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와 루신다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7
피터 케리 지음, 김시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8년 부커상 수상작품이며, 20년 후인 2008년에 여태 부커상을 받은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을 겨루는 베스트 오브 더 부커 후보에도 올라,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에 이어 영광의 준우승을 거둔 작품이라고 해 상당한 기대를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 주 바커스 마쉬에서 1943년 태어난 피터 케리, 라는 구구절절의 바이오그래피는 이이의 작가로서의 성과가 워낙 돋보여 애써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대학에선 원래 화학과 동물학을 공부했지만 때마침 교통사고도 당하고, 원래 학업에 흥미가 없어서 일찌감치 때려치워, 결과적으로 대학에서 얻은 유일한 건 첫 번째 아내 리 위트먼 뿐이었다, 등등. 이런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작가로서의 피터 케리는 매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최우수 소설작품에게 주는 마일스 프랭클린 상을 세 번, 모든 영어권의 작품을 대상으로 최우수 작품에게 주는 부커 상을 두 번 받았으며, 매년 노벨 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오스트레일리아 작가로 손꼽힌다고 한다. 근데 다들 아시지? 노벨 문학상 후보는 결국 만년 후보로만 끝나는 거. 이이가 벌써 77세. 기회는 그래도 남아 있지만 이러다가 결국 숨넘어간 작가가 한 둘이 아니니 안심하면 안 될 듯하다. 어쨌든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작가가 쓴, 대단한 작품이니 어찌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말이지.

 

