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팔기 을유세계문학전집 1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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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열면 원서의 제목이 <길가의 풀 道草>이다. 어떤 내력으로 이게 <한눈팔기>가 됐을까? 엉뚱한 제목은 아니지만 원래의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터인데. 내가 아는 분 중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가장 좋아하는 잠자냥 님의 컬렉션을 보면 출판사 이레에서 나온 책은 제목을 <길 위의 생>이라 뽑았다. 그럴 듯하다. 풀을 한 살이라고 바꾸었을 뿐이니.
  나쓰메 소세키는 나한테 찰스 디킨스 비슷한 인물이다. 두 양반의 작품 성격은 판이하지만, 판이 정도가 아니라 거의 완벽하게 저울의 양 끝에서 팔짱을 낀 채 서로를 꼬나보며 서 있다고 하고 싶은데, 내겐 뭐가 비슷한가 하면, 막상 읽어보면 확 다가오는 친숙감도 별로 없고, 큰 재미도 없어서 에이 이 양반들 책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음에도, 인터넷 서핑 중에 안 읽어본 이들의 책이 눈에 띄면 어느 새 보관함에 들어 있고, 또 어느새 장바구니를 거쳐 아파트 현관 앞의 택배 박스에 들어 있게 된다는 거. 근데 이게 내가 앓고 있는 질환은 아니다. 병은커녕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언급을 했듯, 이게 소세키 파워 아니겠느냐, 주장을 해야겠다. ‘소세키 파워’라고 발음하니까 어감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한눈팔기>는 일본산 찌질이, ‘겐조’라고 하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자기 몸에서 버리고 온 먼 나라의 냄새가 배어있는 사람. 이 냄새, 이게 설마 정말로 체취 비슷하게 비강 깊숙한 곳에 있는 후각중추를 자극하는, 피부 분자의 브라운 운동을 말하는 건 아니라는 정도는 읽자마자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터. 먼 나라가 영국이고 겐조가 소세키 본인의 분신 또는 일부라는 것도. 겐조 스스로가 이런 냄새, 즉 이국적 분위기를 싫어하지만 그러면서도 냄새 속에 스민 긍지와 만족은 오히려 깨닫지 못하면서 은근히 풍기고 싶어 하는 것 역시. 소세키가 영국 유학을 떠난 것이 1900년, 노베첸토.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개화된 나라 일본이라고 해도 유럽의 중심으로 유학을 갔다 온 것이 어찌 어깨에 힘을 줄 이유가 되지 못할 수 있었을까.
  소세키 본인이 아버지의 두 번째 정실 아내가 낳은 막내로, 늦둥이의 탄생이 남부끄러워했던 부모에 의하여 유·소년기 때 동네 고물상(또는 배추장수)을 거쳐 어느 부부에게 입양을 보냈다고 한다. 소세키를 입양한 부부는 자신들이 늙은 다음에 노후 부양을 위해 소세키를 애지중지 키웠다고 하는데, 이 장면이 책 속에서 겐조를 입양한 시마다 부부의 모습으로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다가 시마다 부부가 이혼을 하면서 입양한 겐조를 다시 생부모 집으로 복적復籍시키는 과정에 친부모가 그간 겐조를 부양하는데 들어간 시마다 부부의 비용 등을 정산하고,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을 것임을 문서로 작성한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 어디 있나. 이렇게 겐조 가족과 시마다 가족은 금전적 결산을 통해 완벽하게 절교 상태로 돌입하여, 이후 겐조가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취직을 하고, 당시만 해도 잘 나가던 공직자의 딸과 혼인을 하고, 맏딸을 낳고, 영국유학을 다녀오고, 둘째딸을 낳을 때까지 20년 가까이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지낸다. 소세키도 혹시 이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소설은 아무리 자전적 소설이라 하더라고 완전히 같을 수는 없으니 짐작만 하고 넘어가자.
  어느 비 오는 날, 겐조는 비옷도 없고 장화도 없이 그냥 우산만 쓴 채 외출을 하게 된다. 길을 가다 인력거 집 바로 앞에서 어느 노인을 마주친다. 아무리 적어도 육십오륙 세. 아직도 검은 머리카락이 성하지만 비 오는 날 모자도 없이 외출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노인은 겐조가 지나갈 때까지 유심히 바라보고 이날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난다. 며칠 후, 또다시 외출을 한 겐조 앞에 다시 등장한 모자를 쓰지 않은 노인. 겐조가 살아가면서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중류 이하로 살고 있는 외모를 한 것을 본 겐조는 적어도 그보다는 더 부유하게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이가 한 시절 자신이 아버지라고 불렀던 남자, 시마다 씨. 일찍이 교만하다는 말을 들었던 인물로, 겐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극도로 인색하고 오직 돈을 모으기 위해 인심을 잃었었다고 저 먼 기억들이 조금씩 새롭게 떠오른다.
  글쎄, 이게 어떤 기분일까. 7~8년 엄마, 아빠로 알고 살다가 파양을 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나는 느낌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 나도 그렇다.
  이렇게 <한눈팔기>는 시작한다.
  영국 유학을 다녀와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겐조. 그동안 부유하던 처갓집은 공직에서 쫓겨나고 주식에 실패, 금광에 투자한 것도 실패를 해 거의 거덜이 났고, 이복누나에게 매달 조금씩 용돈을 부쳐주었는데 용돈을 조금 올려주기를 부탁한다. 동복형은 장례식에 입고 갈 하카마(일본 전통의상 중 남성 정장 바지)를 겐조에게 빌려 입어야 하는 신세. 자기 월급 130엔 가지고 인색한 아내가 아무리 수건 짜듯 해도 결국엔 결혼할 때 입고 온 기모노를 전당포에 맡겨야 하는 살림. 여기다 겐조는 경제 개념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소학교만 나온 아내보다 더 완고한 의식으로 무장해 자기밖에 모르는 천생 샌님. 앞뒤 아래위 왼쪽 오른쪽을 둘러봐도 어디 한 군데 비빌 언덕이 없는 신세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한 모자 안 쓰는 노인이자 옛적의 아버지 시미다. 처가에선 장인이 은행 차입을 위한 보증을 서달라고 해서, 은행 보증 서주는 게 지옥을 향한 하이웨이인 줄은 들어서 아는 겐조는 보증 대신 친구의 친구에게 4백 엔을 빌려 장인에게 넘겨주고, 이제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한 시절의 아버지가 자기 집에 들를 때마다 돈을 뜯기기 시작한다. 여기에 어떻게 알았는지, 아니면 지독한 우연인지 역시 한 시절의 어머니도 등장해 한 번 올 때마다 5엔씩 교통비 조로 받아간다. 대학교수 월급이 130엔이니까 5엔이면 얼마나 될까? 여기서 끝나나, 어딜. 아내의 배는 나날이 부풀어 올라 작품 후반에 가면 산파가 도착하기도 전에 셋째 딸을 겐조의 손에 낳아버리니 참으로 안타까운 생활전선으로 몰린다고 할 수 있을 것.
  솔직히 얘기하자. 겐조. 정말 지질한 남자다. 딱 한 가지, 남보다 공부하는 머리 좋아 영국 유학을 한 덕분에 사회적 가치가 오른 대학교수일 뿐,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아내와 비교해도 고리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천생 꼰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은 책이 끝날 때까지 하나도 개선되지 않는 속물. 아내에 대한 변하지 않는 우월감에 전 전근대적 가부장. 근데 이렇게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귀엽다. 왜 그럴까? 이건 나쓰메 소세키가 한 ‘인간’을 등장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상의 어느 소설 주인공이 <한눈팔기>의 겐조처럼 할 것, 해줄 것 다 하고, 다 해주고 칭찬은커녕 오히려 욕(아니면 적어도 쪼잔한 비난)을 먹겠는가 말이지.

