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볼트의 선물 - 1976 퓰리처상 수상작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4
솔 벨로 지음, 전수용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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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번째 솔 벨로. 솔 벨로는 처음에 <오기 마치의 모험>을 읽고 얼마나 학을 떼었는지 곧바로 읽을 생각으로 함께 사 둔 <허조그>를 다섯 달 동안이나 먼지만 쌓게 만들었던 적이 있다. 그랬다가 <허조그>가 참 재미있어서 원래 계획에 의하면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을 솔 벨로를 연달아 찾게 만들었지 뭐야? <비의 왕 헨더슨>과 <오늘을 잡아라>. 그리고 눈에 띄기만 하면 솔 벨로는 무조건 읽겠다고 작심까지 했다. 그러다가 문학동네에서 이 책을 다시 찍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어찌 망설임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대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첫빠따로 읽었다. 어휴, 솔 벨로의 거침없는 수다라니. 즐겁게 지긋지긋한 사흘 반이었다.


  솔 벨로의 입심은 초장부터 현란하다. 극을 견인하는 등장인물은 화자 ‘나’ 찰스 시트린, 유대 이름으로 처키 치트린. 위스콘신 촌놈으로 대학에 다니다가 1930년대에 혜성처럼 등단한 20세기 첫 번째 아방가르드 작가 폰 험볼트 플라이셔의 담시집을 읽고 홀딱 반해 무작정 그를 만나기 위해 뉴욕에 가 주당 3달러짜리 방에 머물며 ‘풀러’라는 선술집에 일자리를 얻은 인물이다. 세월은 무상한 것이라 1940년대 후반에 이르면 과작의 시인 험볼트의 명성은 점점 작아지다 결국 달팽이 지나간 길처럼 어느새 자취도 없어진 반면 ‘나’ 찰스 시트린은 50년대 들어 연극과 영화 버전으로 크게 히트한 <폰트렌크> 덕택에 큰 돈을 만지게 되었다. 험볼트가 이 꼴을 보니 “배알이 뒤틀릴” 수준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심기가 좀 불편하지 않았을까? 자기하고 한 번 말이나 해볼 생각으로 뉴욕으로 왔던 꼬맹이가 이리 크게 성공했으니. 게다가 점점 조증과 울증의 교차 공격을 받기 시작한 험볼트는 이렇게 꼬아댄다.


  “찰리 시틀린을 봐. 위스콘신주 메디슨에서 와서 우리집 문을 두드렸지. 그런데 이젠 백만장자가 됐어. 대체 어떤 작가 어떤 지성인이 그런 큰돈을 벌겠나? 케인스? 그래. 케인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지. 경제학 천재에다 블룸즈버리의 왕자였지.” 험볼트가 말했다. “그는 러시아 발레리나와 결혼했어. 돈은 따라왔고. 그런데 시트린이 대체 뭐라고 그렇게 부자가 됐나? 우리는 가까운 사이였어. 그런데 그 친구는 어딘가 좀 꼬인 데가 있어. 그렇게 돈을 벌었는데 왜 구석에 틀어박혀 지내? 시카고에는 왜 간 거야? 정체가 밝혀질까봐 겁이 난 거겠지.”  (p.8~p.9)


  험볼트는 원래 뭐든 다 가진 남자였다. 금발의 미남이고 체구가 크며, 진지하고, 재치있고, 박식한 인물. 헝가리계 유대인 이민자 아버지가 사업에 성공해 큰 부자였으나 대공황을 만나 가진 것 모두를 파산하고 얼마 안 지나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갑자기 맨땅에 처박히긴 했지만. 천재적인 문학적, 시적 영감으로 적어 나간 담시가 공전의 히트를 해 시대의 총아로 부상한 거였다. 그는 ‘나’ 찰스, 찰리를 “꽤 잘 생긴 친구, 좀 약은 편이고 일찍 대머리가 될 것 같은데 감정이 풍부해서 문학을 사랑하고 감수성이 있는” 젊은이로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잡지에 서평을 쓰는 일자리를 구해주기도 했다.

  그의 전성기는 10년 정도로 끝났다. 원래 작품 수가 많지 않은 과작의 시인이라는 한계를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소수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인정받다가 그것으로 종 친 예술가. 그는 1940년대 말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반면, ‘나’는 50년대 초에 큰 돈을 벌게 되어, 험볼트는 바로 이 돈 때문에 ‘나’에게 반감을 갖게 된 거였다. 게다가 말년에 접어들어 엄청난 우울감에 시달려 결국 정신병원을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들락거렸다는 건, 들어가 있을 때가 있고, 나와 있을 때가 있다는 말인 즉, 병원 밖에 있을 때는 꼭 ‘나’와, 정작 ‘나’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백만달러의 재산을 신랄하게 야유하는 것에서 재미를 찾았다. 그러니까 ‘나’의 입장에서 험볼트를 정의하자면, 예전에 신세를 진 적 있지만 이젠 완전히 “진상”이다, 진상. 그렇다고 내놓고 막 대할 수도 없는. 대강 이해 가시지?

  인간이 망가지면 참으로 다양한 방면으로 망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험볼트도 예외가 아니다. 일찍이 미국의 빈민가에서 안티 크리스트가 뛰쳐나오리라 생각한 미국 문학계에서 험볼트가 나타나 신사처럼 행동하고 매력적인 작품을 쏟아내 콘래드 에이킨, TS 엘리엇, 아이비 윈터스 등이 호평을 받았던 시절엔 생각지도 못할 망나니가 되어 버렸다. ‘나’의 작품 <폰 트렌크>의 연극 공연장 앞에 자신의 후원자 다수와 피켓에 머큐로크롬으로 붉게 “이 연극의 원작자는 배신자다!”라고 쓴 채 연좌농성을 하기도 하고, 친구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몸집이 크고 피부가 희면서 아름다운 아내 캐슬린을 윽박질러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퇴장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지만, 차를 몰고 오다가 핸들을 잡지 않은 팔을 휘둘러 캐슬린의 눈두덩을 시퍼렇게 염색시키는 지경까지 갔으니, 이걸 어쩔꼬? 며칠 후, 캐슬린은 프랑스 제과점에 간다고 나가서 다시는 험볼트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텍사스 시골로 가서 티글리 씨와 재혼해 살다가, 두번째 남편이 죽고나서야 다시 ‘나’와 상봉을 할 때는 이미 험볼트도 세상에 없었다.


  뉴욕에 도착해 오전에 재비츠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과 함께 해안경비대 헬리콥터를 타고 뉴욕 상공을 비행해 센트럴파크 태번온더그린에서 열린 정치인 오찬에 참석했다가 밖으로 걸어나온 ‘나’는 우연히 그를 본다. 벨라스코 극장의 모퉁이를 돌면 바로 나오는, 거의 허물어지는 수준의 일스컴 호텔 앞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험볼트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기색이 완연했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한 채 병들고 지저분한 행색으로 막대형 프리첼을 점심으로 먹고 있었다. ‘나’는 주차된 차 뒤에 숨어 그를 지켜보았고, 결코 다가가지 않았으며 곧 자리를 떴다. 다음날 아침 ‘나’가 사는 시카고행 727 제트기 안에서 <타임스>에 실린 험볼트 사망 기사를 읽었다. 그는 새벽 세 시쯤 쓰레기통을 비우러 나가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으며 곧바로 시city의 시체안치소에 들어갔는데, 안치소에 시poetry 읽는 사람이 없는 바람에 무연고자 신분으로 안치되었다.