  작품은 끝날 때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홉킨스 가문의 화자 ‘나’의 길고 긴 독백이다. 화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인물은 자신의 증조부 오스카 홉킨스로 생몰연대가 1841~1866, 겨우 스물다섯의 청춘에 삶을 마감한 성공회 신부다. 화자의 집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인물은 당연히 어머니. 어머니는 집을 방문하는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북동부 그래프턴 시의 성공회 주교들을, 감히 상석이 아닌 은판 사진이 정면으로 눈에 들어오는, 테이블의 한 가운데 자리에 앉히는 습관이 있을 정도로 증조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이 오스카 증조부는 1866년 당시에 사나운 야생동물과 곤충, 그리고 식인도 마다하지 않는 원주민 등, 살벌한 밀림의 한가운데였던 이곳, 벨린전으로 자그마한 세인트존 교회를 배에 싣고 와 온 세상에 은혜로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화자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증조부가 아니라, 플리머스 형제회 소속이며, 왕립학술원 회원이었던 박물학자인 40대 홀아비 고조할아버지, 티오필러스 홉킨스부터 시작한다. 플리머스 형제회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모임이다. 헨리가 캐서린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생긴 성공회가 벌써 3백년이나 잉글랜드를 드르르륵 누비고 또 다졌건만 어찌된 일인지 유독 런던에서 티오필러스 홉킨스 선생이 이주해 와 자리잡은  데번 주 헤나컴 지역은, 오히려 성공회 신자들이 홉킨스 선생의 설교에 넘어가 플리머스 형제회의 회원이 되는 거였다. 홉킨스 씨가 신봉하는 플리머스 형제회는 크리스마스마저 이교도적, 가톨릭적이라 규정해서 성탄을 기념하지도 않고 대신 ‘율타이드’라 칭하며 그날도 들에 나가 노동을 하라고 가르친단다.
  많은 일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일어난다. 주인공 오스카 홉킨스는 아버지 말고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질산을 피부에 떨어뜨리는 잔혹한 치료 도중에 숨을 거둔 엄마를 닮아 목이 길고 섬세한 외모를 갖고 태어났다. 외모에 어울리게 힘도 별로 없어서 성공회에 다니는 동네 아이들이 오스카만 봤다하면 이지메를 가하고, 심지어 모래나 자갈도 억지로 먹게 했다니 애초부터 외톨이의 별자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때를 맞춰 집에 새로운 가정부 패니가 들어왔다. 패니가 보기에 성탄절을 열다섯 번이나 지냈음에도 아직 오스카가 푸딩 맛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걸 알고, 이런 세상에나, 한숨을 한 번 쉰 다음, 다가온 성탄절에 버터와 우유, 달걀, 채에 거른 곱고 흰 밀가루, 설탕, 소금 기타 온갖 맛나는 양념을 동원해 일생일대의 커스터드 소스를 얹은 푸딩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인생 최초로 등장한 커스터드 소스 얹은 푸딩을 처음으로 입에 넣어, 위아래 이를 서로 부딪칠 것도 없이 저절로 녹아드는 순간, 입천장에 처음엔 얇디얇게 곧이어 점점 두껍게 엉기는 밀가루의 접착, 건포도와 설탕의 단 맛에 온통 돌기가 돋을 거 같은 혀의 미세한 떨림, 그리고 이 모든 물질들을 감싸는 침의 효소작용으로 조금씩 식도로 밀려드는 쾌감! 오스카가 난생 처음 천국의 맛을 감각하고 있는 바로 이때, 티오필러스 홉킨스, 강건한 몸집의 고집스런 아버지가 부엌에 들이닥쳐 왼손으로 오스카의 목을 굳세게 잡고, 오른손으로는 억지로 진한 소금물을 삼키게 하여, 이미 위의 분문을 통과한 푸딩의 모든 잔재까지 모두 거꾸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아버지에 따르면 푸딩은 우상숭배자들이나 먹는 악마의 살이라서.
  그렇다고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다가올 심판의 날에 구원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양육을 하고 있던 터. 이런 불친절한 사랑이 계속 이어지고, 목에 아버지의 엄지와 검지로 인한 멍이 든 성탄 후의 부활절이 지난 다음 주, 오스카는 새롭게 하느님의 소명을 받는다. 그리하여 배교를 해버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좋아하며 다양한 관점에서 공정해지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의 신도들을 부당하게 꾀어 빼내가는 티오필러스 홉킨스만 예외로 치는 성공회 휴 스트래턴 신부에게, 귀순하는 것. 스트래턴 신부는 의외의 신학적 수확을 한 셈. 적의 아들이 손 안에 들어왔으니. 게다가 식사할 때 건포도를 골라놓는 오스카는 분명히 부름, 사제의 소명을 받은 걸로 보였다. 성공회 사제이지만 사실 지극한 속세 인물이기도 한 스트래턴 신부는 몇 년 만에 차분하고 강인한 표정으로 아이를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옥스퍼드의 오리얼 칼리지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생각보다 이 책이 재미없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가, 화자가 너무 빨리, 너무 자주 오스카와 특히 루신다의 앞날에 관해 언급하기 때문인 것 같다. 루신다를 소개하는 초장에 화자는 “후에 전 재산을 나의 증조할머니에게 잃고 하룻밤 새 알거지가” 된다고 소개해버리는 것을 필두로. 그러니까 알거지 신세가 될 루신다의 아버지 르플래스트리어 씨는 1852년 종려주일을 앞두고 뉴사우스웨일스 패러매타 처치 스트리트에서 갓 이민 온 꼬맹이 엘리자베스 멀린스가 선생이 타고 온 말 앞에서 알짱거려 신경이 쓰인 말이 뒷발로 일어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말 잔등에서 내동댕이쳐져 머리부터 추락, 호두 깨는 소리와 똑같은 소리를 내며 두개골이 깨져 즉사하고 만다.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문제 소녀 엘리자베스 멀린스가 오스카하고 나중에 어떻게 연결이 될 걸로 기대하게 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루신다의 엄마 이름도 엘리자베스인 것만 빼고. 말이 나온 김에, 루신다가 열일곱 살 때 스페인 독감으로 죽을 팔자인 엄마 엘리자베스는 런던에 매우 친한 친구가 있으니 이름이 ‘매리 앤 에번스’다. 누구냐 하면, 우리가 흔히 조지 엘리엇으로 알고 있는 여성이다. 그러니까 루신다는 부르주아 인텔리 집안에서 나중에 문학적으로도 성숙하지 못한 알거지가 될 인물.
  르플래스트리어 씨가 죽고 몇 년 있다가 엄마 엘리자베스도 대서양과 인도양, 태평양까지 건너온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는다. 일 년 후 1859년 5월 10일에 열여덟 살이 된 루신다 르플래스트리어 양은 어린 나이에 대농장을 분할해 판 거금을 은행 환어음의 형태로 갖고 패러매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도시 시드니로 들어온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시드니의 달링하버에 있는 유리공장을 사는 것. 전 재산의 반을 투자해서. 열여덟 살짜리가 유배된 범죄자들의 나라, 이 가운데서도 제일 큰 공업도시 시드니에 떨어져 혼자 회사를 통째로 살 수는 없었으니, 성공회 울라라 교구의 신부 데니스 헤잇에게 도움을 청한다. 처녀수태와 부활, 구약의 기적들을 전혀 믿지 않는 헤잇 신부는 유리에 관한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회사 경영에 관해서는 별로다. 이쪽을 보완을 위해 도움을 받는 사람이 답스 앤드 피그 사무소의 회계사 답스 씨. 루신다는 답스 씨의 집에 들락거리면서 재미나게도 카드 게임, 도박에 재미를 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19세기 오스트레일리아에선 여자가 회사의 사장을 하기엔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직원들이 기꺼이 루신다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유리회사에서 가장 고급한 기술자는 유리 대롱을 불어 형태를 잡는 유리 불기공. 이 가운데 가장 고참인 아서 펠프스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경영하는데, 가장 불행한 일은 이 세 명에게 회사를 맡겨놓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회사의 소유자가 되려고, 즉 결혼을 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하는 것. 그러나 믿음과는 달리 조지 엘리엇은 아쉽게도 식민지에서 온 촌년이 도무지 런던의 풍습에 맞추지 못해 함께 어울려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사교계에서도 순식간에 떨려나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리바이어던 호를 타고 귀국길에 오른다.
  이 배에서 만난 인물이 물 공포증에 시달리는 잉글랜드 출신의 성공회 사제 오스카 홉킨스. 이리하여 문제적 인물 오스카와 루신다가 이 바닷괴물 리바이어던 호에서 처음 만나고 시드니에서 다시 어울려 한 방에 둘 만 앉은 채 카드 게임을 하다가 들켜버리니 책표지를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파도, 빨강머리 남자, 유리로 만든 교회가 그려진 카드를 표지로 삼을 수 있었던 것.

