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인준서에 도장을 받고나면 속이 다 후련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똑같은 글을 몇 번이고 계속 읽다보면 멀미가 날 것 같은데 요즘 좀 그랬었다. 자꾸 보아도 질이 향상되지는 않고 양만 늘려봤자 누더기가 되어버리니 심란하여라. 더 손보아야겠지만 끝난 것은 끝난 것이니 우리 방 사람들끼리 모여 조촐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P언니는 귀여운 딸내미가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갈 것이고 J선생님과 나는 새 학교로, K는 그새 취직을 했다. 우리 방 멤버들은 각자 개성이 강하면서도 단합이 잘 되어서 사람들이 부러워하곤 했었는데 논문도 참 각양각색으로 썼다.

  오늘 어느 교수님 한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현직 교사면 교육 쪽으로 논문을 써보지 그랬냐고. 칭찬하실 땐 언제고 지금에 와서 토대를 뒤흔드는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괜한 오해일까. 마치 의무 방기라도 한 것 마냥 책망하는 어조가 마음에 걸렸다. 사실 예까지 와서 들으나마나한 제안이지만 약간의 아쉬움을 내비치며 성의 있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영어교사로서 영문학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교양을 쌓고 연구하는 것이 왜 아쉬운 일이 되어야 하는가. 지난해 수강했던 교수님의 영시 강의는 매우 양질의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마주한 비좁은 틀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런 면으로 볼 때 지금의 지도교수님을 만난 것은 참 행운이었다. 리처드 로티와 이외수를 좋아하시는 교수님은 삐딱한 괴짜 성향을 점잖은 체구와 긴 침묵 속에 감추고 계신 분이다. 오리엔테이션 날, 교수님들 모두가 환영인사 차 강의실을 방문하셨는데 눈에 띄게 훤칠해서이기도 했지만 고집스런 세계를 단단히 담은 눈빛이 인상에 남았더랬다. 난 계획서에 테네시 윌리엄스를 써냈고 교수님의 지도 학생이 되었다. 교수님의 강의는 힘이 있고 현대적이었다. 때로 본인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흥분하시는 모습이라든가, 어색한 유머, 수줍은 배려들이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지도교수님과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도 간혹 봐왔는데 그런 부분에 있어 우리 방은 참 무탈했던 것 같다. 교수님이 별다른 터치 없이 우리의 개성을 인정해주시듯 우리 역시 교수님의 개성을 즐거워한 덕분이었다.

  다들 2년이 금세 가버렸다며 곧 졸업임을 아쉬워하는데 교수님은 문득 그런 말씀을 하셨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꾸 도전하는 삶을 살라고. 안정적인 것도 좋지만 모험 속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성취감은 매우 즐길만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공부를 더해보는 것이 어떠냐며 부추겨대는데 이 대목에서 왜 나는, 멀리 사는 애인이 보고 싶어 한밤중에 집을 나서는 불온한 상상을 했을까. 금강석을 들이대도 돌멩이로 알아먹는 저렴한 수준이라니 원.

  곧이어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까지도 모든 것을 수치화, 계량화시켜야만 안심하고 신뢰하는 학문 풍토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들이 오가다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교수님은 전부터 관심이 많으셨는지 자유로운 학문 커뮤니티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셨다. 왜 아니겠는가. 대학은 좋은 직장임에 틀림없지만 제약이 많다. 그리고 제도는 틀 안의 자유만을 인정한다. 그 결과, 순수한 사랑의 대상이 변화가 아니라 변질되는 순간을 목격해야 하고 그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안정의 욕구란 그렇게 쉽게 저버릴만한 것이 아니라서 짐짓 괴로움을 잊는 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열심히 잊는 채 하다보면 실제로 잊기도 한다.

  연말에 귀 좀 가려우시겠으나 역시 모임의 갈무리는 세기의 꼴통령, 이명박으로 맺음하고 마당에 나와 눈발 폴폴 날리는 밤풍경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많이 떠들고 많이 웃었는데도 교수님도, 언니들도, K도, 나도. 모두가 고즈넉해 보이는 밤이었다. 춥고 눈 오는 밤의 뒷모습이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가능성도 알지만 스스로의 한계도 잘 아는구나.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위해 건배할 줄 알다니.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당신들을.


