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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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쯤 전에 한 번, 그리고 20년쯤 전에 한 번,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어보려 했다가 실패했다. 20년쯤 전에 산 책은 아직도 책꽂이에 꽂혀있다. 그 책하고 궁합이 맞지 않아 결국 읽지 못했을까 싶어서 이번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번, 강유나 번역의 책을 골라, 다 읽었다. 이삼십년 전엔 이 드라마가 와 닿지 않아서 끝까지 읽지 못했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는 소설과 달라 내용을 미리 알아도 책을 읽는데 별 불편함이나 감동의 절감효과가 없다. 그래 간략하나마 스토리를 소개한다.
 60세가 넘은 주인공 윌리 로먼이 샘플이 가득 든 여행가방을 들고 집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극은 시작한다. 34년 동안 한 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한 윌리. 이젠 늙어 운전도 힘에 겹고, 전엔 봉급과 영업수당을 받았지만 이젠 봉급 없이 수당으로만 생활을 꾸려야 하는데, 도시에 살면서 기본 생활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집세, 가전제품 월부금, 보험료 등등. 이를 알고 있는 이웃이자 오랜 친구인 찰리가 수시로 소액을 (못 받을 줄 알고도 빌려)주어 보탬이 되지만, 윌리는 체면상 찰리가 제의하는 직원으로의 채용에는 응할 수 없다. 아들만 둘. 큰 아이는 서른세 살의 비프, 작은 아이도 서른이 넘은 해피. 잘 생긴 외모와 미식축구에 특출났던 비프는 열일곱 살 때까지 지역의 총아였으나 졸업시험에서 수학 F를 받는 바람에 대학에 진학하지도 못하고 인생을 거의 포기, 서부로 가서 주급 25달러의 목동 일을 하다가 딱 오늘 동생과 함께 집에 들른 상태.
 대공황의 끝 무렵을 맞아 가진 것이라고는 예전 시절 화려한 추억과 그때부터 시작한 허풍과 장담과 과대망상과 심각한 우울증. 부자는 날이 밝으면 각기 사장과 전 직장의 사장을 찾아가, 아버지는 뉴욕에서 내근을 하게 해달라고 하고, 비프는 자신에게 1만, 혹은 1만5천 달러를 투자해달라고 요구하기로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없어서, 윌리는 34년간 봉직했던 회사에서 단칼에 해고를 당하고, 비프 역시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사장의 만년필만 훔쳐 나온다. 윌리와 비프가 다 계획에 성공할 것을 가정해서 둘째 해피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세 부자의 만찬을 계획하지만, 만찬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부자간 거친 말다툼으로 끝나고 만다.
 그날 밤, 어머니 린다는 만나기만 하면 거짓과,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 때문에 다투기만 하는 세 부자를 견디지 못해 두 아들에게 집에서 떠나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가족은 마음속에 상처를 가득 안고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 거칠게 반항했던 큰 아들 비프가 자신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아버지 윌리는, 자신이 아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감격해서, 보험금 2만 달러를 떠올리며 집을 나서 차에 올라 전속력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난 20대 때도, 30대 때도 이 이야기가 정말 재미없었다. 34년간 봉직한, 심지어 자기 이름을 지어준 직원을 잠깐 고민도 하지 않고 해고해버리는 젊은 사장. 자본주의라는 정글의 법칙이다. 사실 죽음에 이르는 세일즈맨, 윌리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주택부금도 거의 끝나 집도 자기 집이 되는 것이 멀지 않았고, 가전제품의 월부금도 거의 마지막에 달하며, 두 아들 역시 이젠 더 이상 부양의 의무를 지지 않는 상태. 아내와 나, 오직 두 명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데 왜 죽음에까지 이르러야 했을까.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현재의 나’가 주인공 윌리와 매우 비슷한 상태다. 이젠 아무 빚도 없이 집과 백색가전과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으나 수시로 퇴사를 압박받고 있는 늙은 직원. 여기서 나는, 앞으로 당신들 거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노동법에 감사를 하고 있고, 해야 한다. 우리나라 기업주에게는 미국과 달리 해고의 자유가 없으니. 나도 두 아들만 키웠고, 아이들은 다 독립해 나갔다. 그러니 좀 비슷하지? 게다가 큰 아이의 신붓감이 어제 인사를 왔잖아? 기특하게도. 나는 요즘엔, 며느리 감이 생기면 시부모가 먼저 전화를 해서 일차 방문해 저희 소개를 좀 해도 될까요? 이리 물어봐야 하는 것이 기본 에티켓인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더라고.
 하여간 지금의 내 상태가 윌리와 좀 덜 비슷했다면, 상대적으로 좀 더 다양하게 이 세일즈맨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해석할 수 있을 텐데, 오히려 꽤나 유사한 상황이라 윌리의 유일한 사인을 나는 우울증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윌리를 감싸고 있는 정서는 과거, 그러니까 윌리가 수당만 한 주에 150 달러를 받던 공황 이전의 시절. 고등학교에서 풋볼 선수로 명성을 떨치던 비프와 잘생긴 외모로 여학생 깨나 울리고 다녔던 해피. 세일즈를 위해 다니던 도시에서 가끔 벌이던 로맨스. 그러나 현실은 비록 몇 번 남지 않았지만, 각종 할부금과 주택융자금, 낡은 집을 유지하기 위한 수선비 등등. 여기에 현실에 낙오된 듯 보이는 두 아들. 심지어 가족들이 보기에도 아버지 윌리에겐 심각한 정신장애가 있는 상태로, 수시로 이미 죽은 형의 모습이 보이기도 해서, 가족 간의 대화에 불쑥 형의 유령이 끼어들기도 하는 단계. 가족은 윌리를 사장에게 보내 뉴욕에서의 내근을 요구하게 만드는 대신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게 했어야 했던 건 아닐까.
 물론 드라마는 ‘대부분의 정상인’을 모델로 하지 않는다. 정상인이 주인공이면 너도 그렇게 살고, 나도 그렇게 사니 그 속에서 두드러진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도 쉽지 않고, 만들어봤자 독자가 재미나게 읽어주지도 않으니까. 내가 윌리라면 어땠을까. 쉬운 해결책. 다 때려치우고 집 팔아서 소도시로 내려간다. 그럼 쥐꼬리만 하지만 연금도 나오고, 뉴욕에서 집 팔고 소도시에 작은 집 산 차액으로 그리 궁상스럽지는 않을 거 같은데. 물론 나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고, 밀러는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같을 수는 없다.
 이렇게 독후감의 형식을 빌어 윌리와 그의 가족과 다른 의견을 개진한다고 해서, 이 작품이 별로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고 앞으로 나는 세 명의 극작가,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그리고 아서 밀러의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을지언정, 책을 고르다 눈에 띄면 반드시 읽어볼 것이라고 작정했다. 그만큼 재미있고, (10년만 일찍 읽었다면 더욱 그러했겠지만) 공감했고, 남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할 만큼 좋은 책이란 생각도 들었다. 다만 내가 윌리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일 뿐. 문학적 감정의 과장은 언제나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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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08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적 감정의 과장은 언제나 정당하다’ 너무 멋진데요 팔스타프님! ㅎ

Falstaff 2019-01-08 10:48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