의 송가로 유명해졌지만 내 코앞의 서른은 대단히 아쉽거나 비장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나이 한 살 더 먹는구나, 하는 느낌. 오히려 스물대여섯 즈음에 상상했던 서른이 훨씬 더 의미심장했다. 연애를 할 줄도 알고, 직장에서도 노하우가 쌓여가고, 믿을만한 친구 서너 명에, 가족들 사이에서도 더 이상 철딱서니 막내가 아닌, 적당히 무르익었으되 노티나지 않는.
그런데 현실의 나는? 연애를 할 줄 몰라 그냥 결혼해 버렸고, 내년에 돌아갈 직장이 낯설지나 않을까 염려되고, 믿을만한 친구 서넛과는 연락 한 지가 오바마 당선 전이고, 가족들 사이에서는 소꿉놀이 중인 막내로 취급받는 등 적당히 노티는 나되 결코 무르익지는 않았다. 서른이 되면 한 가지 정도는 자신 있을 줄 알았는데 나이 삼십에 그것도 못해? 라는 말은, 텔레비전에서도 나오고 책에도 쓰여 있고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그 말은, 함부로 으쓱거리는 삼십대의 어깨를 짓누르지 않던가. 이렇듯 환상을 빼니 부담만 남는 인색한 현실이라니.
한편 나의 이십대는 전반적으로 고독했었다. 밖에서 비춰지는 모습과는 별개로 내면을 지배했던 대개의 정서가 그랬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 고독을 즐기고 사랑했던 것 같다. 삼한사온이라는 겨울날씨 마냥 사흘 동안 사람들과 어울렸다면 나흘 정도는 방콕해서 스스로를 감금시켜줘야 하는. 언젠가 내리 며칠을 밖으로 돈 기억이 있는데 한 사나흘 쯤 지나자 가슴이 휑한 것이 빈털터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는 오래 굶주린 사람처럼 집밥을 먹어주고, 가족들에게 은근히 잔소리를 청하고, 좋아하는 책들을 부둥켜안고 방을 뒹굴며, 수첩이나 모니터에 대고 하소연을 해야 한다.
그 와중에도 한 가지 특이할만한 것은, 거의 강박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성실성의 문제다. 내 청춘의 장점이자 단점은 쉬지 않는다는 것.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난 다음날에도 과제물 기한을 맞추기 위해 자료를 찾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눈물이 앞을 가릴지언정 내 앞길을 가리게 놔둘 수는 없다는, 사뭇 비장해 보이지만 소심함에서 비롯되는 성실성. 이분법을 즐기는 몇몇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감성적으로 보이는데 현실적이라는 둥, 현실적인 줄 알았는데 감성적이라는 둥, 하나마나한 말을 늘어놓으며 내 정체를 파악하려 했으나 삽질도 그런 삽질이 없다. 저렴한 비유이긴 하지만 삼겹살에 상추를 싸먹든, 상추에 삼겹살을 싸먹든 맛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듯 고기와 채소의 위치를 부지런히 바꿔가며 열심히 살아온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게 없는 건 모험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번쯤 불판을 뒤집을 수 있는 용기,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엉뚱한 언행으로 가끔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지만 그저 소소한 해프닝에 불과했을 뿐. 고루한 공무원 사회에 속한 나는 불판을 뒤집기는커녕 불판 갈아주세요, 라는 호소마저 짬밥 미달로 복화술에 그쳤다. 그래서 더더욱 쌈 싸먹는 테크닉만 향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연애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이 많기도 하고. 나이를 먹고 결혼까지 했는데도 역시나 사랑 앞에 쿨해지기란 그른 모양이다. 다만 아무개의 연애사란 아무개의 혁명사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 사람을 가장 많이 키우고 변화시키는 건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와 자아, 나와 타인, 타인과 타인의 자아가 끊임없이 접촉하고 길항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나로서 사랑하고 사랑 받으면서도,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 기이하고도 값진 체험을 무엇에 비견하랴. 아마 나는 누군가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준다고 해도 똑같이 어리석고 미숙한 연애를 반복할 것이다. 사랑 앞에서 만큼은 그다지 똑똑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각종 인습과 규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데 사랑이라는 불가해한 영역에서마저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한다면 차라리 사막, 이다.
다가올 삼십대는 거창한 건 됐고 그저 또 열심히 쌈을 쌀 계획이다. 그게 나의 한계이자 설계인 셈. 다만 이십대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삽질의 폭을 ‘나’에서 ‘삶’으로 보다 깊이, 보다 넓게 확장시켜야겠단 생각이 든다. 한편 아무리 결혼했어도 고독은 내 몫이고 내 쉼터라는 점은 변함없다. 하지만 고독을 즐길지언정 방치해선 안 될 동지가 하나 생겼기에 그를 자극시키고 부추기는 일에도 힘써야겠다는 다짐. ‘생산적으로 빈둥거리는 법’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시켜줄까. 곧 서른임에도 비록 어른은 못 되었지만 삶에 관해 덜 칭얼거리게 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서른아홉의 끄트머리에도 한번 쯤 삼십대를... 이라고 쓰게 될는지. 좀 더 나이를 먹어서도 평범한 삶에 그 정도의 예우를 해줄 수 있는 나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