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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광장
레온 드 빈터 지음, 지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호프만의 허기>를 흥미롭게 읽으면서 곧바로 드 빈터가 쓴 다른 책을 샀고, 이제 읽었다. <바스티유 광장>이 드 빈터의 초기 대표작으로 루이 16세가 1791년에 무사히 오스트리아로 탈출한다는 가정 하에 쓴 역사소설이라고 해서 매우 흥미로웠다. 그렇지 않은가. ‘바스티유’를 발음할 때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혁명의 역동성과 꿈틀대는 거친 기운 같은 것들도 포함해서. 그래 책을 받았을 때 기대가 컸는데, 혁명의 와중과 국외 탈출의 극적 장면이 펼쳐질 것에 비하면 책이 그리 두껍지가 않아 좀 갸웃했다. 하여튼 진짜 읽어보니까,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자리한 황폐한 신고전 양식의 건물로 출퇴근하는 역사 교사가 10년 넘게 연구하고 있는 논문, 제목을 <바스티유 광장 ― 역사의 우연성에 관한 연구>로 할지, <바렌으로의 도피 ― 역사성 없는 역사>로 할지도 결정하지 않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관한 ‘연구 주제’였다.
루이 16세의 프랑스 탈출 미수사건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어서 인터넷에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연인이었던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겐을 비롯한 왕당파 일부 세력이 프랑스의 왕정유지를 위해 루이 16세 가족을 망명시키기로 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이들은 1791년 6월 20일을 D-day를 정해 밤늦게 도피행각을 시작한다. 치밀한 계획이었으니만큼 당시 시간기준으로 매우 엄격한 일정을 잡아놓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왕과 왕비가 탄 화려한 6두 마차는 매번 조금씩 계획이 늦어지기 시작했고, 어떤 자료에 따르면 루이16세가 식당에 들어 거한 점심식사 한 끼를 주장하는 바람에 몇 시간이 늦어지기도 했다는데, 하여튼 이런 우연한 지연과 사소한 부주의가 맞물려 왕당파 경비대와의 조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아슬아슬한 차이로 혁명군에게 체포당하기에 이른다. 만일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로 무사하게 도피를 했다 해도, 이 책에서 드 빈터가 주장한 바와 같이, 프랑스에서의 공화정은 막을 수 없었을 것이지만, 적어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고, 워털루는 그저 벨기에의 한적한 벌판에 지나지 않았을 터이다. 혹시 또 아는가. 인권에 대한 자각과 공화정의 위협으로부터 왕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유럽 열강에 의하여 프랑스 혁명 자체가 진압될 수 있었는지도.
하여튼 나는 오해할 수 있는 독자의 권리로 루이 16세의 국외 탈출이라는 가상역사를 기대하고 있다가 물을 먹은 셈이다. 드 빈터는 탈출 사건에서 역사는, 그것이 대륙, 국가, 민족이란 거대 집단의 것일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사에 있어서도, ① 순리적인 절차를 좇아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으며, ② 유대인이란 출신 성분 특성상 역사의 의미심장한 흐름을 신뢰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든 경험만 가져왔을 뿐이다. 루이 16세가 탈출에 실패하게 되는 자잘한 우연과 시간 지연의 합이 비계가 두꺼워 한 번에 잘려지지 않은 루이의 목 위로 여러 번의 기요틴 날이 떨어지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유대인이기 때문에 수용소의 흰 연기로만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부모를 갖게 된 천애 고아의 방황, 유럽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의식을 말이다.
책의 주제. 이제는 좀 식상한 이야기지만 출간한 1981년에는 어땠을까. 당시에도 그런 기분이 들었던 듯하다.
