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베토벤 : 현악 사중주 전곡집 [8CD]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 부다페스트 사중주단 (Budapes / SONY CLASSICAL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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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58~61년 스튜디오 녹음.
  오랜 동안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를 들어봐야 하겠다는 일종의 부채감을 갖고 살던 적이 있다. 후기 사중주 음반은 과르넬리 사중주단,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40년대 녹음, 바릴리 사중주단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전설적인 이 음반, 모두 여덟 장의 CD에 베토벤의 전곡을 담아 할인가 30,500원에 발매한다는 소식을 이제야 듣고, 생각 하고 말고가 없이 단박에 사서 들었다. 물론 그동안 이 녹음을 구입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가격이 마음 약한 사람 심장마비 걸릴 수준이어서 이왕 40년대 녹음이 있는 바에 조금 기다려보자고 했다가 오늘날까지 왔던 것이다. 그간 음반 구입을 많이 망설여 왔었나보다. 2010년에 염가반으로 최초 발매를 한 것을 10년만에야 알았으니.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이어폰을 꼽고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오중주를 선택하려다 손가락을 잘못 움직여 베토벤의 14번 현악사중주를 들으며 출근을 하고 있었다. 이 때 들었던 음원이 바릴리 사중주단의 녹음. 당시까지 듣기는 가끔 들었지만 남들이 좋다 하니까 그냥 좋은 곡인가 싶었던 것이 갑자기, 고막의 진동을 통해 가슴을 콱 찌르듯이 절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막 50세가 된 추운 날 아침이었다.
  나는, 다른 글도 잘 쓰지 못하지만, 음악을 듣고 느낀 감정을 글로 쓰는 일을 제일 힘들어 한다. 음악 공부를 조금 했으면 약간의 전문용어를 섞어서 어떤 이유 때문에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마음에 와 닿는지 훨씬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내게 그런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문학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나은 것이 대학 2학년 시절까지 교양국어 같은 걸 통해 글을 읽는 방법 정도는 깨우칠 수 있었잖은가. 더군다나 음악이라는 장르는 문학이나 회화, 조각, 무용 등 다른 예술과 달리 자연이나 삶을 모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정서에 호소할 수 있어 현악사중주를 들으며 청자가 느끼는 감정, 감동, 흥분 같은 것을 구체적인 단어로 묘사하는 일이 진짜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이렇게 음악을 묘사하는 단어, 특히 형용사의 부족은 숱한 필자들로 하여금 공허한 수사로 음악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고 하게 만들었다. 단어의 부족 현상에 열을 받은 한 시인이 스스로 두껍고 겁나게 비싼 화려 장정의 책을 낸 바 있으나 허망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지금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이 1958년부터 61년까지 컬럼비아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여덟 장의 CD를 듣고 감상을 쓰려는 순간의 난감함을 고백하려고 한다. 그것도 다른 작품도 아니고 쉰 살에 접어들고서야 비로소 듣기를 허락한 베토벤의 (특히 후기) 사중주에 관해. 음악이란 무엇일까. 악보를 읽는 것만이 진정하게 작곡가와 소통하는 길이다. 우리가 음악이라 생각하고 듣는 것은 작곡가와 청자 사이에 연주자라는 매개가 끼어들어 작곡가가 오선지에 그린 악보를 그들이 해석한 결과물을 듣는 일이다. 그것도 또 녹음을 듣는다면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가 한 번 더 개입을 한 것. 내 귀로 여태까지 들어본 모든 기계는 특별히 현악기의 음색을 완벽 ‘비슷하게’ 들려주지 못했다.
  거기다가 여태까지 가장 훌륭한 녹음이라고 단정하고 지내던 바릴리 사중주단의 베토벤 현악사중주와 극명하게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연주하는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연주를 듣고, 독후감이 아닌 소감을 쓰려하니 여태까지 A4 용지 한 장 분량 동안 변죽을 울리고도 시작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음악을 들은 소감을 쓰는 일이 어렵고, 그것도 가장 유명한 연주단의 두 연주를 비교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벽이 앞을 가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얘기해보자.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58~61년 연주에 비하면 바릴리 사중주단의 연주가 더 말랑말랑하다. 평온하다. 침잠한다. 느리다. 사색적이다. 단색이다. 소박하다. 은은하다. 천상의 기분이다. 곡을 내게 헌정한 느낌이다. 더 1 바이올린 위주라서 비올라와 첼로의 반주역할이 크다. 내가 듣기로는.
  주로 12번부터 16번 사중주와 <대푸가>를 후기 작품으로 구분하고 요즘 내가 제일 자주 듣는 곡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15번 3악장을 연달아 들어보면 이런 의견에 동의하실 줄 믿는다. 물론 호오를 분명하게 이야기해보라고 강요하면 그동안 귀에 익어서 그런 줄은 모르겠으나, 내 취향으로는 바릴리 사중주단의 연주가 더 편하다고 말하겠지만, 확실한 건 부다페스트의 이 음반도 바릴리에게 최고의 자리를 양보할 마음이 조금도 없을 거란 정도로만 이야기하자.
  언제나 음악을 문자로 말하는 건 어렵고 어렵다.

 

부다페스트 사중주단, 베토벤 현악사중주 15번 3악장



  * 이렇게 전곡 녹음을 구입하면 좋은 것이, 여간해 듣지 않는 숨겨진 곡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는 초기 작품 가운데 몇 몇 곡 속에 정말로 “숨겨진” 낭만성이 놀랄 만하다.


  * 음악이란 것이 신기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왜 이 연주가 좋은지 이야기하기는 무척 곤란하지만, 한 번 진짜(라고 청자가 느낀 연주)를 들은 후에 다른 연주단의 연주를 들으면, 그게 주관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단번에 ‘에이, 이건 아니다.’ 하는 감정이 확 든다는 거. 그래서 보편적으로 특정 작품에 관해 소위 ‘명반’이 탄생하는 것일 게다.

 

위에서 얘기한 바릴리 현악사중주단의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집.

