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베토벤 : 현악 사중주 전곡집 [8CD]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 부다페스트 사중주단 (Budapes / SONY CLASSICAL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58~61년 스튜디오 녹음.
  오랜 동안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를 들어봐야 하겠다는 일종의 부채감을 갖고 살던 적이 있다. 후기 사중주 음반은 과르넬리 사중주단,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40년대 녹음, 바릴리 사중주단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전설적인 이 음반, 모두 여덟 장의 CD에 베토벤의 전곡을 담아 할인가 30,500원에 발매한다는 소식을 이제야 듣고, 생각 하고 말고가 없이 단박에 사서 들었다. 물론 그동안 이 녹음을 구입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가격이 마음 약한 사람 심장마비 걸릴 수준이어서 이왕 40년대 녹음이 있는 바에 조금 기다려보자고 했다가 오늘날까지 왔던 것이다. 그간 음반 구입을 많이 망설여 왔었나보다. 2010년에 염가반으로 최초 발매를 한 것을 10년만에야 알았으니.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이어폰을 꼽고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오중주를 선택하려다 손가락을 잘못 움직여 베토벤의 14번 현악사중주를 들으며 출근을 하고 있었다. 이 때 들었던 음원이 바릴리 사중주단의 녹음. 당시까지 듣기는 가끔 들었지만 남들이 좋다 하니까 그냥 좋은 곡인가 싶었던 것이 갑자기, 고막의 진동을 통해 가슴을 콱 찌르듯이 절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막 50세가 된 추운 날 아침이었다.
  나는, 다른 글도 잘 쓰지 못하지만, 음악을 듣고 느낀 감정을 글로 쓰는 일을 제일 힘들어 한다. 음악 공부를 조금 했으면 약간의 전문용어를 섞어서 어떤 이유 때문에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마음에 와 닿는지 훨씬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내게 그런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문학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나은 것이 대학 2학년 시절까지 교양국어 같은 걸 통해 글을 읽는 방법 정도는 깨우칠 수 있었잖은가. 더군다나 음악이라는 장르는 문학이나 회화, 조각, 무용 등 다른 예술과 달리 자연이나 삶을 모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정서에 호소할 수 있어 현악사중주를 들으며 청자가 느끼는 감정, 감동, 흥분 같은 것을 구체적인 단어로 묘사하는 일이 진짜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이렇게 음악을 묘사하는 단어, 특히 형용사의 부족은 숱한 필자들로 하여금 공허한 수사로 음악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고 하게 만들었다. 단어의 부족 현상에 열을 받은 한 시인이 스스로 두껍고 겁나게 비싼 화려 장정의 책을 낸 바 있으나 허망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지금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이 1958년부터 61년까지 컬럼비아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여덟 장의 CD를 듣고 감상을 쓰려는 순간의 난감함을 고백하려고 한다. 그것도 다른 작품도 아니고 쉰 살에 접어들고서야 비로소 듣기를 허락한 베토벤의 (특히 후기) 사중주에 관해. 음악이란 무엇일까. 악보를 읽는 것만이 진정하게 작곡가와 소통하는 길이다. 우리가 음악이라 생각하고 듣는 것은 작곡가와 청자 사이에 연주자라는 매개가 끼어들어 작곡가가 오선지에 그린 악보를 그들이 해석한 결과물을 듣는 일이다. 그것도 또 녹음을 듣는다면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가 한 번 더 개입을 한 것. 내 귀로 여태까지 들어본 모든 기계는 특별히 현악기의 음색을 완벽 ‘비슷하게’ 들려주지 못했다.
  거기다가 여태까지 가장 훌륭한 녹음이라고 단정하고 지내던 바릴리 사중주단의 베토벤 현악사중주와 극명하게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연주하는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연주를 듣고, 독후감이 아닌 소감을 쓰려하니 여태까지 A4 용지 한 장 분량 동안 변죽을 울리고도 시작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음악을 들은 소감을 쓰는 일이 어렵고, 그것도 가장 유명한 연주단의 두 연주를 비교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벽이 앞을 가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얘기해보자.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58~61년 연주에 비하면 바릴리 사중주단의 연주가 더 말랑말랑하다. 평온하다. 침잠한다. 느리다. 사색적이다. 단색이다. 소박하다. 은은하다. 천상의 기분이다. 곡을 내게 헌정한 느낌이다. 더 1 바이올린 위주라서 비올라와 첼로의 반주역할이 크다. 내가 듣기로는.
  주로 12번부터 16번 사중주와 <대푸가>를 후기 작품으로 구분하고 요즘 내가 제일 자주 듣는 곡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15번 3악장을 연달아 들어보면 이런 의견에 동의하실 줄 믿는다. 물론 호오를 분명하게 이야기해보라고 강요하면 그동안 귀에 익어서 그런 줄은 모르겠으나, 내 취향으로는 바릴리 사중주단의 연주가 더 편하다고 말하겠지만, 확실한 건 부다페스트의 이 음반도 바릴리에게 최고의 자리를 양보할 마음이 조금도 없을 거란 정도로만 이야기하자.
  언제나 음악을 문자로 말하는 건 어렵고 어렵다.

