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 헌사 - 원본비평연구 민족문학사연구소 정본총서 5
오장환 지음, 이기성 엮음 / 소명출판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오장환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정도로 배웠다. 북으로 갔다는 딱 한 가지 이유로 그의 이름은 오랜 세월 ‘오O환’, ‘오X환’, 이렇게 표기되었고 이이의 대표작이 어떤 시라는 것도 몰랐다. 세월이 흘러 6.29 선언이 나온 1987년에야 창비에서 오장환 전집을 출간할 수 있었으니, 52시간? 좋은 세월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심하면 일요일에도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시절에 어떻게 이이의 시를 읽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이이는 내 머리 속에 그저 이름만 ‘오장환’이라고 기억되고 있었는데, 그것도 ‘오창환’이란 이름의 괜찮은 직장 후배 덕분이었으리라. 어쨌든, 이이의 시집을 샀고, 드디어 첫 장을 열어 읽어보니, 어째 시들이 좀 삐딱하다.
  일단 시집을 다 읽고 ‘나무 위키’, ‘위키피디아’, 네이버 검색을 해봤다. 대개 문인을 소개할 때, “몇 년도에 어느 동네에서 아버지 누구와 어머니 어디 모씨 사이의 몇째 아들로 태어나” 식으로 표현함에도, 이이는 그냥 1918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고 만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오장환 편에서야 글의 중간에 “그의 초기 시는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과 도시에서의 타향살이” 운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이다. 서자, 첩의 아들이란 꼬리표가 평생에 걸쳐 얼마나 아픈 상처가 되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오장환보다 세 살 아래인 장용학도 그의 대표작 <원형의 전설>에서 주인공 이장李章을 사생아로 설정해 작품을 만들어, 이장을 통해 사생아로 태어나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운명인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났으니 오장환의 시어들이 어떤 때는 삐딱하고, 전체적으로는 퇴폐적 슬픔 속에 있음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내 취향은 아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성씨보(姓氏譜)>를 읽어보자.



 성씨보(姓氏譜)
오래인 관습 -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 온 일 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려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전문)


  서자 출신인 오장환이 내놓고 그까짓 족보란 것이 무엇이건데 사람을 우습게 보느냐고 일갈하고 있다. 이런 불만은 또 한 편으로 자신을 낳은 출신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향할 수도 있어, 역시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향수>에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어머니는 무슨 필요가 있기에 나를 만든 것이냐! 나는 이항(異港)에 살고 어메는 고향에 있어 옅은 키를 더욱더 꼬부려가며 무수한 세월들을 흰 머리칼처럼 날려 보내며, 오 오메는 무슨, 죽을 때까지 윤락된 자식의 공명(功名)을 기다리는 것이냐.” (후략)


  서자 신분으로 남들과 같은 인정을 받으며 살기를 포기한 오장환은 위의 시처럼 이항(異港), 멀리 떨어진 낯선 항구도시, 즉 ‘탈 고향’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다. 근본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똑똑하고 강건하고 지조 높은 슬픈 시인은 이래서 더 퇴폐스러운 고통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버리지는 않았을까. 이이는 일제 말기에도 붓을 꺾지 않았고, 그들에게 협력도 하지 않은 채 끝끝내 버텨냈다. “시인부락”의 동인이기도 하며 가장 친한 동무였던 서정주가 부일의 시를 쓰기 시작하자 다시는 만나지도 않았다. 시에서 카프 적인 경향성은 거의 보이지 않거늘 왜 1947년에 월북을 한 것일까.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현대시의 한 페이지는 거뜬하게 장식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0-09-11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자. 유럽에서도 심한 욕 중 하나가 이 서자같은 놈이라던데요 ㅠㅠ 오장환작가님! 기억해뒀다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0-09-11 16:27   좋아요 1 | URL
bastard, 서자, 잡놈, 악당, 개자식이 같은 말이잖아요. ㅋㅋㅋㅋ
저도 사실 잘 몰랐는데 몇 년 전부터 <왕좌의 게임>보면서 저절로 알게 됐습죠.
 