나는 전곡이 아니라 개별 CD들로 후기 곡들과 일부 중기곡만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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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2-2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이 앨범 저도 몇 년 동안 보관함에 담아두기만 했는데, 그렇단 말이지요? 올해는 꼭 사야겠습니다. ㅎㅎ (사실 알라딘에서 1년에 한 번 수입 앨범 할인전 할 때 이 앨범은 2만원대에도 살 수 있습니다. 쿨럭;;)

Falstaff 2020-02-27 14:21   좋아요 1 | URL
옙. 이건 정말 물건입니다!
근데... 2만원대... 아, 차라리 듣지 못했으면 좋았을 것을.... ㅋㅋㅋㅋ

oren 2020-02-27 1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음악은 거의 매일 듣고 살지만, 막상 그 음악을 언어로 표현할라치면 언제나 막막하기만 하더군요. 그런데, 그토록 표현하기 힘든 음악도 어떤 이들은 어찌 그리 잘도 표현하던지, 그런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부러워 죽겠더군요.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가운데 14번은 <마지막 사중주>를 본 이후 언제 들어도 가슴을 흔드는 곡이 되었더랬지요. 보름쯤 전에도 어떤 이가 스마트폰으로 그 음악을 듣고 있길래, 참 좋은 음악 들으시네요. 베토벤의 어쩌구 저쩌구 했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고 좋아하더군요.^^

https://blog.aladin.co.kr/oren/6529278

Falstaff 2020-02-27 20:07   좋아요 2 | URL
14번 사중주는 무려 7악장을 한 번의 쉼도 없이 연주해야 하는 난곡이라고 합니다. 듣기엔 후기 작품 가운데서는 말랑말랑하니 좋습니다만 연주자들은 죽어나가는 곡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얘기하신 영화를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렇네요. ^^
아직까지 아쉽게도 전 음악을 잘 표현한 글을 읽어보지 못했답니다. 비극입니다. ㅠ

oren 2020-02-27 20:28   좋아요 2 | URL
니체만 하더라도 그 어떤 음악평론가 못잖게 숱한 음악가들과 그들의 음악작품에 대해 예리한 글들을 많이 남겼던 듯합니다. 바그너를 비롯,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슈만, 쇼팽, 리스트, 드뷔시, 비제, 롯시니 등등의 음악을 어쩌면 그토록 예리하게 파고드는지 저는 정말 감탄을 거듭했더랬습니다.
* * *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바꾸어보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가득 차 먼지 속에 가라앉을 때 상상력을 가지고 물러서지 말라. 그러면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 자의 혹은 ˝파렴치한 유행˝이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고하고 적대적인 모든 구분들이 부서진다. 이제, 세계의 조화라는 복음에서 각자는 자신의 이웃과 결합되고, 화해하고, 융해되어 있음을 느낄 뿐만 아니라, 마치 마야의 베일이 갈가리 찢어져 신비로운 ‘근원적 일자(一者)‘ 앞에서 조각조각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웃과 하나가 됨을 느낄 것이다. 인간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현한다. 그는 걷는 법과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춤추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가 마법에 걸려 있음이 그의 몸짓에 나타난다. 이제 짐승이 말을 하고 대지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것처럼, 그로부터 초자연적인 것이 울려 퍼진다. 그는 스스로를 신으로 느끼며, 마치 꿈속에서 신들이 소요하는 것을 본 것처럼 그 자신도 황홀해지고 고양되어 돌아다닌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예술 작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원적 일자의 최고의 환희를 위하여 전체 자연의 예술적 힘은 여기 도취의 소나기 아래서 스스로 나타난다.

- 니체,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장

Falstaff 2020-02-28 09:05   좋아요 2 | URL
니체 역시 음악을 이야기한 것이라기 보다, 음악을 매개로 자신의 철학을 설파했습지요. 그냥 니체의 문장과 특유의 철학적 논의, 단문을 엮어서 자신만의 서사를 만드는 일 같아서요.
저는 한 번도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디오니소스를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을 추앙한 환희의 송가를 디오니소스와 연결시켜 들을 수 있는 철학자, 신학자는 망치를 내려쳐 신을 살해해버린 니체 말고는 없을 겁니다.
니체가 평한 바그너도 그렇고 비제도 그렇고, 그는 음악을 자신의 철학을 위한 한 제재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만 제가 잘 알지 못해서요. 니체도, 음악도.

* 민음사 역사서의 교정 교열에 관한 건, 맞춤법 이야기가 아니고요,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정을 봐서 사실 내용이 엉망이 된 일을 이야기했던 겁니다. 주로 나라 이름 때문에요. 秦과 晉, 衛와 魏 이런 것들이요. ^^;;

oren 2020-02-28 12:34   좋아요 2 | URL
니체가 음악을 메타포로 철학을 설파했다는 말씀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단순히 자신의 철학을 위한 재료로서 음악을 이야기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었고, 직접 작곡까지 할 정도로 ‘음악예술‘에 대해 깊은 조예를 지녔던 인물로 보입니다. 저는 언젠가 우연히 ‘니체가 작곡한 음악‘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유럽에서는 니체의 음악작품을 연주하는 음악회가 심심찮게 열린다고도 하더군요.

혹시나 해서, 조금 전에 ‘니체와 음악‘에 관련된 책은 나온 게 없나 살펴봤더니, 그럴 듯한 책이 한 권 나와있네요. 알라딘 책 소개에 나와 있는 내용 일부를 덧붙입니다.^^

* * *

니체가 크게 은혜를 입은 중요한 ‘스승’ 쇼펜하우어가 그랬듯이, 니체도 음악적 메타포를 자주 동원한다. 건반, 끈의 진동, 불협화음, 화성, 선율의 메타포…… 이 메타포는 그의 말을 꾸며주고 설명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음악은 생(生)의 메타포다. 태초의 인간과 문명이라는 화성(和聲)의 마그마, “심히 불안을 자아내는 근음(根音)”에서 떠오르고 차츰 분명해지는 선율에서 “자유로이 제멋대로” 나아가며 의욕과 “인간의 완전한 의식의 욕망”을 우리가 알아본다면, 음악은 생이 마땅히 취해야 할 모습의 메타포다. 그 음악이 정점에 도달할 때, 인류가 때때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보게 되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 “강력한 개인성”은 음악을 이루는 모든 구성 요소의 “지속화음”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

따라서 우리는 니체가 자기 글을 악곡과 동일시하여 『도덕의 계보학』을 3악장짜리 소나타라고 말할 때,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일종의 교향곡이라고 말하면서 이 책 첫 권을 베토벤 교향곡 9번 의 첫 악구에 비유할 때, 이를 단순한 음악 애호가의 꾸밈이나 겉멋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아마도 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음악에만 해당할 것이다”라고 쓸 것이다. 니체는 확실히 “들음(聽)의 재생”을 전제한다. 그러나 니체는 늘 깨어 있는 귀로 읽어야 하고, 이건 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읽기는 무엇보다 듣기이기 때문이다.

