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빛 아래
황수영 지음 / 별빛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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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빛 아래, 황수영

여름 책 두 번째.
올해는 여름 책이 계속 기다리고 있다. 모순같지만 비를 좋아하지만 여름은 좋아하지 않는데 여름의 책들을 읽다보면 여름이 좋게지게 될까. 좋아하지는 않아도 여름을 잘 보내고 싶다.

황수영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서울 국제도서전에 갔다가 별빛들 부스에서 커버가 눈에 띄었고 제목에 눈이 갔으며 게다가 사인본이라(결국 이거였나?) 사고 말았다. 결론은 사길 잘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하면서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이병률 시인의 추천사까지 완벽했다. 플래그는 너무 많았고 필사하다간 책 전체를 할지도 몰랐을, 나의 아름다운 여름 책.

자주 우울하고 자주 슬퍼하는, 그래서 자꾸만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싫었다. 밝고 건강한, 화사한 사람이고 싶었다. 슬프기만 하진 않고 즐겁고 발랄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나 혼자만 슬퍼하지 말고 함께 슬퍼하기 위해 따라나서는 사람(p.24)이고 싶다.

누구라도 나를 좋아할 순 없겠지만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애쓰곤 했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지키는 게 중요한 사람이라 견고한 벽을 만들어 주변을 막고 뾰족한 가시들로 그 벽을 에워싸고 했다. 지금도 여전히 툭툭 튀어나오는 모나고 날선 모습들. 별거 아닌 일에도 발작버튼이 눌리고 스위치가 켜져 공격적이 되곤 하는 나를 볼 수 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마저 환상같지만)이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가둔 내 방 안에서 혼자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두렵고 외로웠다. 그건 누구도 채울 수 없고 그런 모습마저 좋아할리 없었기에 그래서 시를 읽고 필사를 했던 것 같다. 눈이 뻑뻑해져도 팔이 아파와도 벌 서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읽고 쓰고 읽고 쓰면서. 여전히 나에게는 없는 것. 익숙해지지 못했고 배우지 못한 것. ‘사랑이나 사람이나 마음 같은 것. 여유나 인정이나 온기, 용서 같은 것. 마중하는 얼굴과 자랑스레 여기는 어깨 같은 것.’(p.53) 그런 것을 찾기 위해, 배우기 위해.

요즘은 쨍한 여름 빛 아래 축축하게 젖어있는 마음들을 꺼내 잘 말리고 싶다. 못생기고 미운 마음들도, 여리고 나약한 마음들도, 사랑받고 싶어 애쓰는 마음도,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는 마음도, 잊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마음도. 그래서 잘 말리고 닦아서 내가 나를 다독여주고 예뻐해줘야지. 누가 나를 좋아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나 먼저 나를 좋아해줘야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도 끝나고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눈도 그친다.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은 말들도 언젠가 멈출까. 꿈이나 악몽, 소원도. 환상 끝에 남는 온기도. p.20

슬픈 건 나쁜 게 아니지만 슬픈 이야기를 너무 오래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슬프기만 한 사람은 아니고, 슬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먼저 슬퍼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슬퍼하려고 따라나서는 사람이 덜 외롭다고 하니 다행이다. 슬픈 이야기를 꺼내 놓는 마음이 덜 무겁다. 자주 먼저 슬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또 그만큼 자주, 함께 슬퍼하기 위해 따라나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맞아. 그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말을 하면서. p.24



꿈속에서는 나이면서 나 아닌 것이 많다. 내가 만져보지 못한 당신도 꿈속에는 많다. 본 적 없는 얼굴과 잡아보지 못한 손도 많아서 그건 너무 꿈 같다. 꿈이구나 생각하는 순간 끝난다. p.29