요셉과 그 형제들 5 - 먹여살리는 자 요셉 (상)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와 파라오의 친구이자 오른편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자, 궁인 또는 환관 페테프레의 집사로 10년을 지내 이제 스물일곱 살이 되었을 때, 요망한 난쟁이 두두의 꾐에 빠져 요셉을 짝사랑하게 된 여주인 무트-엠-에네트의 욕망을 좌절시킨 대가로, 일개 노예에 불과한 요셉은 죄 없이 저 이집트 변방 섬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진다. 페테프레가 요셉을 아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법적인 명예-아내의 이름을 더럽힐 수 없었으니. 《요셉과 그 형제들》의 마지막 책인 <먹여 살리는 자, 요셉>은 요셉이 수용소에 입소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숨을 거둘 때까지를 그리고 있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아버지 야곱에게 편애를 받은 열일곱 살의 철없던 요셉은 누구나 다 자신을 조건 없이, 심지어 본인들 보다 더 사랑하는 줄 착각했다. 그리하여 함부로 자신의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하고, 상속권을 의미할 수도 있는 베일 옷 입은 모습을 자랑한 대가로 삼 일 동안 마른 우물, 구덩이에 알몸으로 빠졌다가 은 20세겔에 이스마엘의 자손인 상인들에 팔렸다. 이번엔 요셉이 여주인의 욕망을 선한 의도로 다스려 자신이 여인의 비뚤어진 사랑을 교정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으로 인해 또 다른 구덩이인 수용소에서 삼 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마지막 책에서 가장 큰 주제는 “준비와 대비”다. 아주 오래 전, 아쉬타르 여신이 길가메시(책에서는 ‘길가메쉬’)의 사랑을 얻지 못하자 신들의 왕인 ‘아누’를 찾아가 복수를 청하기를,
  “하늘의 황소를 만들어주세요. 그 황소가 세상을 짓밟고 콧구멍에서 불을 내뿜어 온 땅이 말라붙고 들판이 완전히 폐허가 되게 해주세요.”
  아누가 이에 묻는다.
  “그러면 7년 동안 가뭄의 해가 다가올 것이다. 해가 짓밟고 불태워 기근이 다가올 것이다. 결핍의 해를 맞을 준비는 했느냐, 그때 먹을 양식을 제대로 쌓아두었느냐?”
  “준비는 다 했어요. 양식을 쌓아두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아쉬타르, 네가 큰 수모를 겪었으니 하늘의 황소를 내려 보내마.”
  위의 장면은 5권 39~40쪽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아쉬타르 여신은 분을 이기지 못해 펄펄 뛰는 와중에도 자신이 바라는 불짐승을 얻으려면 미리 대비를 해야 함을 이야기했다. 창세기를 읽어본 사람은 책의 앞머리에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 순간, 나중에 이집트와 중동지역 전역을 뒤덮을 기근을 대비하는 요셉이 생각날 것이다.
  또 하나의 키 워드는 “꿈.” 요셉의 별명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꿈꾸는 자”인 바에, 꿈을 해석하는 능력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하겠다.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오직 세상살이 하면서 세 번의 연애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풍채 좋은 40세 수용소장 마이-사흐메의 선처에 힘입어 행정조수로 일 년 동안 일하던 요셉은 단기간 수용 처분을 받은 두 명의 궁정 신하를 만나게 된다. 십 년 동안 페테프레의 집사로 있었던 안목으로 보아하니 이들은 파라오에게 간식과 빵을 주는 ‘멘페의 영주’와 파라오의 주방서기로 음료를 담당하는 ‘아보두의 태수’임을 알아낸다. 이미 다 늙어 오늘 내일 그저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파라오를 새삼스레 암살하기 위한 모종의 음모가 있었고, 이들이 음모에 연루가 되어 있는지 조사 중이라 조만간에 결판이 날 예정이란다. 이들이 한 날 각기 다른 꿈을 꾸고 궁금해 하던 차에 꿈 이야기를 들은 요셉.
  포도주 담당 주방 서기의 꿈만 예로 들자. 파라오와 함께 포도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덩굴손 세 개에 열매가 익기 시작하더니 탱글탱글 탐스럽게 자라나더라는 것. 자기는 왼손에 물이 반 정도 든 잔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포도즙을 짜 파라오에게 건네주었다는 꿈이다.
  요셉이 꿈을 풀기를, 잔, 맑은 물, 열매를 직접 따서 포도즙을 짜는 행위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공물을 의미하며, 세 개의 덩굴손은 3일을 뜻하여 사흘 후 생명의 물을 얻을 수 있단다. 게다가 파라오가 다시 그를 ‘테벤의 의로운 자’로 복권시켜줄 것이니, 그 때가 되면 파라오에게 요셉을 이야기하여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당부한다. 포도주 서기는 이에 기분이 좋아져 흔쾌히 약속을 하지만 요셉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미 두 번 구덩이 속에 빠져본 요셉은, 그가 역모에 관여하지 않은 이유가 경박하고 말도 많은 성격이라 공모자들이 이 사람을 끌어들이면 모의가 금방 탄로 날 것임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으니.