 

부다페스트 사중주단, 베토벤 현악사중주 15번 3악장



  * 이렇게 전곡 녹음을 구입하면 좋은 것이, 여간해 듣지 않는 숨겨진 곡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는 초기 작품 가운데 몇 몇 곡 속에 정말로 “숨겨진” 낭만성이 놀랄 만하다.


  * 음악이란 것이 신기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왜 이 연주가 좋은지 이야기하기는 무척 곤란하지만, 한 번 진짜(라고 청자가 느낀 연주)를 들은 후에 다른 연주단의 연주를 들으면, 그게 주관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단번에 ‘에이, 이건 아니다.’ 하는 감정이 확 든다는 거. 그래서 보편적으로 특정 작품에 관해 소위 ‘명반’이 탄생하는 것일 게다.

 

위에서 얘기한 바릴리 현악사중주단의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집.

나는 전곡이 아니라 개별 CD들로 후기 곡들과 일부 중기곡만 가지고 있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02-2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이 앨범 저도 몇 년 동안 보관함에 담아두기만 했는데, 그렇단 말이지요? 올해는 꼭 사야겠습니다. ㅎㅎ (사실 알라딘에서 1년에 한 번 수입 앨범 할인전 할 때 이 앨범은 2만원대에도 살 수 있습니다. 쿨럭;;)

Falstaff 2020-02-27 14:21   좋아요 1 | URL
옙. 이건 정말 물건입니다!
근데... 2만원대... 아, 차라리 듣지 못했으면 좋았을 것을.... ㅋㅋㅋㅋ

oren 2020-02-27 1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음악은 거의 매일 듣고 살지만, 막상 그 음악을 언어로 표현할라치면 언제나 막막하기만 하더군요. 그런데, 그토록 표현하기 힘든 음악도 어떤 이들은 어찌 그리 잘도 표현하던지, 그런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부러워 죽겠더군요.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가운데 14번은 <마지막 사중주>를 본 이후 언제 들어도 가슴을 흔드는 곡이 되었더랬지요. 보름쯤 전에도 어떤 이가 스마트폰으로 그 음악을 듣고 있길래, 참 좋은 음악 들으시네요. 베토벤의 어쩌구 저쩌구 했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고 좋아하더군요.^^

https://blog.aladin.co.kr/oren/6529278

Falstaff 2020-02-27 20:07   좋아요 2 | URL
14번 사중주는 무려 7악장을 한 번의 쉼도 없이 연주해야 하는 난곡이라고 합니다. 듣기엔 후기 작품 가운데서는 말랑말랑하니 좋습니다만 연주자들은 죽어나가는 곡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얘기하신 영화를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렇네요. ^^
아직까지 아쉽게도 전 음악을 잘 표현한 글을 읽어보지 못했답니다. 비극입니다. ㅠ

oren 2020-02-27 20:28   좋아요 2 | URL
니체만 하더라도 그 어떤 음악평론가 못잖게 숱한 음악가들과 그들의 음악작품에 대해 예리한 글들을 많이 남겼던 듯합니다. 바그너를 비롯,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슈만, 쇼팽, 리스트, 드뷔시, 비제, 롯시니 등등의 음악을 어쩌면 그토록 예리하게 파고드는지 저는 정말 감탄을 거듭했더랬습니다.
* * *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바꾸어보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가득 차 먼지 속에 가라앉을 때 상상력을 가지고 물러서지 말라. 그러면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 자의 혹은 ˝파렴치한 유행˝이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고하고 적대적인 모든 구분들이 부서진다. 이제, 세계의 조화라는 복음에서 각자는 자신의 이웃과 결합되고, 화해하고, 융해되어 있음을 느낄 뿐만 아니라, 마치 마야의 베일이 갈가리 찢어져 신비로운 ‘근원적 일자(一者)‘ 앞에서 조각조각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웃과 하나가 됨을 느낄 것이다. 인간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현한다. 그는 걷는 법과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춤추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가 마법에 걸려 있음이 그의 몸짓에 나타난다. 이제 짐승이 말을 하고 대지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것처럼, 그로부터 초자연적인 것이 울려 퍼진다. 그는 스스로를 신으로 느끼며, 마치 꿈속에서 신들이 소요하는 것을 본 것처럼 그 자신도 황홀해지고 고양되어 돌아다닌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예술 작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원적 일자의 최고의 환희를 위하여 전체 자연의 예술적 힘은 여기 도취의 소나기 아래서 스스로 나타난다.