가끔씩 정말로 혼자임을 실감하면 무서웠다. 살갗이 서늘해지고 손톱 밑이 저리고 얼굴이 따갑게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이 혼자구나 정말로 혼자구나 온 몸이 소리낼 때. 외칠 때. 사라지고 싶었다. 그럴 때 시를 읽었다. 혼자인 사람이 혼자인 것을 소래 내 외치는 시간을 읽었다. 다른 몫의 혼자를 받아들이면서, 너무 외로운 사람들의 섬세한 마음의 굴곡을 손가락 끝으로 훑어내리면서. 아무것이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 나았다.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p.33

오래전 나에게 없는 것으로 인해 많이 울었던 날들이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나에게 없었던 것. 사랑이나 사람이나 마음 같은 것. 여유나 인정이나 온기, 용서 같은 것. 마중하는 얼굴과 자랑스레 여기는 어깨 같은 것. p.53

이유가 궁금했던 날들도 많이 지나갔다. 전엔 모든 일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왜 날 사랑하지 않는지. 왜 매일 슬픈 건지. 왜 이렇게까지 힘든 건지. 왜 밝은 날들은 내게 멀리 있는지. 내 안에 꽉 갇혀버린 질문들. 이유를 알고 싶었으나 결국 내가 나라는 것 외에는 아무 답이 없었다. 허공에만 떠돌다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했던 질문들은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어디에도 닿지 않았을 거 같다. 영원히 돌고 도는 것이 그 질문들이 태어난 이유일지도 모른다. p.62

마음이 자주 긁힌다. 칼날이나 송곳처럼 매섭게 날카로운 게 아니라 갈라진 플라스틱이나 오래돼서 녹슬고 뭉뚝해진 못 같은 것에. 스치자마자 베이는 게 아니라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붉어지고 부어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멍도 이곳저곳 박혀있다. p.73

모두가 돌아간 집에서 개는 현관문을 바다보다가 잠들었다. 기다리기도 했을까. 아니면 여태 보내주는 중이었을까. 나는 그 마음을 알고 있다. 기다리는 것과 여태 보내주는 것의 중간 마음을. 떠난지 오래된 사람을 여태껏 보내주는 마음. 그러면서 혹시나 돌아올까 기다리는 그 마음을.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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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
루리 지음 / 비룡소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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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 루리

루리 작가님의 <긴긴밤>을 무척 좋아한다. <긴긴밤>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고 그만큼 위로받았다. 루리 작가님의 책은 그런 것이다. 내게 문학이 주는 힘은 위로였다.

메피스토가 말해주길 지옥에 가면 가장 미워했던 존재의 모습으로 평생을 지내게 된다. 그러면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지내게 된다는 메피스토의 말이 너무 아파서 한참을 울었다. 메피스토가 나 같아서. 나를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 서글퍼서, 아팠기 때문이다.

메피스토에게 처음으로 내 편이 생겼고 둘은 평생을 함께하게 된다. 여자아이는 나이가 들었고 지난 날들을 잊어가고 있었다. 메피스토는 그녀에게 지난 날들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못된 짓만 하고 다녔던 구겨진 기억들을. 그러나 구겨진 기억은 구겨지지 않았다.

다 읽고나서야 엄마와 딸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어디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악마를 위해 과거를 다시 쓰는 사람. 가장 미워하는 존재은 나 자신이면서 가장 좋아하는 존재는 네가 되는 일. 지지 않고 실패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안고 가는 사랑. 온 힘을 다해 살아갈 세상을 열어주는 사람을 엄마라고 표현해냈다는 사실이 못내 또 슬프다.

_ 그러던 어느 날, 네가 뒤를 돌아봐 준 그 날 처음으로 내 편이 생겼어.

_ 지옥은 어떤 곳이냐고 네가 물었어.
지옥에 가면, 가장 미워했던 존재의 모습으로 평생을 지내게 돼.
그래, 지옥에 가면 너는 네 모습 그대로,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지내게 되겠지.
그럼 천국은 어떤 곳이냐고 네가 다시 물었어.
나도 몰라. 가 본 적이 없어서. 가장 좋아했던 존재의 모습으로 살게 되려나.
그래, 그럼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될거야.