  마지막 날 험볼트를 본 일, 이건 ‘나’ 찰스 시트린에게 작지 않은 회한을 주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냥 넘어가자.


  근데, 솔 벨로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가운데, 혹시 정상적으로 이것저것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인내해서 짜증나는 일 참아가며 보통 사람처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는 커플을 혹시 보신 분 계시면 거수.

  ‘나’ 찰리 시트린의 첫사랑은 나오미 루츠였다. 위스콘신 살 때 고등학교 동창생. 이때부터 찰리의 머리 구조는 보통의 고등학생들과 달라, 갑자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넘나들기 시작해 쾨슬러, 사르트르, 비트겐슈타인을 망라해버리니, 참 나, 이런데도 왕따를 당하지 않았다는 게 기적일만큼, 도무지 시내의 모든 고등학생과 교사를 통틀어도 찰리와 대화 가능한 인물을 구할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다. 찰리와 나오미는 그런 거 말고 나머지 부분에 관해서만큼은, 그러니까 1940년대 연애하는 하이틴이 겪는 모든 과정은 알뜰하게 밟아가며, 찰리는, 겁도 없이 나오미와 남은 생 전부를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나오미는 다른 남자를 골라 홀라당 결혼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하마터면 죽음을 부를 수도 있었을 찰나에 기적적으로 나오미의 딸이 등장해 다시 연락이 닿아 만나 확인해본 바, 나오미는 구름 꼭대기쯤에서 내려오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오리무중의 언설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평생 이런 이야기만 듣고 살다가는 나이 서른도 되기 전에 요실금이 올 거 같다는 공포에 휩쓸려 찰리가 뉴욕으로 험볼트를 보러 간 사이에 후딱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리고 만 거였다.

  이어서 애칭 ‘데미’라 불리는 애나 뎀스터 퐁벨이라는 좋은 집안의 아가씨와 깊고 깊은 연애를 했다. 데미는 ‘나’가 <폰 트랜크>의 대성공이라는 기회를 얻어, 이제야 아버지에게 ‘나’를 남편감으로 소개할 수 있겠다 싶어 <폰 트랜크>의 기사나 화보 같은 걸 스크랩해서 당시 투자를 위해 베네수엘라에 출장계획이 있던 아버지와 함께 날아가다가, 그만 공중폭발로 부녀가 동시에 생을 접었다. ‘나’ 찰스는 당연히 시신이나마 찾고자 베네수엘라로 갔지만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언젠가 장난 비슷하게 교환했던 서로의 백지수표에 험볼트가 $6,763.58의 금액을 써넣고 이를 현금으로 찾아가버렸다. 당시 젊은 찰리 시트린에게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험볼트가 평생에 걸쳐 악담을 할 만큼 큰 돈을 벌기 시작할 때, ‘나’ 찰리 시트린은 괜찮은 신교도 집안의 아가씨 데니즈와 혼인을 한다. 데니즈와의 사이에 딸 둘을 낳고 잘 사는 듯하다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솔 벨로의 주인공이라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포기해야 마땅한 전례를 따라 갈라섰는데, 데니즈는, 유대인 주제에 감히 나와 이혼을 하려고 해, 시카고에서 가장 지독한 변호사를 고용해 ‘나’의 전 재산을 홀딱 빨아버리려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데니즈와 이혼 소송중에 새롭게 레나타라는 아들 하나 딸린 돌싱녀와 연애를 하고 있기는 하다. 근데 이 레나타는 ‘나’를 완전히 호구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결혼을 하자고 몇 번 제의를 했지만‘나’ 찰리는 이혼소송이 완전히 다 끝나기 전까지 그러고 싶지 않은 거다. 그리고 사실 알고 보면 ‘나’가 거의 알거지 수준이라는 것도 밝히고 싶지 않다. 솔 벨로의 작품 속 남자들의 삶이 대부분 이렇다. 이걸 재미로 알아야지 뭐.


  다시 첫 애인 나오미 루츠로 돌아가서, 사실 크게 볼 일 없는 나오미 루츠를 소환하는 이유는, 나오미가 찰리 시트린을 도무지 참아주지 못하고 다른 남자한테 시집가 버린 이유가 찰리의 과도한 현학성, 장황한 단어의 사용, 끝도 없는 주절거림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면 정말로 실감난다. 얼마나 말이 많고,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려고 난리를 벌이는지. 나는 당연히 찰리보다 나오미와 비슷한 부류라서, 본문만 744쪽에 이르는 길고 긴 장편소설을 읽으며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경험도 했고, 속이 미식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라인은 누가 솔 벨로 아니랄까봐 재미 만땅인데, 이제 다른 독자께 권하니, 벨로의 사변적 설레발쯤 아무것도 아닌 듯 견딜 수 있으면 가볍게 도전하시고, 아니면 약간의 허들 정도로 여겨 조금 각오를 하시든지, 그것도 아니면 일단 책을 사놓고, 언제든 내가 한 번은 읽고 만다, 날마다 새로운 마음을 가질 지표로 삼으시면 될 듯하다.

  다른 거 다 빼고, 그러면 온 힘을 다해 세계 인텔리겐치아의 지도자가 되기를 추구했으며, 승리에 대한 분석을 믿었고, 시보다 ‘생각’을 선호했으며, 좀더 높은 문화적 가치를 지닌 하위 세계를 위해 우주 자체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던 폰 험볼트 플라이셔가 남긴 선물이 뭐냐고? 정말 선물이 있다. 이제 다른 건 몰라도 경제적으로 다 죽어가는 찰스 처키 시트린을 위한 인공호흡. 그게 뭔지는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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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4-06-12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뱅글뱅글@_@;;; 오늘을 잡아라 읽어볼까 하고 전집에서 빼놓았던 게 언제인지@_@;;; Falstaff님 리뷰로만 솔 벨로를 만나게 될 것 같은^^;;;;;

Falstaff 2024-06-13 06:14   좋아요 1 | URL
<오늘을 잡아라> 빡세지 않습니다. 잘 읽히고 재미도 있습니다. 당연히 명작은 아니지만요. ^^;;
 
부영사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최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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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걷는다 라고 피터 모르간은 쓴다.

  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을까. 길을 잃어야 한다. 모르겠다. 네가 배우게 되겠지. 나는 길을 잃기 위한 하나의 지표를 원한다. (<부영사>, 민음사. 최현무 역. 1984년 8월. p.5)


  그녀는 걷는다, 피터 모건은 쓴다.