 

  이 책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무수하게 많이 등장한다. 하나하나를 읽어보면 재치 만발인 문장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합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 재치있는 문장을 모두 합친 글의 덩어리로 읽으면 이상하게, 정말 의아스러울 만큼 독자를 덜 흥분시킨다. 왜 그런지 짐작은 하겠지만 아마추어, 기껏해야 딜레탕트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주제에 내 생각을 밝힐 수는 없다. 여차하면 관련된 분께 누가 될 일을 함부로 떠벌일 수는 없는 일.
  이만한 스케일로 작품을 구상하고 전개시킬 수 있는 작가가 그리 흔하지 않을 듯하다. 그리하여 비록 재미있게 읽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이가 쓴 다른 부커상 수상작품인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를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켈리 갱……>을 읽음으로 해서 <오스카와 루신다>는 단지 나의 독법이 잘못 된 것일 뿐이란 게 증명된다면 나중에나마, 나도 좀 덜 거북할 거 같다. 다른 분들께선 아무쪼록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러길 기원한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10-27 09: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아니, 화자가 막 책에서 스포일러하면 어떡합니까... 몹쓸 화자네;; -_-;;;

그나저나 저도 이 책 폴스타프 님이 재미없다고 하셔서, <켈리 갱>부터 읽어볼까 뭐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도서관에 있기에 휘리릭 넘겨보니 그게 더 재미나 보이더라고요. 하하하하하.....

Falstaff 2021-10-27 10:02   좋아요 2 | URL
마지막에도 썼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고, 재치 만땅인 문장도 많은데요, 크게 한 덩어리로 보면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켈리 갱...>은 사놨습죠. 12월 아니면 1월에 읽을 거 같네요. ㅎㅎㅎㅎ

2021-10-27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1-10-27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켈리 갱 읽다가 말았는데...

그런데 왜 읽다 말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마저 다 읽어야 하는데.

Falstaff 2021-10-27 16:2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메냐 님은 읽다 잠깐 쉬는 책이 워낙 많아서요.
켈리 갱은 읽기에 즐겁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coolcat329 2021-10-28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이상하게 켈리 갱부터 느낌이 별로였는데요,.ㅋ
근데 부커상을 두 번이나 받았군요!

Falstaff 2021-10-28 12:29   좋아요 0 | URL
앗, 켈리 갱도 별롭니까? 으흠....

coolcat329 2021-10-28 12:31   좋아요 1 | URL
아! 아닙니다 저 안 읽었습니다. 책 소개만 읽고 별로였다는거였네요. 표지 제목 등등 다 그냥 별로였다는 의미였어요~~

Falstaff 2021-10-28 13:03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군요. 그럼 제가 먼저 읽어보는 걸로... ^^
 
타란느 교수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2
아르튀르 아다모프 지음, 임수현 옮김 / 연극과인간 / 200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세기 프랑스 연극계의 기수로 치는 세 명의 인물이 있으니, 우연하게도 모두 외국 출신 프랑스 거주자로, 첫째가 루마니아 사람으로 프랑스에 흘러들어온 외젠 이오네스코요, 둘째가 아일랜드에서 배 타고 온 사뮈엘 베케트이며, 셋째가 아르메니아계 러시아 출신인 아르튀르 아다모프라고 한다. 이오네스코는 1970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의 영광을 얻었고, 베케트는 그 1년 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아다모프는 두 명의 성공을 목격한 후 1970년, 중증 알코올 의존증에 따른 정신질환으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다.
  이 세 명의 극작가들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입에 올리는 것이 부조리극이다. 또는 누보 떼아뜨르, 반연극, 초현실주의 등. 이들의 대표작이라면 나란히 <대머리 여가수>와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지만, 아쉽게도 아르튀르 아다모프의 작품은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아다모프는 비록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부터 프랑스에 거주하며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한다. 극작 경력은 1950년, 그의 나이 마흔두 살에 <침입>과 <파로디>를 초연하면서 시작했다. <타란느 교수>는 1953년 쉰한 살 때 초연을 한, 그의 중요 작품 리스트 가운데 한 편이다. 극작가로 데뷔한 아르튀르 아다모프의 초기작은 주로 부조리극으로 분류한다고 하는데, 이 <타란느 교수>는 부조리극이라기보다 작가 자신의 열등감이랄까,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에 대한 (막연한) 공포 비슷한 감정을 비유한 것처럼도 읽힌다.

 