- <니체와 음악> 중에서


* 민음사 역사서의 교정 교열에 관한 말씀이 그런 뜻이었군요.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낙천주의자의 딸 - 유도라 웰티의 소설
유도라 웰티 지음, 왕은철 옮김 / 토파즈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을 읽고 웰티의 글이 마음에 들어 이미 품절을 넘어 절판 상태에 접어든 이 책을 헌책방에서 사 읽었다. 읽고 나서 생각하니 그렇게 하길 잘했다. 마음이 흡족하다. 웰티가 <낙천주의자의 딸>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은 것이 1973년, 64세. 이이의 본령은 단편소설에 있다고 책을 번역한 왕은철이 역자해설에서 말한 바, 길지 않은 장편인 이 책도 모두 네 부部로 나누어 각기 한 장면에 초점을 맞추는 형식을 취했다. 독자는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용이 서로 연결되는 연작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 작품의 매력은 소설의 형식에 있지 않고 주인공 로렐 핸드를 둘러싼 가족, 남편,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과 사람이 살아가며 겪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침착하고 쓸쓸한 시각으로 그려낸 것에 있다.
  세상에 누가 있어서 낳고, 자라고, (외)조부모를 떠나보내고, 부모를 여의고, 배우자를 먼저 보내는 일을 겪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웰티가 묘사한 주인공 로렐의 한 살이는 결코 특별하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고, 심지어 소설적이지도 않다. 아니, 아니. 먼저 작품의 스토리를 대강이나마 훑어보는 게 좋겠다.
  1부의 중요한 등장인물은 은퇴한 판사이자 전 시장, 71세의 메켈바 씨. 키가 크고 몸이 무거운 판사는 한 마흔 살 정도겠지만 더 젊어 보이기도 하는 아내 페이와 함께 집이 있는 미시시피 주 마운트 세일러스에서 기차를 타고 뉴올리언스의 안과전문의 코트랜드 씨를 방문한다. 한쪽 눈에 중요한 문제가 있으며 다른 쪽 눈은 당시만 해도 특별한 치료/수술법이 없었던 백내장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무남독녀 외동딸이자 과부인 로렐 핸드 역시 밤비행기를 타고 시카고에서 도착한 터. 안과의 코트랜드 씨는 고향이 판사와 같은 마운트 세일러스이며 그의 누나가 아직 고향에서 학교 교사를 하는데, 상처한 판사의 전처이자 로렐의 친어머니인 베키가 시집와서 제일 먼저 사귄 친구였던 터. 의과대학을 다니던 코트랜드는 학업 중 대공황기를 맞아 학교를 때려치우려 궁리를 할 곤고했던 시절, 판사를 지내던 메켈바 씨가 그깟 공무원 봉급이 몇 푼이나 되겠느냐만 코트랜드 씨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경제적으로 도와준 은인이기도 하다. 이런 코트랜드가 진료를 해보니 당장 망막수술을 해야 하고, 성공리에 수술을 한다는 전제로 약간의 시력을 가질 수 있다고 진단을 내린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환자는 꼼짝 말고 몇 주를 견뎌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 왔을 때, 뉴올리언스 시내는 화려한 축제를 시작하고 철없는 아내 페이는 절대 요양을 취해야 하는 남편에게 바가지 득득 긁으며 자신을 위해 몸을 움직여보라고 패악질을 부린다. 물론 페이는 늙은 남편이 누워 있기 시작했을 때부터 더 이상 살기를 희망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하필이면 환자의 팔을 끌어당기며 포악을 쓰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과부가 되어버린다.
  2부 부터는 간단하게 넘어가자. 2부는 제일 많은 분량으로 되어 있다. 시신을 마운트 세일러스에 있는 집으로 옮겨와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룬다. 다른 가족이 없다고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의붓딸 로렐에게 한 말과 달리 이웃 불럭 소령이 수술을 받기 바로 전에 판사가 가르쳐준 대로 페이의 어머니, 오빠, 조카 등을 불러 이들도 장례식에 참석을 하고, 페이는 점잖은 동네 예절을 깡그리 무시한 채 말 그대로 교양 없이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페이의 가족이 장례식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자 페이는 그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로렐이 집을 떠나는 날에 돌아와 더 이상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게 일정을 잡는다.
  3부는 집에 남은 로렐이 눈에 이상이 있어 앞을 못 보게 된 채 세상을 마감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어머니와 외갓집, 아버지와의 관계를 추억한다.
  4부는 휴가 중에 결혼하고 다시 해군에 복귀하자마자 가미카제 특공기의 공격을 받아 시신도 찾지 못한 남편을 기억하고 사람 사는 일에 대해 조금 생각하다가 집을 떠난다.
  내가 이렇게 일일이 작품의 스토리를 설명하는 건, 스토리를 이야기해봤자 진짜로 책을 읽을 분의 감상에 거의 방해를 주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 그러나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읽은 심사관들이, 다른 심사관도 아니고 미국 내에서는 방귀 깨나 뀐다는 퓰리처 상 심사관들이 <낙천주의자의 딸>에게 선뜻 상을 안긴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웰티는 작품을 통해 각자의 주변에 있는 것들과 모든 ‘나’의 관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것을 권하고 있다. 가까운 사람, 예를 들어 부모-자식, 부부, 친척, 친구, 이웃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배려해줄 뿐만 아니라 가끔은 자신도 알게 혹은 모르게 상처를 주는 존재들이란 것. 자신의 호의가 남에게는 무례로 보일 수도 있고, 분명히 나는 비아냥거렸는데 그걸 칭찬으로 접수해 고마움을 표시할 수도 있는 것이 인생,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관계이다. 그리하여 유도라 웰티가 이 잔잔하고 깔끔한 소설 <낙천주의자의 딸>에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선언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만나고 삶을 계속하는 것에는 사랑만이 아니라 미움도 함께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이 책의 미덕은 아버지의 죽음이란 흔한 주제에서 흔하게 보듯이 그리움, 슬픔, 우울, 후회 같은 싸구려 감상에 조금도 빠지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을까. 알수록 매력적인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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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2-25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도라 웰티, 몰랐던 작가의 좋은 작품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움으로도 삷은 계속된다. 아니 계속 한다 삶을. 주변에 있는 모든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는 문장에 바로 중고 구매했어요. 단편집도 같이 ^^

Falstaff 2020-02-25 09:2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언제나처럼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
저도 단편집 읽고 곧바로 헌책방 뒤진 거랍니다.

잠자냥 2020-02-2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도라 웰티 단편선에서 몇 작품 읽었는데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더 알고 싶어지는 작가더군요. 저는 다행히 검색해 보니 집 근처 도서관에 이 책이 있더라고요. 도서관 다시 문 열면(코로나19 때문에 문 닫았어요 ㅠ_ㅠ) 꼭 빌려서 보겠습니다.

Falstaff 2020-02-25 10:07   좋아요 0 | URL
헉, 도서관도요?
저도 오늘부터 마스크 쓰고 사무실에 앉았을려니 아주 힘드네요.

2020-02-25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0-02-25 10:37   좋아요 0 | URL
네 확진자 동선에 있어서 닫은 건 아니지만 미리 알아서 예방차원에서 2월 내내 닫았는데....지금 사태로 보니 왠지 3월도 쉽사리 열 것 같지는 않네요.