  정말 삼 일 후에 포도주 서기는 무죄방면 된 반면 빵 서기는 요셉이 정확하게 예언한대로 참수형에 처해진다. 이후 세월이 흘러 역모가 진압되자마자 파라오 아무호트페 3세는 숨을 거두고 아들이 왕좌에 올랐으나 나이가 차지 않아 일 년 동안 어머니, 즉 대비에 의해 수렴첨정이 이루어지다가 열여섯 살이 되어 정식 파라오의 업무를 시작한다. 이때 파라오 아멘호테프가 꿈을 꾼 것. 왕은 먼저 아직 권력의 맛을 완전히 떨치지 못해 아들을 조금 질투하고 있는 대비에게, 다음엔 대비의 권유에 의하여 남, 북 제사장인 ‘베지르’들에게, 이어서 요셉을 알고 있는 ‘테벤의 의로운 자’를 포함한 대신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지만 도대체 제대로 해석을 하는 인간이 없어 복장이 터지는 순간, 포도주 서기가 2년 전 자신의 꿈을 해몽해준 수용소의 행정조수 요셉이 번쩍 생각나 파라오에게 추천하고, 파라오는 즉각 사신을 보내 요셉을 데려오게 하니, 이 때가 요셉이 수용소에 보내진지 꽉 찬 3년이 되었다.
  파라오의 꿈. 강물 속에서 암소 일곱 마리, 황소는 하나도 없고, 진짜 튼실한 암소 일곱 마리가 나오더니 이어서 곧바로 흉해도 너무 흉한, 가죽과 뼈가 붙어 곧바로 굶어죽을 듯한 암소 일곱 마리가 뒤이어 솟아나와 먼저 나온 살찐 암소를 다 잡아 먹었단다. 살찐 암소를 잡아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흉한 암소들은 하나도 살이 붙지 않았다. 연이어 같은 날 또 꿈을 꾸었는데, 쟁기로 갈아엎은 검은 땅에서 일곱 개의 이삭이 솟더니 탱글탱글 황금빛 주렁주렁 열매를 맺더라는 것. 그러나 이어서 나온 또 다시 솟은 일곱 개의 이삭은 완전한 쭉정이로 다 말라붙어 죽은 거 같은데 동풍이 불어 쭉정이 이삭들이 풍성한 이삭에 닿은 순간 살찐 이삭을 다 먹어 치워버렸고, 그랬음에도 흉한 이삭이 통통해지지도 않더라는 내용이다.
  해몽은 다 아실 듯. 7년 연속의 풍년과 7년 연속의 기근. 요셉은 풍년이 들 때 양식을 저장하여 기근에 대비하기를 주장해, 왕의 정부에서 가장 중요한 농림부 장관이자 총리 수준의 자리에 올라 왕의 유일한 친구, 왕의 작은 아버지라 불리게 됐다는 거. 그러나 요셉의 진가는 기근의 시절에 있다. 파라오에게 제시하기를, 풍년이 들었을 때 충분히 비축한 양식은 기근이 시작되면 식량 무기가 되어 이집트 내의 토호세력과 속지들을 싼 값에 구입해 왕실의 재산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인근 국가의 모든 부를 다 흡수하여 이집트 역사상 가장 부유한 국가로 만들 수 있고, 심지어 왕이 경계해마지않는 ‘아문’ 신을 따르는 집단의 힘마저 뺄 수 있다는 비전vision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신을 추앙하는 거 역시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물론 이런 비전 속엔 꿍꿍이가 하나 있기는 하다. 언젠가는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이 떨어진 아버지 야곱과 열 명의 형들 역시 식량을 얻기 위해 이집트로 올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때가 바로 자신의 저 오래된 꿈, 열 개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을 향해 절을 하고, 태양과 달, 그리고 열한 개의 별 역시 자신에게 절을 하는 순간이리라는 것을.
  이 책 《요셉과 그 형제들》은 놀라운 작품이다. 그러나 내놓고 이야기해서, 쉽게 읽을 수는 없을 것. 구약성서 가운데 적어도 창세기를 미리 읽어두어 앞 뒤 관계 또는 이야기의 진행 정도를 알아두면 좋고, 신화학, 인류학적인 정보, 프레이저가 쓴 <황금가지>의 선독이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무턱대고 책을 덥석 들었다가는 낭패 보기에 맞춤하지만, 다 읽을 수 있으면 참 좋은 책 한 편 읽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듯. 나도 어제 책 다 읽자마자 독후감을 쓰는 대신, 큰 책 한 편 읽은 기념으로 축배를 먼저 들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0-09-14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성경 인물 중에서 요셉을 좀 좋아합니다. 좋아하는데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마는 잘 생겨서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런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셉 이야기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목이 여기에요. 요셉이 꿈을 해몽해준 포도주 담당 서기에게 자신을 탄원한 부분이요. 이 책에서는 요셉이 그가 자신을 잊어버릴거라는 암시가 있었나봐요.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더냐. 나의 복권을 예언한 사람을 어찌 잊을쏘냐. 그가 잊었기 때문에 후에 요셉은 파라오를 직접 만날 수 있었을거라 전 생각하거든요.
대작 읽으신것 너무 축하드립니다. 폴스타프님 리뷰 통해서 저도 좋은 책을 읽은 듯 합니다. 감사해요^^