  어떻게 하면 되돌아오지 않을 수 있을까? 길을 잃어야 해. 모르겠어. 배우게 되겠지. 나는 길을 잃었다는 걸 알려주는 표시를 원해요. (<부영사> 문학과지성사. 최윤 역. 2024년 3월. p.9)



  “이데아총서” 17번으로 나온 <부영사>가 40년 전에 내가 읽은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이다. 최현무 역의 금속활자본.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다. 2년 후인 1986년에 이용숙은 뒤라스의 중편소설 두 편이 실린 《길가의 작은 공원 / 아반 사바나 다빗》을, 김인환은 유명작이자 우리나라에서 출세작인 <연인>이 <애인>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중단편집 《복도에 앉은 남자》를 번역 출간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책장 저 속에 숨어 있나보다. 못 찾겠다.)



 나는 이 책들을 각각 복학생과 사회초년생 신분으로 읽었는데, 그만 단번에 뒤라스에게 빠져버렸다. 이중에서도 특히 <부영사>. 뒤라스는 읽을 때마다 마음을 완전히 채워주는 포만감이 들지 않고 뭔가 놓쳐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읽은 후에, 눈을 뒤집고 찾아봐도 속을 털어놓을 책 좋아하는 인간은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뒤라스 독후를 이야기하기가 버거웠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하여튼 <부영사> 초입을 더 읽어보자.


  "수많은 경사지가 사방을 가로지르는 광대하게 펼쳐진 일종의 늪지대, 가장 적의에 차 있는 지평선의 한곳을 향해 그녀의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녀는 그렇게 한다. 그녀는 여러 날을 걷고, 경사지를 따르고, 떠나며, 물을 건너고, 곧바로 나아가다가 좀더 멀리 있는 늪지대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 늪지대를 가로지르고 또 다른 늪지대를 향해 떠난다. 여전히 톤레샤프의 평원, 여전히 그녀는 알아본다. 톤레샤프만 따라가면 절대 길을 잃지 않을 거야. 그녀는 엿새동안 걷는다. 배 속의 아이는 점점 더 심하게 움직거린다."


  1984년 여름 이후, 뒤라스의 <부영사>를 읽은 다음부터 내게 똔레샵 호수와 메콩강은 로망이 되었다. 흐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수면을 하고 있으나 흙이 섞인 물이 두려움을 주는 광대한 물의 벌판. 그러나 뒤라스의 거의 모든 것이 낯설었고 서걱거렸다. 하지만 매혹적이었고, 쉽지 않았다. 근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나는 결국 똔레샵 호수에 가볼 수 있었다. 빈 손을 벌리고 관광객을 쫓아오는 어린 아이들과, 쓰레기투성이인 호숫가와, 목에 커다란 뱀을 두른 채 ‘다라이’를 탄 꼬맹이들과, 무엇보다, 더럽고, 더럽고, 더러운 것들이 부유하는 호수 표면에 <부영사>고 뭐고 정이 뚝 떨어져버리고 말긴 했지만, 하여간 로망은 이루어져 버렸다. 한 세대가 지나서 그랬는지, 그만큼 내가 더 낡아져 그랬는지. 탓할 것은 세월 말고 없었다. 습지를 따라 걸어보지도 못했다. 외진 곳을 혼자 걷다 무슨 흉한 꼴을 당할지 누가 알랴 싶어. 현금 많이 가지고 다닌다고 소문이 난 코리언 아닌가 말이지.

  40년의 세월이 결코 가볍지 않다. 나는 거의 새로운 책을 읽었다. 머리 속에 가지고 있던 조각들은 오직 하나, 애를 배고 만 십대 소녀가 가족한테 쫓겨나 톤레샤프 호숫가와 메콩강변을 따라 걷고 걷는 형상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을 뿐이었으면서도 무슨 셈법으로 뒤라스의 대표작을 이야기할 때면 <부영사>를 꼽았을까? 교만해서? 그럴 수도 있지. 되는 대로 막 뱉고 봐서? 그럴 수도 있고. 80년대 중순과 비교해 이제는 다양한 뒤라스가 시장에 나왔고, 독자층도 다양하다. 이를 두고 서강대 불문과 명예교수이자, 전 학과장이자, 천생 선생인 최현무, 필명 최윤은 “뒤라스의 작품 세계가 지닌 예외적∙변방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이제 세계적이 되었다. 다중적 해석을 허락하는 작품 세계와 점점 희박해지는 언어는 오독도 마다하지 않는 다양한 독자층을 만들어냈다. 명성과 이해가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라고 딱부러지게 지적했다. 일찍이 김치수, 김화영과 더불어 소위 프로방스 학파를 이루면서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누보로망을 소개한 최윤의 지적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근데 몇 가지만 짚어보자. 그래도 뒤라스 깨나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이이의 작품은 서걱거리고 낯설어서 마음을 채우는 포만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초기 작품인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읽게 되었고, 처음으로 친근하게 책을 읽으며 소위 별 다섯 개를 매길 수 있었다. 이어서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도. 왜 그럴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라스의 연표를 보면 각각 1950년과 53년에 출간한 것들이다. 이에 반해 <부영사>는 1966년, <모데라토 칸타빌레>가 1958년, <아반, 사바나, 다비드>가 1970년, <복도에 앉은 남자>는 1980년이다. 비록 적장자는 아니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 역시 누보로망 계열의 한 명으로 볼 수도 있는데 (보기도 하는데), 1950년대 후기 작품부터 선을 그어 그러지 않았나 싶다. 만일 이이의 후기작들을 누보로망이라고 하는 걸 허용한다면, 누보로망의 개념처럼 “근대소설의 반항으로의 신소설”답게 독자가 스스로 주어진 텍스트를 자신이 직접 조합하고 추리하는 적극적 읽기를 당연하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독자가 오독을 하든 말든, 작가 또는 역자가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내 의견이다. 믿지 마시라.


  내게 뒤라스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쉼표의 사용이다. 문장 속에 자유로이 널려 있는 쉼표. 쉼표가 나올 때마다 호흡을 같이 하면서 나도 덩달아 한번 쉬고 이어 읽는 과정. 나는 이게 즐겁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


  "그는 어린 시절 음악을 했었다고 말한 다음에, 좀더 분명한 어조로, 지방의 어느 학교로 전학하면서 피아노 수업이 중단되었다고 덧붙인 이후로는,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그녀는 어느 학교였는지, 어느 지방이었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녀는 그가 말하기를 바라는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때때로, 어느 저녁에는 그녀도, 그녀 역시, 이야기한다. 누구와? 무엇에 대해서?" (p. 138)


  악보에는 쉼표가 있어도 그곳에서 숨을 쉬지 않고 다음 쉼표까지 갈 수만 있으면 그냥 건너 뛰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뒤라스는 그렇지 않다. 쉬라고 콤마를 찍어놓은 장소에서 독자는 작가와 함께 숨을 한 번 쉬는 편이 좋다. 무언가 리듬을 느낄 수도 있고, 앞뒤의 문맥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고, 쉬어서 오히려 더 강조하는 것임을 알아챌 수도 있다.