2020-02-25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25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20-03-12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는 여성 예술가의 습관(?)에 대한 책에서 마침 유도라 웰티 챕터 읽고 있었는데요?!?!!
그녀는 아침에 파자마 입은 채로 일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16살 때부터 산대요.그녀의 이상적인 하루는 손님이나 방해 없이 아침 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그후엔 버번에 물을 섞어 마시고 점심은 샌드위치에 콜라라고 합니다. 저도 점심 메뉴를 샌드위치로 ....

Falstaff 2020-03-12 12:37   좋아요 0 | URL
나이먹은 웰티겠군요.
이이는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엄마하고 함께 살면서 엄마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애를 많이 썼다고 하더라고요. 변변히 연애 한 번도 못한 채로요.
점심 맛나게 드셔요. 전 오늘 급식으로 순대국이 나왔더군요. 신기하게도 순대만 들어있는 순대국은 난생 처음입니다. ㅋㅋ
 
님의 침묵 범우문고 282
한용운 지음 / 범우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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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수 없어요>가 교과서에 실린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때 달달 외우라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국어교사가 새된 목소리의 아주머니가 돼서 두드려 맞지는 않았는데, 시를 배우면서 공즉시색, 색즉시공 어쩌고저쩌고 했던 걸 아주 오랜 세월 잊고 지내다가, 요새 시인들이 쓰는 시의 개인적 절망의 암호화에 적응을 못하기도 했고, 이제는 우리의 고전이 된 예전 시들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기특한 자각도 들고 해서 본격적으로 우리 시를 읽어보기로 결정해 처음으로 고른 시집이 《님의 침묵》이다.
  만해의 시를 교과서에서 배울 때, 그이의 님은 잃어버린 나라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으며, 진짜로 시인의 애인일 수도 있다는 걸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진짜 시집 《님의 침묵》을 열어보니, 시인이 쓴 서문, 만해는 이걸 “군말”이라고 했는바, 엇다 모르겠다, 멋있고 짧은 글이니 그대로 옮겨보기로 하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옛말이 정답다. ‘기루다’가 무슨 뜻일꼬? ‘그리워하다’의 고어다. ‘장미화’? 나이든 가수의 이름이 아니라 그냥 장미꽃. 하여튼, 국어 교사가 만해의 시를 연구해 학생들에게 그리 가르쳐준 것이 아니었다. 만해가 일찍이 시집을 펴내면서 자신의 ‘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해 놓은 걸 그냥 전달만 해준 거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 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시 <님의 침묵>의 부분이다. 대가리 커지고 이 시를 떠올릴 때마다 제일 웃기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 왜 첫 키스가 날카로울까, 였다. 도대체 첫 키스를 누구하고 한 거야? 뭐 다들 해보셨지? 순전히 내 경우만 고백하자면, 당시 서로가 그게 첫 키스였던지라 그걸 어떻게 하는지는 유전자적 지식으로 알긴 하지만 둘 다 너무 서툴러서 기억나는 거라고는, 하고보니, 주둥이 부근이 온통 침 범벅이 된 것 밖에 없어서, 아 참, 이런 걸 평생 하고 살아야 하는지 어린 마음에도 마땅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런 이유로 시인이 극강 프로페셔널하고 첫 키스를 한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시인과 상대방이 극도의 구강건조증 환자여서 입술과 입술이 맞붙을 때 불꽃이 번쩍, 했을 거라고 나는 선언한다.
  근데, 진짜로 시집 《님의 침묵》을 읽어보면 왜 보통의 우리가 만해 한용운, 하면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만 알고 있는지 단박에 눈치 챌 수 있다. 시들의 거의 대부분이, 한 98퍼센트 정도가 ‘님’ 또는 ‘당신’에게 바치는 헌사이며, 시에 사용한 시어와 문장들도 비슷한 정조를 갖고 있어서 모두 88편의 시가 그게 그거인 것처럼 읽힌다. 아, 안다, 알아. 그동안 시대가 많이 바뀌어 독자가 발랑 까져서 만해의 구도와 독립을 향한 염원 같은 숭고한 헌사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는 건. 근데 읽는 인간이 그렇게 느끼면 그걸로 끝이지 뭐. 혹자는 <님의 침묵>이나 <알 수 없어요>보다 <복종>을 더 좋아한다는 사람도 만나볼 수 있기는 하다. 나는 그런 인간의 속뜻을, 자신은 만해의 다른 시도 알고 있다고 폼 잡는 거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집을 읽으면서 누구나 다 알고 좋아하는 시 두 편 말고 하나를 더 건졌다. <두견새>라는 이름의 시인데, 두견이는 우리말로 접동새를 뜻하며 당시 유식하게 한문으로 하면 불여귀(不如歸)라 했다. 이름 좋다. 또 다른 말로 귀촉도(歸蜀道)라고도 한다. 혹시 항우에 밀려 잔도를 따라 촉나라로 들어가며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한탄하던 유방 일당이 밤새 한 잔 술에 시름을 달랠 때 접동새 울음소리가 들려 이런 이름이 붙은 거 아닐지 몰라? 하여간 그런데, 예전에 자주 접대를 받던 비싼 술집 이름이 취불귀(醉不歸)였더랬다. 발음이 비슷해 자주 간 편인데 뜻도 멋있었다. 취해 돌아가지 못하리. 그렇게 비싼 술집은 내 돈 내고 간 적도 없지만, 남의 돈이라도 진짜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인종이라 좋은 기억은 아니다. 엇, 독후감 쓰다 보니 또 나하고 자매결연 맺은 도시 삼천포로 빠졌다. 어쨌든 마음에 든 시 <두견새>를 소개하며 독후감을 마감한다.



  두견새는 실컷 운다.
  울다가 못 다 울면
  피를 흘려 운다.


  이별한 한(恨)이야 너뿐이랴마는
  울려야 울지도 못하는 나는
  두견새 못 된 한을 또다시 어찌하리.


  야속한 두견새는
  돌아갈 곳도 없는 나를 보고도
  ‘불여귀 불여귀(不如歸不如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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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2-24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의 침묵> 소리내어 읽기를 쑥스러워했던 때가 있었네요 ^^
두견새라는 시를 오랜만에 여기서 다시 만나요. 누구에겐가 적어서 보여주고 싶은데 그 누구가 없어 안타까웠던 때가 있었고요.

