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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그 형제들 3 - 이집트에서의 요셉 (상)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평점 :
《요셉과 그 형제들》의 세 번째 책.
토마스 만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생각났던 인물. 리하르트 바그너. 그의 작품들을 보면 구구절절 말이 많다. 사실 극에서 행해지는 일들에 객관성을 주기 위하여 행위의 근거 또는 먼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지만 처음 듣는 사람들은 단박에 나가떨어지게 만든다. 우스개로 비교하는 인물이 자코미니 푸치니인데, 푸치니라면 두 시간도 안 돼서 단박에 이놈 저놈 다 죽이고 피바다로 극이 끝났을 이야기를 바그너는 삼박사일 동안, 그것도 하루에 네 시간 넘게 관객들을 자리에 앉혀놓는다는 거.
딱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이 그렇다. 창세기 39장 1절에 말하기를,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작가는 이 한 줄을 위하여 무려 240여 쪽의 지면을 할애했다.
만의 이야기는 요셉이 알몸으로 던져져 갇힌 마른우물 또는 구덩이에서 구출된 것의 의미로 시작한다. 요셉은 열일곱 살의 나이로 구덩이에 빠져 스스로 죽은 몸이 됐다고 여긴다. 왜 그랬을까. 그동안 죽음으로까지 내몰릴 정도로 잘못 살았다는 자각이 든 것. 죽음에 이르는 잘못, 즉 죄의 이름은 ‘신뢰’였다. 사람을 무턱대고 믿는 일. 그들의 한계를 무시하고, 그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 형들의 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단을 향해 절을 한다는 등, 해와 달과 열 개의 별이 자신의 별에 절을 한다고 신이 나서 떠벌인 일. 눈치 없이 케토닛 파심을 입고 형들에게 자랑하는 눈 먼 행위 등. 타인의 한계를 무시하고 무리한 요구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무턱대고 존중해준 나름대로의 사랑이 결국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거다. 그 결과 손과 발이 묶여 마른우물 아래로 던져진 것으로 그때 자신은 이미 죽었으며, 이스마엘 사람들로 꾸려진 상단의 사위 ‘밉삼’에게 구출되어 어두운 터널 속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본 것을 다시 태어난 행위로 여긴다. 마른우물 또는 구덩이는 그에게 죽음의 장소이자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대지의 자궁이며 산도였다. 그리하여 첫째 형 르우벤이 없는 상태에서 상인들에게 은 20세겔에 팔렸을 때도 아무런 이의나 항의 없이 조용히 이를 수락했으며, 아버지 야곱이 사는 동네를 거쳐 끝없는 행진을 할 때 역시 상단을 탈출해 야곱의 집으로 도망하지 않았던 것.
요셉을 산 상단의 노인은 천생 상인. 평생 세상 구석구석을 다니며 온갖 것을 다 경험한 이 늙고 현명한 상인은 먼저 자신의 노예이자 상품인 요셉의 품질을 확인한다. 노인은 요셉의 몸과 더불어 재주까지 산 것이니. 요셉이 글을 쓸 줄 알고 셈에 밝다는 말을 듣고 삼 일 안에 상단의 모든 물품의 목록을 정리해 가져오라 요구하고, 언변이 좋은 것을 알고는 자신의 잠자리에 잠이 잘 올 수 있도록 밤 인사를 하라하니, 요셉 가라사대,
“가볍고 유쾌한 꿈들아, 주인님의 평화롭고 달콤한 단잠에 예쁜 수를 놓아다오.”
당시가 기원전 20세기 가량. 거의 모든 즐거움은 이야기의 구전으로 전해지던 시대에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사람들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재주였을 수도 있다. 그래 노인은 날마다 다른 말들로 밤 인사를 할 것을 요구하고, 요셉은 주인의 명령에 따른다.
“요람을 흔드는 한밤의 팔에 안겨 그 가슴에 머리를 묻고 달게 주무셔요. 어머니 품에 안겨 새록새록 잠자던 어린 시절처럼.”
여기에 삼 일 후, 정말로 자신의 물품 목록과 수량을 각기 색이 다른 글과 숫자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온 것을 본 노인은, 이게 보통 물건이 아님을 알고 요셉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주기에 이른다. 왕의 오른편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자, 왕의 친구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자의 집에 그를 팔기로. 노인이 감히 왕의 친구라 불리는 자를 아는 건 아니고, 그자가 사는 저택의 집사, 개신교 창세기에 ‘가정 총무’라 불리는 ‘몬트-카브’라는 홀아비를 안단다. 아브라함 시절부터 이왕 신을 섬기려면 가장 힘이 센 신을 섬기겠노라며 주님을 선택한 핏줄답게, 요셉은 부채를 들고 있는 자를 칭송하는 의미에서 그에게 황금을 매달아준 왕이 누구인지 물어보았고, ‘넵-마-레-아문호트페-님무리아’라는 이름을 들었다. 세상에나. 가장 화려하고 영예롭게 이름을 드높인 왕, 혁혁한 명성과 함께 영원 속으로 사라진 왕들의 후손, 저 아래 세상, 진창의 나라이자 죽은 자의 나라의 파라오였다.