 

  그런데, 소세키를 읽는 덴 이런 스토리도 자잘한 재미가 있지만 역시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와 일본인들 특유의 섬세한 감정의 묘사가 압권이다. 이건 일본인이 아니면 습관 속에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흉내 내기 어려운 세밀화라고나 할까, 하여튼 사소설적 하이퍼 레알리즘 비슷하다 해야 할까 싶은 감각과 특색 있는 의식의 충돌이랄 수 있을 것. 초두에 디킨스와 소세키가 저울의 양 극단에서 서로 꼬나보고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디킨스는 죽어도 소세키처럼 쓰지 못했을 것이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지만, 도무지 두 양반 다 읽지 않고 그냥 넘기긴 지극히 섭섭하다는 공통점. 그리하여 어감은 좀 그렇지만 독후감의 마지막을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다.

 

  소세키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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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5-13 09: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어도, 별 다섯은 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독자들이 줘서 말입니다, 별 네 개에서 멈췄습니다.
내돈내산은 별 네 개가 만점?

잠자냥 2021-05-13 10:27   좋아요 4 | URL
ㅋㅋㅋ 그래서 전 제 돈 주고 산 책 별 다섯 개 줄 때 아주 쾌감을 느낍니다. ㅋㅋㅋ 이게 진짜 진솔한 별 다섯이다!!!! 막 이러면서 ㅋㅋㅋㅋㅋ

tobewhat 2021-05-13 10: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일어 道草가 길 가의 풀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길 가는 도중 딴짓을 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역자는 내용도 고려해서 그렇게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Falstaff 2021-05-13 10:13   좋아요 2 | URL
아, 그렇습니까. 그래 모르면 병이라니까요.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1-05-13 10: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소세키 파워 ㅋㅋㅋㅋ 폴스타프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전 처음 소세키 읽었을 땐 이게 뭐야... 되게 심심하네 했는데, 그 심심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읽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소세키 작품은 다 읽었는데, 그걸 또 읽고 있더랍니다(제가 한 번 읽은 책 또 읽는 경우는 정말 드물거든요. 세상에 읽을 책이 넘나 많아서리...). 디킨스는 재미나서 계속 읽는다면 소세키는 심심한 맛에 자꾸 읽는 것 같아요. 암튼 그것이 소세키 파워 같습니다.

Falstaff 2021-05-13 10:27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디킨스하고 소세키는 정말 저울의 완전 반대쪽이예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1-05-13 10: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겐조=소세키 그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소세키 정말 한 인간으로는 좋아하기 어려운 남자 같아요. 영국 유학 시절 부인한테 보낸 편지 보면 정말.... 이빨 닦았냐는 둥 머리는 어떻게 손질하라는 둥, 잔소리 장난 아님... 그래도 제자들은 그를 칭송해 마지 않았으니 ㅋㅋㅋㅋ 사회적으로 명성 있는 남자들이 집안에서도 좋은 남편이기 어렵다는 걸 보여준 사례1. ㅋㅋㅋㅋ

Falstaff 2021-05-13 10:30   좋아요 3 | URL
악. 그 정도예요? ㅋㅋㅋ 저런 잔소리 하는 건 아내가 무척 맘에 들지 않는다는 건데 하긴 당시에 눈 맞아 결혼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근데, 그러면 더 잔소리 안 하게 되는 거 아닌가....가 아닌가요? ㅋㅋㅋㅋ

제자가 소세키 칭찬하는 게, 윌리엄스가 스토너 쓰는 거하고 뭐가 달라요. 인간적인 면은 다 꼬부쳐놓고 눈에 좋게 보이는 것만 열라 나열하면 말입니다.
전 스토너를 계기로 모스크바의 로스토프 백작도 다시 보기 시작했다니까요! ㅋㅋ

잠자냥 2021-05-13 10:40   좋아요 4 | URL
나쓰메 소세키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잠깐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하도 웃기고 어처구니 없어서, 제가 메모해둔 내용입니다. 이빨 닦았냐는 건 제 기억 오류고 틀니 하란 잔소리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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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니는 하는 게 옳을 것 같소. 머리는 둥글게 묶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자주 감으시오. (85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출산 후 경과가 좋아 건강해지면 틀니를 하시구려. 돈이 없으면 장인께 빌려서라도 하시오. 돌아가서 갚아 드리겠소. 머리는 묶지 않는 편이 머리카락을 위해서도 뇌를 위해서도 좋소. 오드키닌이라는 물이 있소. 비듬이 생기지 않는 약이오. 써 보시구려. 탈모가 멈출지 모르오. (95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무엇보다 무정하기 그지없는 내가 아내에게만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편지를 보내니 기특하지 않나. 그런 다각형 얼굴이라도 돌아가면 좀 잘해 줄 생각일세. (96쪽,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편지의 분위기를 보아 밤에는 12시를 넘기고 아침에는 9시, 10시경까지 자는 듯하구려. 밤은 그렇다 치고 아침엔 좀 일찍 일어나도록 하시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병이 없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니 그건 잘 알고 있을 것이오. 9시나 10시까지 자는 여자는 첩이나 창부, 하급 사회의 여자들뿐이라 생각하오. 적어도 좋은 집안에 태어나 상응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그렇게 단정치 못한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소. 야라이초 3번지를 한번 살펴보오. 당신을 제외하고 그런 부인들은 하나도 없소. 이건 유학 전에도 항상 하던 말 같은데 당신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구려. 나쓰메의 부인은 아침 9시, 10시까지 잔다고 수군거리면 좀 창피하지 않겠소. 당신은 어찌 생각하오. 당연히 신병은 특별한 일이지만 요전의 편지에 의하면 아주 건강해졌다고 하니, 몸에 이상 없는 한 일찍 일어나도록 신경 써야 할 것이오. 게다가 아이들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소. 후데가 성인이 되어 시집을 가서 당신처럼 9시나 10시까지 잔다면 나는 미래의 사위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일 게요. 당신 부모님들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오. 노력해서 자신의 결점을 없애는 것이 인간 제일의 의무일 게요. (124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출처: 나쓰메 소세키,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Falstaff 2021-05-13 10:49   좋아요 5 | URL
와와와...... 이건 정말, 너무 하네요. ㅋㅋㅋㅋ