  톤레샤프 호수가를 무작정 걷던 소녀는 길가에서 아이를 낳고, 낳은 아이를 백인한테 떠 맡기고, 영양실조에서 온 것이 틀림없이 머리카락이 다 빠진 상태에서 10년 넘어, 걸어, 걸어, 걸어서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한다. 프랑스 대사관 앞까지. 마음씨 고운 대사부인 안-마리 스트레테르가 문턱에 놓아주는 음식 찌꺼기를 동료 거지,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먹기 위하여. 이때 건물 안에 전 라호르 주재 프랑스 부영사가 있었다. 말이라고는 자기 고향인 듯한 “바탐방”이란 단어 말고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거지 여인이 갠지즈 강변의 캘커타까지 와서 부영사와 대사 부인과 어떤 관계를 만들었을까? 아무것도, 아무 관계도. 그것을 뒤라스는 쉼표가 가득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그녀는 마치…… 긴 직선 끝의 한 점처럼, 실상 별다른 의미 없는 사건들 끝의 한 점처럼 캘커타에 있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잠과 굶주림, 감정의 소멸, 인과관계의 소멸만이 있었던 것일까?

  내 생각에 그 이상이야. 그녀가 사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야. 그녀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p.210)


  이것이 무슨 애니그마인지, 나도 모르겠다. 이 책을 다 읽은 당신 생각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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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6-10 0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데아 총서 갖고 있는데,,, 어느 번역이 좋은가요? 다시 살까말까 고민중입니다. 사도 이데아총서에 있는건 갖고 있을듯요^^

Falstaff 2024-06-10 06:40   좋아요 1 | URL
같은 역자인 걸요 뭐. 그저 최선생이 교정 한 번 더 한 것으로 보시면 될 겁니다. ^^

그레이스 2024-06-10 08:14   좋아요 1 | URL
같은 분이셨나요? 헐 몰랐어요.ㅋㅋ
찾아보니 그렇네요.
최현무는 남자이름, 최윤은 여자이름,,,, 제 편견도 한몫 했네요. ㅎㅎ

Falstaff 2024-06-10 08:17   좋아요 1 | URL
당시에 뒤라스를 번역한 이용숙, 김인환, 다 여성이예요. ㅎㅎ

망고 2024-06-10 1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영사...저는 중3때인가 부모님 서가에 있던 책을 읽었는데 그때는 부영사라는 단어의 뜻도 모르던 때였거든요ㅋㅋㅋㅋ이 책을 읽고 부영사라는 단어를 알게되었습니다. 근데 이 소설 그당시 읽으면서 이해를 하나도 못 했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참 어려운 책이라는 이미지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커서도 손이 안 가던 소설입니다ㅜㅜ폴스타프님 인용하신 문장 읽어보니 어렴풋이 그때의 느낌이 나요. 뭔가 어릴때 맡았던 냄새를 다시 맡아서 반가운 느낌^^

Falstaff 2024-06-10 14:47   좋아요 1 | URL
에휴, 중3에게는 무리지요. 저는 아직도 헤매는 걸요. ㅎㅎ
추억이란 참... 그죠?

stella.K 2024-06-12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첨 들었을 땐 무슨 절 이름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 ㅋ
와, 근데 뒤라스의 초창기 번역본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저는 얼마 전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다른 안 읽을 책과 함께 버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읽을 것 같지가 않아서요. 버전이 옛날 거이기도 하구요.
하루키를 좋아했다면 버전별로 가져도 좋을텐데 그건 제 전문은 아닌지라...
전 벌 받을 거예요. ㅋㅋㅋ

Falstaff 2024-06-13 06:16   좋아요 1 | URL
ㅋㅋㅋ 엽기 스텔라 님. 절 이름 ㅋㅋㅋㅋ
<해변의 카프카> 뭐 버릴 만한 책 아닙니까. 저도 미쳤다고 그걸, 헌책이었기는 합니다만, 돈 주고 사는 만행을 저질러버렸다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벌 안 받습니다. ㅎㅎㅎ

blueyonder 2024-06-15 16:52   좋아요 1 | URL
저에게는 여전히 절 이름처럼 보입니다. ㅋ
 
피아노 조율사
궈창성 지음, 문현선 옮김 / 민음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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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대에서 연극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은 극작가. <남녀에 대한 게 아냐>를 쓰고 연출해 1990년에 “타임스 문학상” 연극부문 최우수상을 받았으니 이 정도면 대박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브로드웨이가 있는 뉴욕 한 가운데서 말이지. 이후 타이완으로 돌아온 64년 용띠 아저씨는 2003년 “유시 프로덕션 박물관有戱制作館”이라는 극단을 만들어 직접 연출가의 길을 걷는 한편 소설과 기타 산문도 꾸준하게 발표했다. 남들은 하나도 하기 힘든데 극작, 소설을 쓰는 명문 국립대만대학 외국어문학과 교수? 삼십대 시절에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정말로 십여 년 극작과 연출을 하다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소설도 쓰기 시작했단다.

  중편소설. 기가 막히게 널럴한 편집으로 본문이 196페이지에 끝난다. 큼지막한 활자에 열아홉 줄로 한 페이지를 메꾼 바람에 반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가 “섬세하다” “아름답다” 같은 형용사를 발산한다. 맞는 말이지만 짧은 분량의 작품인 것을 감안하면 그리 돋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섬세, 감각, 아름다움으로만 치면 궈창성을 능가하는 작가 몇 명을 꼽는데 몇 초, 몇 분이면 충분할 듯. 극작, 즉 무대극을 쓰던 작가답게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데 더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


  두 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린쌍林桑. 3개월 전에 아내가 죽었다. 처음엔 피아노를 연주했다가 바이올린으로 전공을 바꾸어 유학까지 다녀온 20살 연하의 아내 에밀리가 운영해온 음악학원, 사실상 피아노 학원을 정리하기로 했다. 학원 사무실에 앉은 린쌍의 귀에 들리는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3년 전, 성공한 사업가 출신인 린쌍은 결혼 1주년 기념으로 에밀리에게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어 주기로 했다.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기뻐하면서 오직 단 한 명의 청중, 남편 린쌍을 위하여 바이올린으로 <보칼리제>를 연주해주고 레퍼토리에 넣기로 했다지만, 린쌍이 듣기에 곡이 처연해서 생전의 어머니를 연상시키니 연주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연주 곡에는 들지 않았으나 린쌍의 머리에 박혀버린 곡이었다. 그런데 그 곡이 연주할 사람이 없는 2층 연습실에서 들려오고 있는 거였다.

  음악학원의 문을 닫는 날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 하필이면 <보칼리제>. 린쌍의 귀에는 무거운 침잠이 아니라 ‘무게 잃은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알아보니 피아노를 옮기기 전까지 자기 의무를 다하겠다고 마지막 날에도 찾아와 조율 중인 조율사가 연주하는 거다. 연주 실력이 뛰어나 교습을 해보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시간당 1,500 위안의 저렴한 조율비에 만족하는 야구모자를 쓴 남자. 그는 에밀리가 결혼하면서 가져온 뵈젠도르퍼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눈에 힘줘서 다시 소리내 읽어보시라.

  “뵈젠도르퍼.”