여기까지도 성질 급한 독자들은 이야기가 늘어진다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이스마엘 사람” 가운데 애굽, 즉 이집트까지 가서 요셉을 팔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대상隊商이었을 것이고, 이집트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파라오의 친위대장 페테프레, 즉 보디발에게 접근할 정도라면 요셉의 능력을 독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터이다. 여기에 하나 더. 당시 이집트는 세상의 중심. 감히 변두리 가운데서도 변두리인 이스마엘 족 떠돌이 상인이 어떻게 친위대장과 대면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저택의 집사마저 간신히, 요셉의 주님이 배려한 덕에 만날 수 있게 되며, 더 이상 하인이 필요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구리 200데벤이라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팔리게 된 것. 그런데 토마스 만을 리하르트 바그너와 비교한 이유는, 이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대상 무리는 아시아, 아라비아 각처, 그리고 이집트 땅에 들어와 처음 밟은 고셈 지역 등의 성 쌓은 모습, 풍경, 특산물, 축제, 탈 것(낙타 또는 배 등), 국경과 도시를 지키는 병사와 세관을 통과하기 위한 그들과의 대화와 뇌물 상납, 상품 거래내역 등까지 모두 설명을 하는데, 좀 심했겠지? 그렇다. 심했다.
하여튼 ‘오사르시프’라고 이름을 바꾼 요셉이 어쨌건 처음 본 이집트는 하下이집트의 스무 번째 주state로 소박한 육지라 할 수 있으나 풀이 우거지고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적당히 촉촉한 매우 비옥한 땅이었으니, 요셉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이곳의 살찐 초원을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벤야민을 비롯한 형제, 가족들을 불러 살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이 이집트 땅에서 반드시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하며, 이왕 서쪽 저승(이집트)의 나라로 갈 바에 일인자가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 열일곱 살짜리가. 대단하지? 역시 될 인간은 떡잎부터 다르다.
이후에도 가히 장황하고 장대한 서술 끝에 드디어 페테프레(성서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들어간 우리의 요셉. 여기서 처음 만난 후원자는 난쟁이 세엔크-웬-노프레-네테루호트페-엠-페르-다문, 또는 베스-엠-헵, 또는 베지르, 또는 곳립.
창세기 39장 7절에 말하기를,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페테프레 혹은 포티파르의 집에서 선량한 집사 몬트-카브가 죽은 이후에 그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는 긴 이야기는 모두 생략하고, 성서에 나왔듯이 보디발, 페테프레의 정실 아내 무트-엠-에네트가 요셉에게 반해 눈짓하고 동침하기를 청하는 장면으로 가자. 페테프레의 부모는 아버지가 ‘후이’, 어머니가 ‘루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이집트 사람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가문의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친 오누이가 결혼한 커플이며, 이들의 유일한 아들이자 자손인 페테프레는 거인의 풍모에 장사다운 힘을 지닌 완력의 사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부부관계를 ‘부글거리는 끓어오름’이라 일컬을 정도로 불결하게 보아 아들은 어두운 영역에서 끄집어내어 보다 순결한 자에게 바치려, 그만 양 다리 사이의 모든 돌출된 것을 잘라 궁신宮臣, 즉 내관, 내시로 만들어 파라오에게 바쳤던 거다. 그리하여 그가 맡은 친위대장이라는 호칭도 완전히 명예직이지 실제 친위대장의 역할은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남성’ 장교가 모든 권한을 갖고 있던 상태였다고 상정했다.
아무리 잘 생기고 현명하고, 똑똑하고, 말을 잘 하는 요셉일지언정, 왕의 친구, 훗날에는 ‘왕의 유일한 친구’로 격상되는 대갓집 중의 대갓집 마나님이 한갓 노예에게 눈길이나 줄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토마스 만은 또 다른 난쟁이이자 남성의 기능은 정상이라 보통의 여자와 혼인하여 키가 큰 아들 둘을 낳은 악당 난쟁이 ‘두두’를 등장시켜 친위대장부인이자 여주인 무트-엠-에네트의 눈길을 요셉에게 이끌리게 하고, 스스로 가운데 끼어 부인의 마음에 요셉을 깊게 새기게 만들며, 심지어 연서를 써서 요셉에게 건네도록 종용하고 전달까지 맡긴다. 여태까지는 동정녀로 남자를 전혀 모르다가 평생 처음으로 연정을 품게 된 궁신, 환관의 아내에게 당시 기준으로 중년의 나이에 찾아온 첫사랑, 첫 번째 육욕의 대상으로 전환해버린 요셉. 무트-엠-에네트를 향한 토마스 만의 시선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문서(구약성서)에서처럼 오직 자신의 육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눈짓’은 아니었다고 변호한다.
그렇다. 이것이 연대기와 소설작가의 차이점이다. 연대기에 나와 있는 것 말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상황을 사람 사는 이야기, 그것도 타당할 수밖에 없는 전개과정을 상상하여 그럴 듯하게 만들어내는 이들을 우리는 소설가라고 부른다.
토마스 만. 장황하고 장황하다. 간혹 질리기도 하고, 너무 오랜 시간 책을 들여다보느라고 피로해진 눈, 시각 때문에 고단한 때를 맞춰 장황한 장면이 나오면 확 질려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토마스 만을 읽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누가 있어 이리도 재미있게, 감히 성서의 행간을 뒤져 매력적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