  <타란느 교수>는 당연히 타란느 교수를 위한 무대다. 장면은 단 두 개. 하나는 경찰서. 다른 하나는 호텔의 사무실.
  경찰서에 잡혀 온 타란느 교수의 죄명은 음란공연죄. 추운 겨울날, 물가를 산책하던 타란느 교수가 갑자기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고 물가 근처에서 놀고 있던 소년 여러 명이 신고를 했다. 타란느 교수는 자신이 대학에서 강의하는 유명인사임을 강조하면서 자기가 어떤 인물인데 그따위 짓을 했겠느냐, 한겨울에 몸살로 앓고 싶어 환장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도 찬바람 부는 물가에서 옷을 벗을 수 있겠느냐고 주장하며, 교수라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다. 물론 독자는 타란느 교수를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철없는 장난꾸러기들의 단체 고발도 믿을 수 없다. 여기에 신문기자와 신사 네 명이 등장했음에도 아무도 타란느 교수를 알아보는 인물이 없다. 마지막에 등장한 귀부인이 마침내, 여기서 교수님을 뵙는군요, 반갑게 아는 척을 하지만, 자세히 보더니 ‘메나르 교수’인 줄 잘못 알았다고 하는 거다.
  형사부장은 그저 약간의 벌금만 내면 아무 흔적 없이 깨끗하게 끝나는 일이니까 조서에 서명만 하고 가라 하지만 자존심 센 타란느 교수가 어떻게 한 번 주장한 사실, 옷을 벗은 적이 결단코 없다는 걸 번복해 서명을 하고 벌금을 내겠는가 말이지. 그러다가 슬쩍 등장인물들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두리번거리는 교수 역시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첫 번째 장면이 끝난다. 빼어난 연극비평가인 것처럼 보이는 역자 임수현은 해설에서 타란느 교수의 옷을 벗는 행위를 ”아다모프의 은밀한 강박관념들─죄의식, 수치심, 불안, 공포,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이 아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는, 작가에겐 일종의 거울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두 번째 장면인 호텔의 사무실에서는 처음엔 앞 장면의 연장인 듯 두 명의 경찰이 와서 교수에게 계속 벌금 낼 것을 요구한다. 장소를 바꾸지 않고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 동생 쟌느가 애초에 타란느 교수를 초빙하려 했던 벨기에 대학 학장이 보낸 편지를 무표정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읽으면서 이에 교수가 반응하는 것이 극의 절정을 이룬다. 앞에서 거명했던 두 명의 부조리 거장들, 외젠 이오네스코와 사뮈엘 베케트가 성공적인 삶과 지위를 이어가는 가운데 끝내 비극적인 종말을 맞아야 했던 아르튀르 아다모프의 차이점이 조금은 눈에 보이는 듯해서 마음이 좀 쓸쓸해지기도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10-26 09: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부조리 연극의 삼인방이 있었군요. 다른 두 작가에 비해 약간 다른 느낌이 드네요~ <대머리 여가수>의 충격이 있어서 부조리극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

Falstaff 2021-10-26 09:44   좋아요 4 | URL
<대머리 여가수> ㅎㅎㅎ 전 그래도 마음에 들었더랬는데요.
전 부조리극하고 맞는 거 같더군요. <대머리 여가수> 외에도 <고도를 기다리며>,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촛불> 등등이 다 좋았습니다.
20세기 프랑스 희곡을 집중해서 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은 부조리극을 더 읽고 싶어서이기도 하고요. ^^
 
바스티유 광장
레온 드 빈터 지음, 지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프만의 허기>를 흥미롭게 읽으면서 곧바로 드 빈터가 쓴 다른 책을 샀고, 이제 읽었다. <바스티유 광장>이 드 빈터의 초기 대표작으로 루이 16세가 1791년에 무사히 오스트리아로 탈출한다는 가정 하에 쓴 역사소설이라고 해서 매우 흥미로웠다. 그렇지 않은가. ‘바스티유’를 발음할 때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혁명의 역동성과 꿈틀대는 거친 기운 같은 것들도 포함해서. 그래 책을 받았을 때 기대가 컸는데, 혁명의 와중과 국외 탈출의 극적 장면이 펼쳐질 것에 비하면 책이 그리 두껍지가 않아 좀 갸웃했다. 하여튼 진짜 읽어보니까,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자리한 황폐한 신고전 양식의 건물로 출퇴근하는 역사 교사가 10년 넘게 연구하고 있는 논문, 제목을 <바스티유 광장 ― 역사의 우연성에 관한 연구>로 할지, <바렌으로의 도피 ― 역사성 없는 역사>로 할지도 결정하지 않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관한 ‘연구 주제’였다.
  루이 16세의 프랑스 탈출 미수사건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어서 인터넷에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연인이었던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겐을 비롯한 왕당파 일부 세력이 프랑스의 왕정유지를 위해 루이 16세 가족을 망명시키기로 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이들은 1791년 6월 20일을 D-day를 정해 밤늦게 도피행각을 시작한다. 치밀한 계획이었으니만큼 당시 시간기준으로 매우 엄격한 일정을 잡아놓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왕과 왕비가 탄 화려한 6두 마차는 매번 조금씩 계획이 늦어지기 시작했고, 어떤 자료에 따르면 루이16세가 식당에 들어 거한 점심식사 한 끼를 주장하는 바람에 몇 시간이 늦어지기도 했다는데, 하여튼 이런 우연한 지연과 사소한 부주의가 맞물려 왕당파 경비대와의 조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아슬아슬한 차이로 혁명군에게 체포당하기에 이른다. 만일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로 무사하게 도피를 했다 해도, 이 책에서 드 빈터가 주장한 바와 같이, 프랑스에서의 공화정은 막을 수 없었을 것이지만, 적어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고, 워털루는 그저 벨기에의 한적한 벌판에 지나지 않았을 터이다. 혹시 또 아는가. 인권에 대한 자각과 공화정의 위협으로부터 왕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유럽 열강에 의하여 프랑스 혁명 자체가 진압될 수 있었는지도.
  하여튼 나는 오해할 수 있는 독자의 권리로 루이 16세의 국외 탈출이라는 가상역사를 기대하고 있다가 물을 먹은 셈이다. 드 빈터는 탈출 사건에서 역사는, 그것이 대륙, 국가, 민족이란 거대 집단의 것일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사에 있어서도, ① 순리적인 절차를 좇아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으며, ② 유대인이란 출신 성분 특성상 역사의 의미심장한 흐름을 신뢰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든 경험만 가져왔을 뿐이다. 루이 16세가 탈출에 실패하게 되는 자잘한 우연과 시간 지연의 합이 비계가 두꺼워 한 번에 잘려지지 않은 루이의 목 위로 여러 번의 기요틴 날이 떨어지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유대인이기 때문에 수용소의 흰 연기로만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부모를 갖게 된 천애 고아의 방황, 유럽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의식을 말이다.

