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스카와 루신다 1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7
피터 케리 지음, 김시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1988년 부커상 수상작품이며, 20년 후인 2008년에 여태 부커상을 받은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을 겨루는 베스트 오브 더 부커 후보에도 올라,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에 이어 영광의 준우승을 거둔 작품이라고 해 상당한 기대를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 주 바커스 마쉬에서 1943년 태어난 피터 케리, 라는 구구절절의 바이오그래피는 이이의 작가로서의 성과가 워낙 돋보여 애써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대학에선 원래 화학과 동물학을 공부했지만 때마침 교통사고도 당하고, 원래 학업에 흥미가 없어서 일찌감치 때려치워, 결과적으로 대학에서 얻은 유일한 건 첫 번째 아내 리 위트먼 뿐이었다, 등등. 이런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작가로서의 피터 케리는 매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최우수 소설작품에게 주는 마일스 프랭클린 상을 세 번, 모든 영어권의 작품을 대상으로 최우수 작품에게 주는 부커 상을 두 번 받았으며, 매년 노벨 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오스트레일리아 작가로 손꼽힌다고 한다. 근데 다들 아시지? 노벨 문학상 후보는 결국 만년 후보로만 끝나는 거. 이이가 벌써 77세. 기회는 그래도 남아 있지만 이러다가 결국 숨넘어간 작가가 한 둘이 아니니 안심하면 안 될 듯하다. 어쨌든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작가가 쓴, 대단한 작품이니 어찌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말이지.
작품은 끝날 때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홉킨스 가문의 화자 ‘나’의 길고 긴 독백이다. 화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인물은 자신의 증조부 오스카 홉킨스로 생몰연대가 1841~1866, 겨우 스물다섯의 청춘에 삶을 마감한 성공회 신부다. 화자의 집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인물은 당연히 어머니. 어머니는 집을 방문하는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북동부 그래프턴 시의 성공회 주교들을, 감히 상석이 아닌 은판 사진이 정면으로 눈에 들어오는, 테이블의 한 가운데 자리에 앉히는 습관이 있을 정도로 증조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이 오스카 증조부는 1866년 당시에 사나운 야생동물과 곤충, 그리고 식인도 마다하지 않는 원주민 등, 살벌한 밀림의 한가운데였던 이곳, 벨린전으로 자그마한 세인트존 교회를 배에 싣고 와 온 세상에 은혜로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화자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증조부가 아니라, 플리머스 형제회 소속이며, 왕립학술원 회원이었던 박물학자인 40대 홀아비 고조할아버지, 티오필러스 홉킨스부터 시작한다. 플리머스 형제회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모임이다. 헨리가 캐서린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생긴 성공회가 벌써 3백년이나 잉글랜드를 드르르륵 누비고 또 다졌건만 어찌된 일인지 유독 런던에서 티오필러스 홉킨스 선생이 이주해 와 자리잡은 데번 주 헤나컴 지역은, 오히려 성공회 신자들이 홉킨스 선생의 설교에 넘어가 플리머스 형제회의 회원이 되는 거였다. 홉킨스 씨가 신봉하는 플리머스 형제회는 크리스마스마저 이교도적, 가톨릭적이라 규정해서 성탄을 기념하지도 않고 대신 ‘율타이드’라 칭하며 그날도 들에 나가 노동을 하라고 가르친단다.
많은 일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일어난다. 주인공 오스카 홉킨스는 아버지 말고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질산을 피부에 떨어뜨리는 잔혹한 치료 도중에 숨을 거둔 엄마를 닮아 목이 길고 섬세한 외모를 갖고 태어났다. 외모에 어울리게 힘도 별로 없어서 성공회에 다니는 동네 아이들이 오스카만 봤다하면 이지메를 가하고, 심지어 모래나 자갈도 억지로 먹게 했다니 애초부터 외톨이의 별자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때를 맞춰 집에 새로운 가정부 패니가 들어왔다. 패니가 보기에 성탄절을 열다섯 번이나 지냈음에도 아직 오스카가 푸딩 맛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걸 알고, 이런 세상에나, 한숨을 한 번 쉰 다음, 다가온 성탄절에 버터와 우유, 달걀, 채에 거른 곱고 흰 밀가루, 설탕, 소금 기타 온갖 맛나는 양념을 동원해 일생일대의 커스터드 소스를 얹은 푸딩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인생 최초로 등장한 커스터드 소스 얹은 푸딩을 처음으로 입에 넣어, 위아래 이를 서로 부딪칠 것도 없이 저절로 녹아드는 순간, 입천장에 처음엔 얇디얇게 곧이어 점점 두껍게 엉기는 밀가루의 접착, 건포도와 설탕의 단 맛에 온통 돌기가 돋을 거 같은 혀의 미세한 떨림, 그리고 이 모든 물질들을 감싸는 침의 효소작용으로 조금씩 식도로 밀려드는 쾌감! 오스카가 난생 처음 천국의 맛을 감각하고 있는 바로 이때, 티오필러스 홉킨스, 강건한 몸집의 고집스런 아버지가 부엌에 들이닥쳐 왼손으로 오스카의 목을 굳세게 잡고, 오른손으로는 억지로 진한 소금물을 삼키게 하여, 이미 위의 분문을 통과한 푸딩의 모든 잔재까지 모두 거꾸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아버지에 따르면 푸딩은 우상숭배자들이나 먹는 악마의 살이라서.