Falstaff 2020-09-14 20:11   좋아요 0 | URL
이 작품에서도 요셉이 무지하게 잘 생긴 청년으로 등장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 넘어서까지 동정을 지키는 절제의 사나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포도주 서기의 경우엔, 초장부터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로 딱 찍어 예언을 합니다. 나라에 무슨 일이 있어 요셉이 아니라면 풀 수 없는 문제가 나와야 자신을 천거할 거라고요. 토마스 만은 신화학자가 아니라 소설가라서,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반역자가 아닌 것이 아니고, 반역을 꾀하는 무리가 같은 편으로 하면 자기들 비밀까지 몽땅 주위에 흘리고 다닐 인물이어서 반역의 무리에 끼지 못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저도 무릎을 탁, 쳤지요. ㅋㅋㅋㅋㅋㅋ
교인이시면 한 번 도전해보실만 할 겁니다. ^^
 
요셉과 그 형제들 3 - 이집트에서의 요셉 (상)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셉과 그 형제들》의 세 번째 책.
  토마스 만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생각났던 인물. 리하르트 바그너. 그의 작품들을 보면 구구절절 말이 많다. 사실 극에서 행해지는 일들에 객관성을 주기 위하여 행위의 근거 또는 먼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지만 처음 듣는 사람들은 단박에 나가떨어지게 만든다. 우스개로 비교하는 인물이 자코미니 푸치니인데, 푸치니라면 두 시간도 안 돼서 단박에 이놈 저놈 다 죽이고 피바다로 극이 끝났을 이야기를 바그너는 삼박사일 동안, 그것도 하루에 네 시간 넘게 관객들을 자리에 앉혀놓는다는 거.
  딱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이 그렇다. 창세기 39장 1절에 말하기를,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작가는 이 한 줄을 위하여 무려 240여 쪽의 지면을 할애했다.
  만의 이야기는 요셉이 알몸으로 던져져 갇힌 마른우물 또는 구덩이에서 구출된 것의 의미로 시작한다. 요셉은 열일곱 살의 나이로 구덩이에 빠져 스스로 죽은 몸이 됐다고 여긴다. 왜 그랬을까. 그동안 죽음으로까지 내몰릴 정도로 잘못 살았다는 자각이 든 것. 죽음에 이르는 잘못, 즉 죄의 이름은 ‘신뢰’였다. 사람을 무턱대고 믿는 일. 그들의 한계를 무시하고, 그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 형들의 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단을 향해 절을 한다는 등, 해와 달과 열 개의 별이 자신의 별에 절을 한다고 신이 나서 떠벌인 일. 눈치 없이 케토닛 파심을 입고 형들에게 자랑하는 눈 먼 행위 등. 타인의 한계를 무시하고 무리한 요구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무턱대고 존중해준 나름대로의 사랑이 결국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거다. 그 결과 손과 발이 묶여 마른우물 아래로 던져진 것으로 그때 자신은 이미 죽었으며, 이스마엘 사람들로 꾸려진 상단의 사위 ‘밉삼’에게 구출되어 어두운 터널 속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본 것을 다시 태어난 행위로 여긴다. 마른우물 또는 구덩이는 그에게 죽음의 장소이자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대지의 자궁이며 산도였다. 그리하여 첫째 형 르우벤이 없는 상태에서 상인들에게 은 20세겔에 팔렸을 때도 아무런 이의나 항의 없이 조용히 이를 수락했으며, 아버지 야곱이 사는 동네를 거쳐 끝없는 행진을 할 때 역시 상단을 탈출해 야곱의 집으로 도망하지 않았던 것.
  요셉을 산 상단의 노인은 천생 상인. 평생 세상 구석구석을 다니며 온갖 것을 다 경험한 이 늙고 현명한 상인은 먼저 자신의 노예이자 상품인 요셉의 품질을 확인한다. 노인은 요셉의 몸과 더불어 재주까지 산 것이니. 요셉이 글을 쓸 줄 알고 셈에 밝다는 말을 듣고 삼 일 안에 상단의 모든 물품의 목록을 정리해 가져오라 요구하고, 언변이 좋은 것을 알고는 자신의 잠자리에 잠이 잘 올 수 있도록 밤 인사를 하라하니, 요셉 가라사대,
  “가볍고 유쾌한 꿈들아, 주인님의 평화롭고 달콤한 단잠에 예쁜 수를 놓아다오.”
  당시가 기원전 20세기 가량. 거의 모든 즐거움은 이야기의 구전으로 전해지던 시대에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사람들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재주였을 수도 있다. 그래 노인은 날마다 다른 말들로 밤 인사를 할 것을 요구하고, 요셉은 주인의 명령에 따른다.
  “요람을 흔드는 한밤의 팔에 안겨 그 가슴에 머리를 묻고 달게 주무셔요. 어머니 품에 안겨 새록새록 잠자던 어린 시절처럼.”
  여기에 삼 일 후, 정말로 자신의 물품 목록과 수량을 각기 색이 다른 글과 숫자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온 것을 본 노인은, 이게 보통 물건이 아님을 알고 요셉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주기에 이른다. 왕의 오른편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자, 왕의 친구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자의 집에 그를 팔기로. 노인이 감히 왕의 친구라 불리는 자를 아는 건 아니고, 그자가 사는 저택의 집사, 개신교 창세기에 ‘가정 총무’라 불리는 ‘몬트-카브’라는 홀아비를 안단다. 아브라함 시절부터 이왕 신을 섬기려면 가장 힘이 센 신을 섬기겠노라며 주님을 선택한 핏줄답게, 요셉은 부채를 들고 있는 자를 칭송하는 의미에서 그에게 황금을 매달아준 왕이 누구인지 물어보았고, ‘넵-마-레-아문호트페-님무리아’라는 이름을 들었다. 세상에나. 가장 화려하고 영예롭게 이름을 드높인 왕, 혁혁한 명성과 함께 영원 속으로 사라진 왕들의 후손, 저 아래 세상, 진창의 나라이자 죽은 자의 나라의 파라오였다.