 

  책의 주제. 이제는 좀 식상한 이야기지만 출간한 1981년에는 어땠을까. 당시에도 그런 기분이 들었던 듯하다.
  시대는 1970년대 말. 역사 교사 파올 드 비트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의 으리으리한 별장에서 사는 로마 가톨릭 집안 출신의 아내 미커와 두 딸, 하나와 미르얌과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암스테르담의 중산층 유대인이다. 파올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을 이용해 연구자료를 구하러 파리 국립중앙도서관의 국립고문서관에 다녀온 이후 조금씩 의도적으로 자신의 육신을 망가뜨려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중이다. 내일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해 또다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지만 파올은 새벽이 올 때까지 각종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시간과 자신을 죽이고 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이걸 지켜봐야 하는 아내 미커의 복장이 어떻겠는가. 갑작스레 찾아온 남편의 이유 없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거의 6개월 동안 대책 없이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니. 미커는 파올이 논문을 진전시키지 못해 생긴 것으로 보고 잠시 친정에 다니러 가면서, 식탁 위에 메모를 적어 두어 파올의 작전이 성공을 거두게 해준다. 여름방학 기간에 다시 파리에 가서 자료를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내용. 바로 이때 집으로 걸려온 프랑스 여자 폴린의 전화. 내일 암스테르담애 도착할 것이니 함께 고흐 박물관과 암스테르담 시립 박물관에 가고 싶다는 것.
  폴린이 누구인가. 작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 프랑스 국립고문서관에서 자료를 모을 당시 머물던 호텔의 아르바이트 직원. 파올과 같은 유대인이다. 이들은 유대인이란 동질성으로 금세 오해를 풀고 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며칠 만에 호텔이 아닌 폴린의 아파트에서 몸을 섞게 된다. 폴린은 열다섯 살이 많은 파올의 결혼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연인관계를 유지 시키고 싶지만, 이게 말이 쉬운 거다. 다행히 파리-암스테르담 간 거리가 있어서 이들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파올은 여러 형태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난데없는 공황장애와 우울증 증상도 절반은 여기서 비롯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파올과 폴린의 사랑은 활활 불타올랐고, 이들은 도서관에서 공부는커녕 파리 각지에 놀러 다니며 온갖 추억을 쌓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바스티유 광장에서 세 장의 사진도 찍었고, 여기서 사달이 났다. 후줄근한 광장을 배경으로 카메라를 보고 서 있는 폴린의 왼쪽 어깨 뒤에서 서 있는 한 남자의 불투명한 시선. 그는 울고 있는 것일까? 추위를 견디지 못해 혹은 혹독한 기후 때문에 눈에 물기가 맺혔을 뿐일까? 교무실에서 이 사진을 보고 있는데, 지나던 늙수그레한 동료 교사가 사진을 보더니, 행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느냐고 묻는 거였다. 이 수학교사의 눈에는 폴린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한 파올이 행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난 것으로 판단한 것. 그렇게 사진 속 눈에 눈물 그득한 남자와 파올이 닮아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43년 당시 임신한 유대인의 출산을 비밀리에 돕던 산파를 수소문해 드디어 자신을 받은 친절한 할머니를 찾아낸다.
  이 칠십 대의 시골 할머니는 정확하게 파올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두 시간 먼저 태어난 쌍둥이 형 필립을 기억해낸다. 아들이면 외할아버지 필립과 친할아버지 파올 가운데 어떤 이름을 줄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부부에게 한꺼번에 아들 둘이 생겨 고민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까지. 문제는 단숨에 풀리고 만다. 자신의 친형 필립이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었으며, 바스티유 광장에서 사진을 찍는 파올을 보고 뭔가 가슴이 찡한 감정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으리라는 결론. 이것이 프롤로그에서 장황하고 화려한 문체로 한없이 엄살을 피우던 파올의 이유 없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의 나머지 원인이었다. 어쨌든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치유하기 위해서 파올은 암스테르담을 떠나 파리로 가야 하는 건 어김없는 사실.
  소설이 되기 위하여 때를 맞춰 파리에서 젊고 아름다운 유대 여인 폴린이 암스테르담으로 왔고, 밤을 며칠 함께 보낸 다음 같은 기차의 옆자리에 타고 파리로 향한다. 소설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본문은 모두 여덟 개의 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암스테르담 역을 떠나 지나간 세월 동안 파올이 아내 미커를 만나고, 미커와의 가정생활을 역사학자답게 시대별로 구분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생활을 묘사하고, 폴린을 만나 뜨거운 사이가 되고, 유럽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관한 토의를 하고, 자신을 받은 산파를 만나 가족관계를 알아내는 사이에 드디어 독특한 냄새가 진동하는 파리 북역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드디어 결론이 기다리고 있다. 권할 수준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힘들더라도 기회가 생기면 지나치지 말라는 권유 정도는 할 수 있는 책이라, 결론만큼은 일러드리지 않겠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10-25 09: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78쪽 분량안에 이 내용이 다 들어있다니 놀라워요. 더군다나 결론이 궁금해졌고요😆ㅎㅎ
루이 16세 목이 잘 안잘렸고
그걸 또 반복해서 자른 당시 혁명의 분위기라.. 상상하기조차 무섭네요!!(근데 궁금;;)