Falstaff 2020-02-24 16:0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근데 교과서에선 <님의 침묵>을 소개만 했지 나오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워낙 오래 전이라 가물가물 합니다만.
<두견새>는 처음 읽어보는 건데요, 이거 필이 팍 꽂히더라고요. 문학소녀셨군요. 저도 요즘 시 읽다가 이런 시 읽으니 갑자기 눈 앞이 환~해지는 것이, ^^;;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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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들어서 읽기도 전에 바짝 쫄아 구입을 망설였던 책이 세 권 있었다. 헤르만 브로흐의 <현혹>, 막스 프리슈의 <슈틸러>, 그리고 이 책. 사실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브로흐를 제일 겁냈었고 비오이 카사레스는 약간 머뭇거린 정도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아, 비오이 카사레스를 읽기 위해 닷새가 필요했다. 464쪽에 불과한 책을. 이 책을 읽기 위해 독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경구는, 그까짓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다짐까지 해야 하는 말이 있다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보통의 남자들이라면 군역을 치루면서 수도 없이 들은, “졸면 죽는다.”는 거. 비오이 카사레스를 제대로 읽으려면 중단편에 불과한 분량이긴 하지만 각 편을 시작하는 문장에서 끝마치는 문장까지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하면 얄짤없이 첫 페이지로 다시 돌아와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그가 쓴 <모렐의 발명>을 읽고 탈옥한 사형수가 도망친 외딴 섬에 모렐이란 이름의 테니스 선생이 발명한 영상의 비밀, 헛갈리는 진짜 라틴 아메리카의 아몰랑 주의 소설의 진수를, 이해했다는 말은 하지 말자, 경험한 후로 다시는 함부로 비오이 카사레스를 읽으려 덤비지 말자고 각오한 것이 떠올랐다. 이 중단편집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에 실린 작품들은 등장인물의 단언을 빌어 시간도 변한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개떡으로 알고, 빛의 속도 역시 부정한다. 이게 말로 하기는 간단해도 시간과 빛의 속도를 부정한다는 건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틀을 해체하겠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이미 죽은 사람들도 어떠한 형태를 갖추었더라도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쉽게 얘기해 시공간 파괴 작업. 위에서 언급한 <모렐의 발명>에서 영상 속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나’의 영혼 또는 실체로서의 몸까지 영상에 흡수되듯이 이 책에서도 비슷한 차원의 것들이 모든 작품 속에 등장한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영혼의 문제. 예를 들어 편지를 날라주는 비둘기, 전서구의 뇌를 열어 방연석이 첨가된 무선통신 장치를 해놓으면 비둘기가 훨씬 더 효율적인 집배원 역할을 하지 않을까, 라고 개념을 잡은 한 소년은 자기네 집에서 기르는 비둘기에다 대고 닥치는 대로 뇌수술을 감행한다. 단편 <열망>의 주인공인 이 소년은 동네에서 제일 예쁘지만 사납고 공격적인 아가씨하고 결혼한 후에는 니켈로 만든 두 개의 기둥이 있고 높이가 20cm 쯤의 틀을 만들어 짐승의 영혼을 보관하는 장치를 만들어내고 만다. 한 틀에 한 영혼. 제일 먼저 틀로 초대하는 영혼은 자신이 기르던 늙은 개 마르코니. 자, 육신에서 영혼을 빼 틀에 저장해놓았으니 몸뚱이는 어떻게 될까? 어떻기는 어때, 즉시 부패하기 시작하는 거지. 그래 개는 마당을 파고 묻을 수밖에. 이 상태에서 영혼을 보관해놓았으니 늙긴 했지만 그래도 십여 년을 함께 정을 붙이고 산 마르코니는 영생의 단계에 들어간 것일까?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여쁜 아내 밀레나가 시어머니와 시누이 연합군에 맞서 하고 한 날 베르됭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틀을 하나 더 만들어 이번엔 자신의 영혼을 담아버리는 단계에 이르니, 영상에 영혼을 담은 <모렐의 발명>과 비슷하다.
  모든 작품이 이렇게 엽기발랄하다. <위대한 세라핌>에서는 알바레스라고 하는 주인공이 병이 들어 휴직을 하고 산타클라라 인근 해변에 요양 목적으로 방문해 바다를 바라보는 환상의 장면이 ① 거대한 썩은 고기(생선)로 가득 찬 원형 모양의 수평선, ② 호텔 화단의 시든 꽃, ③ 몇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진 고래와 크고 작은 고기들의 시체, ④ 이것을 먹기 위해 육지에서 날아든 까마귀, ⑤ 호텔에 돌아오자 라디오에서 크게 들리는 모차르트의 레퀴엠, ⑥ 유렵의 모든 해변에서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니스에서 온 전보 등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무자비하게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아침 산타클라라 해변의 낮은 벼랑 옆에서 상상한 것에서 출발한다. 나는 바닷물이 빠지면서 바다 밑바닥에 무지갯빛 물방울이 맺힌 동안 커다란 고래 무리가 해변에서 죽어있는 것을 상상했다.”라는 작가 노트에서 보듯이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자신의 뇌 속에 방연석이 첨가된 무선통신 장치가 삽입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누가 무선통신 장치를 작가의 뇌에 심었는가 하는 점인데, 나는 정답을 안다. 세상의 썩은 바닷물과 유황냄새가 나는 민물로 가득 차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비오이 카사레스의 뇌에 무선통신기 시술을 한 자는, 루시퍼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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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2-21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이 책 장바구니에만 담아두고 있었는데 사게 되면 각오하고 정신 차리고 읽겠습니다!!

Falstaff 2020-02-21 09:25   좋아요 0 | URL
에구, 잠자냥님은 내공이 깊으시니 그래도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
 

 

 

  출판사 문학동네는 오늘까지 모두 186권의 세계문학전집을 냈습니다. 이 가운데 제가 읽은 책들, 다른 출판사를 통해 읽은 작품은 비단 아무리 좋은 명작이라도 포함시키지 않고, 오직 문학동네 시리즈로 읽은 책 중에서 감명 깊게, 감동하며, 또는 동감하면서 기쁘게 읽은 책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아마추어 독자가 개인적으로 느낀 감상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추천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순서는 시리즈 번호입니다.

 


5. J.M.G. 르 클레지오, <황금 물고기>

   

  본격적으로 르 클레지오의 팬이 되게 만든 작품. 작가의 시선은 프랑스와 영국, 부모의 조국 사이에 있지 않고 전 세계를 아우른다. 이 책에선 북아프리카로 추정되는 모처에서 유괴된 소녀 라일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혹독한 세상 속을 유영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라일라는 유럽, 북아메리카를 거쳐 자신이 낳고, 유괴되고, 학대를 받으면서 자란 아프리카로 다시 회귀하는 한 마리의 물고기로 은유하며 비로소 자신을 찾아낸다. 르 클레지오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수작. 저 사막 넘어 둥둥둥 북소리처럼 울리는 내면의 깊은 곳을 호소하는 정체성의 화음. 이제 먼 먼 곳에서 돌아와 자신의 땅을 밟는 한 인간을 감격적으로 그린다.

