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문학동네는 오늘까지 모두 186권의 세계문학전집을 냈습니다. 이 가운데 제가 읽은 책들, 다른 출판사를 통해 읽은 작품은 비단 아무리 좋은 명작이라도 포함시키지 않고, 오직 문학동네 시리즈로 읽은 책 중에서 감명 깊게, 감동하며, 또는 동감하면서 기쁘게 읽은 책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아마추어 독자가 개인적으로 느낀 감상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추천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순서는 시리즈 번호입니다.

 


5. J.M.G. 르 클레지오, <황금 물고기>

   

  본격적으로 르 클레지오의 팬이 되게 만든 작품. 작가의 시선은 프랑스와 영국, 부모의 조국 사이에 있지 않고 전 세계를 아우른다. 이 책에선 북아프리카로 추정되는 모처에서 유괴된 소녀 라일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혹독한 세상 속을 유영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라일라는 유럽, 북아메리카를 거쳐 자신이 낳고, 유괴되고, 학대를 받으면서 자란 아프리카로 다시 회귀하는 한 마리의 물고기로 은유하며 비로소 자신을 찾아낸다. 르 클레지오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수작. 저 사막 넘어 둥둥둥 북소리처럼 울리는 내면의 깊은 곳을 호소하는 정체성의 화음. 이제 먼 먼 곳에서 돌아와 자신의 땅을 밟는 한 인간을 감격적으로 그린다.

 


12.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킴>

  

  키플링은 식민주의자다. 그러나 서정주가 부일 반민족 행위자임에도 그의 시를 읽지 않을 수 없듯이 키플링의 <킴>, 외로운 북서부 인도에서 히말라야까지 펼쳐지는, 한 현명한 라마승과 아일랜드 혼혈 소년의 모험 또는 순례이야기를 빼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 세세한 내용은 생각나지 않으나 황량하고 아름다운 카슈미르와 야크 떼가 무리지어 풀을 뜯는 히말라야의 장관 속에서 한 소년이 성장하는 광경이 지금도 머릿속에 가득하다.

 


49. 이노우에 야스시, <둔황>

 

  이 작품은 내 평생의 로망으로 남을 둔황 지역을 무대로 했기 때문에 흔히들 말하는 “나 홀로 명작”의 타이틀을 얻었다. 중국이 외세에 의하여 무력으로 개방되었던 19세기, 서양 열국과 제국주의 일본은 둔황지역을 거의 약탈하다시피 무수한 기록물과 예술품을 노략질했다. 작품은 중국이 가장 허약했던 송나라 시절, 과거 낙방생 조행덕이란 서생이 장안 서쪽 저 멀리 탕구르족이 세운 서하라는 나라에 한 번 가보겠다는 것으로 시작해, 사방천지를 둘러봐도 모래벌판 밖에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온갖 고생을 한 이야기다. 서하의 포로로 노예 신분으로 출발, 한족 출신의 용병으로 자리잡는 우여곡절을 쓴 광대한 파노라마. 다시 말하건대, 이 책은 “나만의 명작”이니 당신은 실망할 수도 있으리라.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염소의 축제>

   

   우리도 장기 집권하다 암살 당한 독재자의 기록이 있다. 요사는 일본계 페루 사람인 후지모리와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었다가 영광의 준우승을 한 이력도 있으니 이이가 정치소설을 쓴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것도 라틴 아메리카를 한 나라, 한 나라씩 골라 아픈 곳을 콕콕 질러대는 놀라운 솜씨가 있다. 이번엔 야구 잘하는 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를 골라 도미니카의 국민들로부터 구세주요, 자애로운 국부國父로 알려져 있으나 천하의 엽색가이며 부정축재자에다가 변태의 죽음, 여기에 희생으로 바쳐진 한 여자의 상처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빼어난 작품.

 


59. 하인리히 뵐,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기본적으로 하인리히 뵐은 소위 폐허문학으로 구분하고는 한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완전히 폐허가 된 독일 시내를 배회하는 우울하고 배고픈 사람들의 모습을 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독일어를 쓰는 지역을 묘사하는 걸 보면, 지독하게 규격화되어 있고, 정떨어질 만큼 질서가 잡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인공 슈니어는 이런 질식적인 환경에 염증을 느끼고 질서와 율법에 저항을 하는데, 저항이란 것이 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일이라 갈수록 좌절이 깊어질 뿐. 뵐은 슈니어를 통해 전후 독일의 하늘을 덮고 있는 기득권과 권력과 질서에 침을 뱉고 있었다.