  여기까지도 성질 급한 독자들은 이야기가 늘어진다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이스마엘 사람” 가운데 애굽, 즉 이집트까지 가서 요셉을 팔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대상隊商이었을 것이고, 이집트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파라오의 친위대장 페테프레, 즉 보디발에게 접근할 정도라면 요셉의 능력을 독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터이다. 여기에 하나 더. 당시 이집트는 세상의 중심. 감히 변두리 가운데서도 변두리인 이스마엘 족 떠돌이 상인이 어떻게 친위대장과 대면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저택의 집사마저 간신히, 요셉의 주님이 배려한 덕에 만날 수 있게 되며, 더 이상 하인이 필요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구리 200데벤이라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팔리게 된 것. 그런데 토마스 만을 리하르트 바그너와 비교한 이유는, 이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대상 무리는 아시아, 아라비아 각처, 그리고 이집트 땅에 들어와 처음 밟은 고셈 지역 등의 성 쌓은 모습, 풍경, 특산물, 축제, 탈 것(낙타 또는 배 등), 국경과 도시를 지키는 병사와 세관을 통과하기 위한 그들과의 대화와 뇌물 상납, 상품 거래내역 등까지 모두 설명을 하는데, 좀 심했겠지? 그렇다. 심했다.
  하여튼 ‘오사르시프’라고 이름을 바꾼 요셉이 어쨌건 처음 본 이집트는 하下이집트의 스무 번째 주state로 소박한 육지라 할 수 있으나 풀이 우거지고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적당히 촉촉한 매우 비옥한 땅이었으니, 요셉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이곳의 살찐 초원을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벤야민을 비롯한 형제, 가족들을 불러 살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이 이집트 땅에서 반드시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하며, 이왕 서쪽 저승(이집트)의 나라로 갈 바에 일인자가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 열일곱 살짜리가. 대단하지? 역시 될 인간은 떡잎부터 다르다.
  이후에도 가히 장황하고 장대한 서술 끝에 드디어 페테프레(성서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들어간 우리의 요셉. 여기서 처음 만난 후원자는 난쟁이 세엔크-웬-노프레-네테루호트페-엠-페르-다문, 또는 베스-엠-헵, 또는 베지르, 또는 곳립.
  창세기 39장 7절에 말하기를,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페테프레 혹은 포티파르의 집에서 선량한 집사 몬트-카브가 죽은 이후에 그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는 긴 이야기는 모두 생략하고, 성서에 나왔듯이 보디발, 페테프레의 정실 아내 무트-엠-에네트가 요셉에게 반해 눈짓하고 동침하기를 청하는 장면으로 가자. 페테프레의 부모는 아버지가 ‘후이’, 어머니가 ‘루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이집트 사람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가문의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친 오누이가 결혼한 커플이며, 이들의 유일한 아들이자 자손인 페테프레는 거인의 풍모에 장사다운 힘을 지닌 완력의 사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부부관계를 ‘부글거리는 끓어오름’이라 일컬을 정도로 불결하게 보아 아들은 어두운 영역에서 끄집어내어 보다 순결한 자에게 바치려, 그만 양 다리 사이의 모든 돌출된 것을 잘라 궁신宮臣, 즉 내관, 내시로 만들어 파라오에게 바쳤던 거다. 그리하여 그가 맡은 친위대장이라는 호칭도 완전히 명예직이지 실제 친위대장의 역할은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남성’ 장교가 모든 권한을 갖고 있던 상태였다고 상정했다.
  아무리 잘 생기고 현명하고, 똑똑하고, 말을 잘 하는 요셉일지언정, 왕의 친구, 훗날에는 ‘왕의 유일한 친구’로 격상되는 대갓집 중의 대갓집 마나님이 한갓 노예에게 눈길이나 줄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토마스 만은 또 다른 난쟁이이자 남성의 기능은 정상이라 보통의 여자와 혼인하여 키가 큰 아들 둘을 낳은 악당 난쟁이 ‘두두’를 등장시켜 친위대장부인이자 여주인 무트-엠-에네트의 눈길을 요셉에게 이끌리게 하고, 스스로 가운데 끼어 부인의 마음에 요셉을 깊게 새기게 만들며, 심지어 연서를 써서 요셉에게 건네도록 종용하고 전달까지 맡긴다. 여태까지는 동정녀로 남자를 전혀 모르다가 평생 처음으로 연정을 품게 된 궁신, 환관의 아내에게 당시 기준으로 중년의 나이에 찾아온 첫사랑, 첫 번째 육욕의 대상으로 전환해버린 요셉. 무트-엠-에네트를 향한 토마스 만의 시선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문서(구약성서)에서처럼 오직 자신의 육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눈짓’은 아니었다고 변호한다.
  그렇다. 이것이 연대기와 소설작가의 차이점이다. 연대기에 나와 있는 것 말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상황을 사람 사는 이야기, 그것도 타당할 수밖에 없는 전개과정을 상상하여 그럴 듯하게 만들어내는 이들을 우리는 소설가라고 부른다.
  토마스 만. 장황하고 장황하다. 간혹 질리기도 하고, 너무 오랜 시간 책을 들여다보느라고 피로해진 눈, 시각 때문에 고단한 때를 맞춰 장황한 장면이 나오면 확 질려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토마스 만을 읽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누가 있어 이리도 재미있게, 감히 성서의 행간을 뒤져 매력적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0-09-06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이게 3권에 대한 리뷰군요. 너무 재미있습니다!!!
기독교에서, 혹은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요셉에 대해 ‘택함 받은 사람이다‘,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거든요. 100에 98정도요. 근데 비교적 최근(15년 전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에는 요셉의 ‘눈치없음‘에 대한 또 다른 해석도 나오더라구요. 최초로 이야기했던 설교자는 기억이 안 나는데, 요는 요셉은 그렇게나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다는데 방점이 찍히지요. 요셉 좋아하는, 그의 스토리를 사랑하는 기독교인으로서 이 페이퍼가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네요. 저는, 이 시리즈를 다 읽을 엄두는 안 나고요. 폴스타프님이 올려 주시면 리뷰 정독하는 걸로 갈음하려 하오니, 부디 또 리뷰를 올려주시면 매운 반갑겠습니다^^