  음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여러 작품 속에 잘난 척하고 싶은 작가들이 입 밖으로 내는 피아노는 스타인웨이가 아니라 뵈젠도르퍼라는 걸 안다. 그걸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고, 마치 지나가며 얼핏 봤다는 듯이. 그래서 이 작품 <심금자尋琴者: 피아노를 찾는 사람>에서도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 대신 업라이트가 나온다. 그랜드 피아노일 경우 3억에서 4억은 줘야, 하이엔드는 훨씬 더 많아야 살 수 있을 걸? 당연히 오스트리아 메이드 오리지널. 그러나 이제 야마하가 인수하는 바람에 일본 기업이 됐다. 야마하? 이 책에서도 나오듯이 피아노의 전설 가운데 한 명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말년에 전용 비슷하게 연주했던 브랜드이며 에밀리 어린 시절에 집에서 연습했던 악기다.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역시 린쌍이 에밀리한테 결혼 기념으로 사준 것으로 음악학원이 아니라 저택 거실에 놓여 있다. 에밀리 생전에 조율사가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조율을 해왔다. 다만 린쌍이 여태까지는 조율과 조율사에게 관심이 없어서 몰랐지만. 이렇게 세계 명품 피아노 3종 브랜드가 다 등장한다. 린쌍은 자수성가한 사업가.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인색하다는 것. 그럼에도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선뜻 사 줄만큼 스무 살 어린, 그래도 서른여섯 살이었던 아내가 좋았다.


  그렇다고 이걸 음악에 관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맞지 않다. 물론 음악 이야기가 들어 있다. 다만 음악 이야기를 곁들인 인생, 위에서 <보칼리제>를 듣는 린쌍의 감상처럼 인생의 “무게 잃은 공허감”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음악은 <보칼리제>와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그리고 슈베르트의 D.954와 D.960 소나타 정도 말하고 있으며 작품 자체보다는 연주자, 조율사, 피아노라는 악기, 음악적 재능과 성공의 복잡한 연결고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조율사가 작품을 연구해서 곡과 예정된 연주자의 특성/성향에 가장 알맞은 상태의 음색을 내도록 조율을 하면, 연주자는 조율사가 조정한 건반을 연주할 뿐이란다. 내가 알기로 연주자도 조율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서 자기가 원하는 음색이 나올 수 있게 조율사에게 요구한다.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자의 전속 조율사 정도가 되면 굳이 연주자의 요구를 듣지 않더라도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조건을 알 수 있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작품에 등장하는 조율사는 이제 마흔세 살 정도의 젊지 않은 남자로 탈모증세가 심하고, 커다랗고 볼품없는 귀를 가졌으며, 얼굴엔 십대 시절을 휩쓸고 지나간 여드름 자국이 달 표면처럼 촘촘한 외모를 지녔으나, 음악적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이제 자신의 재능에 대하여 누구도 관심을 두거나 거론하는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하는 비밀이 되고 말았지만. 이이는 어릴 적부터 음악 신동의 천성적 충분조건을 완전하게 갖추었다. 딱 한 가지, 가정 환경을 제외하고. 1958년 중국과의 진먼金門 포격전에서 한쪽 눈을 상실하고 현지 아가씨와 결혼해 3남2녀를 둔 아버지는 타이페이로 옮겨와 불법건물에서 만둣집을 운영했다. 그의 바람은 아들은 사관학교에, 딸은 사범전문학교에 들어가 학비 없이 괜찮은 직업을 갖게 하는 것이었던 바, 피아노 천재성이란 건 아버지 인생에 불효와 배반을 초래할 수 있는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거다. 게다가 음악을 제외한 모든 과목은 평균 이하라서 야간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조율사는 어떻게 대학에 진학했지만 도중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재능이 있는 인간 가운데도 소수만 그것으로 성공할 수 있는 거, 그게 인생이지.


  조율사가 스타인웨이를 조율하기 위하여 린쌍의 집에 들락거릴 때 당연히 에밀리를 자주 보았고, 그리하여 말총머리를 한 남자친구도 본 적이 있었으나, 에밀리는 굳이 조율사를 경계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마흔세 살이 되어도 결혼해본 적 없고, 여자가 있어본 적도 없는 조율사라고 해서 젊은 미인 에밀리에게 관심을 두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췌장암에 걸려 지극한 고통 속에 숨을 거둔 에밀리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린쌍을 보면서, 과연 린쌍도 자기 전처의 사생활을 알고 있었을까 궁금했다.

  이제 사업을 모두 접고 여유있는 말년을 즐길 수도 있는 린쌍은, 조율사의 훌륭한 솜씨와 뵈젠도르퍼와 스타인웨이에 얽힌 추억에 휩싸여 타이완에서의 중고 유명 피아노 판매 사업을 도모한다. 그리고 거의 즉각 조율사를 사업의 파트너로 채용해 일단 월급부터 지급해버린다. 그리고 훌쩍 뉴욕으로 떠난 두 남자. 볼품없는 조율사와 달리 예순이 훌쩍 넘었지만 183센티미터의 키에 짙은 눈썹, 높은 코, 반짝이는 은발 곱슬머리를 가진 린쌍은 뉴욕에서도 에밀리와의 추억이 있었으며, 후회만 절절하게 하게 만든 6년의 결혼생활 끝에 이혼한 전처와 온몸에 문신을 그린 무능력한 아들과 이제 반년도 남지 않은 삶만 부여받은 암환자인 전처의 남편이 있었다. 그리고 린쌍,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 조율사는 감도 잡히지 않는 말총머리의 남자도.

  그렇게 사는 거지. 알면 뭐하고, 모른다고 한들 어쩌랴. 해는 저물고, 바람 불고, 눈보라도 치는 이역만리의 땅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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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6-07 0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마르그리트 뒤라스, <부영사>
수요일. 솔 벨로, <험볼트의 선물>
금요일. 윌라 캐더, <루시 게이하트>

blanca 2024-06-07 0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문으로 읽었으면 좀 달랐을까? 이런 생각 들었어요. 분량도 그렇고요.

Falstaff 2024-06-07 16:12   좋아요 1 | URL
옙. 조금 더 길게 써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ㅎㅎㅎ 그거야 작가 권리니 어쩌겠나 싶더라고요. 오랜만입니다. 반가워요. ^^
 
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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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일본계 종양 전문의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의 딸로 LA에서 출생한 한야 야나기하라는 소설가, 편집자, 여행작가의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본인은 자신을 일컬어 부업으로 소설을 쓰는 잡지 편집자라고 규정한다. 2015년 이후 뉴욕 타임스의 서브 잡지인 티 매거진 T:Magazine에서 일하다가 2017년에 편집장으로 승진했다는데 아직 다니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미국 출판계가 “패션 산업만큼 속물적인 로컬 공동체”라는 그의 말대로 설마 여태 같은 직장에 다닐 수 있겠어? 하여튼 그때 이후로 죽 뉴욕에 살고 있단다. 본업 저널리스트, 부업 소설가로.

  이 책 <리틀 라이프>는 2015년에 출간해서 그해 맨부커상과 전미 도서상 최종 리스트에 올랐고, 서평잡지 “커커스”에서 주는 커커스 상을 받아 세금 포함 5만 달러가 예금통장에 찍혔다. 2016년엔 영국에서 오직 여성 작가한테만 주는 여성소설상을 받았는데 상금이 얼마인지는 모르겠다. 두번째 작품으로 이만 하면 대박을 친 거다. 우리나라엔 출간 15개월 후인 2016년 6월에 시공사를 통해 선을 보여 독자들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물론 소수의 아싸들도 있었다. 나는? 중도에서 약간 아싸 쪽으로 기운다. 그래서 시작부터 과감하게 내 감상을 말하자면, <리틀 라이프>는 포르노다. “포르노” 운운하니까 어떠셔? 혹하지? 변태 같다고? 기다려보시라.