댓글(2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웽스북스 2008-12-31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인한 깐따삐야님. 올해의 마지막 새벽이라니. (네꼬님 집에 단 덧글 보고 쿵! 했지요) 덕분에 얼른 자려던 마음이 그만 아쉬워져버렸어요. 으흑. 이를 어째.

무사히 잘 마치신거 정말 축하드려요 ^_^ 난 올해 깐따삐야님 덕에 알라딘 마을을 좀 더 사랑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고맙기도 하구요 ^^ 이 새벽이 지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자리에 있어요. 우리. 흐흐흐. 굿나잇. 입니다.

Mephistopheles 2008-12-31 15:10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20X4-30+45-65는 뭘까~~~~요?

깐따삐야 2009-01-01 10:40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네꼬님 글에 댓글 달고 난 바로 자버렸는데. 웬디양님이 못 자고 있었군요! 저런저런. 바쁘단 핑계로 서재활동을 제대로 못했는데 언제 다시 들러도, 여전히 따듯하고 부지런한 웬디양님을 만날 수 있어서 참 좋아요. 새해 복 많이 받고 올 한해도 열심히 달리자구요.^^

메피님- 간장게장+명동칼국수+등갈비는 뭘까~~~~요? 흥흥!

Mephistopheles 2009-01-01 13:01   좋아요 0 | URL
간장게장+명동칼국수+등갈비=급체 입니다. 호프만식 산술논리도 따지면 소화불량이고요.

깐따삐야 2009-01-02 23:25   좋아요 0 | URL
메피님, 급체하나 좀 봐주세요. 갑자기 증명하고 싶어지네. 먼저 좀 사주시구요?

2008-12-31 0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1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08-12-31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 말이 멋진데요.
'소주 한 잔 했더니 사랑이 입 안에서 폭발하누나' 왠지 낭만적이고 문학적으로 보여요.
저는..소주 먹으면 무조건 입 안에서 폭탄이 터질 것 같다죠. -_-
새 해에는 예전처럼 다시 깐따 동상을 자주 봤으면 좋겠습니다.^^

깐따삐야 2009-01-01 10:57   좋아요 0 | URL
술이 달게 느껴지는 자리가 있잖아요. 그 날도 그랬는데 많이 마시면 정말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아서.ㅠ 누군가 대학원의 인간관계는 정치적이라고 그러던데 그것도 사람따라 상황따라 다른가봐요. 저는 무조건 아쉽기만 하고 이제 곧 졸업이면 보기 힘들어진다는 생각에 맘도 짠하고 그랬답니다. 에휴.

새해엔 엘신님과 더 자주 보고 사랑과 폭탄을 주고 받으며(어째 좀?) 즐거운 수다 많이 나누고 싶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마늘빵 2008-12-31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해진 기간에 맞춰 부랴부랴 바삐 쓰기는 했지만,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죠. 책으로 나온 결과물을 다시 읽어보면 볼 때마다 자꾸 아쉬운 부분이 보인다니까요. 그래서 어떤 분은 나온 뒤에는 다시 들춰보지 않는다구. ^^ 논문 축하, 결혼도 축하, 그리고 이제 서른이던가요. 그것도 축하.

깐따삐야 2009-01-01 11:05   좋아요 0 | URL
전에 아프님이 논문 쓰시면서 페이퍼에 올리셨던 심경들이 고스란히 이해가 되는 한해였어요. 댓글도 공감백배에요. 자꾸 아쉬운 부분이 보이는데 수정보완을 해도 또 아쉽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냥 아예 들춰보지 않는 게 최선인지도 몰라요. 다시 쓰면 더 잘 쓸까요? 그렇지도 않을 것 같아요.