Falstaff 2020-09-06 20:12   좋아요 0 | URL
아, 기독교인이시라면 별 어려움 없이 읽으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
이제 독후감은 마지막 책冊, 하나 남았습니다. 아주 흥미롭더라고요. 원래 창세기가 출애굽기와 더불어 재미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성서 속에 생략되어 있는 사람 사는 모습을 이리도 적묘하게 잘 묘사를 하는지, 역시 토마스 만, 이름 값이 헛되지 않더라고요.
다음번엔 상인, 정치인, 책략가로서의 요셉이 등장합니다. ㅎㅎㅎ 정작 읽기를 마치니까 좀 아쉬운 감정도 들더라고요. ㅋㅋㅋㅋ
 

  오늘 오후 다섯 시 부터 쐬주 깠습니다. 술꾼들이 대개 그렇듯이 술잔 넘기는 속도가 빠른 편이라 좀 취했군요. 근데 마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다 읽었거든요,.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모두 여섯 권을 다 "해치웠습니다."

  어떻게 생긴 책이냐 하면, 이렇습지요.

 

 

 

  다 읽으면 당연히 즉시 독후감을 써야 하는데, 천만의 말씀을. 일단 장광설의 대명사 토마스 만의 여섯 권짜리 장편소설, 무려 3천 쪽에 달하는 소설을 읽어치웠다는 것을 자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내자에게 쇠고기 좀 사와, 하고 일단 공양을 바친 다음, 하여간 정말 있다면 , 분명히 없을 것이지만, 쇠고기 탄 미세먼지를 흠향하신 그분 다음으로 한 판 구워 쐬주 한 병, 만 원에 네 캔하는 맥주 한 캔 깠습지요. 크하하하하..... 누가 있어서 비 기독교인이자 유물론자이기도 한 폴스타프가 이 책을 완주할 줄 알았겠습니까!

  근데, 이거 정말 읽을 만합니다. 구약, 창세기 안에 등장하는 요셉이 유머와 장난끼의 대명사일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또한 그것을 유머로, 장난으로, 짓궂은 하느님의 예견된 순서로 해석하는 토마스 만의 입담이 말씀입지요, 아후, 이 책(들)을 영업할 수밖에 없게 만들더라니까요.

  내친 김에 토마스 만의 소설 올 클리어에 도전해야겠습니다. <대공전하>, <선택된 인간>만 더 읽으면 되는데, 번역한 게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 <대공전하>는 아직 번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택된 인간>이라도 올해 안에 읽어야겠습니다.

  자꾸 읽을 책만 많아집니다. 그게 인생입지요.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0-09-05 19: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호! 만리장성을 종주 하셨네요! 대단하십니다!ㅎ 기념으로 2차도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완독 축하드리고 즐건 주말되십시요!ㅎ

Falstaff 2020-09-05 19:18   좋아요 1 | URL
음하하하.... 고맙습니다. 일품 안동소주 40도로 집구석에서나마 2차를 즐기겠습니다. ㅋㅋㅋㅋ

초딩 2020-09-05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의산 중 한권을 아름다운 가게에서 업어 왔는데 한권오 무지 두꺼워 모셔만 두고 있습니다.
우헐 6권에 삼천페이지!!!
자축 경축 하셔도 되겠네요,~~~
아 저도 소주로 소독하고 파요 ㅎㅎㅎ
축하드립니다~

Falstaff 2020-09-05 20:14   좋아요 0 | URL
에이, 별거 아니예요. 마의 산, 그냥 해치워버리세요.
기껏해야 소설밖에 더 됩니까. ㅋㅋㅋㅋ
읽으신 다음에 장하게 쐬주 한 잔 하시면 되는 겁지요. ^^

박균호 2020-09-05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시네요. 이 책이 대단한 작품이라는 소리만 듣고 감히 읽어 볼 엄두를 못내고 있는 처지라서요.

Falstaff 2020-09-06 06:56   좋아요 0 | URL
대단하긴요, 그저 독자일 뿐인 걸요.
하여튼 대작을 읽은 김에 축배 한 잔 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서요. ㅋㅋㅋㅋ
 

 

커피? 저는, 100 그램에 만 원 넘어가는 건 절대 내 돈 주고 사마시지 않겠다,는 주의입니다. 그래 알라딘이 고맙지요. 저렴하게 다양한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까요.

 

제가 요즘 즐기는 커피 보실래요?

 

  오른쪽부터 보겠습니다. 정확하게 100그램에 만 원짜리, 근데 부가세 별도. 그럼 만천 원짜립니다. 200g 이니까 22,000원. 당연히 제 돈 주고 안 샀습니다. 작은 아이가 뭐 특별 에디션이라나 뭐라나 해서 사다 주더군요. 자세히 따져보니 '예가체프'입니다. 다락방님의 아우님이 예가체프에서 청국장 맛이 난다고 했답니다. 이 예가체프, 상당히 덜 볶은 커피에서 정말로 청국장 냄새가 납니다. 커피도 영어로 하면 coffee bean, 커피 "콩"이잖아요. 적당히 열을 가하면 진짜 청국장, 된장 냄새가 난다고, 마누라가 알려주더군요.

  몇 년 전, 나이 먹었다는 이유로(정말 딱 찍어서 이런 이유를 대더라고요) 회사에서 대기발령 받고 인사담당자에게 "들어올 땐 회사에서 뽑았지만 나갈 때는 내가 결정할 테니까 너무 신경들 쓰지 말고 한 6~7년 편안하게 기다려."라고 말했을 당시, 아내가 몇 달 후 허리에 손을 척, 얹고 하는 말이, "오늘부터 나도 바리스타야. 드러워서 회사 다니기 싫으면 당장 때려 치워. 내가 카페라도 해서 먹여 살릴게." 했거든요. 에휴, 젊어서 둘 다 성질머리 드러웠을 때 팍 갈라지지 않기 다행입니다. 그죠?