저도 (19세기 말 태생이신)외조부가 외조모에게 쓰신 편지 읽어본 적 있는데, 아내를 사랑하는 (아니면 적어도 척하는) 남편이었던지 ‘무뚝뚝한 사랑‘이 은근히 깔려 있어서,
소세키의 편지는 제 고정관념을 완벽하게 깨버리는 데요! 세상에나!!
거 참. (근데 웃음나는 건 참을 수가 없군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5-13 21:12   좋아요 2 | URL
하하하하하하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ㅋㅋ

mini74 2021-05-13 10: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양이주인놈이나 다이스케나 너무 쪼잔하다고 일본남자 아웃 이라던 친구가 생각나네요. 일본남자도 괄괄한 내 친구를 아웃할 거 같지만 ㅎㅎㅎ

Falstaff 2021-05-13 11:3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근데 아무리 찌질하고 쪼잔해도 그걸 구태여 찾아 읽잖아요.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5-13 11: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찌질한데 나긋한 문장과 이야기를 어느새 읽고 있는 나;;;라는 이상한 상황에 어이없지만 그런게 또 매력인가 생각합니다.

Falstaff 2021-05-13 12:15   좋아요 3 | URL
ㅋㅋㅋ 이상하지 않습니다. ㅋㅋㅋ
소세키 파워라니까요!!!

새파랑 2021-05-13 1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겐조는 향수 아닌가요? ㅎㅎ 몇 작품 안읽어봤지만 소세키 책의 주인공은 전부 경제관념이 없는것 같더라구요 ㅋ 알라딘 우주점 구경가면 항상 소세키 작품 검색해봅니다~

Falstaff 2021-05-13 12:3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소세키 주인공이 경제 개념 없는 건, 소세키가 없어서 그래요.ㅋㅋㅋㅋ
 
따뜻한 흙 문학과지성 시인선 280
조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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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은의 세 번째 시집. 물론 처음 읽는 조은이다. 이름이 참 재미있다. 조은. 검색해보면 조은 DA, 조은 주택, 조은 푸드 육가공, 조은 성모 안과의원, 조은 타이 마사지 등이 나오고 이어서 시인 조은의 사진을 구경할 수 있다. 1960년 안동 생. 1988년에 데뷔하고 몇 권의 시집을 낸 이력밖에는 정보를 구할 수 없다. 특히 바이오그래피는. 하긴 그런 거 알면 뭐 하나. 시인이 시만 좋으면 그만이지.  조은의 시에 관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시집을 샀고, 읽었다. 이 시인 역시 주된 관심사는 탄생과 삶과 죽음의 사이클. 이렇게 또 한 명의 시인이 쓴 또 한 권의 나와 맞지 않는 시집을 읽었다. 왜 시인들은 이리도 무거울까. 뭐 진짜로 만나면 내가 번쩍 들 정도의 체중밖엔 나가지 않겠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삶의 정체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우울과 죽음의 색조화장을 하게 되었는지 이젠 궁금증을 넘어 의례 그러려니 할 정도가 됐다. 중국에서 열린 시인대회에 참석해 중국의 유명 여류 시인한테 다른 건 몰라도 오줌발 하나는 지기 싫어 중국식 개방형 화장실에서 힘을 줘 오줌을 눴다는 시를 쓴 김민정이 그리울 지경이다. 하긴 지금은 만 61세지만 조은이 이 시집을 낼 당시의 나이가 43세.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아직도 그렇다면 좀 문제지만.
  시집의 제일 앞에 실린 시부터 누군가가 죽는다.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여럿이, 한꺼번에, 잠재운 고통을 깨우며,

 

  울고 있다
  동네 개는 모두 짖어대고
  불을 켜려 허둥거리며 나는
  재빨리 모르는 한 죽음에다
  나의 죽음을 겹쳐본다

 

  누군가 죽었다
  누군가 죽었다

 

  어둠의 노른자위에 있는
  나의 손 닿는 어딘가가 썰렁하다
  이곳 어딘가는
  세상을 버린 자와 닿아 있었다
  가쁜 소리를 내던 문도 숨을 멎었다

 

  한때 숨쉬던 흙덩이는
  오열 속에 해체되고 있으리라

 

  이웃들도 불을 켠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죽었다  (전문)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죽음의 사발통문.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시인이 들은 것은 울음소리다. 누구의 울음일까. 둘째 연에서 보듯 동네 개가 한 마리 짖으니 모든 동네의 개들이 이를 따라 짖는 걸 여럿이 한꺼번에 잠재운 고통을 깨우며 울고 있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 여럿이 한꺼번에 잠재운 고통을 깨우며 울고 있어서 이것을 들은 동네의 암캐 수캐들이 따라서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짖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사람 또는 개들의) 울음소리에 잠이 깨 허둥지둥 불을 켜기 위해 손짓을 하는 시인은, 자신의 방에서 ‘고통을 깨우며’ 누군가가 죽었다고 지레짐작을 하며 거기다 자신의 죽음을 겹쳐버린다. 이 시에서 자신이 잠자고 있던 방은 이 시집 전체에 중요한 기재로 등장한다. 시인은 이미 죽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곳 어딘가, 시인이 몸을 뉜 방 어딘가 세상을 버린 자, 죽은 자와 닿아 있다. 문도 숨을 멎었으니 이젠 다시는 열리지 못할 것. 이 문은 다른 시 <문고리>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삼 년을 살아온 집의
  문고리가 떨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고 닫았던 문
  헛헛해서 권태로워서
  열고 닫았던 집의 문이
  벽이 꽉 다물렸다
  문을 벽으로 바꿔버린 작은 존재  (하략)

 

  숨을 멈춘 문은 문고리가 떨어져 이제 열고 닫히는 기능이 없어지면서, 소통의 장소인 문이 단절의 대명사인 벽으로 바뀐 것. 사람을 완전히 단절시킬 수 있는 것은 죽음 또는 묘혈로써의 문이 숨을 멎은 방이다. 이번에 시집 좀 읽으려고 여덟 권이나 사 놓았는데, 죽음이라, 다른 시집들도 이러려나.
  두 번째로 실린 시에는 새로운 시적 상징이 등장한다.