행복한책읽기 2021-10-25 09:47   좋아요 4 | URL
지두 저 대목에서 허걱했어요. 기요틴을 내리치고 내리치고 내리쳤단거잖아요. 으으으으😖😖😖😖

Falstaff 2021-10-25 09:50   좋아요 3 | URL
저도 루이 목에 비계가 많이 껴서 기요틴이 몇 번 떨어졌다는 건 이 소설을 통해서 처음, 햐... 이런 건 알지 못해도 좋은데 말이지요, 처음 알았습니다. 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10-25 09:4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런. 또 낚였네유. 우째 이리 길고도길게 써서 플친들 시간 옴팡 들이게 하고선. 메롱이라니. 지는 이제 안궁금하지롱요.^^

Falstaff 2021-10-25 09:51   좋아요 3 | URL
이 책은 도서관을 이용하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드 빈터는요 <호프만의 허기>가 좀 더 좋더라고요. ^^
 
트맆티콘 - 삶과 죽음의 세장면
막스 프리쉬 지음, 김형국 옮김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트립티콘”을 우리말로 하면 “세 폭 제단화” 기독교의 제단 뒤쪽에 그려진 세 폭짜리 그림이란 뜻이다.

 

트립티콘


  막스 프리쉬의 희곡 <트립티콘>도 이 형식에 맞추어 모두 세 장면으로 되어 있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가운데 그림이 제일 크고, 제1과 제3 화의 사이즈가 작다. 이 희곡도 1장면과 3장면을 합한 것보다 제2 장면의 분량이 조금 더 길다.
  작품의 주제는 죽음. 또는 사후세계. 1장면은 70대 남자가 죽어 장사를 지내고 많은 조문객이 과부를 위로하기 위해 집을 방문해 차려놓은 식사를 하며 애도를 표한다. 고인이 평소에 앉아 있던 흰 의자엔 죽은 고인이 앉아 있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다. 2장면은 죽음 이후의 세계다. 새벽, 아침, 오전, 오후, 저녁, 황혼, 밤의 구분이 없는 저승일지언정 봄이 왔다는 걸 죽은 이들이 다 알고 있다. 고인들은 이승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나이로 고착되어 있어서, 고서점을 운영하던 노인의 아버지는 영국계 정유회사 셸의 제복을 입은 젊은 모습으로 여전히 늙은 아들에게 낚시질 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타박을 한다. 이 젊은 아버지 옆에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뼈만 남은 할머니가 있으니 바로 젊은 아버지의 아내, 고서점 주인 영감의 엄마다.
  3장면은 암에 걸려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이는 프랑신느와 이이의 아직 죽지 못한 연인 로제. 한때 서로 사랑했지만 결국 이별을 해야 했던 커플. 이들 사이에 놓인 죽음이란 거대한 장벽을 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미 죽은 프랑신느가 다시 살아올 수는 없는 일이니, 속주머니에 품고 있는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 로제가 프랑신느 있는 곳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어떤 그림일지 대강 보이실 듯. 새로운 것도 없고 기발한 점도 없다. 다만 3장면에서 죽음이란 방식으로 결별을 완성한 커플이 지난 시절을 돌아보는 것이 좀 서늘한 정도.

 

  이제 막스 프리쉬의 3대 소설, <슈틸러>, <호모 파버>, <내 이름은 간텐바인>을 읽었고, 희곡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안도라>와 <트맆티콘>까지 마쳤으니 이걸로 된 듯하다. 적어도 당분간 다시 프리쉬를 찾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1-10-22 0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치오의 이 세폭제단화가 이 소설과 연관이 있나요?

Falstaff 2021-10-22 08:59   좋아요 2 | URL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제가 ‘트립티콘‘이 뭔지 몰라서, 혹시 독후감 읽는 분들께서도 모르시는 분이 계실까봐 트립티콘이 이런 거다, 라는 의미에서... ^^;;;

coolcat329 2021-10-22 09: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형식은 뭔가 의미심장한 의미가 있을거같네요.
1장은 이승 2장은 저승 3장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과거 회상.
저 혼자 생각해봤네요.
양쪽 그림이 가운데 그림에 꼭 맞게 포개지듯 뭔가 이 희곡에도 그런 맞아떨어지는게 있을거 같아요.
마지막 당당한 문장 아휴~부럽습니다.
저는 슈틸러 갖고 있는데 참 손이 안가네요.

Falstaff 2021-10-22 09:26   좋아요 2 | URL
슈틸러는 그래도 재미있는 편일 텐데요. ㅋㅋㅋㅋ
천천히 읽으셔요. 취미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실 필요 1도 없습니다. ^^

유부만두 2021-10-23 15: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뜬금 댓글 입니다;;;;

전에 팔스타프님께서 ‘서부전선 이상없다’ 민음사판을 혹평 하셨더랬는데요, 집에 있어서 읽기 시작했어요. 아 … 이대로도 좋은데, 더 좋았어야 했단거죠??

Falstaff 2021-10-23 16:17   좋아요 1 | URL
민음사 판이 아니라 열린책들 판입니다. 2014년 말에 저는 열을 받아 열린책들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항의를 합니다만, 아직 한 마디의 답변도 받지 못했습니다.

