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지만 이 일의 발단도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졸업한 영등포에 위치한 자칭 명문 K고에 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늦장가 가서 나름 늦둥이를 본 이아무개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며칠 전 대뜸 이런 글을 동창밴드(SNS)에 올린 것.
“얼마 전부터 양파와인을 아침, 저녁으로 먹고 있음.
이명증, 침침한 눈, 다이어트, 백발, 주름감소 등 효능이 좋다고 해서 시작한 건데.., 엉뚱한 데서 효능이….
이러다 둘째 볼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미루어 추측해 보건데.. 양파와 와인이 만나면 환각성분이 생성되는
듯함. 그렇지 않고서야 웬수같던 마누라가 갑자기 손예진으로 보일 리가 없는 거 아님? 아침, 저녁으로 이틀째….
뭔가... 내가 모르는... “
평소 불의를 보고 잘 참지 못하듯이 신성한 동창밴드에 사이비과학이 판치는 걸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와인 몇 잔에 마누라가 손예진으로 둔갑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일단 인터넷 검색부터 해봤다. 아, 그런데….. 이 친구가 올린 글처럼 양파와인 효능에
대한 증언들은 매우 많았다. 친구가 말한 효과 뿐만 아니라 “남자의
정력 증강에 탁월한 효과 “, “ 원기 부족한 남성의 스태미너에 좋아 “ 등 거의 엄청난 보약처럼 소개되고 있었다. 심지어는 요즘 내가 고생하는 불면증에도 효과가 있다는 게 아닌가?
잠시 고민 후 나는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 내가 직접 사이비과학을 검증할 마루타가 되기로.
정력 증강, 원기 회복 뭐 이런 건
솔직히 내게 하나도 필요 없지만 불면증에 효과가 있다는 건 솔직히 좀 솔깃했다.
당장 마트로 달려갔다. 와인 매장에
가니 요즘 양파와인 열풍을 반영하듯 매장아가씨가 대뜸 양파와인용으로 양 많고 값 싼 와인으로 많이들 사가신다며 내게 하나를 권했다. 일단 싸구려 1.5 리터 짜리 대형와인을 한 병 샀다. 인터넷에 보면 하루 소주 두 세 잔 분량 정도 마신다고 했으니 한 보름 이상은 충분히 먹을 양이었다. 양파는 천 원만 줘도 주먹만한 양파 6~7개를 주길래 그걸로 끝. 자르고 담기까지 30분이 채 안 걸렸다.
그리고 숙성기간 2일을 기다렸다. 마침내 금요일 밤 양파와인 단지의 봉인이 풀리는 날.
두 둥~~~
생각했던 것 보다 양파냄새가 심하고 고약했다. 와인 특유의 향긋한 향도 거의
없어서 솔직히 썩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무려 사이비과학 철퇴의 사명을 (아무도
안 줬지만) 스스로 부여하고 고되고 힘든 마루타 체험을 자청한 내가 아니던가?
사람들은 소주 두 잔 정도를 마시라고 했지만 난 맥주 글라스에 두 컵을 마셨다. ‘순수하게’ 하루라도 빨리 사이비과학의 실체를 파헤치고 싶은 조바심에….
그런데 역시나 그날 밤도 잠을 잘 못 이루고 밤새 화장실만 들락거리며 잠을 뒤척였다. 다음날 아침 마누라의 얼굴도 손예진과는 거리가 먼 원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 역시 저잣거리에서 나도는 뜬소문이었나….
다시 하루가 흘렀다. 토요일 밤의 달이
뜨고 이경(二更)이 지날 무렵 비장한 각오로 남은 양파와인과 아몬드 한 통을 책상에 올렸다.
그리고 다시 마루타로서 소임을 다하고자 맥주 글라스에 와인을 따라 엄숙히 마셨다. 한
잔, 또 한 잔….. 다시 또 한 잔.