 


  한 번쯤은 죽음을

 


  열어놓은 창으로 새들이 들어왔다
  연인처럼 은밀히 방으로 들어왔다
  창틀에서 말라가는 새똥을
  치운 적은 있어도
  방에서 새가 눈에 띈 건 처음이다
  나는 해치지도 방해하지도 않을 터이지만
  새들은 먼지를 달구며
  불덩이처럼 방 안을 날아다닌다
  나는 문 손잡이를 잡고 숨죽이고 서서
  저 지옥의 순간에서 단번에 삶으로 솟구칠
  비상의 순간을 보고 싶을 뿐이다
  새들은 이 벽 저 벽 가서 박으며
  존재를 돋보이게 하던 날개를
  함부로 꺾으며 퍼덕거린다
  마치 내가 관 뚜껑을 손에 들고
  닫으려는 것처럼!
  살려는 욕망으로만 날갯짓을 한다면
  새들은 절대로
  출구를 찾지 못하리라
  한 번쯤은 죽음도 생각한다면……  (전문)

 


  첫 번째 시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에서 죽음 또는 묘혈의 상징이 된 방에 그만 새들이 들어왔다. 연인처럼 은밀하게 들어왔다니까 두 마리인 듯하다. 방의 주인 ‘나’는 새들을 방관한다. 해치지도 않고 방해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둔다. 새가 정말로 방 안으로 들어온 경험이 있으신가? 투명한 창문이 아니라면 벽에 부딪히지 않는다. 좁은 방이라면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큰 사무실에선 그렇다. 대신 투명한 유리벽에 온몸을 쿵쿵 박아 죽음에까지 이른다. 시인은 이 모양을 자신이 마치 관 뚜껑을 손에 들고 닫으려 하는 것처럼 보고 있다. 새들이 살려는 욕망으로만 날갯짓을 한다면 결코 들어온 곳으로 다시 나갈 수 없단다. 한 번쯤 죽음도 생각해보면 혹시 모르겠다면서. 그럼 새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기에 허락도 없이 방에 무단침입을 해서 쿵쿵 머리를 박고 있을까.

 


  새

 


  새가 내 머리 위를 불덩이처럼 맴돈다. 언제 저 새가 이 방으로 들어왔을까? 애써 침잠시킨 어두운 한 세계가 역행하고, 숨골이 활짝 열리는 열기. 어떻게 저 새가 이 방으로 들어왔을까? 웅크린 내 몸이 깔고 있는 지렛대 같은 어둠을 극도로 부풀리며 새는 활기차게 난다. 내 몸에서 번쩍 눈을 뜨는 먼지들, 전신을 뒤집으며 소용돌이치고, 휘청거리며 내게서 떨어져나가는 깜깜한 길 하나. (전문)

 


  ....란다. 세상을 버린 자와 닿아있는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깜깜한 길? 맞아? 그럴 리가 있나. 물론 조은의 시가 전부 이런 건 아니다. 이 시집에서도 더 눈에 띄는 건 탄생과 죽음이란 사이클의 연속, 죽음이 있는 곳에 탄생이 있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인 장면이긴 하다.
  조은의 시가 좋은 시라고들 한다. 하여튼 조은의 시가 시를 감상하는 재주가 없는 내게 와서 고생을 좀 한 건 확실하게 맞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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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5-11 10: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분석을 해주신 부분들이 흥미진진한걸요? 맞지않았다고 하셔도 궁금해질만큼요ㅋㅋ시인은 아마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 때문에 침잠했었나 봐요.

Falstaff 2021-05-11 10:39   좋아요 3 | URL
ㅎㅎㅎ 잘 읽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근데 전 시도 잘 몰라요. 요즘 시집을 대강 이런 식으로 읽더라고요. 그래 저도 모르게 시를 ‘감상‘하는 대신 따져본 거 같습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쉽지 않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 창비세계문학 84
로베르트 무질 지음, 정현규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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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트 무질은 무려 열 권에 달하는 대표작 <특성 없는 남자>를 2권까지 읽었는데, 스스로 무질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출판사 북인더갭의 안병률 사장의 번역이었으며, 반드시 완역이 나와야 할 책이라는 주장에 굳이 반대할 의견은 없으나, 직접 읽어본 독자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안병률 사장에게 가장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게 딱 두 권만 번역하고 스톱 했다는 것이었다는 점 역시 밝혀두고 싶다. 왜냐하면, <특성 없는 남자>를 읽는 내내 소년 퇴를레스가 칸트를 읽을 때 느낀 것하고 비슷하게, “뼈밖에 없는 노인의 손이 머리에서 나사를 돌리듯 뇌를 빼내는 것 같은 느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 역시 작가가 로베르트 무질이었으므로 만일 이 책이 4백 쪽을 넘어가는 분량이었다면, 언젠가는 읽었겠지만 틀림없이 지금처럼 신간 안내가 뜨자마자 사서 읽는 일은 없었을 듯하다. 이 정도면 얼마나 덴 줄 아실 듯.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이 무질의 첫 작품인지 모르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적어도 무질의 청춘 시대에 쓴 소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1880년에 남부 오스트리아에서 엔지니어 집안에서 태어난 로베르트 무질은 열네 살에 매리쉬-바이스키르헨 군사고등실업학교에 입학한다. 여기가 모르긴 해도 기숙학교일 것 같다. 무질은 군사고등실업학교에서 삼 년 만에 중퇴하게 되는데 이 학교에서 경험했던 것을 몇 명의 작가에게 작품으로 써보라고 제공했지만 아무도 시도를 하지 않아 자신이 직접 소설로 썼다고, 책 뒤편의 작품해설에 쓰여 있다. 왜 초기작품일 것이라 짐작했는가 하면, 열네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두뇌활동이 왕성한 사춘기 소년의 사변적 방황을 섬세하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시절을 끝마치고 될 수 있는 대로 가까운 시간 안에 쓰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해서다. 이 작품이 현대 모더니즘 소설에서 각광 받고 있는 기념비적 작품이라고들 하면, 독자의 감상은 별개로 하더라도, 뛰어나다는 뜻이라 당연히 작가의 젊은 시절에 썼을 것으로 추정했다. 존경하는 황순원도 <소나기>를 환갑이 넘은 나이에 쓸 수는 없었을 테니.

