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 헌사 - 원본비평연구 민족문학사연구소 정본총서 5
오장환 지음, 이기성 엮음 / 소명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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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장환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정도로 배웠다. 북으로 갔다는 딱 한 가지 이유로 그의 이름은 오랜 세월 ‘오O환’, ‘오X환’, 이렇게 표기되었고 이이의 대표작이 어떤 시라는 것도 몰랐다. 세월이 흘러 6.29 선언이 나온 1987년에야 창비에서 오장환 전집을 출간할 수 있었으니, 52시간? 좋은 세월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심하면 일요일에도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시절에 어떻게 이이의 시를 읽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이이는 내 머리 속에 그저 이름만 ‘오장환’이라고 기억되고 있었는데, 그것도 ‘오창환’이란 이름의 괜찮은 직장 후배 덕분이었으리라. 어쨌든, 이이의 시집을 샀고, 드디어 첫 장을 열어 읽어보니, 어째 시들이 좀 삐딱하다.
  일단 시집을 다 읽고 ‘나무 위키’, ‘위키피디아’, 네이버 검색을 해봤다. 대개 문인을 소개할 때, “몇 년도에 어느 동네에서 아버지 누구와 어머니 어디 모씨 사이의 몇째 아들로 태어나” 식으로 표현함에도, 이이는 그냥 1918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고 만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오장환 편에서야 글의 중간에 “그의 초기 시는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과 도시에서의 타향살이” 운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이다. 서자, 첩의 아들이란 꼬리표가 평생에 걸쳐 얼마나 아픈 상처가 되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오장환보다 세 살 아래인 장용학도 그의 대표작 <원형의 전설>에서 주인공 이장李章을 사생아로 설정해 작품을 만들어, 이장을 통해 사생아로 태어나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운명인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났으니 오장환의 시어들이 어떤 때는 삐딱하고, 전체적으로는 퇴폐적 슬픔 속에 있음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내 취향은 아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성씨보(姓氏譜)>를 읽어보자.



 성씨보(姓氏譜)
오래인 관습 -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 온 일 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려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전문)


  서자 출신인 오장환이 내놓고 그까짓 족보란 것이 무엇이건데 사람을 우습게 보느냐고 일갈하고 있다. 이런 불만은 또 한 편으로 자신을 낳은 출신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향할 수도 있어, 역시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향수>에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어머니는 무슨 필요가 있기에 나를 만든 것이냐! 나는 이항(異港)에 살고 어메는 고향에 있어 옅은 키를 더욱더 꼬부려가며 무수한 세월들을 흰 머리칼처럼 날려 보내며, 오 오메는 무슨, 죽을 때까지 윤락된 자식의 공명(功名)을 기다리는 것이냐.” (후략)


  서자 신분으로 남들과 같은 인정을 받으며 살기를 포기한 오장환은 위의 시처럼 이항(異港), 멀리 떨어진 낯선 항구도시, 즉 ‘탈 고향’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다. 근본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똑똑하고 강건하고 지조 높은 슬픈 시인은 이래서 더 퇴폐스러운 고통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버리지는 않았을까. 이이는 일제 말기에도 붓을 꺾지 않았고, 그들에게 협력도 하지 않은 채 끝끝내 버텨냈다. “시인부락”의 동인이기도 하며 가장 친한 동무였던 서정주가 부일의 시를 쓰기 시작하자 다시는 만나지도 않았다. 시에서 카프 적인 경향성은 거의 보이지 않거늘 왜 1947년에 월북을 한 것일까.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현대시의 한 페이지는 거뜬하게 장식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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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0-09-11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자. 유럽에서도 심한 욕 중 하나가 이 서자같은 놈이라던데요 ㅠㅠ 오장환작가님! 기억해뒀다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0-09-11 16:27   좋아요 1 | URL
bastard, 서자, 잡놈, 악당, 개자식이 같은 말이잖아요. ㅋㅋㅋㅋ
저도 사실 잘 몰랐는데 몇 년 전부터 <왕좌의 게임>보면서 저절로 알게 됐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