_ 그렇게 마지막 남은 소원을 빌었어.
제발 날 지우지 마.

_ 난 우리가 실패한 줄 알았어.
그런데 너는 지지 않았구나.너는 지지 않았어.

#작가의말
이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 살아온 한 엄마와 그런 엄마의 삶이 슬프고 억울해서 악마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 저의 오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냉혹한 세상을 살아 낸 엄마가 물려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한 삶이,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살아갈 수 있게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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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8-05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긴밤은 저도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 메피스토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네요.
하리님 더운 주말입니다.
시원하고 좋은 오후 보내세요.^^

하리 2023-08-08 09:04   좋아요 1 | URL
동화책도 참 좋더라고요🥰 그나저나 요즘 너무 더운 날들이죠ㅠㅠㅠㅠ 서니데이님도 더위먹지 않게 조심하시고 에어컨바람으로 감기걸리기도 좋으니 감기도 조심하셔요🙏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문학동네 시인선 105
이사라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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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이사라

#시인의말
늘 해질 무렵이었다.

새살이 돋아야 했던 기억들

항상 그때였다.

상처가 있는데 안 아프다고
상처가 없는데 아프다고

생각이 물들 때까지
참 오래 걸렸다.

이제 가볍게 집으로 간다,

2018년 5월
이사라

이사라 시인의 시는 편안하다. 읽다가 응? 이게 소리야? 싶은 시가 없어서 읽기가 부담스럽지 않아 좋다. 가볍게 읽히면서 가볍지 않고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 있다. 사람에 대해, 슬픔에 대해, 가족에 대해, 죽음에 대해. 어머니의 죽음 이후의 일들을 시가 되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상실감과 슬픔, 죄책감, 슬픔과도 같은 감정들의 소용돌이 휘말리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 떠난 가슴에 사람은 어떻게 새길을 내는지(p.20) 알 수 없고, 너와 내가 지나온 세상이 부서지고나서야 웃게(p.40) 된다는 사실, 아무리 못났어도 인연이기에 이제 우리가 헤어질 것(p.91)이라는 사실. 잃어버리고나서야 그리워(p.110)하겠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뒤엉켜 켜켜이 함께 살아가고 있을
그 세상에서
네가 찾은 황무지가 나이기를
#황무지

사람이라서
더 크게 울 수 있는 사람이라서
여기까지 빗방울을 뭉쳐왔을가

사랑하는 사람들 떠난 가슴에
사람은 어떻게
어렵사리 새길을 내나
#사람은어떻게

내 눈 속에서
너와 내가 지나온 세상이 부서지며
웃는다
#웃는다

내 몸에서
네 마음이 쏙 빠져나갔다

너를 보내고도
내가 남아서
웃는다
#이제는웃는다

어떤 위로로도
멈추는 법을 모르는 너는 몰라
이렇게 부서지며 오는 너를
나는 왜 짧은 저항으로 끝내지 못했을까

나의 얼굴을 계속 지워버리는 너를
나 대신 누가 더 사랑할까

파도 같은 마음들 사이에 내 마음도 있네
#파도같은

귓속 멍멍한 채로
나는 시간을 다 쓴 사람처럼
들을 수 없는 사람으로 그냥 산다

한세상 보내도록
그래도 내가 사라지지 않으니

내 귀에서는 드디어
물에 젖은 귓속말이 풍성하다
슬플 일이 없을 것 같다
#이명(耳鳴)

마음이 한 장 한 장
유리창처럼 부서져
너의 사방을 위험하게 할 뿐

곁에서 어쩔 줄 모를 뿐

마지막 사랑 가지고도
닿을 수 없는
네 곁에서
내가 살아간다
#곁에서

우리가 아무리 못났어도 인연이기에
이제 우리는 헤어질 것이다

지금 여기 꽃이 피고 지고 바람이 불고 사그라지고
마음이 몇 번씩 닿았다가 무너진 인연이기에

이승 아닌 곳에서 다시 봉인될 것이다
#이승에서의날들

두서없는 시간들 사이로
황망한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어디선가 내 가방 젖어가고
내 사사로운 것들 흠뻑 젖어갈 것이고