  네 명의 청년이 등장한다. 열일곱 살의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 열여덟 살인 나머지 세 명. 윌럼 라그나르손, 맬컴 어바인, 그리고 장 밥티스트 마리온. 이들은 보스턴 외곽에 있는 대학, 어떤 대학인지 딱 감이 잡히지만 그냥 넘어가자, 신입생일 때 기숙사 룸메이트로 처음 만나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우정을 간직한다. 그냥 보통의 우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 한 편의 핵심 줄거리가 될 만한 대단한 우정,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한 천사일 수 있는 완벽한 우정, 물론 언제나 완벽하지는 않지만 결국 완벽에 수렴하고야 마는 우정을 나눈다.

  윌럼 라그나르손. 스웨덴 이민 농부의 아들. 지적 장애를 가진 형을 잃고 그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을 안고 산다. 부모 모두 세상을 떴다. 당연히 전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형이 죽을 때 지불해야 했던 어마어마한 병원비가 집이며 목장이며,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동산 일체까지 깨끗하게 말아먹어 보통의 미국 소설 등장인물과 달리 부모가 죽어도 땡전 한 푼 건지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바로 그) 명문대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유명하고 견실한 레스토랑인 “오톨란”에서 웨이터를 하는 배우 지망생이(었)다.

  장 밥티스트 마리온. 애칭 “제이비”로 불린다. 아버지가 아이티에서 뉴욕으로 날아와 아이티계 미국인인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제이비를 낳았으나 세 살 때 먼저 눈을 감았다. 공립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어머니는 후에 맨해튼의 마그넷스쿨 교장이자 브루클린 칼리지 객원교수를 역임하며 혁신적인 교수방법으로 뉴욕 타임스 기사에 실리기도 한 유명인사다. 집에 외할머니, 이모 등 여성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았으나 나름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미술학도.

  맬컴 어바인. 세상에 나올 때 입에 은수저를 물고 있어서 산과 의사가 기겁을 했다. 유명 로펌 회사 중역까지 지낸 아버지 덕택에 살아생전 한 번도 돈에 궁해 본 적이 없다. 자본주의 시대에 역시 돈이 최고라서 어려서부터 자유로운 영혼을 즐기며 살았지만 바로 이점 때문에 아버지는 맬컴보다 누나 플로라를 편애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맬컴은 (정체상태의) 일, (존재하지 않는) 연애생활, (정해지지 않은) 성정체성,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다가 건축가로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 이름 “주드Jude.”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지만, 은화 서른 냥에 예수를 팔아먹은 이스가리옷 사람 유다와 이름이 같아 2천여 년간 크게 손해를 본 성 유다 타데오는 “좌절하는 사람”, “절망스러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다. <리틀 라이프>의 주인공 주드는 내가 읽은 소설책 가운데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불운한 별을 타고 태어났다. 수호성인은커녕 좌절과 절망 자체이며, 저 먼 기억 속,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겪은 폭력의 지독한 후유증 속에 평생 지배당한다.

  어느 싸늘한 아침, 주드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 발가벗은 유아의 모습으로 수도원 앞에 버려져 있다. 이를 발견한 수도사, 신부들은 아이를 입양시키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수도원에서 키웠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아이는 자랐고, “주드”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수도사와 신부한테 수업도 받았다. 수도원의 잡일을 하며 사소한 잘못에도 가혹한 체벌을 당했다. 소년 주드는 하필이면 잘 생긴 모습으로 컸다. 하긴 어떻게 생겼어도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주드는 수도사와 신부 몇 명에게 지속적으로 강간과 폭행을 당해 심신이 망가진다. 십대 초기부터 주드는 돌 벽에 자신의 몸을 던져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온실에서 식물을 키우면서 자신을 한 번도 구타한 적이 없는 친절한 말씨의 루크 신부는 소년 주드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역시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며, 예술가, 의사, 학생, 도축업자의 수호성인 루크.

  지옥 속에서 차디찬 벽을 향해 몸을 던지던 주드에게 루크 신부는 자신과 수도원을 탈출하자고 제의한다. 유일한 피난처였던 루크 신부의 뜻을 좇아 고물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주드. 루크 신부는 모텔에 머물며 차마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처럼 가장해 주드의 몸을 판다. 그러면서 틈이 날 때, 주드에게 라틴어를 비롯한 다양한 과목을 가르친다. 적어도 하나는 확실한 건, 학생의 수호성인의 이름을 딴 루크 신부, 에드거 윌못이 훌륭한 교사였다는 점. 윌못은 숱한 성인 남성에게 매춘을 하는 주드가 다시 모텔의 벽을 향해 몸을 던지기 시작하자, 자기 상품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몸에 더러운 색깔의 흠집을 내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게 자해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친절하게, 면도칼로 팔의 근육을 긋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해서 주드는 평생동안 최소한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자신의 팔뚝을 면도날로 긋는 행위를 지속하게 된다. 가른 피부에 흰 줄 같은 새살이 돋고 돋아 촘촘하게 흰 선이 생겼어도 돋은 새 살의 아래를 한 번 더 가르고, 지혈을 하고, 붕대를 감으며 고통을 유지시켜야만 삶을 살 수 있는 주드.

  여전히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 루크 신부를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주드는 고아원에 들어가서도 많은 카운슬러들에게 역시 같은 구타와 강간을 당한다. 견디지 못하고 고아원을 탈출헤서도 그를 기다리는 것은 또다른 강간과 폭력이었으며, 평생을 따라붙는 지독한 폭력이었는데, 그건 불시에 나타나 갑작스러운 경련처럼 나타나는 끔찍한 고통이었으니 역자는 이것을 “삽화”라고 번역했다.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병을 앓는 중, 병의 증상이 위급하게 나타나 일정 시간 지속되는 한 차례의 사건을 의미하는 의학용어.”

  루크 신부가 함부로 말해본 것을 주드가 계시처럼 기억한 대로 열여섯 살이 가까워오는 시절 기적처럼 선한 사회복지사 애너를 만난다. 여태까지 주드가 만난 모든 인간이 악마였던 것과 달리 이제 주드 앞에 “케일럽”이라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천사이거나 천사의 오른편에 앉은 이들만 나타난다. 괜찮은 위탁가정에서의 몇 달을 보낸 다음 보스턴 근교의 대학에 입학하고, 여전히 면도날로 자신의 팔뚝을 그으며, 진정한 우정 속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순수수학 석사과정을 밞으며 뉴욕 지방 검찰청을 거쳐 최고의 로펌인 로젠 프리처드 앤드 클라인에 입사해 소송분과장으로 일한다. 드디어 사랑을 찾았고, 생각지도 못할 만큼 많은 돈을 벌었으나 여전히 마음 속 괴물의 검은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야 야나기하라


  충분하게 감동받을 만한 주인공과 주변인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을 포르노라고 규정하니, 그건 등장인물의 행위를 묘사하는 한야 야나기하라 때문이다. 그는 확실히 “속물적인 로컬 공동체”에서 쓰는 문법으로 소설을 쓴다. 청년 주드가 잘 드는 면도날로 자신의 팔뚝을 섬세하게 긋는 장면. 하이퍼 레알리즘, 또는 포토 리얼리즘 적인 묘사가 연속적으로 창궐하면 이건 소음이며, 공해이며, 춘화이며 포르노다. 처음 팔뚝을 긋는 장면에서 독자는 경악을 하다가, 팔꿈치부터 손목까지의 하박에서 상박의 이두근으로 발전할 때는, 심하다 싶었는데, 이게 연속되면 나중엔 “지루하다”가 된다.