 


12.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킴>

  

  키플링은 식민주의자다. 그러나 서정주가 부일 반민족 행위자임에도 그의 시를 읽지 않을 수 없듯이 키플링의 <킴>, 외로운 북서부 인도에서 히말라야까지 펼쳐지는, 한 현명한 라마승과 아일랜드 혼혈 소년의 모험 또는 순례이야기를 빼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 세세한 내용은 생각나지 않으나 황량하고 아름다운 카슈미르와 야크 떼가 무리지어 풀을 뜯는 히말라야의 장관 속에서 한 소년이 성장하는 광경이 지금도 머릿속에 가득하다.

 


49. 이노우에 야스시, <둔황>

 

  이 작품은 내 평생의 로망으로 남을 둔황 지역을 무대로 했기 때문에 흔히들 말하는 “나 홀로 명작”의 타이틀을 얻었다. 중국이 외세에 의하여 무력으로 개방되었던 19세기, 서양 열국과 제국주의 일본은 둔황지역을 거의 약탈하다시피 무수한 기록물과 예술품을 노략질했다. 작품은 중국이 가장 허약했던 송나라 시절, 과거 낙방생 조행덕이란 서생이 장안 서쪽 저 멀리 탕구르족이 세운 서하라는 나라에 한 번 가보겠다는 것으로 시작해, 사방천지를 둘러봐도 모래벌판 밖에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온갖 고생을 한 이야기다. 서하의 포로로 노예 신분으로 출발, 한족 출신의 용병으로 자리잡는 우여곡절을 쓴 광대한 파노라마. 다시 말하건대, 이 책은 “나만의 명작”이니 당신은 실망할 수도 있으리라.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염소의 축제>

   

   우리도 장기 집권하다 암살 당한 독재자의 기록이 있다. 요사는 일본계 페루 사람인 후지모리와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었다가 영광의 준우승을 한 이력도 있으니 이이가 정치소설을 쓴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것도 라틴 아메리카를 한 나라, 한 나라씩 골라 아픈 곳을 콕콕 질러대는 놀라운 솜씨가 있다. 이번엔 야구 잘하는 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를 골라 도미니카의 국민들로부터 구세주요, 자애로운 국부國父로 알려져 있으나 천하의 엽색가이며 부정축재자에다가 변태의 죽음, 여기에 희생으로 바쳐진 한 여자의 상처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빼어난 작품.

 


59. 하인리히 뵐,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기본적으로 하인리히 뵐은 소위 폐허문학으로 구분하고는 한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완전히 폐허가 된 독일 시내를 배회하는 우울하고 배고픈 사람들의 모습을 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독일어를 쓰는 지역을 묘사하는 걸 보면, 지독하게 규격화되어 있고, 정떨어질 만큼 질서가 잡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인공 슈니어는 이런 질식적인 환경에 염증을 느끼고 질서와 율법에 저항을 하는데, 저항이란 것이 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일이라 갈수록 좌절이 깊어질 뿐. 뵐은 슈니어를 통해 전후 독일의 하늘을 덮고 있는 기득권과 권력과 질서에 침을 뱉고 있었다.

 


61. 존 치버, <팔코너>

 

  에제키엘 패러것 교수가 자신의 형을 죽인 혐의로 교도소, 팔코너에 입소하게 된다. 교도소. 정문에 들어서면 큰 돌 위에 “이곳에 들어서는 자, 희망을 버려라.”라고 쓰여 있는 곳. 페러것 교수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바로 옆에서 총알이 동료의 목을 관통했으나 얼른 죽지도 않고 극도의 고통을 받는 참경을 보며 다른 전우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스스로 미치지 않기 위하여 위급한 상황에 쓰라고 지급해준 모르핀을 자신의 허벅지에 찌르기 시작해 만성, 또는 습관성 약물중독에 빠진 인물이다. 자신이 형을 죽였는지, 형이 하필이면 자신의 앞에 있는 뾰족한 금속물체를 향해 쓰러졌는지 교수는 증명할 방법도 없고, 자세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재판장이라는 권력은 습관성 마약중독이기 때문에 살인을 했을 거라고 판정을 해버리는 상황. 나 같으면 최후 진술에 이렇게 말하겠다. 조국은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나를 위해서 죽어줬으면 좋겠다고. 삼 일만에 부활을 하든지 말든지.

 


69. 애니타 브루크너, <호텔 뒤락>

  스위스의 여름 호텔, 뒤락. 본격적인 휴가철은 벌써 끝나 이젠 호텔에 남아있는 객들이라고는 거액 상속자인 늙은 모녀, 거식증과 불임이 겹쳐 소박을 맞아 스위스의 외진 호텔로 쫓겨난 여인, 고부갈등으로 여름내 호텔에 처박히는 형을 당하는 귀머거리 노파, 그리고 로맨스 소설을 쓰는 주인공이 있을 뿐. 그러나 소설 속에는 별 내용이 없다. 그저 이들이 서로가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특수성 속에 얽히고설키는 신경줄의 묘사. 이름하여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치닫고 있는데, 이 속에 남자가 한 명 보태지니 신경전은 더욱 미묘한 단계로 접어들게 되고, 결론은 이 속에서도 어떤 이에게는 나를 찾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것.

 


79.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

 

  하필이면 이 책으로 살만 루슈디를 읽어, 단박에 그의 팬이 됐다. 말이 필요하지 않은 명작.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는 날의 자정에, 아무리 인구가 많은 나라라도 그렇지, 한 날 한 시에 무려 1,001명의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것도 모자라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전부 개별적으로 특별한 능력을 가졌으며 심지어 일종의 텔레파시로 서로 교감을 할 수 있다. 이거 <엑스 맨> 아니다. 그러나 루슈디의 입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화자 ‘나’와 천 명의 아이들과 인도와 파키스탄의 현대사를 서로 연결시켜가며 쉼 없이 수다를 떨어댄다. 그리고 이야기는 실제와 환상을 넘고, 동양과 서양을 넘고, 힌두교와 이슬람을 넘는 거대 담론으로 진화해나가는데, 그런 거 다 빼고 이야기 읽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재미가 넘쳐 숙면의 기회를 박탈하는 수준이다.

 


87.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늦여름>

 

  아름다운 책. 슈티프터만큼 자연을 멋있고, 아름답고, 경건하고, 친숙하고, 생동감 있고, 건강하고, 태생적으로 익숙하고, 사물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으로 묘사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여기에 회화, 조각, 화훼, 나무, 숲, 곤충, 새, 짐승, 암석, 화석, 암괴 등에 대한 미학적 관점이 놀라울 정도로 진지하다. 19세기 독일 소설가가 그렇듯이 여차하면 지루해질 수도 있는 작가이고 작품이지만 고비만 넘긴다면 당신은 보헤미아가 배출한 최고의 작가가 쓴 대표작을 읽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아무리 묘사해도 부족한 슈티프터의 아름다운 문장과 고급진 의식과 시각이라니. <보헤미아의 숲>과 <숲 속의 오솔길>에 이어 자연을 찬미한 눈부신 작품.