 


61. 존 치버, <팔코너>

 

  에제키엘 패러것 교수가 자신의 형을 죽인 혐의로 교도소, 팔코너에 입소하게 된다. 교도소. 정문에 들어서면 큰 돌 위에 “이곳에 들어서는 자, 희망을 버려라.”라고 쓰여 있는 곳. 페러것 교수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바로 옆에서 총알이 동료의 목을 관통했으나 얼른 죽지도 않고 극도의 고통을 받는 참경을 보며 다른 전우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스스로 미치지 않기 위하여 위급한 상황에 쓰라고 지급해준 모르핀을 자신의 허벅지에 찌르기 시작해 만성, 또는 습관성 약물중독에 빠진 인물이다. 자신이 형을 죽였는지, 형이 하필이면 자신의 앞에 있는 뾰족한 금속물체를 향해 쓰러졌는지 교수는 증명할 방법도 없고, 자세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재판장이라는 권력은 습관성 마약중독이기 때문에 살인을 했을 거라고 판정을 해버리는 상황. 나 같으면 최후 진술에 이렇게 말하겠다. 조국은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나를 위해서 죽어줬으면 좋겠다고. 삼 일만에 부활을 하든지 말든지.

 


69. 애니타 브루크너, <호텔 뒤락>

  스위스의 여름 호텔, 뒤락. 본격적인 휴가철은 벌써 끝나 이젠 호텔에 남아있는 객들이라고는 거액 상속자인 늙은 모녀, 거식증과 불임이 겹쳐 소박을 맞아 스위스의 외진 호텔로 쫓겨난 여인, 고부갈등으로 여름내 호텔에 처박히는 형을 당하는 귀머거리 노파, 그리고 로맨스 소설을 쓰는 주인공이 있을 뿐. 그러나 소설 속에는 별 내용이 없다. 그저 이들이 서로가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특수성 속에 얽히고설키는 신경줄의 묘사. 이름하여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치닫고 있는데, 이 속에 남자가 한 명 보태지니 신경전은 더욱 미묘한 단계로 접어들게 되고, 결론은 이 속에서도 어떤 이에게는 나를 찾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것.

 


79.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

 

  하필이면 이 책으로 살만 루슈디를 읽어, 단박에 그의 팬이 됐다. 말이 필요하지 않은 명작.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는 날의 자정에, 아무리 인구가 많은 나라라도 그렇지, 한 날 한 시에 무려 1,001명의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것도 모자라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전부 개별적으로 특별한 능력을 가졌으며 심지어 일종의 텔레파시로 서로 교감을 할 수 있다. 이거 <엑스 맨> 아니다. 그러나 루슈디의 입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화자 ‘나’와 천 명의 아이들과 인도와 파키스탄의 현대사를 서로 연결시켜가며 쉼 없이 수다를 떨어댄다. 그리고 이야기는 실제와 환상을 넘고, 동양과 서양을 넘고, 힌두교와 이슬람을 넘는 거대 담론으로 진화해나가는데, 그런 거 다 빼고 이야기 읽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재미가 넘쳐 숙면의 기회를 박탈하는 수준이다.

 


87.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늦여름>

 

  아름다운 책. 슈티프터만큼 자연을 멋있고, 아름답고, 경건하고, 친숙하고, 생동감 있고, 건강하고, 태생적으로 익숙하고, 사물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으로 묘사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여기에 회화, 조각, 화훼, 나무, 숲, 곤충, 새, 짐승, 암석, 화석, 암괴 등에 대한 미학적 관점이 놀라울 정도로 진지하다. 19세기 독일 소설가가 그렇듯이 여차하면 지루해질 수도 있는 작가이고 작품이지만 고비만 넘긴다면 당신은 보헤미아가 배출한 최고의 작가가 쓴 대표작을 읽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아무리 묘사해도 부족한 슈티프터의 아름다운 문장과 고급진 의식과 시각이라니. <보헤미아의 숲>과 <숲 속의 오솔길>에 이어 자연을 찬미한 눈부신 작품.

