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5
헨리 제임스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헨리 제임스를 처음 읽은 건, 우습게도 벤자민 브리튼의 쉽지 않은 오페라 <나사의 회전>을 들으면서 도대체 이게 어떤 스토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원작을 찾게 된 내력을 갖고 있다. 원작을 읽으면서 작품 속에 정말로 유령이 등장한다는 걸 알고는 이런, 이 양반이 쓴 책 좀 읽어봐야겠다, 싶어 계속 찾았다. 그리하여 <여인의 초상>, <데이지 밀러>, <아메리칸>, <워싱턴 스퀘어>까지 읽고 이젠 제임스 그만 읽겠다, 작정을 한다. 그러다 다 늦게 읽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속에서 최고의 영국 소설가 네 명을 고르는데 제인 오스틴, 조지프 콘래드, 조지 엘리엇과 더불어 헨리 제임스를 꼽는 바람에 마음을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가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에서 <대사들>을 출간하자마자 구입해 읽게 됐다.
  역자 정소영은 작품해설에서 <대사들>을 포함한 “후기의 삼부작과 단편 소설들은 매우 난해해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문학 전공자들도 친숙하게 다가가기 어렵다. 그럼에도 삼부작이 제임스의 주요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난해함이 제임스 미학의 정점을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밝힌다. 위 역자의 인용문 가운데 붉은 색을 칠한 지시대명사 ‘그’를 한 번 빼고 읽어보시라. 뜻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오히려 더 잘 읽힌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신지. 역자는 본인이 원고를 썼으니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독자가 <대사들> 속에서 7만 5천 8백 92번 나오는(신뢰수준 95%, 오차범위 +/- 3.9%) 지시대명사 ‘그’와 인칭대명사 ‘그' ‘그녀’의 홍수에 휩쓸려 익사할 즈음이 되면 책을 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이것도 책이 난해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요인 가운데 하나인 건 분명하다는 것도.

 

  역자가 어떤 의미에서 <대사들>이 난해하다고 했는지, 책을 다 읽고 30분쯤 지난 독자가 설명해보자.
  주인공 이름이 루이스 램버트 스트레더. ‘루이스 램버트’를 이 책의 지리적 무대인 프랑스 말로 발음하면 ‘루이 랑베르’다. 그렇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생극 가운데 <나귀가죽>과 더불어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발자크 책 중에서 가장 읽기 힘든 ‘발자크의 철학연구’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루이 랑베르>의 주인공이다. 결혼 전야에 갑자기 새파란 면도칼을 들고 아랫도리를 훌렁 까더니 평생 거꾸로 매달려 고생스럽게 흔들거리기만 했던 신체 일부를 싹둑 잘라버리겠다고 앙탈을 부리다 기겁한 삼촌에 의하여 저지당한 문제아. <대사들>의 루이스 램버트는 루이 랑베르와 달리 긍정적이고, 사리판단 잘 하고, 정의파인 신사다. 여기서 내가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루이 랑베르가 아니라 그를 만들어 낸 오노레 드 발자크.
  내 경우에 국한해서 벌어지는 일인지 모르겠는데, 발자크를 읽기 위해서는 거의 무한정 쏟아지는 묘사, 가구가 됐든, 건물이 됐든, 사람의 외모가 됐든,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됐든 간에 아주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묘사에 간혹 질리고는 한다. 근데, 헨리 제임스의 다른 책의 경우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대사들>을 읽으면서 저절로 무한 묘사의 달인 발자크가 머리에 떠올려졌으며, 급기야 <대사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헨리 제임스가 발자크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일 수준이라는 걸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 특정인과 특정인을 둘러싼 관계자들의 대화 속에서 서로 머리를 굴리는 것, 그러면서 행동으로 비쳐 보이는 극도로 미세한 것까지 모두, 모두, 모두,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독자의 뇌 속을 헝클어트리는데, 이게 한 번의 번역을 거쳐, 평소에 지시대명사와 인칭대명사를 자주 쓰지 않은 우리말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한 번역으로 말미암아 75,892 번의 ‘그’까지 섞여버리면, 지금 헨리 제임스가 묘사하고 있는 의식, 생각, 짐작, 또는 이런 것들과 비슷한 일이 과연 누구의 대뇌에서 벌어지고 있는 화학작용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기에 또, 등장인물들의 대화 가운데서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을 찾아보기 힘들다. 출연진 거의 대부분이 미국의 부르주아 또는 세미 부르주아 신사 숙녀, 유럽의 백작 가문 사모님과 영애라서 그런지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듯하다. 그들만의 대화법도 겉멋은 잔뜩 들었으나 알고 보면 속이 하나도 없는 허례로 그득하고,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이심전심이 되어야만 뜻을 알 수 있는 대화를 그들은 진짜 기가 막히게 풀어나간다. 인간 사이에 말이 왜 존재하는가. 이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A를 말하고 싶은데 그걸 A로 말하면 마치 격이 떨어질 거 같아서 A′로 표현해야 했던 19세기말, 20세기 초 벨 에포크 시대의 유럽 신사숙녀들의 노고에 새삼 마음이 경건해진다. 그들의 대화를 21세기의 한국 독자들도 공유해야 하는 아주 가벼운 문제가 있을 뿐.
  그리하여 만일 두 권짜리 장편소설 <대사들>에서 등장인물들의 의식이나 생각 등에 대한 묘사를 최소화하는 요즘 소설처럼 다시 쓴다면 원고지 천오백 매 정도의 짧은 장편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바로 이 지루하고, 골치 아프고,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장황한 묘사가 <대사들>을 헨리 제임스의 노작勞作으로 만드는 계제가 되는 것이고, 이렇게 쓰든 저렇게 쓰든, 작품을 만드는 건 독자가 아니라 작가의 권리니까.