시대는 1970년대 말. 역사 교사 파올 드 비트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의 으리으리한 별장에서 사는 로마 가톨릭 집안 출신의 아내 미커와 두 딸, 하나와 미르얌과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암스테르담의 중산층 유대인이다. 파올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을 이용해 연구자료를 구하러 파리 국립중앙도서관의 국립고문서관에 다녀온 이후 조금씩 의도적으로 자신의 육신을 망가뜨려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중이다. 내일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해 또다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지만 파올은 새벽이 올 때까지 각종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시간과 자신을 죽이고 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이걸 지켜봐야 하는 아내 미커의 복장이 어떻겠는가. 갑작스레 찾아온 남편의 이유 없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거의 6개월 동안 대책 없이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니. 미커는 파올이 논문을 진전시키지 못해 생긴 것으로 보고 잠시 친정에 다니러 가면서, 식탁 위에 메모를 적어 두어 파올의 작전이 성공을 거두게 해준다. 여름방학 기간에 다시 파리에 가서 자료를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내용. 바로 이때 집으로 걸려온 프랑스 여자 폴린의 전화. 내일 암스테르담애 도착할 것이니 함께 고흐 박물관과 암스테르담 시립 박물관에 가고 싶다는 것.
폴린이 누구인가. 작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 프랑스 국립고문서관에서 자료를 모을 당시 머물던 호텔의 아르바이트 직원. 파올과 같은 유대인이다. 이들은 유대인이란 동질성으로 금세 오해를 풀고 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며칠 만에 호텔이 아닌 폴린의 아파트에서 몸을 섞게 된다. 폴린은 열다섯 살이 많은 파올의 결혼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연인관계를 유지 시키고 싶지만, 이게 말이 쉬운 거다. 다행히 파리-암스테르담 간 거리가 있어서 이들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파올은 여러 형태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난데없는 공황장애와 우울증 증상도 절반은 여기서 비롯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파올과 폴린의 사랑은 활활 불타올랐고, 이들은 도서관에서 공부는커녕 파리 각지에 놀러 다니며 온갖 추억을 쌓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바스티유 광장에서 세 장의 사진도 찍었고, 여기서 사달이 났다. 후줄근한 광장을 배경으로 카메라를 보고 서 있는 폴린의 왼쪽 어깨 뒤에서 서 있는 한 남자의 불투명한 시선. 그는 울고 있는 것일까? 추위를 견디지 못해 혹은 혹독한 기후 때문에 눈에 물기가 맺혔을 뿐일까? 교무실에서 이 사진을 보고 있는데, 지나던 늙수그레한 동료 교사가 사진을 보더니, 행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느냐고 묻는 거였다. 이 수학교사의 눈에는 폴린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한 파올이 행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난 것으로 판단한 것. 그렇게 사진 속 눈에 눈물 그득한 남자와 파올이 닮아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43년 당시 임신한 유대인의 출산을 비밀리에 돕던 산파를 수소문해 드디어 자신을 받은 친절한 할머니를 찾아낸다.
이 칠십 대의 시골 할머니는 정확하게 파올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두 시간 먼저 태어난 쌍둥이 형 필립을 기억해낸다. 아들이면 외할아버지 필립과 친할아버지 파올 가운데 어떤 이름을 줄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부부에게 한꺼번에 아들 둘이 생겨 고민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까지. 문제는 단숨에 풀리고 만다. 자신의 친형 필립이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었으며, 바스티유 광장에서 사진을 찍는 파올을 보고 뭔가 가슴이 찡한 감정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으리라는 결론. 이것이 프롤로그에서 장황하고 화려한 문체로 한없이 엄살을 피우던 파올의 이유 없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의 나머지 원인이었다. 어쨌든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치유하기 위해서 파올은 암스테르담을 떠나 파리로 가야 하는 건 어김없는 사실.
소설이 되기 위하여 때를 맞춰 파리에서 젊고 아름다운 유대 여인 폴린이 암스테르담으로 왔고, 밤을 며칠 함께 보낸 다음 같은 기차의 옆자리에 타고 파리로 향한다. 소설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본문은 모두 여덟 개의 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암스테르담 역을 떠나 지나간 세월 동안 파올이 아내 미커를 만나고, 미커와의 가정생활을 역사학자답게 시대별로 구분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생활을 묘사하고, 폴린을 만나 뜨거운 사이가 되고, 유럽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관한 토의를 하고, 자신을 받은 산파를 만나 가족관계를 알아내는 사이에 드디어 독특한 냄새가 진동하는 파리 북역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드디어 결론이 기다리고 있다. 권할 수준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힘들더라도 기회가 생기면 지나치지 말라는 권유 정도는 할 수 있는 책이라, 결론만큼은 일러드리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