  오른 쪽에서 두 번 째, 비료푸대 같은 봉지에 담긴 것이 제가 여태까지 커피 사다 마신 이 동네 커피 가게, 야매로 자기들이 볶아 파는 무면허 가게에서 사 온 예가체프입니다. 제 취향을 알아서 하얗게 태운 백탄 숯을 사용해 직화로 볶아주는데 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근데 저게 마지막 작품입니다. 이 사람들이 두 명이 동업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머리끄덩이 잡고, 둘 다 남자들입니다, 말이 그렇다 이거지요, 대판 싸우고 갈라서서 깨졌습니다.

  백숯에 살짝 볶아 산미도 세고, 고소한 맛도 일품이고 그랬는데, 저 커피를 살 당시 아내가 데리고 간 아줌마가, 자기는 쓴 게 좋다고 좀 달달 볶아달라고 해서 그만 마지막 저 봉지 안의 커피는 쓰기만 한, 개떡이 됐습니다. 이젠 살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커피 볶는 이가 일본에 유학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도쿄에서 이름난 커피 집에 취직해 그것만 배우고 온 한량이라고 합니다.

  왼쪽에서 두 번 째가 이번에 알라딘에서 산 "엘살바도르 엘 보르보욘" 8월 24일 볶은 겁니다. 100자 평에도 쓴 적 있듯이, 그저 씁니다. 쓰기만 합니다. 좀 덜 볶은 게 있으면 한 번 더 시도해보겠지만 알라딘 커피공장에 대중이 제일 좋아할 로스팅 방식으로 레시피가 있어서 제가 원하는 건 나오지 않을 거 같습니다. 앞으론 선택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

  맨 왼쪽이 "시다모 난세보." 알라딘에서 산 제일 맛난 커피였습니다. 적당히 시고 적당히 고소하고 적당히 쓴 커피. 가격대비 만족도 최고였습니다. 근데 잘 보시면 볶은 날짜가 7월 2일. 이상하지요?

  속에 든 커피는 정작 시다모가 아니고, 100g에 무려 9만9천원 하는 '블루 마운틴'입니다. 당연히 제 돈 주고 산 거 아니고요, 마누라가 어디서 한 50그램 얻어온 겁니다. 맛이요? 개떡이더군요. 왜 그런고 하면, 만일 저한테 100g에 10만 원 짜리 커피가 있다고 쳐보세요. 그거 함부로 마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실 있기는 있지만 그저 장식용이 되고 마는 겁니다. 저것도 커피 볶고 아무리 짧게 잡아도 1년은 넘었을 겁니다. 아끼고 아끼고 또 아끼다가, 똥 된 겁니다. 그러니 맛이 있을 턱이 없지요. 비싼 몸으로 제 집에 굴러와서도 겨우 한 번 갈리고, 이후 다시는 손도 대지 않으니 나중엔 갈려서 삼겹살 먹은 다음에 프라이 팬 세척용으로나 쓰일 거 같습니다.

  하여간 제 주의는, 100g 당 만 원 넘는 커피는 안 마시겠다, 하는 겁니다.

 

 

  이 커피가 젤 좋은데, 계속 판매하지는 않겠지요?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9-0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동생은 청국장, 저는 된장 혹은 간장 향을 느꼈는데 그 커피에 대해 그런 평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요. 제 동생과 저 밖에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도 시다모 난세보 좋아서 몇 번 사 마셨어요. 그게 일등이다가 지금은 엘 보르보욘하고 막상막하에요. 저는 엘 보르보욘도 너무 좋았어요!
시다모 난세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니.. 지금은 이번달의 커피인 코스타리카 라스 로마스 마시고 있는데, 이거 다 마시면 시다모 난세보 마셔야겠어요.

Falstaff 2020-09-04 09:50   좋아요 0 | URL
저는 사진처럼 한 번에 보통 세 종류의 커피를 장만해서 이것 저것 마시는 게 좋더라고요. 아내가 몰래 타서, 이게 무슨 커피? 하고 맞추기 장난, 만 원 내기도 합니다. ㅋㅋㅋ
저도 라스 로마스도 한 번 마셔봐야겠네요.
근데 솔직히, 인스턴트도 좋아요. 특히 맥심 부드러운 블랙. ㅋㅋㅋㅋ

잠자냥 2020-09-0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시다모 난세보는 정작 안 마셔봤네요. 판매 중지되기 전에 한 번 마셔봐야겠어요.
두 번째 그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는 커피 맛 궁금합니다. 백탄 숯을 사용해 직화로 볶는 커피콩이라.... 생각만 해도 기막힌 맛일 거 같네요.

Falstaff 2020-09-04 10:11   좋아요 0 | URL
판매 중지는 한참 있다가나 되지 않을까요? ㅋㅋㅋㅋ 제가 오버가 좀 심했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들 다시 화해하거나(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세상일을 누가 압니까?), 커피 볶는 남자가 다시 일을 시작하면 전화번호 가르쳐드릴께요. 일 시작하면 분명히 저한테도 연락이 올 거니까요. ^^

hnine 2020-09-04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기엔 아쉽습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개성 뚝뚝 드러나게 글을 잘 쓰시는데 말입니다.
그나저나 커피라면 전 그저 맥심 모카이니, 할 말 없고요.

Falstaff 2020-09-04 10:5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개성은 모르겠는데, 잘 쓰는 글은.... 아닌 거 같습니다..... 창피한 일입니다만, 제가 쓴 콩트도 하나 올린 적 있답니다.
https://blog.aladin.co.kr/729554277/10737554
저도 맥심 부드러운 블랙 봉지 커피 좋아해서 회사에서 마시고요, 집에는 인스턴트 테이스터스 초이스도 있습니다! 간편해서 좋아요.

