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창공의 빛을 따라 ㅣ 암실문고
나탈리 레제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1월
평점 :
80쪽짜리 작은 책이다. 두어 시간이면 금방 읽겠지, 하며 펼쳤다가 여러 번 중단했다 다시 읽기를 반복하며 여러 날이 흘렀다. 아끼는 암실 문고의 신간이라서 하루라도 빨리 읽고 싶은 마음으로 서평단에 신청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서두른 것을 조금 후회한다. 이 글은 실패한 서평이 될 것이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병실을 지키며 암담하기만 한 앞날에 '거꾸로 뒤집힌 수태고지'라도 내려달라는 간절한 마음. 남편이 숨을 거두는 순간부터 그를 묻고 그가 없는 집으로 돌아와 그가 없는 일상을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글로 담았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과 완전히 뒤바뀐 일상.
그것은 거꾸로 뒤집힌 수태고지 (...)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고지이지만,
그럴 때도 우리는 말 안에 곧게 서 있어야만 하니, 그러니 말해 주소서,
15-16쪽
작가란 사람들은 참 징그러운 족속들이라는 생각도 한다. 다양한 책과 사상가를 인용해가며 극렬한 고통의 순간을 끝내 언어로 빚어 세상에 내놓다니. 그러나 이해는 된다. 레제에게 '말'은 중요했다. 죽음에 대한 선고를 고지 받아야 했고 남편과 죽음에 대해 말하며 작별해야 했고 남편이 남긴 말을 기억하고 모아두어야 했다. 그것이 레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애도의 방법이었으리라.
나는 내려가고, 또 내려가서, 보다 구체적인 곳으로, 보다 투명한 곳으로 나아간다.
날이 밝아온다.
나는 거꾸로 뒤집힌 하늘의 신선함 속으로 나아가고,
계속해서 나아가고,
창공의 빛을 따라 몸을 던진다.
76쪽
마지막 쪽을 읽고나면 오른쪽 면이 하얗게 비어있다. 책장을 넘기면 표지 사진과 나머지 절반이 양면에 펼쳐져있다. 또 넘긴 면은 온통 새카맣고, 면지 역시 새카맣다. '거꾸로 뒤집힌 하늘의 신선함 속으로 나아가, 창공의 빛을 따라 몸을 던진다'는 의미를 한참 생각하며 사진을 들여다 본다.
독자 각각의 경험에 따라 이 책은 다양한 결로 읽힐 것이라 생각한다. 격렬한 고통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낸 책이다. 누군가는 그 아름다움 자체에 반할 것이고 누군가에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쑤셔대는 자극이 될지 모르며 또 누군가에겐 위안과 공감을 얻는 치유의 책으로 읽힐 것이다. 내게는 지금까지 읽어본 암실문고의 책 가운데 감정적으로 가장 어렵고 힘든 책이었다. 그럼에도 읽어보라고 선뜻 내밀고 싶은 책이다. 암실문고는 늘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