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주의자의 딸 - 유도라 웰티의 소설
유도라 웰티 지음, 왕은철 옮김 / 토파즈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을 읽고 웰티의 글이 마음에 들어 이미 품절을 넘어 절판 상태에 접어든 이 책을 헌책방에서 사 읽었다. 읽고 나서 생각하니 그렇게 하길 잘했다. 마음이 흡족하다. 웰티가 <낙천주의자의 딸>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은 것이 1973년, 64세. 이이의 본령은 단편소설에 있다고 책을 번역한 왕은철이 역자해설에서 말한 바, 길지 않은 장편인 이 책도 모두 네 부部로 나누어 각기 한 장면에 초점을 맞추는 형식을 취했다. 독자는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용이 서로 연결되는 연작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 작품의 매력은 소설의 형식에 있지 않고 주인공 로렐 핸드를 둘러싼 가족, 남편,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과 사람이 살아가며 겪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침착하고 쓸쓸한 시각으로 그려낸 것에 있다.
  세상에 누가 있어서 낳고, 자라고, (외)조부모를 떠나보내고, 부모를 여의고, 배우자를 먼저 보내는 일을 겪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웰티가 묘사한 주인공 로렐의 한 살이는 결코 특별하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고, 심지어 소설적이지도 않다. 아니, 아니. 먼저 작품의 스토리를 대강이나마 훑어보는 게 좋겠다.
  1부의 중요한 등장인물은 은퇴한 판사이자 전 시장, 71세의 메켈바 씨. 키가 크고 몸이 무거운 판사는 한 마흔 살 정도겠지만 더 젊어 보이기도 하는 아내 페이와 함께 집이 있는 미시시피 주 마운트 세일러스에서 기차를 타고 뉴올리언스의 안과전문의 코트랜드 씨를 방문한다. 한쪽 눈에 중요한 문제가 있으며 다른 쪽 눈은 당시만 해도 특별한 치료/수술법이 없었던 백내장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무남독녀 외동딸이자 과부인 로렐 핸드 역시 밤비행기를 타고 시카고에서 도착한 터. 안과의 코트랜드 씨는 고향이 판사와 같은 마운트 세일러스이며 그의 누나가 아직 고향에서 학교 교사를 하는데, 상처한 판사의 전처이자 로렐의 친어머니인 베키가 시집와서 제일 먼저 사귄 친구였던 터. 의과대학을 다니던 코트랜드는 학업 중 대공황기를 맞아 학교를 때려치우려 궁리를 할 곤고했던 시절, 판사를 지내던 메켈바 씨가 그깟 공무원 봉급이 몇 푼이나 되겠느냐만 코트랜드 씨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경제적으로 도와준 은인이기도 하다. 이런 코트랜드가 진료를 해보니 당장 망막수술을 해야 하고, 성공리에 수술을 한다는 전제로 약간의 시력을 가질 수 있다고 진단을 내린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환자는 꼼짝 말고 몇 주를 견뎌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 왔을 때, 뉴올리언스 시내는 화려한 축제를 시작하고 철없는 아내 페이는 절대 요양을 취해야 하는 남편에게 바가지 득득 긁으며 자신을 위해 몸을 움직여보라고 패악질을 부린다. 물론 페이는 늙은 남편이 누워 있기 시작했을 때부터 더 이상 살기를 희망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하필이면 환자의 팔을 끌어당기며 포악을 쓰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과부가 되어버린다.
  2부 부터는 간단하게 넘어가자. 2부는 제일 많은 분량으로 되어 있다. 시신을 마운트 세일러스에 있는 집으로 옮겨와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룬다. 다른 가족이 없다고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의붓딸 로렐에게 한 말과 달리 이웃 불럭 소령이 수술을 받기 바로 전에 판사가 가르쳐준 대로 페이의 어머니, 오빠, 조카 등을 불러 이들도 장례식에 참석을 하고, 페이는 점잖은 동네 예절을 깡그리 무시한 채 말 그대로 교양 없이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페이의 가족이 장례식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자 페이는 그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로렐이 집을 떠나는 날에 돌아와 더 이상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게 일정을 잡는다.
  3부는 집에 남은 로렐이 눈에 이상이 있어 앞을 못 보게 된 채 세상을 마감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어머니와 외갓집, 아버지와의 관계를 추억한다.
  4부는 휴가 중에 결혼하고 다시 해군에 복귀하자마자 가미카제 특공기의 공격을 받아 시신도 찾지 못한 남편을 기억하고 사람 사는 일에 대해 조금 생각하다가 집을 떠난다.
  내가 이렇게 일일이 작품의 스토리를 설명하는 건, 스토리를 이야기해봤자 진짜로 책을 읽을 분의 감상에 거의 방해를 주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 그러나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읽은 심사관들이, 다른 심사관도 아니고 미국 내에서는 방귀 깨나 뀐다는 퓰리처 상 심사관들이 <낙천주의자의 딸>에게 선뜻 상을 안긴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웰티는 작품을 통해 각자의 주변에 있는 것들과 모든 ‘나’의 관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것을 권하고 있다. 가까운 사람, 예를 들어 부모-자식, 부부, 친척, 친구, 이웃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배려해줄 뿐만 아니라 가끔은 자신도 알게 혹은 모르게 상처를 주는 존재들이란 것. 자신의 호의가 남에게는 무례로 보일 수도 있고, 분명히 나는 비아냥거렸는데 그걸 칭찬으로 접수해 고마움을 표시할 수도 있는 것이 인생,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관계이다. 그리하여 유도라 웰티가 이 잔잔하고 깔끔한 소설 <낙천주의자의 딸>에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선언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만나고 삶을 계속하는 것에는 사랑만이 아니라 미움도 함께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이 책의 미덕은 아버지의 죽음이란 흔한 주제에서 흔하게 보듯이 그리움, 슬픔, 우울, 후회 같은 싸구려 감상에 조금도 빠지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을까. 알수록 매력적인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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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2-25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도라 웰티, 몰랐던 작가의 좋은 작품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움으로도 삷은 계속된다. 아니 계속 한다 삶을. 주변에 있는 모든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는 문장에 바로 중고 구매했어요. 단편집도 같이 ^^