 


98. 존 더스패서스, <맨해튼 트랜스퍼>

 

  590쪽에 이르는 소설책을 일박이일 동안 완독했을 정도로 재미있다. 1900년경부터 1920년까지 뉴욕을 중심으로 서민들의 사는 모습을 그렸다. 이들은 이민선을 타고 와서 살 곳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고 당연히 돈도 없는 가족들이었으며,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타지에서 도시로 유입된 도시빈민이기도 했는데, 단 한 끼의 해결을 위해 굴욕도 감수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스스로는 그것이 굴욕인지 모를 수도 있겠고. 이들이 몇 달 동안 이민선을 타고 온갖 고생을 해가며 왔으며, 비싼 교통비를 모으기 위해 농장의 막노동꾼 일을 해서 오긴 했지만, 이제는 뉴욕을 떠나기도 쉽지 않은 진퇴양난의 수렁에 빠져있는 것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한다.

 


115. 에밀 졸라, <인간짐승>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아줌마의 둘째 아들 자크 이야기. 졸라의 <목로주점>은 다른 출판사 책으로 읽었고, 졸라의 <제르미날>과 각축을 했으나 <인간짐승>을 꼽았다. 이유는 제르베즈 아줌마의 삼남 일녀의 일생이 전부 질주, 폭주를 하는데 이들 가운데 질주의 폭력성이 <인간짐승>의 주인공 자크가 제일 심하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기질 상 약간 광기가 있는 자크는 여성과 성적인 접촉을 하려고만 하면 그만 심한 살인욕구가 먼저 치미는 정신적 비정상 상태에 있는 인물이다. 그래 처음부터 비극을 내포하고 있는데 일단 에밀 졸라 특유의 사건의 자연주의적 묘사가 흥미진진하며 자크의 고모 등을 둘러싼 살인사건의 집요함, 특별히 마지막 씬의 대단한 질주가 넋이 나갈 정도로 충격적이다.

 


116.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빌러비드>로 처음 모리슨을 만났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곧바로 서점을 뒤져 이이의 다른 책들을 골라 제법 읽었다. 흑인 노예를 다룬 많은 책들이 있지만 노예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딸을 살해함으로써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켰던 실화를 바탕으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흑인 여성이 이런 소재로 썼으니 당연히 관점은 여성 노예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에 아프리카 성향의 마법적 요소까지 가미되어 책을 읽는 재미가 더해지는데 내가 읽기로는 문학적 가치 또한 대단해서 <빌러비드>를 시작으로 흑인문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 작품이야말로 흑인, 특히 흑인 여성에 바치는 한 판 굿이며 깊은 통곡이며, 새로이 제시하는 전망이다.

 


118.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유대계 미국인이 쓴 유대계 미국인 이야기. 물론 보통의 가정은 아니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하는 딸을 둔 엄친아 가족. 미국의 부르주아 계급을 형성하는 스위드 레보브는 거기다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엄친아 himself. 그러나 운명의 1968년, 노먼 메일러가 <밤의 군대들>에서 묘사했듯이 미국의 젊은이들과 히피들이 반전을 기치로 펜타곤을 향해 행진할 때, 스위드의 딸 메리는 심지어 폭탄 테러를 일으키고 만다. 미국 내에서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한 정부를 충분히 이해하는 주인공 스위드 입장은 어땠을까. 이제 기업체를 운영하는 한편 목장식 저택을 지어놓고 본격적으로 목가적 삶을 즐기려고 하는 순간, 이 가정은 물론이고 온 미국이 거친 혼동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123. W.G. 제발트, <현기증 · 감정들>

 