  사랑도 그렇다. “연속되는” 짙은 애무나 지루한 노골적 삽입을 포르노라고 하지, 요즘 시대에 촌편처럼 등장하는 베드씬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사랑의 감정, 이 중에서 상실의 감정도 마찬가지. 작가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간략하게 어필할 수 있을까를 궁리해야 마땅…한 거 아닌가? 작품 속에 ‘페르마의 정리’ 증명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수학자가 증명을 하긴 했는데 여전히 많은 수학자가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기 위해 뇌를 썩이고 있다고. 지금의 증명은 백장이 넘는 A4 용지가 필요해, 이를 대폭 간략한 방법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그런 것을 이해하는 작가가 왜 팔을 긋고, 나중엔 그것도 모자라 허벅지까지 긋는 행위, 사랑의 상실을 앓는 장면을 그리 연속적으로 크레센도, 크레센도, 점증시켜 기어이 포르노를 만들고 마는지 나는 무척 아쉬웠다. 자극적인 장면의 연속이 지긋지긋했다. 나는 밤에 자다가 진짜 꿈도 꾸었다. 젊은 남자가 면도날로 자기 팔뚝을 그어, 쩍 벌어진 붉은 근육 좀 보라고 내게 내미는. 이런 우라질.


  할 말이 여전히 많다. 주드를 둘러싼 사람들. 그저 선하기만 하고 단호하지 못한 인간들. 확실하게 금을 그어버린 선인과 악인의 경계. 이런 등장인물들이 넘치고 넘쳐서 유일하게 제이비, 장 밥티스트, 이이 하나만 그저 사람같이 보였다. 이 말만 보태고, 할 말이 아직도 넘치지만, 이쯤에서 그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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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06-05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본국에서는 울고불고 아주 난리났다고 유튜브에서 그러던데요. 근데 내키지도 않는 포르노문학을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ㅋㅋ 짧으면 또 모를까 겁나 두껍네요...

잠자냥 2024-06-05 10:46   좋아요 0 | URL
엥? 뉘신가 했습니다 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6-05 16:48   좋아요 1 | URL
이 책이...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동아시아를 새삼스럽게 강타하고 있습니다. 온갖 곳에서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SNS 아닐까 싶기는 합니다만. ㅎㅎㅎ 이 작품은 포르노 맞습니다. ^^

잠자냥 2024-06-05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포르노라고 해서 어떤 의미인가 좀 궁금하긴 했어요. 저는 고통포르노, 불행포르노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가 싶었거든요. 1권 읽는 내내 불행포르노라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저는 2권 가서 결국 이 또한 하나의 사랑이야기, 라는 점에서 별점을 높게 주었습니다! ㅎㅎㅎ

Falstaff 2024-06-05 16:51   좋아요 1 | URL
포르노 논의는 당연하고요. 거기에 하나 더 붙여서 작가가 인간을 관찰하는 이분법적 시각에 질렸습니다. 악마 그리고 천사. 정말 작가가 그렇게 믿는다면, ㅎㅎㅎ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여태 헛 산 거 아닌가요?

stella.K 2024-06-05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평점이 좋아서 언떤가 기대했는데 팔님 리뷰를 보니 그냥 가뿐하게 안 보는 쪽으로 넘겨도될 것 같네요. 커버에 머스마가 떡 버티고 있어 저자가 남잔가 했더니 후덕한 여사님이었네요. ㅋ

Falstaff 2024-06-05 16:52   좋아요 1 | URL
오, 저는 아싸, 소수 의견에 불과합니다. 많은 독자가 별5를 던지는 명작일 지도 모릅니다. 그냥 제가 읽기에 그렇더라... 하는 걸로 이해해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론: 도서관 대출이 갑입니다!

젤소민아 2024-06-06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역주행 중이더군요. 난리가 났던데요 ㅎㅎ 리뷰 잘 봤습니다~

Falstaff 2024-06-06 12:58   좋아요 0 | URL
이 책 읽고 틱톡에 눈물 흘리며 우는 사진 올리기가 세계적으로 유행이었나 봅니다. 그게 우리나라 트위터에 퍼져서... ㅎㅎㅎ
 
비빔, 잡탕, 혹은 샐러드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22
장휘 지음, 김우석.김유화 옮김 / 연극과인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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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연극과인간’의 중국현대희곡총서 시리즈 22번째 작품. 이 작품을 검색해보면 82년생 극작가 장휘(張慧)의 데뷔작이라 하기도 하는데 인터넷 정보가 늘 그렇듯 믿기는 힘들다. 장휘는 중국 연극판의 인재 풀pool이기도 한 중앙희극학원 연출학과를 졸업하고 공부를 계속해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도 2007년 이후 지금까지 스무 편에 가까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단다. 우리나라에도 “희곡 우체통 낭독회”나 “서울 연극제 희곡집” 또는 “봄 작가, 겨울 무대” 같은 청년 극작가나 연출가의 창작물 지원 프로젝트가 있는 것처럼 중국에서도 비슷한 기획이 있어서 우리보다 훨씬 폭넓은 지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가운데 한 단체가 굴로우서(鼓樓西) 극장이며, 이 극장의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2021년 9월에 초연해 대성공을 거둔다. 이어 제8회 우쩐 연극제 특별 초청작으로 참가했고, 역자는 이를 “파격적”이라고 했으니 상당한 규모의 축제인 듯하다. 이어서 “신경보新京報” 즉 “시나 뉴스”가 선정한 2021년 중국 10대 연극에도 이름을 올렸으니 굉장한 성공이라고 해도 좋겠다.

  시나 뉴스의 “2021년 중국 10대 연극” 심사위원 가운데 한 명인 듯한 중앙연극아카데미 연극문학과 학과장 펑타오는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키는 세 개의 단절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젊은 연극인들의 (전염병이 창궐하는) 현실에 대한 성찰이다.”라고 말한다. 작품의 제목에 세 가지 음식, 보통의 시민들이 흔히 먹을 수 있는 일상적인 먹거리인 비빔, 잡탕, 그리고 샐러드가 들어 있으니 Covid를 겪는 일반인들의 닫힌 상태를 세 가지 양식으로 그렸다는 것에는 동의하는데, 그렇다고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세 부분으로 똑 잘라서 설명하려고 한 것에 관해서는, 완전한 반대는 아닐지언정 학과장님 하신 말씀이 맞다고 선뜻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변죽만 울리지 말고 스토리를 이야기해보자.