++++++++++

에리히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없다> 라는 훌륭하기 그지 없는 책을 이제 막 완독했습니다. 읽기가... 라기 보다는 읽어내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레마르크의 필력이야 어디 한점 까탈을 잡을 수 있을까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최고의 텍스트로 최악의 책을,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열린책들이란 훌륭한 책방에서 찍었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내내.
교정 교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제가 내린 결론으로, 한국 소재 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외국인이 교정 교열을 담당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2. 이런 개판 무인지경의 교열작업을 했음에도 정말로 책을 내기 전에 어떤 책임자도 스스로 마지막 정독을 해보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3. 책이 나온 다음 번역작업을 한 홍성광 씨 역시 자기가 직접 번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책이 나왔을까, 혹시 무슨 실수라도 없었을까, 조금도 궁금하지 않아 한 번도 자기가 번역한 책을 들춰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홍성광씨가 책을 보았다고 하면 문제는 더 심각하지요. 이런 정도로 엉망인 책이 자기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시중에 돌아다니게 놔두었으니까요. 이 사람이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번역한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도 의외입니다.
4. 위와 같은 문제점을 해소하며, 이 책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한 출판사 열린책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전량 회수를 권유합니다. 손실을 피할 수 없겠으나 출판사의, 한 기업의 자존심이 있다면 완전한 재교열 후에 제 2판을 찍어 다시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5. 마지막으로, 여태까지의 의견 또는 비판이 마땅하지 않으시다면 반론을 하시기 전에 꼭, 먼저 <서부 전선 이상없다>를 다 읽은 다음에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유부만두 2021-10-23 16:18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열린책 이에요, 제 오타입니다;;;;

유부만두 2021-10-23 16:21   좋아요 0 | URL
아직 전 초반이라 괜찮다 느끼는건지;;; 다른 번역판 무엇으로 가야하나요? ㅠ ㅠ

Falstaff 2021-10-23 16:26   좋아요 0 | URL
다른 번역판도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ㅠㅠ

유부만두 2021-10-23 16:31   좋아요 0 | URL
아...이런...

서부전선 망했네요

Falstaff 2021-10-23 16:57   좋아요 1 | URL
우리글의 특징은
초성(자음), 중성(모음), 종성(있을 경우에 한해서. 자음) 이런 순서로 나열되지 않습니까. 근데요, 이 책을 열독하시다보면,
모음, 자음. 이런 순서의 문자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ㅋㅋㅋ

제 의견은, 그래도 댁에 책이 있으면 읽는 편이 더 낫다, 입니다. 텍스트가 정말 훌륭하잖아요. 얼마나 훌륭한지는 읽어보시면 저절로 동의하실 듯합니다.

유부만두 2021-10-23 17:23   좋아요 2 | URL
계속 이어서 읽고 있습니다. 아, 좋은데요?! 계속 나오는 콩 이야기도, 그 선생 이야기나 훈련소 이야기도, 왜 이제야 이 소설을 읽는지 후회막급입니다.

 
왼손잡이 여인 범우문고 74
패터 한트케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만일 지금 이십대라면, 그리고 소설가가 되려 하는데 <왼손잡이 여인>을 읽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아마도 절망했을 거 같다. 이렇게 쓰는 작가가 있는데 뭘 더 보탤 수 있을까, 라는 좌절감에 빠져 한 달 가량 술독에 빠져 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보통의 체조선수가 몬트리올에서 나디아 코마네치의 퍼포먼스를 직접 본 기분과 비슷했을 것 같다.
  스토리와 문장이 다 절편이다. 다행히 난 글 써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이 아니다. 그간 페터 한트케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단정해놓고 이이의 작품은 별로 읽지 않았다. 201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 스웨덴 한림원이 잘난 척하기 위해 잘난 척하는 작가한테 상을 줬다고 불만을 갖기도 했다. <소망 없는 불행>,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그리고 희곡 <관객모독> 이렇게 네 권만 라이브러리에 들어 있을 뿐. 그래 이 책도 별로 기대하지 않고 그저 싼 맛에 골랐다가, 언필칭 대박이다. 한트케를 멀리 한 지난 세월이 아쉽다.

 

  이 여자 마리안느는 서른 살.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진 도자기 회사의 지점에서 판매 책임자로 근무하는 남편 부르노,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스테판과 함께 테라스 형태로 지은 방갈로에 살고 있다. 부자라고 할 수는 없어도 안락한 생활을 누릴 정도의 중산층으로, 언제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날지 몰라 방갈로에 세 들어 있다. 부르노가 몇 주일 만에 스칸디나비아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 작품은 시작한다.
  아내가 공항으로 남편을 마중 가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인 아이를 재우고 나서, 부부는 오랜만에 호텔 레스토랑에 가서 정찬을 즐긴다. 가슴이 팬 드레스를 입은 아내를 앞에 앉혀놓고 칼바도스를 곁들여 훌륭한 식사와 늙은 종업원의 전문적인 서비스를 받는 일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뿐만 아니라 기묘한 방식에 의해 인류 전체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일이라 규정하는 남편 부르노. 봉건적 봉사정신의 완숙미를 보여주며 서비스를 하는 종업원에게 부르노는 빈 방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이왕 나온 김에 호텔에서 자고 가기로 결정한다.
  다음날 이른 아침.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마리안느는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떠오른다. 즉각적인 생각. 여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다. 핀란드에서 자기 회사 제품의 변기 위에 앉아 있을 때 혼자 있다는 생각을 하고 공포감에 휩싸였다는 남편의 말 때문인가? 아내와 함께 견고하게 묶여 있다는 감정, 이런 걸 느끼면서 그러나 남편은, 당신이 없어도 살아갈 것 같은 생각이 들더란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말을 나눈다. 사람 없는 이른 아침의 공원에서.