- 니체,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장

Falstaff 2020-02-28 09:05   좋아요 2 | URL
니체 역시 음악을 이야기한 것이라기 보다, 음악을 매개로 자신의 철학을 설파했습지요. 그냥 니체의 문장과 특유의 철학적 논의, 단문을 엮어서 자신만의 서사를 만드는 일 같아서요.
저는 한 번도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디오니소스를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을 추앙한 환희의 송가를 디오니소스와 연결시켜 들을 수 있는 철학자, 신학자는 망치를 내려쳐 신을 살해해버린 니체 말고는 없을 겁니다.
니체가 평한 바그너도 그렇고 비제도 그렇고, 그는 음악을 자신의 철학을 위한 한 제재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만 제가 잘 알지 못해서요. 니체도, 음악도.

* 민음사 역사서의 교정 교열에 관한 건, 맞춤법 이야기가 아니고요,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정을 봐서 사실 내용이 엉망이 된 일을 이야기했던 겁니다. 주로 나라 이름 때문에요. 秦과 晉, 衛와 魏 이런 것들이요. ^^;;

oren 2020-02-28 12:34   좋아요 2 | URL
니체가 음악을 메타포로 철학을 설파했다는 말씀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단순히 자신의 철학을 위한 재료로서 음악을 이야기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었고, 직접 작곡까지 할 정도로 ‘음악예술‘에 대해 깊은 조예를 지녔던 인물로 보입니다. 저는 언젠가 우연히 ‘니체가 작곡한 음악‘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유럽에서는 니체의 음악작품을 연주하는 음악회가 심심찮게 열린다고도 하더군요.

혹시나 해서, 조금 전에 ‘니체와 음악‘에 관련된 책은 나온 게 없나 살펴봤더니, 그럴 듯한 책이 한 권 나와있네요. 알라딘 책 소개에 나와 있는 내용 일부를 덧붙입니다.^^

* * *

니체가 크게 은혜를 입은 중요한 ‘스승’ 쇼펜하우어가 그랬듯이, 니체도 음악적 메타포를 자주 동원한다. 건반, 끈의 진동, 불협화음, 화성, 선율의 메타포…… 이 메타포는 그의 말을 꾸며주고 설명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음악은 생(生)의 메타포다. 태초의 인간과 문명이라는 화성(和聲)의 마그마, “심히 불안을 자아내는 근음(根音)”에서 떠오르고 차츰 분명해지는 선율에서 “자유로이 제멋대로” 나아가며 의욕과 “인간의 완전한 의식의 욕망”을 우리가 알아본다면, 음악은 생이 마땅히 취해야 할 모습의 메타포다. 그 음악이 정점에 도달할 때, 인류가 때때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보게 되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 “강력한 개인성”은 음악을 이루는 모든 구성 요소의 “지속화음”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

따라서 우리는 니체가 자기 글을 악곡과 동일시하여 『도덕의 계보학』을 3악장짜리 소나타라고 말할 때,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일종의 교향곡이라고 말하면서 이 책 첫 권을 베토벤 교향곡 9번 의 첫 악구에 비유할 때, 이를 단순한 음악 애호가의 꾸밈이나 겉멋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아마도 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음악에만 해당할 것이다”라고 쓸 것이다. 니체는 확실히 “들음(聽)의 재생”을 전제한다. 그러나 니체는 늘 깨어 있는 귀로 읽어야 하고, 이건 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읽기는 무엇보다 듣기이기 때문이다.

- <니체와 음악> 중에서


* 민음사 역사서의 교정 교열에 관한 말씀이 그런 뜻이었군요.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