 

  첫 구절 “러시아를 향해 뻗은 선로 옆 작은 기차역”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당연히 이미 상당히 오래 연착한 기차는 아직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플랫폼에는 비교적 나이가 있는 부부와 한 무리의 명랑한 젊은이들이 모여 있다. 젊은이들은 쾌활한 웃음으로 떠들썩하지만 진정한 즐거움이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끈질긴 저항을 하는 듯하다.
  부부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제국의 동부에 인적이 드문 척박한 농경지의 작은 도시에서 궁중 고문관으로 있는 퇴를레스 씨와 부인으로 아들의 휴일에 맞춰 W. 기숙학교에서 아들의 면회를 끝내고 귀가하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W. 기숙학교는 퇴를레스 씨에게는 먼 도시의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는 유명 기숙학교로 가계에 부담이 되기는 했지만, 나라 최상류층 가문의 자제들이 졸업 후 대학진학, 군인,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교육을 받으며 상류사회 교제를 위해서라도 이 학교 출신이란 추천 요건이 매우 중요한데다가, 어린 아이가 이런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아들이 입학시켜달라고 야심차게 졸라대는 바람에, 비록 나중에 많은 눈물을 피할 수 없었지만 허락하게 된 것이다.
  궁중 고문관. 말이 좋아 궁중 고문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궁중 고문관이었던 사람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궁중 고문관으로 열심히 일하고 극작을 쓰고, 소설도 쓰고 해서 인정을 받아 바이마르의 재상으로까지 출세한 인물. 궁중 고문관이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감당하기가 좀 벅찬 학교였으니 혹시 퇴를레스 군이 외아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플랫폼의 명랑한 젊은이들은 소년 퇴를레스와 네 명의 친구. 바이네베르크, 라이팅, 모테, 호프마이어. 이 가운데 모테와 호프마이어는 잠깐 나왔다가 곧바로 사라지는 엑스트라 역할이고 젊은 남작들인 폰 바이네베르크와 폰 라이팅은 두고두고 퇴를레스 군과 갈등을 빚는다. 이들은 퇴를레스보다 두 살이 많은 동급생. 십대 중반에 두 살의 나이면 지력과 완력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하여 처음엔 두 친구를 존경하는 입장이었다가 서서히 동등해진다.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남자 기숙학교. 한국의 군대처럼 계급과 짬밥에 따라 명확한 서열이 있으면 차라리 덜하겠지만 다수의 동등한 어린 수컷들을 한 우리에 모아놓았으니 이건 애초에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밀림 상태였을 것이다. 소년 퇴를레스 역시 입학과 동시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밤마다 베개를 적셨고 매일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난 소년은 부모를 향한 갑작스럽고도 애틋한 애정이 넘치는 단계를 거치고 이어서 향수라고 부르는 낯설고 새로운 상태에 이르다가, 향수가 사라진 영혼에 이번엔 일종의 공허함이랄까 허무 같은 것이 밀려온다. 자신에게서 사라진 것, 뭔가 긍정적인 것으로 어떤 영혼의 힘이며 내면에서 고통을 빙자해 시든 무엇. 마치 꽃을 피웠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첫 겨울을 보내는 어린나무처럼 빈곤하고 황량한 느낌이 드는 상태에 이른다.
  어떤 상태에 이르렀다고? “뭔가” 긍정적인 것. “어떤” 영혼의 힘. 고통을 빙자해 시든 “무엇.” 빈곤하고 황량한 “느낌이 드는 상태”라니. 애매모호한 추상명사들의 나열. 이런 것들이 독자를 혼란의 소낙비를 맞게 만드는 요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무엇’, ‘뭔가’가 계속 나온다. 이것들이 뭘까.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을 혼란 속에서 끝마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드리는 힌트를 기억하시라. 이 추상명사로 요약할 수 있는 책 속의 무수한 사춘기 소년의 번뇌는 오성悟性, 사물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 밖에서 이루어지는 대자적對自的 인식을 말한다. 로베르트 무질은, <특성 없는 남자>에서도 숱하게 그러했는데,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가능하지도 않지만 인식 밖에서 가능할 수 있는 현상에 집착한다.
  이 책에선 퇴를레스가 숙고하다 기어이 수학교사를 찾아 질문하게 되는 허수 √-1을 오성 밖의 인식으로 등장시킨다. 제곱하면 –1이 되는 가상의 수.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수의 제곱은 양수plus number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전혀 가능하지 않은 수number가 있어 제곱을 하면 –1이 되는데, 이것을 ‘i’라고 한다. 이른바 허수다. 우리가 아는 평행선도 저 멀고 먼 무한대까지 확장하면, 다른 것도 아니고 평행선이, 만난다. 서울시장 오세훈의 빙모 사공정숙 선생이 평행선이 언젠가는 만난다는 것을 증명한 적이 있다.
  퇴를레스와 악당 친구 바이네베르크, 라이팅 앞에 등장하는 동급생이 바지니. 바지니는 힘도 약하고 씀씀이가 좀 헤픈 아이인데 과자점 주인에게 외상을 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갚기 위해 친구들 사이에서 소위 돌려막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씀씀이를 줄이지 못해 점점 더 큰 돈을, 더 많은 친구로부터 빌려야 했고, 급기야 아이들 수준으로는 제법 큰 돈을 바이네베르크의 잡낭haversack에서 훔쳐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장면을 발견한 것이 가학적 취미가 있는 라이팅. 라이팅은 곧바로 이 사실을 바이네베르크와 퇴를레스에게 전하고 곱상한 외모와 체격의 바지니를 그들의 공동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자신들의 비밀 아지트에 바지니를 불러 옷을 모두 벗기고 구타를 하는 등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학대를 하고 모욕을 퍼붓는다.
  퇴를레스가 사춘기를 본격적으로 맞이하면서 줄곧 숙고의 대상으로 삼았던 오성 밖의 인식이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의 행동이나 영혼으로 전환되리라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이 심사숙고가 어떤 때는 열대여섯 살의 미성숙한 소년의 것이었다가, 어떤 때에는 이 작품을 쓸 당시의 무질, 즉 스물다섯 살의 성년의 사고방식이기도 한 것이 독자를 미궁으로 빠뜨려버린다. 애초부터 무질을 읽으면서 편하고 쉬운 작품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도 친애하는 이웃의 독자들이여, 이 분량, 250쪽 정도라면 다 읽을 때까지 집중할 수 있을 수준이니 한 번쯤 눈에 힘을 줘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물론 선택한 후의 결과는 전적으로 당신 소관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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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5-10 09: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 속에 바이네베르크가 동급생 바지니에게 바늘로 찌르는 고문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걸 읽으며 무려 39년 전의 군대 고참이 생각났다. 약간 검은 얼굴에 잘 생기고 (공부는 잘 하지 못한 것 같아도) 머리 좋고, 합리적 이유로 후임들 갈궈서 뭐라 할 말 없게 하는, 그래도 괜찮은 인간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 사람 취미가 나같은 졸병 차려 자세 시켜놓고 허벅지에 스테이플을 박아 넣는 거였다. 그새낀 지금 뭐하고 살까? 잘 살 거야, 잘 살 거야, 잘 살아라.
알고는 당할 수 없어서 항의하거나 몸을 피하면 고참들한테 참 괴롭힘을 당했는데, 내가 그랬다. 괴롭힘을 당할 때 당할지언정 그건 아픔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저열한 모욕이었기 때문에 항의를 했고, 오랜 시간 꽤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아, 난 군대에 극적으로 맞지 않는 인간이었다. 탈영 안 하고 만기제대한 것만 가지고도 기특하다, 기특해!