그렇다고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다가올 심판의 날에 구원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양육을 하고 있던 터. 이런 불친절한 사랑이 계속 이어지고, 목에 아버지의 엄지와 검지로 인한 멍이 든 성탄 후의 부활절이 지난 다음 주, 오스카는 새롭게 하느님의 소명을 받는다. 그리하여 배교를 해버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좋아하며 다양한 관점에서 공정해지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의 신도들을 부당하게 꾀어 빼내가는 티오필러스 홉킨스만 예외로 치는 성공회 휴 스트래턴 신부에게, 귀순하는 것. 스트래턴 신부는 의외의 신학적 수확을 한 셈. 적의 아들이 손 안에 들어왔으니. 게다가 식사할 때 건포도를 골라놓는 오스카는 분명히 부름, 사제의 소명을 받은 걸로 보였다. 성공회 사제이지만 사실 지극한 속세 인물이기도 한 스트래턴 신부는 몇 년 만에 차분하고 강인한 표정으로 아이를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옥스퍼드의 오리얼 칼리지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생각보다 이 책이 재미없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가, 화자가 너무 빨리, 너무 자주 오스카와 특히 루신다의 앞날에 관해 언급하기 때문인 것 같다. 루신다를 소개하는 초장에 화자는 “후에 전 재산을 나의 증조할머니에게 잃고 하룻밤 새 알거지가” 된다고 소개해버리는 것을 필두로. 그러니까 알거지 신세가 될 루신다의 아버지 르플래스트리어 씨는 1852년 종려주일을 앞두고 뉴사우스웨일스 패러매타 처치 스트리트에서 갓 이민 온 꼬맹이 엘리자베스 멀린스가 선생이 타고 온 말 앞에서 알짱거려 신경이 쓰인 말이 뒷발로 일어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말 잔등에서 내동댕이쳐져 머리부터 추락, 호두 깨는 소리와 똑같은 소리를 내며 두개골이 깨져 즉사하고 만다.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문제 소녀 엘리자베스 멀린스가 오스카하고 나중에 어떻게 연결이 될 걸로 기대하게 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루신다의 엄마 이름도 엘리자베스인 것만 빼고. 말이 나온 김에, 루신다가 열일곱 살 때 스페인 독감으로 죽을 팔자인 엄마 엘리자베스는 런던에 매우 친한 친구가 있으니 이름이 ‘매리 앤 에번스’다. 누구냐 하면, 우리가 흔히 조지 엘리엇으로 알고 있는 여성이다. 그러니까 루신다는 부르주아 인텔리 집안에서 나중에 문학적으로도 성숙하지 못한 알거지가 될 인물.
르플래스트리어 씨가 죽고 몇 년 있다가 엄마 엘리자베스도 대서양과 인도양, 태평양까지 건너온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는다. 일 년 후 1859년 5월 10일에 열여덟 살이 된 루신다 르플래스트리어 양은 어린 나이에 대농장을 분할해 판 거금을 은행 환어음의 형태로 갖고 패러매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도시 시드니로 들어온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시드니의 달링하버에 있는 유리공장을 사는 것. 전 재산의 반을 투자해서. 열여덟 살짜리가 유배된 범죄자들의 나라, 이 가운데서도 제일 큰 공업도시 시드니에 떨어져 혼자 회사를 통째로 살 수는 없었으니, 성공회 울라라 교구의 신부 데니스 헤잇에게 도움을 청한다. 처녀수태와 부활, 구약의 기적들을 전혀 믿지 않는 헤잇 신부는 유리에 관한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회사 경영에 관해서는 별로다. 이쪽을 보완을 위해 도움을 받는 사람이 답스 앤드 피그 사무소의 회계사 답스 씨. 루신다는 답스 씨의 집에 들락거리면서 재미나게도 카드 게임, 도박에 재미를 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19세기 오스트레일리아에선 여자가 회사의 사장을 하기엔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직원들이 기꺼이 루신다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유리회사에서 가장 고급한 기술자는 유리 대롱을 불어 형태를 잡는 유리 불기공. 이 가운데 가장 고참인 아서 펠프스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경영하는데, 가장 불행한 일은 이 세 명에게 회사를 맡겨놓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회사의 소유자가 되려고, 즉 결혼을 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하는 것. 그러나 믿음과는 달리 조지 엘리엇은 아쉽게도 식민지에서 온 촌년이 도무지 런던의 풍습에 맞추지 못해 함께 어울려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사교계에서도 순식간에 떨려나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리바이어던 호를 타고 귀국길에 오른다.
이 배에서 만난 인물이 물 공포증에 시달리는 잉글랜드 출신의 성공회 사제 오스카 홉킨스. 이리하여 문제적 인물 오스카와 루신다가 이 바닷괴물 리바이어던 호에서 처음 만나고 시드니에서 다시 어울려 한 방에 둘 만 앉은 채 카드 게임을 하다가 들켜버리니 책표지를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파도, 빨강머리 남자, 유리로 만든 교회가 그려진 카드를 표지로 삼을 수 있었던 것.
이 책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무수하게 많이 등장한다. 하나하나를 읽어보면 재치 만발인 문장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합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 재치있는 문장을 모두 합친 글의 덩어리로 읽으면 이상하게, 정말 의아스러울 만큼 독자를 덜 흥분시킨다. 왜 그런지 짐작은 하겠지만 아마추어, 기껏해야 딜레탕트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주제에 내 생각을 밝힐 수는 없다. 여차하면 관련된 분께 누가 될 일을 함부로 떠벌일 수는 없는 일.
이만한 스케일로 작품을 구상하고 전개시킬 수 있는 작가가 그리 흔하지 않을 듯하다. 그리하여 비록 재미있게 읽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이가 쓴 다른 부커상 수상작품인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를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켈리 갱……>을 읽음으로 해서 <오스카와 루신다>는 단지 나의 독법이 잘못 된 것일 뿐이란 게 증명된다면 나중에나마, 나도 좀 덜 거북할 거 같다. 다른 분들께선 아무쪼록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러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