나는 잃어버리고서야 그리워한다
손때 묻은 관계처럼
#잃어버린가방의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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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병률 지음 / 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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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병률


작가님의 책을 읽다보니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어느 한적한 바닷가. 바람부는 숲 속 어딘가. 눈 내리는 작은 마을. 혼자일 때 쓸쓸하고 함께일 땐 따뜻한 그런 곳. 사랑을 풀어내는 글이어서 그럴 것이다. 모든 산문집에서 사랑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이기도 사물이기도 식물이기도 하겠다. 눈에 담는 모든 것에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특히, 당신. 당신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당신이 떠나보내고 텅 빈 마음. 당신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 당신과 함께 바다에게 가고 싶어지는 마음. 그 마음들이 모여 사랑으로 가득찬 책 한 권이 만들어졌다. 이야기를 세세하게 풀어내지도 결말이 구체적이도 않은 산문들이기에 그 안에 나를 넣어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게 한다. 당신의 이야기인지 나의 이야기인지 모르게.

낯선 어느 곳에서 떠오르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노을을 보러가자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이지 않느냐고, 모든 시야에 걸려드는 사소함들을 환각하는 일이 사랑이지 않느냐고, 어느 깊은 산골에다 소박한 책방 하나 꾸리며 같이 나이들어가고 싶다는 말로 당신을 생각하는, 사랑을 쓴 러브레터와도 같겠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게 사랑은 아니기에 사랑하다가도 어긋나고, 이어보려해도 고스란히 해진 자국을 남긴다(p.124)고 말한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고 말하면서 두 팔 벌려 안을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하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어도 그 행복이 혼자서 만든 것이기 바라기도 하고, 사랑이 끝났다는 사실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며 통곡하고 마는 이별의 뒷모습이기도 하겠다.

사랑도 이별도, 당신도 나도, 그저 멀리 보이는 흐릿한 신기루같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어느 낯선 곳에서 혼자 맞이한 아침, 신선한 공기의 밀도, 약풍의 바람, 그리고 뜨겁거나 건조하지 않은 날씨의 질감이 당신 기분을 완벽한 상태로 만들었는데, 그 사이 누군가 덜커덩 떠오르고 차올랐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그 사람을 완벽히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당신이 왜 무작정 바다에 가고 싶어하는 건지, 당신이 왜 그 사람이 한 말을 여러 번 여러 각도로 곱씹는지, 그리고 왜 자주 멍해지는 것만으로도 잘못된 방향으로 내달리는 느낌에 가슴이 아픈 건지, 이 정도라면 당신은 그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53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바다에 가자는 말은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이며, 노을을 보러가자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이며, 깊은 밤 불쑥 산책을 하고 싶다고 문자를 보내는 것도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p.82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번복자가 되어 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을 되돌린다면 어떨까. 당신이라는 세계가 놓치고 만 것들을 붙잡는 것. 그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있는 힘껏 몸을 돌리고 관점을 되돌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두 팔 벌려 안을 수 있다면. p.98

하루 종일 의자 하나를 생각했습니다. 당신 생각으로 찬 바람도, 걱정도, 또 그리움도 따뜻하게 앉히고 싶어서 말입니다. p.162

오래전부터 당신한테서는 구멍이 나고 있었다. 당신은 겉돌았다, 당신이 시선을 밖으로 가져간 건 나의 온도탓이었겠으나 그로 인해 중심잡기에 실패한 나였고, 스키를 타다가 넘어진 나였으며, 외줄타기를 하려다 한 발도 못 떼고 만 것도 나였다. p.211

하지만 내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은 왜 그리 안 되는 걸까요. 마음 이쪽에서 마음 저쪽으로 편지를 써서 좀 잘해보라고 당주하고 싶은데 왜 편지는 쓸 때마다 백지가 되거나 녹고 마는 걸까요. p.244