축하 감사해요. 논문은 허접하고 결혼은 아직도 갸우뚱, 서른은 왠지 약올리시는 것 같아 축하 받기 민망하지만.-_- 아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더욱 성장하는 한해 되시길 바래요.^^

무스탕 2008-12-31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로 바빴던 올해였네요.
모두 무사히 잘 마친것 축하해요.
오늘밤은 서방님하고 30기념 한 잔 하셔야죠? ^^

깐따삐야 2009-01-01 11:0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랬음 좋았을텐데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서 10시도 안 되어서 잤다는. 초저녁 잠이 많아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서른은 서른인가 봐요. 아흑!

무스탕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서재에서 더 자주 뵈요.^^


순오기 2008-12-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어떻게 저런 태그를 쓸 수 있을까, 감탄하는 중!
두루두루 축하합니다~
태그패밀리가 다시 뭉칠 수 있도록 알라딘에서 새해이벤트 없을까요?^^

깐따삐야 2009-01-01 11:11   좋아요 0 | URL
술의 힘이죠. 재능보다 강하고 열정보다 뜨거운. 쿡쿡.^^
(실은 동아리 선배 하나가 비슷한 표현을 한 적이 있어요. 헤~)
축하 감사드려요. 순오기님 덕분이에요. 알라딘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계시니 언제 다시 들러도 늘 푸근해진답니다.

아~ 태그패밀리. 지난 겨울의 추억이 새록새록. 그나저나 정말 알라딘 왜 이벤트 안 하는 거죠!! 저도 이참에 폭식투쟁에 들어갈까요!!

웽스북스 2009-01-02 13:25   좋아요 0 | URL
폭식투쟁. ㅋㅋㅋㅋㅋㅋ 아 깐따삐야님. 너무 웃겨요.

깐따삐야 2009-01-02 23:26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도 동참하세요. 겨울맞이 이벤트 이런 것도 하나 없구. 알라딘 너무햇!

웽스북스 2009-01-03 01:59   좋아요 0 | URL
전 서재의 달인인데, 그런걸 해도 될까요? (어머, 이런 ~ ㅋㅋ)

BRINY 2008-12-3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방학을 했는데, 고3의 방학식은 뭐가 뭔지...그 와중에 마지막으로 유리를 깨서 유종의 미를 장식하는 녀석하며...낼모레면 스무살 맞는지...
어느 교대생의 블로그에서 본 [먹고 살려고 교사하지만]이란 말이 계속 맴도는 연말입니다.
깐따삐아님의 새로운 모험을 기대하면서!

깐따삐야 2009-01-01 11:17   좋아요 0 | URL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일 저지를 타이밍을 캐취하는 것 같아요. 꼭 방학식 하는 날 유리를 깬다죠. 이제 저도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갑자기 긴장되네요. 으이궁!

우리부터 잘해야겠지만 우리를 정말 갈 데까지 몰고가는, 인간의 한계에 다다르게 만드는, 그런 일들이 좀 없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BRINY님도 방학 동안 재충전 하시고 다시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학교로 돌아가시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Mephistopheles 2008-12-3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생각 했는걸요..삶이 모험인 사람이야 지루한 삶은 아닐지라도 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나 본인 스스로는 굉장히 피곤한 삶이 아닐까 하고요.^^

암튼 깐따삐야님 논문하고 일단은 빠이빠이하는 거겠죠.?? 축하드려요..^^

(대체 소주 마시고 뭘 한겨??)

깐따삐야 2009-01-01 11:22   좋아요 0 | URL
그건 그래요.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이 고생하겠죠. 그나저나 모험의 의미란 여러가지니깐 작은 것이라도 목표를 세우고 도전해보는 삶, 좋은 것 같아요.

일단 빠이빠이 하고픈데 그게... 그래도 감사해요.^^

소주 마시고 집에 와서 술주정 좀 하다가 잠들었어요. 그러고나니 새해네요. 흐흐. 메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저도 달인 될 수 있도록 많이 부추겨 주세요. 네?

Mephistopheles 2009-01-01 13:00   좋아요 0 | URL
제 서재에 오셔서 일수 찍으세요...ㅋㅋ

웽스북스 2009-01-03 01:48   좋아요 0 | URL
오홋, 그것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