 

  당신이 나를 떠나리라는 것. 당신이 나를 혼자 내버려두리라는 것. 바로 그것이에요. 부르노, 가세요.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요.
  영원히 말이지?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떠나리라는 것뿐이에요.
  난 우선 돌아가서 호텔에서 따뜻한 커피나 한 잔 마셔야겠어. 그리고 오후에 짐을 가지러 가겠어.

 

  이렇게 남편은 호텔로 돌아가고, 아내는 집에 도착해 아이를 깨워 아침을 먹이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남편의 트렁크 두 개를 채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와 놀아주다가, 남편이 오고, 악수를 한 다음, 트렁크를 들고 떠난다. 마리안느는 소파에 앉아 TV를 본다. 아이들 놀이터의 CCTV와 연결이 된 TV를 쳐다보는 마리안느의 두 눈에 이제 눈물이 고인다. 밤이 온다. 마리안느는 이불을 싸들고 아이의 방에 가 아이의 침대 옆 바닥에 눕니다.
  다음날 아침, 마리안느는 예전에 다니던 출판사 사장에게 편지를 해 프랑스어 번역 제안서를 보낸다. 우체통이 단지 끝 공중전화박스 옆에 있어 그곳을 지나다 기다리고 있던 부르노를 만난다. 부르노는 여자를 전화박스로 몰아넣고 한 대 치려고 했으나 전화박스의 공간이 너무 협소해 실패한다. 부르노는 화가 난다. 무척 화가 난다.

 

  나를 너무 오래 혼자 두지 말아. 그러다간 당신도 어느 날엔가 죽고 말 거야.

 

  부르노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이유 없이 자기 집에서 쫓겨난 거다. 마리안느의 친구이자 아들 스테판의 담임선생인 프란치스카의 집에서 지내라고 한 것도 아내 마리안느다. 그러나 이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여자는 말한다.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생각해라. 너희들이 나에 대한 말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나는 너희들로부터 자유스러울 것이다.

 

  집에 돌아온 마리안느는 집안의 가구를 다시 배치하고, 대청소를 마친다. 아들이 도와준다. 일을 다 마치고 어린 아들과 눈이 마주친 마리안느가 웃는다. 스테판이 말한다.

 

  웃지 마세요. 일부러 웃으려고 애를 써서 웃는 거잖아요. 나도 슬프단 말이에요. 슬픈 건 엄마뿐만이 아니라니까요.

 

  이렇게 마리안느, 한 여자가 자발적인 긴 고독을 시작하고 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1-10-21 09: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들이 도와준다….이 문장이 아픕니다.

Falstaff 2021-10-21 09:38   좋아요 4 | URL
ㅎㅎㅎ 저는 참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떤 느낌이 드실지 궁금하군요.
읽으면서 여러차례 감탄을 했었습니다.

새파랑 2021-10-21 09: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른 한트케 작품과 다른가 보네요. 전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한 작품만 봤는데 너무 어렵더라구요 ㅜㅜ
이건 무조건 찜~!!

Falstaff 2021-10-21 10:51   좋아요 4 | URL
뭐든지 그렇지만 한트케도 독자하고 잘 맞는 게 젤 중요한 듯합니다.
이 책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지요.

붕붕툐툐 2021-10-21 12: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낯익다 싶었는데 <관객모독> 작가였군요! 이 작품은 연극으로 본 적이 있거든요! 저도 이 작품 찜!!ㅎㅎ

Falstaff 2021-10-21 13:07   좋아요 3 | URL
넵. 관객모독은 희곡으로 읽어도 괜찮았어요. ㅎㅎㅎ

잠자냥 2021-10-21 12: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우 한트케 저도 합이 안 맞아서 버린(?) 작가인데 이 책까지만 한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나디아 코마네치에서 빵! 터집니다. ㅋㅋㅋㅋ 요즘 젊은이들은 저 코마네치 잘 모르겠죠?

Falstaff 2021-10-21 13:08   좋아요 4 | URL
저도 이 문고판 책값이 싸지 않았으면 안 읽었을지도 모릅니다. ㅋㅋㅋㅋㅋ
이름만 조금 들어봤겠지요, 나디아 코마네치. 당시엔 정말 경악이었는데 말입죠.
보고, 보고, 또 보고 아우... 근데 너무 오래 전 이야기를 했나 싶기도. ㅋㅋ

coolcat329 2021-10-21 2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리안느가 왜 그러는건지 이해가 안가는데 코마네치 수준이라니 저도 찜하겠습니다. 책 읽으면 마리안느 이해가 가겠죠?😙

Falstaff 2021-10-22 08:19   좋아요 3 | URL
마리안느의 행복 또는 자아 찾기입니다.
며칠 전에 읽은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선 네드라가 깔끔하게 이혼해버지만 마리안느는 자신의 일을 갖고자 하는군요. 이하 생략!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