  첫번째 장면의 제목은 쉬슈관(滸墅關). 우리 발음으로 ‘호서관’이다. 등장인물은 등장순으로 남자와 여자. 15년 전에 이혼한 왕년의 부부. 남편의 취미가 고고학 발굴 현장에 가서, 전문가가 아니라 딜레탕트 취미 생활자니까, 적극적으로 학자들과 함께 유물을 발굴하는 건 아니고 잔일을 도와주며, 발굴한 자료를 보고 과거 시대와 인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면서 즐거워한 수준이다. 여자는 이런 남편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부부가 그러하듯 대화가 점점 사라졌다. 과거의 유적지인 쉬슈관으로 탐사여행을 떠난다기에 전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고, 정말로 쉬슈관에 가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뒤를 밟았는데, 기차역 큰 시계탑 아래에서 한 여자를 만나 함께 역으로 사라진 것을 보고나서,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이혼을 요구했던 거였다. 쉬슈관, 호서관은 (맹상군 열전) 식객이 닭 우는 소리를 내 맹상군이 무사하게 빠져나가게 할 수 있었던 함곡관이나 촉한의 수도인 성도를 지키던 면죽관 같은 장대하고 높은 군사용 관문이 아니다. 물품의 이동과 통과에 따라 일정 비율의 세금, 즉 관세를 걷는 상업적 용도의 관이라서 비교적 멀지 않은 과거에 설치되어 크게 고고학적으로 발굴할 것이 없어 보인다. 호서관은 19세기 청나라 때 탐관오리들이 하도 착복을 해 세수가 모자란 것이 국가적 문제가 된 곳이란다. 내가 중국사람도 아니니 믿지는 마시라. 하여간 그렇다는 거다.

  그런데 헤어진 부부가 어떤 일로 15년 만에 한 방, 아니면 적어도 한 공간에 머물게 되었으며 14일 동안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처지에 떨어졌을까? Covid19 시절의 14일 격리조치를 떠올리면 정확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잠복기가 14일이라서 지금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알려면 14일 동안 완전히 격리 생활을 해야 했던 것, 다 기억하시지?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말이지. 나는 읽으면서 도무지 이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15년 전에 이혼하고 여태 따로 살아온 남녀가 아무리 Covid 상황이라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 집에 딱 둘 만 있을 수 있을까? 예전에는 서로 말, 대화 없는 부부였지만 이제 옛 남편이 도망가려 해도 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처지라 어쩔 수 없더라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내는 15년, 아니 150년이 더 흘러도 전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지겹게도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고, 의심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쉬슈관엔 간 건가? 그 여자하고 함께 간 건가? 갔다면 거기서 뭘 했을까? 남편은 미치기 일보직전이 되어 당장 트렁크에 되는대로 옷가지를 쑤셔 넣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결코 현관문을 열지 못한다. 이렇게 단절된 사람들. 하지만 알고 보면,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격리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가 이미 죽은 남자의 혼령을 불러냈든지, 자기 의식 속에서 여전히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남자를 스스로 만들어냈는지 그건 감상자 마음대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장면을 중앙연극아카데미 펑타오 학과장은 “과거”라고 말한 거 같은데, 여자의 생각만 과거이지 처한 상황, 펜데믹이 아니었더라면 여자가 남자를 호출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 같아 현재성을 삭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펑 교수에게 반박하기도 어렵기는 하지만.


  두번째 “잡탕” 장면의 소제목은 “아치阿齊”다. 진짜 이름은 치밍(齊明)이지만 편하게 아치라고 부른다. 아치 역시 갇혀 있다. 어디에? 교도소에. 아치로 말하자면 여태 살면서 돈 버는 일이라고는 너구리를 죽여 가죽을 벗기는 일 딱 하나였다. 갑자기 너구리 가죽 가격이 떨어지는 바람에 한 번에 수백 마리의 너구리 가죽을 벗겨야 하는 시기가 있어서 급하게 임시 일꾼을 구했을 때, 친구 따라 갔다가 눈치 없이 토란 찜닭을 아치 혼자 다 먹어 치우는 바람에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전 처음 짐승을 죽여야 하고 몸이 식기 전에 가죽을 벗겨야 하는 일을. 이것 말고 아치가 하는 건 도둑질이었다. 특히 전기 자전거를 좋아해 가히 전기자전거 전문 절도범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치는 도둑질을 한 다음에 벌판의 풀밭에서 전기자동차를 베고 피로를 풀기 위해 한바탕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다.

  독자가 이걸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면, VR 안경을 쓴 기자가 교도소에 취재 왔다가 아치를 인터뷰한 것. 그러니까 기자와 감옥 안 접견실이라는 한 공간에 있으면서 비록 인터뷰 형식이지만 대화를 하고 있건만, 기자에게 이게 진짜 현실은 아니다. 그저 VR 스코프를 통해 바라보는 가상 현실일 뿐. 공부를 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경쟁 시험을 통해 신문사 기자가 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삶을 사는 기자와, 본업이 절도이며 유일하게 해 본 일이 동물을 죽여 가죽을 벗기는 것이었던 청년은 동시대를 살고 있으되 서로의 사이에는 견고하고 높아서 완벽한 단절, 벽이 있을 뿐이다. 이 벽을 무너뜨리는 일은 서로 공감할 무엇인가를 나누는 일일 터. 교도소에 들어온 것을 일종의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아치는 여전히 수많은 너구리의 목에 줄을 걸고, 졸라 죽이고, 매달고, 한 쪽에 구멍 하나씩 내고, 거기에 손가락을 걸어 당기고, 찢어서 흠 없고 온전한 너구리 가죽 한 장을 손에 든 듯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살고 있다는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체감한다.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도 점점 아치의 도살과 각피 과정에 동의하면서 견고했던 벽은 무너질 수 있었을 것이고, 드디어 관객 앞에서 VR 안경을 벗는다.


  세번째 장면 역시 단절된 공간. 바로 무대다. 무대가 소통의 장소라고? 가끔 아닐 때가 있는데 이 작품의 샐러드 파트가 그렇다. 무엇보다, 언어가 박탈되었다. 세번째 씬의 소제목이 그래서 “무언극”이다.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나타나는 극장 밖의 남자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극장에 들어오고, 공연장에 입장하며, 역시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무대에 오른다. 여기서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건 AI. 연극의 기본은 소통이니 AI와 남자 역시 소통을 해야 하리라. 이들에게 가능한 것은 자판을 매개로 한 화면. 제일 먼저 AI와 남자의 대화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지, 감염되지는 않았지만 발열이 나타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지, 뭐 이런 것들이다. 그러면서 남자를 위시한 인간은 점점 AI에 예속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선 AI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이라서 그런지 예술가들의 AI에 대한 경계 또는 공포 역시 우리나라보다 더 큰 거 같다. 결국 거대한 오르골 위에서 남자와 여자, 즉 인류와 AI가 함께 끊임없는 원을 그리며 춤추는 인형으로 변하면서 지구엔 일식이 시작되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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