페넬로페 2021-05-10 09:56   좋아요 4 | URL
폴스타프님은 제가 모르는 작가의 책을 어찌 이리 잘 알려주시는지^^과외비 안내고 과외받는 기분입니다.감사해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예전에 군대 갔다 온 저의 남편에게 군대얘기 들으면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하게 될 정도로 폭력적인 얘기가 많았어요 ㅠㅠ
그래서 생각보다 영창을 많이 간다고도 하더라고요^^

Falstaff 2021-05-10 10:01   좋아요 4 | URL
ㅎㅎㅎ 뭘요. 그저 조금 앞서서 읽어본 것 뿐입니다.
군대 얘기는 여기서 그만 하겠습니다. 좋은 기억이 별로 없어서 말입죠. ^^;;;

잠자냥 2021-05-10 12: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독일어권 작가들과 멀어지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세운 로베르트 무질. ㅋㅋㅋ <벤야멘타 하인학교> 읽었을 때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 100배는 더한 당혹감을 느끼게 해 준 로베르트 무질. 근데 참 재미난 게 이 로베르트(무질)가 저 로베르트(발저) 작품을 읽고 칭찬했대요. 로베르트끼리는 뭔가 통하는가 봅니다.

암튼 북인더갭에서 <특성 없는 남자> 2권까지만 번역하고 더 번역하지 않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ㅋㅋㅋㅋ 애초에 더 고마운 일은 무질이 이걸 미완으로 남겼다는 게 아닐까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5-10 12:50   좋아요 3 | URL
아, 로베르트들이 또 한 건을 이미 했었군요! ㅋㅋㅋㅋ
19세기 ‘소설의 시대‘ 헤게모니를 프랑스와 영국에 뺐긴 분풀이로 20세기 들자마자 독일어 쓰는 애들이 일치단결한 건 맞는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대사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5
헨리 제임스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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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제임스를 처음 읽은 건, 우습게도 벤자민 브리튼의 쉽지 않은 오페라 <나사의 회전>을 들으면서 도대체 이게 어떤 스토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원작을 찾게 된 내력을 갖고 있다. 원작을 읽으면서 작품 속에 정말로 유령이 등장한다는 걸 알고는 이런, 이 양반이 쓴 책 좀 읽어봐야겠다, 싶어 계속 찾았다. 그리하여 <여인의 초상>, <데이지 밀러>, <아메리칸>, <워싱턴 스퀘어>까지 읽고 이젠 제임스 그만 읽겠다, 작정을 한다. 그러다 다 늦게 읽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속에서 최고의 영국 소설가 네 명을 고르는데 제인 오스틴, 조지프 콘래드, 조지 엘리엇과 더불어 헨리 제임스를 꼽는 바람에 마음을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가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에서 <대사들>을 출간하자마자 구입해 읽게 됐다.
  역자 정소영은 작품해설에서 <대사들>을 포함한 “후기의 삼부작과 단편 소설들은 매우 난해해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문학 전공자들도 친숙하게 다가가기 어렵다. 그럼에도 삼부작이 제임스의 주요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난해함이 제임스 미학의 정점을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밝힌다. 위 역자의 인용문 가운데 붉은 색을 칠한 지시대명사 ‘그’를 한 번 빼고 읽어보시라. 뜻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오히려 더 잘 읽힌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신지. 역자는 본인이 원고를 썼으니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독자가 <대사들> 속에서 7만 5천 8백 92번 나오는(신뢰수준 95%, 오차범위 +/- 3.9%) 지시대명사 ‘그’와 인칭대명사 ‘그' ‘그녀’의 홍수에 휩쓸려 익사할 즈음이 되면 책을 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이것도 책이 난해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요인 가운데 하나인 건 분명하다는 것도.

 

  역자가 어떤 의미에서 <대사들>이 난해하다고 했는지, 책을 다 읽고 30분쯤 지난 독자가 설명해보자.
  주인공 이름이 루이스 램버트 스트레더. ‘루이스 램버트’를 이 책의 지리적 무대인 프랑스 말로 발음하면 ‘루이 랑베르’다. 그렇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생극 가운데 <나귀가죽>과 더불어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발자크 책 중에서 가장 읽기 힘든 ‘발자크의 철학연구’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루이 랑베르>의 주인공이다. 결혼 전야에 갑자기 새파란 면도칼을 들고 아랫도리를 훌렁 까더니 평생 거꾸로 매달려 고생스럽게 흔들거리기만 했던 신체 일부를 싹둑 잘라버리겠다고 앙탈을 부리다 기겁한 삼촌에 의하여 저지당한 문제아. <대사들>의 루이스 램버트는 루이 랑베르와 달리 긍정적이고, 사리판단 잘 하고, 정의파인 신사다. 여기서 내가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루이 랑베르가 아니라 그를 만들어 낸 오노레 드 발자크.
  내 경우에 국한해서 벌어지는 일인지 모르겠는데, 발자크를 읽기 위해서는 거의 무한정 쏟아지는 묘사, 가구가 됐든, 건물이 됐든, 사람의 외모가 됐든,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됐든 간에 아주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묘사에 간혹 질리고는 한다. 근데, 헨리 제임스의 다른 책의 경우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대사들>을 읽으면서 저절로 무한 묘사의 달인 발자크가 머리에 떠올려졌으며, 급기야 <대사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헨리 제임스가 발자크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일 수준이라는 걸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 특정인과 특정인을 둘러싼 관계자들의 대화 속에서 서로 머리를 굴리는 것, 그러면서 행동으로 비쳐 보이는 극도로 미세한 것까지 모두, 모두, 모두,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독자의 뇌 속을 헝클어트리는데, 이게 한 번의 번역을 거쳐, 평소에 지시대명사와 인칭대명사를 자주 쓰지 않은 우리말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한 번역으로 말미암아 75,892 번의 ‘그’까지 섞여버리면, 지금 헨리 제임스가 묘사하고 있는 의식, 생각, 짐작, 또는 이런 것들과 비슷한 일이 과연 누구의 대뇌에서 벌어지고 있는 화학작용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기에 또, 등장인물들의 대화 가운데서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을 찾아보기 힘들다. 출연진 거의 대부분이 미국의 부르주아 또는 세미 부르주아 신사 숙녀, 유럽의 백작 가문 사모님과 영애라서 그런지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듯하다. 그들만의 대화법도 겉멋은 잔뜩 들었으나 알고 보면 속이 하나도 없는 허례로 그득하고,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이심전심이 되어야만 뜻을 알 수 있는 대화를 그들은 진짜 기가 막히게 풀어나간다. 인간 사이에 말이 왜 존재하는가. 이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A를 말하고 싶은데 그걸 A로 말하면 마치 격이 떨어질 거 같아서 A′로 표현해야 했던 19세기말, 20세기 초 벨 에포크 시대의 유럽 신사숙녀들의 노고에 새삼 마음이 경건해진다. 그들의 대화를 21세기의 한국 독자들도 공유해야 하는 아주 가벼운 문제가 있을 뿐.
  그리하여 만일 두 권짜리 장편소설 <대사들>에서 등장인물들의 의식이나 생각 등에 대한 묘사를 최소화하는 요즘 소설처럼 다시 쓴다면 원고지 천오백 매 정도의 짧은 장편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바로 이 지루하고, 골치 아프고,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장황한 묘사가 <대사들>을 헨리 제임스의 노작勞作으로 만드는 계제가 되는 것이고, 이렇게 쓰든 저렇게 쓰든, 작품을 만드는 건 독자가 아니라 작가의 권리니까.