내가 울게 되더라도 나는 당신 때문에 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신의 여백과 여운을 울게 될 것이다. 사랑이 끝났다는 사실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몸을 숨기고, 당신을 통곡할 것이다.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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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만 나랑 있자
김현경 지음 / warm gray and blue(웜그레이앤블루)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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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 밤만 같이 있자, 김현경

안기고 싶던 사람에서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이 되기까지
눈 뜬 채 보내는 밤이 두려운 이들과, 아침을 맞는 일이 괴로운 이들에게.

이 책은 제가 겪은 두려움과 그 까닭, 정처 없이 표류하던 밤과 두려운 아침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제 자신이 누군가를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기록한 몇 달간의 이야기입니다. p.11

주변에서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김현경 작가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 덕분에 또 한 명의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다. <오롯이, 혼자>에서도 그랬듯 이 책에서도 역시 울고 웃고 무너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했다.

“나는 껍질 없는 달걀 같아.” 라던 말이 참 아프게 다가왔다. 내 주변 둘려싼 견고한 벽은 바로 얇디 얇은 막으로 둘러쌓인 마음과도 같았기 때문에. 별거 아닌 말에도 날카로운 송곳에 찔린 것처럼 터져버린 마음들. 그런데 그런 얇은 막조차도 없는 달걀같다니, 막아줄수도 쓸어담을수도 없는 그런 마음들이 흘러내린다 생각하니 덩달아 아팠다.

우울은 감출 수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모여 있다 펑- 터진다.(p.48) 요즘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터진 모양이다. 나는 마음이 힘들 때 철저히 혼자있고 싶다가도 어디라도 나가 마음을 풀어내고 싶기도 하는 사람이라 종잡을 수 없는 이런 내가 참 꼴보기 싫다.

그래도 어떤 날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초록의 나무, 살랑살랑 바람에도 힘이 나기도 한다. ‘오늘은 비참하고 내일은 알 수 없더라도 어제 하루만큼은 즐거웠으니까, 조금 괜찮다 생각한다.(p.85) 작은 즐거움, 소소한 행복이라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렇게 조금씩 조각 하나하나를 모아나가고 싶다.

어떤 사람은 사랑에서 죽음을 떠올릴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밖에서 싱글벙글 웃는데 방에서는 매일 밤 숨죽여 운다. 누군가는 웃는 표정으로 즐거운 말을 한다고 그가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한다. 누군가의 힘듦을 우리는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도 자주 상처받고 매번 스스로 내뱉은 후에 다짐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p.130)

동시에 나는 지난 몇 달 내내, 손 잡아줄 사람들이, 기댈 어깨를 빌려줄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 사이에 깨달았어. 물론 너도 그중 하나고. 네 이야기를 털어놓는 일이 실제로 크게 도움이 안 된대도 말해주고 기대주면 좋겠어. 네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말해주라. 내가 언제든 쓰러질 것 같아 보인대도 손 잡아주고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덕분에 알았어.(p.165)

작가님 주변에는 마음이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것은 작가님 역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니까 가능한 일이겠다. 어쩐지 작가님이 부러워지고 말았다. 작가님을 다시 만난다면 한 번 안아주고 싶다. 안아주고 안기면서 그 온기를 나눠받고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촛불이 되어주는 사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려도 밤늦게 와달라고 해도 기꺼이 함께 해주는 사이, 100% 전부를 공감해줄 수 없어도 노력으로라도 반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는 사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축복인지. 안아줄 수도, 안길 수도 있는 그런 사람. 안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꼭 놓치지 말기를.

나는 아직도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손 내는 것을, 안기는 것을, 안아주는 것을 못하는 사람.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운 사람. 하지만 가시나무를 넘어서야겠지. 나 되게 살고 싶었던 거 예전에 이미 알았으니까. 여전히 회피하는 버릇은 버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시 굴밖으로 나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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