 


98. 존 더스패서스, <맨해튼 트랜스퍼>

 

  590쪽에 이르는 소설책을 일박이일 동안 완독했을 정도로 재미있다. 1900년경부터 1920년까지 뉴욕을 중심으로 서민들의 사는 모습을 그렸다. 이들은 이민선을 타고 와서 살 곳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고 당연히 돈도 없는 가족들이었으며,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타지에서 도시로 유입된 도시빈민이기도 했는데, 단 한 끼의 해결을 위해 굴욕도 감수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스스로는 그것이 굴욕인지 모를 수도 있겠고. 이들이 몇 달 동안 이민선을 타고 온갖 고생을 해가며 왔으며, 비싼 교통비를 모으기 위해 농장의 막노동꾼 일을 해서 오긴 했지만, 이제는 뉴욕을 떠나기도 쉽지 않은 진퇴양난의 수렁에 빠져있는 것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한다.

 


115. 에밀 졸라, <인간짐승>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아줌마의 둘째 아들 자크 이야기. 졸라의 <목로주점>은 다른 출판사 책으로 읽었고, 졸라의 <제르미날>과 각축을 했으나 <인간짐승>을 꼽았다. 이유는 제르베즈 아줌마의 삼남 일녀의 일생이 전부 질주, 폭주를 하는데 이들 가운데 질주의 폭력성이 <인간짐승>의 주인공 자크가 제일 심하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기질 상 약간 광기가 있는 자크는 여성과 성적인 접촉을 하려고만 하면 그만 심한 살인욕구가 먼저 치미는 정신적 비정상 상태에 있는 인물이다. 그래 처음부터 비극을 내포하고 있는데 일단 에밀 졸라 특유의 사건의 자연주의적 묘사가 흥미진진하며 자크의 고모 등을 둘러싼 살인사건의 집요함, 특별히 마지막 씬의 대단한 질주가 넋이 나갈 정도로 충격적이다.

 


116.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빌러비드>로 처음 모리슨을 만났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곧바로 서점을 뒤져 이이의 다른 책들을 골라 제법 읽었다. 흑인 노예를 다룬 많은 책들이 있지만 노예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딸을 살해함으로써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켰던 실화를 바탕으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흑인 여성이 이런 소재로 썼으니 당연히 관점은 여성 노예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에 아프리카 성향의 마법적 요소까지 가미되어 책을 읽는 재미가 더해지는데 내가 읽기로는 문학적 가치 또한 대단해서 <빌러비드>를 시작으로 흑인문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 작품이야말로 흑인, 특히 흑인 여성에 바치는 한 판 굿이며 깊은 통곡이며, 새로이 제시하는 전망이다.

 


118.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유대계 미국인이 쓴 유대계 미국인 이야기. 물론 보통의 가정은 아니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하는 딸을 둔 엄친아 가족. 미국의 부르주아 계급을 형성하는 스위드 레보브는 거기다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엄친아 himself. 그러나 운명의 1968년, 노먼 메일러가 <밤의 군대들>에서 묘사했듯이 미국의 젊은이들과 히피들이 반전을 기치로 펜타곤을 향해 행진할 때, 스위드의 딸 메리는 심지어 폭탄 테러를 일으키고 만다. 미국 내에서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한 정부를 충분히 이해하는 주인공 스위드 입장은 어땠을까. 이제 기업체를 운영하는 한편 목장식 저택을 지어놓고 본격적으로 목가적 삶을 즐기려고 하는 순간, 이 가정은 물론이고 온 미국이 거친 혼동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123. W.G. 제발트, <현기증 · 감정들>

 

  제발트가 쓴 첫 번째 장편소설. 무대는 1800년의 마랭고 전투. 대포를 밀면서 알프스 산맥을 넘은 프랑스 군대가 객관적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극적 역전승을 벌인 나폴레옹의 기념비적인 승전. 이 무리들 속에 마리 앙리 벨이라는 이름의 소년병이 있었으니 그는 나중에 ‘스탕달’이라는 필명으로 19세기를 프랑스 소설의 세기로 만들기에 이른다. 제발트는 후에 나폴레옹의 큰 전투가 있었던 지명을 따서 <아우스터리츠>라는 장편을 쓰고, 이 책에서 독자로 하여금 깊은 사색에 이르게 하는 제발트 표 도보여행의 흔적은 <토성의 고리>로 연결된다. 제발트의 독특한 미적 탐색으로 그는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책 속에 담았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당신은 제발트의 영역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131. 아모스 오즈,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이 책 전에 아모스 오즈를 몇 권 읽었으나 도무지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아 마지막으로 한 권만 더 읽어보겠다고 마음먹고 골랐다가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북유럽 출신의 부르주아 유대인을 조부모, 외조부모로 둔 아모스 오즈. 그가 자신들의 선조들이 유럽에서 어떤 고난을 겪었으며 이스라엘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그 후에도 아랍 연합과 투쟁하는 동안 피할 수 없던 사회적 결핍, 가족과 가정의 물질적 가난과 고통에 대해, 담담하게 적어놓았다. 물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열세 살 때 당연하게도 가장 깊은 유대를 지녔던 어머니가 자살해버린 상처까지. 단 하나, 스스로가 유대인이기 때문이겠지만 팔레스타인 점령을 당연한 듯 바탕에 깔아버린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35.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의 데뷔작이자 발표한 해 부커상을 수상한 작품. 이후 로이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가 20년 만에 신작 <지복의 성자>를 냈을 만큼 구두쇠다. 인도 남부의 아예메넴을 무대로 상류계급 가족 내의 친족간 결혼은 필연적으로 유전적 결함을 낳았고, 가끔은 지독하게 머리가 좋은 자손도 태어났으리라. 그리하여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을 정도의 재원이 지역의 발전을 위해 불가촉천민을 위한 학교도 짓고 공장도 만들지만, 아직 과거 인도의 습성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것은 아니라서 불가촉천민을 무자비하게 두드려 패기도 하고, 역시 인도 유학을 다녀온 개화된 신여성 아내의 귀싸대기를 후려치기도 한다. 이런 구조적 어처구니없음과 난장판을 재미있게 써내려간 로이. 그의 신작이 새로 출간된 것을 알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사버린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150. 커트 보니것, <제5 도살장>

 