  제발트가 쓴 첫 번째 장편소설. 무대는 1800년의 마랭고 전투. 대포를 밀면서 알프스 산맥을 넘은 프랑스 군대가 객관적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극적 역전승을 벌인 나폴레옹의 기념비적인 승전. 이 무리들 속에 마리 앙리 벨이라는 이름의 소년병이 있었으니 그는 나중에 ‘스탕달’이라는 필명으로 19세기를 프랑스 소설의 세기로 만들기에 이른다. 제발트는 후에 나폴레옹의 큰 전투가 있었던 지명을 따서 <아우스터리츠>라는 장편을 쓰고, 이 책에서 독자로 하여금 깊은 사색에 이르게 하는 제발트 표 도보여행의 흔적은 <토성의 고리>로 연결된다. 제발트의 독특한 미적 탐색으로 그는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책 속에 담았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당신은 제발트의 영역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131. 아모스 오즈,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이 책 전에 아모스 오즈를 몇 권 읽었으나 도무지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아 마지막으로 한 권만 더 읽어보겠다고 마음먹고 골랐다가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북유럽 출신의 부르주아 유대인을 조부모, 외조부모로 둔 아모스 오즈. 그가 자신들의 선조들이 유럽에서 어떤 고난을 겪었으며 이스라엘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그 후에도 아랍 연합과 투쟁하는 동안 피할 수 없던 사회적 결핍, 가족과 가정의 물질적 가난과 고통에 대해, 담담하게 적어놓았다. 물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열세 살 때 당연하게도 가장 깊은 유대를 지녔던 어머니가 자살해버린 상처까지. 단 하나, 스스로가 유대인이기 때문이겠지만 팔레스타인 점령을 당연한 듯 바탕에 깔아버린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35.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의 데뷔작이자 발표한 해 부커상을 수상한 작품. 이후 로이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가 20년 만에 신작 <지복의 성자>를 냈을 만큼 구두쇠다. 인도 남부의 아예메넴을 무대로 상류계급 가족 내의 친족간 결혼은 필연적으로 유전적 결함을 낳았고, 가끔은 지독하게 머리가 좋은 자손도 태어났으리라. 그리하여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을 정도의 재원이 지역의 발전을 위해 불가촉천민을 위한 학교도 짓고 공장도 만들지만, 아직 과거 인도의 습성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것은 아니라서 불가촉천민을 무자비하게 두드려 패기도 하고, 역시 인도 유학을 다녀온 개화된 신여성 아내의 귀싸대기를 후려치기도 한다. 이런 구조적 어처구니없음과 난장판을 재미있게 써내려간 로이. 그의 신작이 새로 출간된 것을 알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사버린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150. 커트 보니것, <제5 도살장>

 

  빌리 필그림은 선척적 약골로 태어났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강제징집당해 다른 곳도 아니고 거의 마지막으로 격전을 치룬 벌지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그것이 진짜로 참전이라면. 벌지에 도착하였으나 군복도 안 주고, 철모도 안 주고, 기본적으로 소총도 지급받지 못한 빌리는 동료 세 명과 함께 독일군의 총알을 맞지 않기 위해 상대적으로 감시가 소홀한 독일의 후방지역으로 스스로 들어가 다 늙은 노인병과 소년병에게 고스란히 사로잡히고 만다. 그리하여 빌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엘베 강의 피렌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아름다운 고도 드레스덴 폭격. 시 외곽지역의 방공호에서 드레스덴에 불바다로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빌리는 급기야 트랄팔마도어 행성의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2년 동안 동물원에 전시되는 참변을 겪는데, 당연히 어디까지나 은유다. 적군 섬멸이라는 미명으로 벌인 학살극, 이런 폭력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153. 이반 부닌,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아름다운 소설. 러시아 대지주 귀족 출신 가정이 몰락해가는 과정. 이렇게 얘기하면 이미 충분히 읽어본 경험이 있을 듯한데, 몰락하면서도 예전의 소비성향과 사치는 조금도 줄지 않아 도박과 향락에 전념하는 바람에 완전히 파멸에 이르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자손 없이 부자 고모가 죽는 바람에 거금을 손에 쥐게 되는 가정의 아들. 자신의 이야기를 쓴 듯한 내용임에도 작가가 시인 출신이라 그런지 문장이 사람의 가슴팍을 쥐어짠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지나고 과거를 고백하는 작품일 뿐임에도 내가 부닌의 이 작품에 한없이 매료된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독후감 말미에, “불행한 당신, 더욱 불행해지고 싶으면, 어제처럼 내일도 당신의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을 위해 살아라.”라고 썼다.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이 책을 읽는다면, 어느 순간 당신이 지금 극적으로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시 책의 앞부분으로 돌아와, 이게 진짜인지 거짓인지 머리를 한 번 푸르르 흔들고, 심지어 커피를 한 잔 마시든지, 담배 한 대 피우고 와서 재도전을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보코프, 이 문제적 인간이 대단한 구라를 풀었다. 킨보트라고 하는 영문학자가 위대한 현대시인 존 셰이드가 쓴 미완의 시 <창백한 불꽃>을 출간할 권리를 얻어 서문과 무려 280쪽에 이르는 주석을 단 시집을 만든 결과물이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주장한다. 나보코프의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르주아 귀족 계급이었다가 1917년 혁명으로 인해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사가 어른거린다. 이 작품도 그런 부류의 소설로 나보코프의 혈액 내에 잔존하고 있는 불안감과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이의 작품이 거의 다 그렇듯이 독서력이 좀 있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이거 명작이다.