Falstaff 2020-02-25 09:2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언제나처럼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
저도 단편집 읽고 곧바로 헌책방 뒤진 거랍니다.

잠자냥 2020-02-2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도라 웰티 단편선에서 몇 작품 읽었는데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더 알고 싶어지는 작가더군요. 저는 다행히 검색해 보니 집 근처 도서관에 이 책이 있더라고요. 도서관 다시 문 열면(코로나19 때문에 문 닫았어요 ㅠ_ㅠ) 꼭 빌려서 보겠습니다.

Falstaff 2020-02-25 10:07   좋아요 0 | URL
헉, 도서관도요?
저도 오늘부터 마스크 쓰고 사무실에 앉았을려니 아주 힘드네요.

2020-02-25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0-02-25 10:37   좋아요 0 | URL
네 확진자 동선에 있어서 닫은 건 아니지만 미리 알아서 예방차원에서 2월 내내 닫았는데....지금 사태로 보니 왠지 3월도 쉽사리 열 것 같지는 않네요.

2020-02-25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25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20-03-12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는 여성 예술가의 습관(?)에 대한 책에서 마침 유도라 웰티 챕터 읽고 있었는데요?!?!!
그녀는 아침에 파자마 입은 채로 일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16살 때부터 산대요.그녀의 이상적인 하루는 손님이나 방해 없이 아침 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그후엔 버번에 물을 섞어 마시고 점심은 샌드위치에 콜라라고 합니다. 저도 점심 메뉴를 샌드위치로 ....

Falstaff 2020-03-12 12:37   좋아요 0 | URL
나이먹은 웰티겠군요.
이이는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엄마하고 함께 살면서 엄마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애를 많이 썼다고 하더라고요. 변변히 연애 한 번도 못한 채로요.
점심 맛나게 드셔요. 전 오늘 급식으로 순대국이 나왔더군요. 신기하게도 순대만 들어있는 순대국은 난생 처음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