단발머리 2020-09-04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시던 맛난 커피숍 없어지게 되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둘이 싸운 이야기 자세히 듣고 싶은데 말이지요. 극적힌 화해를 기대하면.... 너무 늦었나요?
전 알라딘 커피 하나씩 먹어보고 있는데 아직 맛을 감별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제 먹은 코스타리카가 너무 신선하고 고소해서 알라딘 다시 봤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9-04 12:30   좋아요 0 | URL
아, 거기는 커피숍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상가 2층 구석에서 커피만 볶는 야매집이었습니다. ㅋㅋㅋㅋ 아닌게 아니라 커피 집하다가 말아 먹었기도 했고요.
이 양반들이 다른 먹는 장사를 하느라 한 명은 자본을, 다른 한 명은 노동을 대기로 했는데 때를 제대로 맞춰 그 때가 코로나 창궐 1주일도 아니고 3일 전, 2월 말이었습지요. 쫄딱 망하면, 부부도 이혼을 하는게 요즘 세월인 바에 동업이야 뭐 저절로 깨지게 된 것입지요.
게다가 둘 다 어려서부터 부잣집 도련님 출신이라 지금이야 쫄딱 망해서 벌어 먹을 걱정을 하고 있지만 도무지 참을성들이 없어요. 에휴, 진작 강남에 건물이나 하나 사지들 말입니다.

coolcat329 2020-09-04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떡‘ ‘똥‘ ㅋㅋ 이런 묘사 참 제가 폴스타프님 글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ㅋㅋ
저는 알라딘도 비싼듯 하여 더 싼곳에 정착했는데 주변에 추천하니 모두들 좋아합니다. 비싸다고 맛있는게 아니더라구요.

잠자냥 2020-09-04 14:18   좋아요 1 | URL
알라딘은 어떻게 생각하면 비싸지 않은 게, 커피 사고 100자평 올리면 담달에 천 원 적립금으로 돌려주고, 플래티넘 회원은 다달이 커피 3천원 할인권 주고, 커피 스탬프 10개 모으면(새로 나온 커피 사면 무려 스탬프 4개 줍니다. 그러니까 10개 모으는 건 금방이죠) 적립금 4천원 또는 5천원 할인권 주니까요. (알라딘 무슨 영업사원 같네요;;)

Falstaff 2020-09-04 14:44   좋아요 1 | URL
쿨캣님: 에구... 저런, 저런. 저는 그런 단어 좀 안 쓰려고 나름 애쓰는데 불쑥 튀어나오는 건데요. ㅋㅋㅋㅋ 그래도 흉하다 하지 않고 좋아하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잠자냥님: 억, 100자 평이 그렇습니까? 레알 몰랐는 걸요! 다달이 커피 3천원 할인권은 또 뭐예요? 이런 것도 알아야 챙겨 먹지 모르니깐 영... ㅋㅋㅋㅋ 근데 정말 커피 할인권은 어떻게 받는 거예요? 저도 플랫 등급입니다만....

잠자냥 2020-09-04 16:02   좋아요 1 | URL
알라딘 pc화면에서 마이페이지 눌러보면.... 오른쪽 상단에 영화할인권/커피원두 할인쿠폰 있어요. 그거 클릭해보세요. 이걸 아직 모르셨다니.. ㅠㅠ 전 다달이 3천원 할인 쿠폰 받았는데... (좀 더 쉽게 보자면... 멤버십 등급 : 플래티넘 --- 자세히 보기 이거 클릭해보세요. 그럼 바로 ‘영화/커피원두 할인쿠폰 받기‘떠요)

100자평 이벤트는 새로 나오는 원두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코스타리카 라스 로마스‘ 평 남기면 담달 초반에 적립금 천원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다락방 2020-09-04 16:04   좋아요 0 | URL
헉.. 다달이 커피 할인권 언제부터 제가 안쓰고 있었을까요..까맣게 잊었어요. 아 밥통 ㅠㅠ

잠자냥 2020-09-04 16:05   좋아요 0 | URL
100자평 이벤트 페이지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09725

잠자냥 2020-09-04 16:06   좋아요 0 | URL
캭.... 이분들이... ㅠㅠ 아, 아깝다... 내가 왜 아깝지;;; 다락방 님 커피도 많이 사셨으면서... ㅠㅠ

다락방 2020-09-04 16:07   좋아요 0 | URL
아 저는 그 존재도 알고 사용한 적도 있는데 언제부터 잊었을까요? 아 억울해서 속쓰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 요 며칠간도 드립백이랑 원두랑 엄청 샀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속쓰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 억울해서 지금 또 커피 사야겠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0-09-04 16:1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탬프 10개 금방 모으시겠네 ㅋㅋㅋㅋㅋㅋ 그땐 또 꼭 잊지말고 적립금 4천원이나 5천원 쿠폰으로 교환하세요!!

Falstaff 2020-09-04 16:17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이런 참 나 원, 아주 똥을 쌌네요 그동안. 으 척척해... ㅋㅋㅋㅋㅋ
앗참. 고맙다는 말씀을 안 드렸네요. 고맙습니다. 복 받으실 겨. ^^

초딩 2020-09-04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잠시 쉰다고 북플 스크롤 하다 몸을 기울였는데, 이렇게 댓글 달고 있습니다
ㅎㅎㅎㅎ 너무 잼있어요~~~!!!!
봉다리들의 사연 잼있어요 ㅋㅋㅋ

Falstaff 2020-09-04 14:5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