거의 빈 속에 마신 탓에 마지막엔 아마 휘청~ 하며 벽을 붙잡고 일어난 것 같다. 물론 양파와인 병은 텅 비었고.
역시나 ‘순수하게’ 하루라도 빨리 사이비과학의 실체를 파헤치고 싶은 조바심에 그랬다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부터 기억이
뚝. 그리고 연극무대의 암전(暗轉)처럼
눈을 뜨니 벌써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한 달 넘게 고생하던 불면증이 사라진 것이었다!!! 간만에 맛 본 숙면으로 피곤이 좀 풀린 듯 했다.
음… 양파와인에 대한 소문이 완전히
낭설은 아니었군.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난 순간 공포에
휩싸였다. 아니? 양파와인에 대해 나돌던 소문이 과연 사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예쁜 우리 마누라가 손예진으로 둔갑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온 몸을 덥쳐왔다. 믿기
싫었지만 손예진으로 변한다는 양파와인의 소문이 정말 진짜라면….
안 되는데… 손예진으로 바뀌면 정말
안 되는데….
떨리는 마음으로 옆을 돌아 보니 다행히도 우리 마누라가 아직도 쌔근쌔근 ‘원래의 자기 얼굴로’ 자고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진짜 말이
그렇지 하루아침에 마누라가 손예진으로 변한다면 이 얼마나 황당한 사태겠는가? 아마 예쁜 마누라 둔 유부남들은
다 이해하겠지만.
그래서 난 기쁜 마음에 일요일 하루 종일 감사하고 봉사하는 자세로 극진히 마눌님을
모시며 휴일을 보냈다.
지금 우리집엔 또 한 병의 양파와인이 숙성되고 있다.
2. 요즘 읽고 있는 책들
간만에 책 읽으면서 저자의 똑똑함과 예리함에 감탄하며 즐겁게 읽고
있는 책.
아무리 책 쓰는 사람 머리가 좋아도 짜증나고 밥맛 없이 글을 쓰는 저자들도 많은데 이 책은
참으로 탄복하며 읽고 있다. 마치 평소에 지루하고 설명도 잘 못하는 강사들의 강의만 듣다가 머리에 쏙 들어 오면서도
재미나게 강의하는 명강사를 만난 기분이다.
요즘 많이들 화제에 올리는 빅데이터와 여론조사, 그리고 통계에 얽힌 재미난 사례들이 많이 나오는데 두껍고 책값도 만만치 않지만 여름휴가철에 권할 만한 책인 것 같다.
가끔 제조업체들, 특히 소비재를 생산하는 업체들을 다녀보면 아직도 ‘물건만 제 기능에 충실하게 잘 만들면 겉 모양에 상관 없이 소비자들은 우리 제품을 선택해 줄 것이다’ 라는 믿음에 사로 잡힌 사장님들을 종종 만난다. 그렇지만 요즘은
물건도 외모가 예뻐야 팔리는 시대다. 다들 공감하시겠지만 책도 마찬가지. 이 책을 집어 든 순간, 그리고 내용을 좀 살펴보니 앞에 말한 그런
사장님 생각부터 났다.
책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우리가 먹는 먹거리의 거의 전분야에
걸쳐 상식적으로 알고 있으면 매우 도움이 되는 정보들, 특히 세간에 잘못 알려진 먹거리 상식들에 대해
저자의 유려한 글 솜씨를 통해 잘 담겨있다.
그런데…. 책표지와 편집 상태는 그야 말로 안타까움 그 자체다. 마치 고등학교 교지 같은 느낌의 얇은 겉지와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답답한 편집 상태. 부디 2쇄 본에서는 내용 보다는( 다시 말하지만 책 내용만으로는 지금도 별 5개다) 외모에 신경써서 이 좋은 책이 사장되지 않길 바란다. 식탁에서 먹거리와 관련된 풍부한 대화주제를 원한다면, 그리고 책 디자인에 상관없이 오로지 책내용만 중시하는
분이라면 추천할 만한 책이다.
그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