  빌리 필그림은 선척적 약골로 태어났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강제징집당해 다른 곳도 아니고 거의 마지막으로 격전을 치룬 벌지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그것이 진짜로 참전이라면. 벌지에 도착하였으나 군복도 안 주고, 철모도 안 주고, 기본적으로 소총도 지급받지 못한 빌리는 동료 세 명과 함께 독일군의 총알을 맞지 않기 위해 상대적으로 감시가 소홀한 독일의 후방지역으로 스스로 들어가 다 늙은 노인병과 소년병에게 고스란히 사로잡히고 만다. 그리하여 빌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엘베 강의 피렌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아름다운 고도 드레스덴 폭격. 시 외곽지역의 방공호에서 드레스덴에 불바다로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빌리는 급기야 트랄팔마도어 행성의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2년 동안 동물원에 전시되는 참변을 겪는데, 당연히 어디까지나 은유다. 적군 섬멸이라는 미명으로 벌인 학살극, 이런 폭력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153. 이반 부닌,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아름다운 소설. 러시아 대지주 귀족 출신 가정이 몰락해가는 과정. 이렇게 얘기하면 이미 충분히 읽어본 경험이 있을 듯한데, 몰락하면서도 예전의 소비성향과 사치는 조금도 줄지 않아 도박과 향락에 전념하는 바람에 완전히 파멸에 이르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자손 없이 부자 고모가 죽는 바람에 거금을 손에 쥐게 되는 가정의 아들. 자신의 이야기를 쓴 듯한 내용임에도 작가가 시인 출신이라 그런지 문장이 사람의 가슴팍을 쥐어짠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지나고 과거를 고백하는 작품일 뿐임에도 내가 부닌의 이 작품에 한없이 매료된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독후감 말미에, “불행한 당신, 더욱 불행해지고 싶으면, 어제처럼 내일도 당신의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을 위해 살아라.”라고 썼다.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이 책을 읽는다면, 어느 순간 당신이 지금 극적으로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시 책의 앞부분으로 돌아와, 이게 진짜인지 거짓인지 머리를 한 번 푸르르 흔들고, 심지어 커피를 한 잔 마시든지, 담배 한 대 피우고 와서 재도전을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보코프, 이 문제적 인간이 대단한 구라를 풀었다. 킨보트라고 하는 영문학자가 위대한 현대시인 존 셰이드가 쓴 미완의 시 <창백한 불꽃>을 출간할 권리를 얻어 서문과 무려 280쪽에 이르는 주석을 단 시집을 만든 결과물이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주장한다. 나보코프의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르주아 귀족 계급이었다가 1917년 혁명으로 인해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사가 어른거린다. 이 작품도 그런 부류의 소설로 나보코프의 혈액 내에 잔존하고 있는 불안감과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이의 작품이 거의 다 그렇듯이 독서력이 좀 있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이거 명작이다.

 


178. 막스 프리슈, <슈틸러>

 

  쉽게 읽히지 않는 작가 프리슈가 쓴 소설이라 잔뜩 쫄았다가 대박친 책이다. 독일 출신 미국인으로 오랜 세월 멕시코에 살다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스위스 행 기차를 탔는데, 맞은편에 앉은 사내의 신고로 스위스 경찰에 의하여 스파이 사건에 연루된 슈틸러라는 인물로 지목받은 화이트 씨. 그가 스위스 땅에 도착하자마자 규격, 정형화되고,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게 정돈되었으며 하다못해 길거리에 장애인이나 거지 한 명 구경하지 못하는 스위스에 질식할 듯한 갑갑함을 느낀다. 검사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변호를 맡은 국선변호사도 무조건 화이트 씨를 슈틸러로 인식을 하는 와중에 변호사의 권유로 자신이 살아온 일생을 노트 일곱 권에 빽빽하게 적어내려 간다. 동시에 원래 직업이 조각가인 슈틸러라는 인물이 스위스와 파리를 무대로 벌였던 여러 기이한 행각이 삽입되어 독자를 혼동과 미로의 틈바구니에서 즐겁게 해주는데, 적어도 지은이가 프리슈다. 즐겁기만 할 수는 없는 일. 이들 사이에 도대체 어떤 일이 얽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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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20 1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키플링은 저질과 더불어 뼛속까지
제국주의자였죠. 공감합니다.

<염소의 축제>는 제가 모니터로
참여한 작품이라 더더욱 기억에
남네요 :>

하인리히 뵐의 책은 어디에 두었
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못 읽고
있습니다.

<빌러비드>는 올해 읽었는데 가히
대단한 작품입니다. 블랙 아메리칸
에 대한 진혼곡이라고나 할까요.

커트 보네거트의 책은 아이필드
버전의 번역이 더 마음에 들더라구요.

로이 여사의 책은 어제부터 다시
읽고 있습니다.

Falstaff 2020-02-20 11:26   좋아요 0 | URL
매냐님의 라이브러리도 참 대단합니다.
저도 로이의 새 책에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얼른 읽어야지요. ^^

coolcat329 2020-02-20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중에 읽은 책이 딱 한 권이네요😅-작은 것들의 신. 저도 지복의 성자를 바로 샀답니다. 올해 꼭 읽을 작품으로 빌러비드, 황금물고기를 생각했었는데 또 추가해야겠습니다. 늘 좋은 책들 소개해 주시니 감사하고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0-02-20 12:42   좋아요 1 | URL
별 거 없는 독후감을 좋게 읽어주셔서 늘 고맙지요.

잠자냥 2020-02-20 13:00   좋아요 2 | URL
황금물고기는 정말 좋아요! 꼭 읽어보세요~!

방울딸기 2020-02-21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황금물고기 얼른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지복의 성자는 읽고 있는데 너무 좋아요 ㅠㅠ
아직 독서력이 부족해서 읽을 책들이 너무 많네요!

Falstaff 2020-02-21 14:49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황금물고기, 탁월한 선택입니다. 좋은 시간 보내실 겁니다. ^^

비로그인 2020-03-10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Falstaff 2020-03-10 21:23   좋아요 0 | URL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페이퍼 보시면 민음사, 열린책들 시리즈도 있습니다.
쇤네가 주제에 뭘 그리 고집이 있겠습니까.

유부만두 2020-03-12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만 루슈디는 자서전 조차 재미있습니다!
<조지프 앤턴>이고요. ^^
곧 최근작 <2년 8개월 28일>도 나온다고 합니다. 이건 루슈디 책 중 제일 쉽고 귀엽게 재미있어요.

Falstaff 2020-03-12 11:20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그거 참 궁금하네요. 근데... 출간 전에 미리 읽어보셨군요! ^^

null 2020-03-1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러비드, 현기증.감정들, 미국의 목가, 제5도살장 엄청나게 좋아해서 여러번 읽고 원서까지 사서 훑었어요. 저는 영어권에만 치중해 읽는 편인데 다른 언어권의 책들도 많이 얻어갑니다. (장바구니에 줍줍)

Falstaff 2020-03-12 16:18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