 

  벨 에포크 시대의 미국. 도시 노동자 80퍼센트 이상의 고혈을 짜서 만들어낸 이윤은 자본가 가문의 자제들을 일하지 않는 자, 일할 필요가 없는 자로 만들어놓았고, 태생적으로 유럽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던 그들 가운데 일부분은 구대륙으로 흘러들어 청춘을 소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매사추세츠 울렛 지방의 품목을 밝히지 않는 거대 생산 공장을 운영하는 뉴섬 가문의 적장자 채드윅 뉴섬도 이들 부류 가운데 한 명으로 현재 파리에 거주하고 있다. 채드윅, ‘채드’로 말하자면 부잣집 외동아드님답게 세상 버르장머리 없게 성장해 성격이 속칭 개판이었던 젊은이로, 유럽 각지를 떠돌며 젊음을 소비하다가(소비? 소비라니? 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질투를 유발하는 젊음이란 말인가!) 소위 예술을 공부합네, 하고 현재는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강건하고 올곧은 성격이지만 아들에겐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기엔 문제가 있는,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디서 빠지지 않는 엄마 뉴섬 부인이 생각하기에, 채드가 돌아오지 않는 건 분명히 파리에서 모종의 아가씨와 미친 연애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낸다. 그리하여 즉시 돌아와 가업을 잇든지, 아니면 호적에서 지워버릴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말로는 그렇지만 즉각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의 수행을 위해 우리의 선량하고, 지극히 상식이 통하고, 포용력 있고, 정의로우며 합리적인 우리의 주인공 루이 랑베르, 아니, 루이스 램버트 스트레더 씨를 아들에게 대사로 보내게 된다.
  그래서 제목이 대사들ambassadors이 된다. 나는, 책 표지도 그렇고 제목도 그래서, 일단 헨리 제임스니까 유럽의 모처, 궁정, 청와대, 의사당에서 벌어지는 외교전을 그리지 않았을까 싶었다가, 이 사실을 알고 조금, 아주 조금 김이 샜음을 고백한다.
  램버트 스트레더 역시 괜히 몇 달씩 걸리는 먼 길을 떠나는 게 아니라, 울렛의 영주라고 해도 별로 손색이 없는 과부 뉴섬 부인과의 오래된 교류도 있고 해서, 유럽으로 가 성공적으로 집나간 탕아를 데려오기만 하면 다음날로 곧바로 뉴섬 부인에게 청혼을 해, 지금이 55세니까, 앞으로 15년가량의 여생을 편히 놀고먹으려 하는 꿍꿍이가 있긴 있었다. 스트레더도 역시 많은 재산이 있었지만 불운의 별은 과거에 벌였던 일곱 번의 사업마다 하는 족족 개골창에 빠뜨려 버려 이제 남은 거라곤 생의 마지막 날까지 그저 근근이 먹고 살기에 아주 약간의 부족함만 있을 정도. 스트레더 씨는 혼자 먼 길을 떠나기에 조금 적적한 면이 있으니 코네티컷 밀로스 출신의 변호사이자 자신이 가장 믿는 친구로 현재 멜버른에서 머물고 있는 웨이마시와 리버풀 항구 근처의 작은 도시 체스터에서 만나기로 한다. 여기서 우연히 만난 역시 밀로스 출신의 서른다섯 정도의 현명한 노처녀 마리아 고스트리 양. 게다가 파리 마르뵈프 구역의 작은 중이층 집에서 살고 있다. 스트레더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고스트리 양과의 우정을 맺게 되는데, 우연히 만난 이 현명한 여성의 덕을 얼마나 많이 보는지, 난 하마터면 뉴섬 부인 대신 고스트리 양하고 결혼할 줄 알았다니까 글쎄.

 

  여기서 잠깐. 헨리 제임스는 미국 태생이지만 나이 들어 영국으로 귀화한다. 내가 읽어본 그의 작품 속에도 미국과 유럽의 여러 장면이 나오고, 주된 장면은 거의 전부 유럽이다. 독자는 헨리 제임스가 젊은 시절부터 단단히 유럽동경이란 질병을 앓고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고, 실제로도 몇 작품 속에서 미국인이란 돈으로 승부를 거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 이렇게 양분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나마 상식이 통하고 총기가 제대로 작동하는 인물들의 그룹은 모두 유럽을 동경한다. 실제로 문장 속에, 의인화한 유럽이 등장인물에 이야기를 전달했다, 아니다 라는 말도 나온다. 그래 유럽이라 하는 오래된 건물, 조각품들과 아름다운 경치 같은 건 모든 부드럽고 우아하고 불가결하고 곡선적인 것들을 대표하는 반면, 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실제로도 그렇지만) 딱딱하고 천박하고 금전적이고 직선적인 것을 상징한다. 근데 우리의 주인공 스트레더 씨가 유럽에서 어쨌든 잘 지내고 있는 채드를 아메리카로 데려오는 일을 하게 됐는데, 우여곡절이 없을 수가 없는 거였다. 처음부터.
  그런데 진짜 파리에 가서 채드를 만나보니까, 예전의 천방지축 방탕한 채드가 아니라 어느새 세련된 몸가짐과 말씨, 행동거지가 완비한 신사로 변해 있었던 거였다. 왜냐고? 왜긴 왜인가, 위 문단에서 이야기했듯 유럽물을 제대로 먹어서 그렇지. 그리고 프랑스 아버지와 영국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해 백작한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은 마리 비오네 백작부인 가족과 친해진 결과라고 봐야 한다. 백작부인은 눈오네 자작의 친형인 비오네 백작과 결혼해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을 진짜로 아름다운 딸 잔 비오네를 낳았지만, 유럽의 귀족가문 전통상 이혼하지 못하는 쇼윈도우 부부로, 천 킬로미터 이상을 떨어져 살고 있다. 잔 비오네, 열다섯 살의 날개만 없는 천사를 만난 우리의 주인공이자 뉴섬 부인의 대사인 램버트 스트레더는, 채드의 변신이 근본적으로 사랑에서 비롯했다고 결론을 내리는데, 근데 누구를 향한 사랑인지 그게 좀 헛갈리는 상태에 이른다.
  그래 진짜로 스트레더 씨가 뉴섬 부인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고 울렛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을 때, 파리에 두 번째 대사가 도착한다. 파리에서 곧바로 할 일 없이 된 스트레더 씨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야 하며, 채드는 가업을 잇기 위해 아메리카로 가야 할까, 아니면 사랑을 위해, 아직 누가 사랑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하여튼 사랑을 위해 파리에 뭉개고 있어야 할까.