 


178. 막스 프리슈, <슈틸러>

 

  쉽게 읽히지 않는 작가 프리슈가 쓴 소설이라 잔뜩 쫄았다가 대박친 책이다. 독일 출신 미국인으로 오랜 세월 멕시코에 살다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스위스 행 기차를 탔는데, 맞은편에 앉은 사내의 신고로 스위스 경찰에 의하여 스파이 사건에 연루된 슈틸러라는 인물로 지목받은 화이트 씨. 그가 스위스 땅에 도착하자마자 규격, 정형화되고,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게 정돈되었으며 하다못해 길거리에 장애인이나 거지 한 명 구경하지 못하는 스위스에 질식할 듯한 갑갑함을 느낀다. 검사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변호를 맡은 국선변호사도 무조건 화이트 씨를 슈틸러로 인식을 하는 와중에 변호사의 권유로 자신이 살아온 일생을 노트 일곱 권에 빽빽하게 적어내려 간다. 동시에 원래 직업이 조각가인 슈틸러라는 인물이 스위스와 파리를 무대로 벌였던 여러 기이한 행각이 삽입되어 독자를 혼동과 미로의 틈바구니에서 즐겁게 해주는데, 적어도 지은이가 프리슈다. 즐겁기만 할 수는 없는 일. 이들 사이에 도대체 어떤 일이 얽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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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20 1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키플링은 저질과 더불어 뼛속까지
제국주의자였죠. 공감합니다.

<염소의 축제>는 제가 모니터로
참여한 작품이라 더더욱 기억에
남네요 :>

하인리히 뵐의 책은 어디에 두었
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못 읽고
있습니다.

<빌러비드>는 올해 읽었는데 가히
대단한 작품입니다. 블랙 아메리칸
에 대한 진혼곡이라고나 할까요.

커트 보네거트의 책은 아이필드
버전의 번역이 더 마음에 들더라구요.

로이 여사의 책은 어제부터 다시
읽고 있습니다.

Falstaff 2020-02-20 11:26   좋아요 0 | URL
매냐님의 라이브러리도 참 대단합니다.
저도 로이의 새 책에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얼른 읽어야지요. ^^

coolcat329 2020-02-20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중에 읽은 책이 딱 한 권이네요😅-작은 것들의 신. 저도 지복의 성자를 바로 샀답니다. 올해 꼭 읽을 작품으로 빌러비드, 황금물고기를 생각했었는데 또 추가해야겠습니다. 늘 좋은 책들 소개해 주시니 감사하고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0-02-20 12:42   좋아요 1 | URL
별 거 없는 독후감을 좋게 읽어주셔서 늘 고맙지요.

잠자냥 2020-02-20 13:00   좋아요 2 | URL
황금물고기는 정말 좋아요! 꼭 읽어보세요~!

방울딸기 2020-02-21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황금물고기 얼른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지복의 성자는 읽고 있는데 너무 좋아요 ㅠㅠ
아직 독서력이 부족해서 읽을 책들이 너무 많네요!

Falstaff 2020-02-21 14:49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황금물고기, 탁월한 선택입니다. 좋은 시간 보내실 겁니다. ^^

비로그인 2020-03-10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Falstaff 2020-03-10 21:23   좋아요 0 | URL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페이퍼 보시면 민음사, 열린책들 시리즈도 있습니다.
쇤네가 주제에 뭘 그리 고집이 있겠습니까.

유부만두 2020-03-12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만 루슈디는 자서전 조차 재미있습니다!
<조지프 앤턴>이고요. ^^
곧 최근작 <2년 8개월 28일>도 나온다고 합니다. 이건 루슈디 책 중 제일 쉽고 귀엽게 재미있어요.

Falstaff 2020-03-12 11:20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그거 참 궁금하네요. 근데... 출간 전에 미리 읽어보셨군요! ^^

null 2020-03-1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러비드, 현기증.감정들, 미국의 목가, 제5도살장 엄청나게 좋아해서 여러번 읽고 원서까지 사서 훑었어요. 저는 영어권에만 치중해 읽는 편인데 다른 언어권의 책들도 많이 얻어갑니다. (장바구니에 줍줍)

Falstaff 2020-03-12 16:18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