 

  하여튼 소설은 제목에 비해 너무 작은 스코프 안에 갇혀 있다. 아무리 잘 봐주어도 로맨스 소설. 더 좋은 마음으로 보면 심리소설. 좀 과도하게 심리탐구를 해서 그렇지만. 따라서 진도도 잘 나가지 않는데 책도 두 권이라 결코 만만하지 않다. 당신이 만약 인내심이 좀 부족하다면, 인내심 함양 차원에서 한 번 대차게 도전해보시는 것도 바람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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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5-07 14: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일단, 그 번역자의 문장을 그 편집자는 잡아내지도 않고 그 책을 그냥 출판했다는 겁니까? 그 말도 안되는 행위를 그 민음사에서 또..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5-07 14:1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웃겨서 미쵸요!

잠자냥 2021-05-07 14: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 지루하기 짝이 없고 그 난해하기 짝이 없는 <루이 랑베르>의 그 루이 랑베르가 여기에 또 나온답굽쇼? 게다가 그 헨리 제임스가 그 발자크 귀싸대기를 올려치는 수준이라니, 저는 이 작품 대차게 패스하렵니다. 감사합니다. 그 폴스타프 님께 땡스 투

Falstaff 2021-05-07 14:27   좋아요 4 | URL
이 책은 헨리 제임스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대화를 애매하게 만들기로 작정을 한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당연히 대화를 비롯한 행동에 확실한 타당성이 있다고 볼 수 없어서 독자는 트랩이 어디 묻혀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냥 당해야 하는 거 같았습니다.
헨리 제임스가 늙어가면서 점점 악당이 된 거 같아요!
ㅋㅋㅋㅋ 그 발자크의 그 귀싸대기 하나는 확실하게 올렸습니다!!

새파랑 2021-05-07 1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네요 ㅎㅎ 전 인내심이 많아서 미도전^^

Falstaff 2021-05-07 16:09   좋아요 2 | URL
ㅋㅋㅋ 좋습니다!
저는 소위 난해한 거보다 스케일이 작아서 별로였습니다.

coolcat329 2021-05-07 1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저는 표지 명화보고 국가 간 외교를 다룬 역사 소설이겠구나...생각했는데, 집 떠난 아들 데려오는 임무맡은 대사라뇨 ㅋㅋㅋ

Falstaff 2021-05-07 20:40   좋아요 3 | URL
아, 제 말이 그거 아닙니까!!! ㅋㅋㅋ
 
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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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소년 소설로도 읽어보지 않고, 영화나 만화 등에 숱하게 소개가 되는 바람에 마치 읽어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읽어본 줄 알았다. 작년에 우연한 기회에 그렇지 않다고 확정을 해서, 이미 찰스 디킨스는 그만 읽기로 작정을 했음에도, 좋다, 예외다, 이거 딱 하나만 더 읽고 진짜로 디킨스는 끝이다, 라며 주문을 했고 읽었다.
  그런데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은 직후 마음속으로 이걸로 디킨스 졸업장을 받았다, 해놓고도 <황폐한 집>을 읽은 전적이 있다. 그러고는 에잇 석사과정 마쳤다고 생각하자 했는데, 또 넉 달도 견디지 못하고 <어려운 시절>을 읽었으니, 그건 박사과정이었다고 하나? 그럼 <올리버 트위스트>는 포스트 닥이냐?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한 번 해봤다.
  이게 디킨스 파워가 아닌가 싶다. 읽으면서는 우습지만 재미나고, 읽고 나선 뻔한 이야기 가지고 킬링 타임 한 번 잘 했다, 더 이상은 아니다, 해놓고, 시간이 지나 인터넷서핑 하다가 안 읽어본 디킨스 나오면 또 사정없이 궁금해지는 거. 이게 디킨스 파워고 구닥다리 영국소설의 매력인 거 같다. 진짜라니까.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작품이지만)필딩의 <업둥이 톰 존스>나 로렌스 스턴의 <신사 트리스트럼 샌디의 인생과 생각이야기> 같은 게 은근히 독자를 끄는 힘이 있다. 특히 로렌스 스턴은 진짜, 지금 읽어도 포스트 모던이라니까. 그러나 아무리 ‘은근히 끄는 힘’이 있어도 <크리스마스 캐럴>은 안 읽는다. 읽지 않겠다. 일단은.
  <올리버 트위스트>의 스토리야 뭐 다들 아시겠지. 나는 안 읽었으면서도 읽은 줄 알았던 소년 소설을 경험해보신 분이 많겠고, 영화 보신 분도 많을 테니까.
  디킨스를 비롯한 19세기 초중반까지 쓰인 영국소설을 읽으면서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의 감성에 공감을 준다거나, 삶의 현실을 투사한다거나,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기대하기란 난망한 일. 그저 스토리 하나를 따라가면서 그걸 즐기는 수준 정도만 기대하면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
  애초 이 책, 출판사 ‘현대지성’에서 출간한 <올리버 트위스트>를 선택한 이유도, 거의 유일하게 한 권으로 만든 완역본이라서 그랬다. 다른 출판사들은 두 권짜리가 많다. 스토리 중심의 책이라 역자의 구별성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란 잔머리를 굴렸다는 말씀인데 오랜만에 성공한 거 같다.
  찰스 디킨스 가운데 제일 재미있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 권짜리니까 후회는 없으실 듯. 선택은 알아서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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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5-04 09: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만일 안 읽었는데, 읽은 것 같은 착각을 주는 작품 목록이 있다면 디킨스 작품이 수두룩 실릴 거예요. 저에게도 그렇다는 ㅋㅋㅋㅋ 그것도 디킨스의 힘일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1-05-04 09:31   좋아요 5 | URL
맞아요, <크리스마스 캐럴>도 틀림없이 안 읽었을 겁니다. 영화와 만화로는 무지하게 여러번 봤지만요. 그건 읽지 않겠다!!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5-04 11: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는다면 이 책으로 읽겠습니다. 한 권이라 좋네요.~

Falstaff 2021-05-04 11:10   좋아요 3 | URL
그리고 재미있어서 후다다닥 읽게 된답니다. ㅋㅋㅋㅋ

율별엠제이 2021-05-05 05: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막대한 유산>도 휘리릭 읽힙니다.. 디킨스의 매력입니다.

Falstaff 2021-05-05 13:20   좋아요 0 | URL
옙. 다행스럽게 그건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초딩 2021-05-06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습니다! ㅎㅎㅎ
시원한 하루 되세요~
언제나 통쾌한 Falstaff 님~

Falstaff 2021-05-06 12:12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