 

  벨 에포크 시대의 미국. 도시 노동자 80퍼센트 이상의 고혈을 짜서 만들어낸 이윤은 자본가 가문의 자제들을 일하지 않는 자, 일할 필요가 없는 자로 만들어놓았고, 태생적으로 유럽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던 그들 가운데 일부분은 구대륙으로 흘러들어 청춘을 소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매사추세츠 울렛 지방의 품목을 밝히지 않는 거대 생산 공장을 운영하는 뉴섬 가문의 적장자 채드윅 뉴섬도 이들 부류 가운데 한 명으로 현재 파리에 거주하고 있다. 채드윅, ‘채드’로 말하자면 부잣집 외동아드님답게 세상 버르장머리 없게 성장해 성격이 속칭 개판이었던 젊은이로, 유럽 각지를 떠돌며 젊음을 소비하다가(소비? 소비라니? 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질투를 유발하는 젊음이란 말인가!) 소위 예술을 공부합네, 하고 현재는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강건하고 올곧은 성격이지만 아들에겐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기엔 문제가 있는,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디서 빠지지 않는 엄마 뉴섬 부인이 생각하기에, 채드가 돌아오지 않는 건 분명히 파리에서 모종의 아가씨와 미친 연애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낸다. 그리하여 즉시 돌아와 가업을 잇든지, 아니면 호적에서 지워버릴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말로는 그렇지만 즉각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의 수행을 위해 우리의 선량하고, 지극히 상식이 통하고, 포용력 있고, 정의로우며 합리적인 우리의 주인공 루이 랑베르, 아니, 루이스 램버트 스트레더 씨를 아들에게 대사로 보내게 된다.
  그래서 제목이 대사들ambassadors이 된다. 나는, 책 표지도 그렇고 제목도 그래서, 일단 헨리 제임스니까 유럽의 모처, 궁정, 청와대, 의사당에서 벌어지는 외교전을 그리지 않았을까 싶었다가, 이 사실을 알고 조금, 아주 조금 김이 샜음을 고백한다.
  램버트 스트레더 역시 괜히 몇 달씩 걸리는 먼 길을 떠나는 게 아니라, 울렛의 영주라고 해도 별로 손색이 없는 과부 뉴섬 부인과의 오래된 교류도 있고 해서, 유럽으로 가 성공적으로 집나간 탕아를 데려오기만 하면 다음날로 곧바로 뉴섬 부인에게 청혼을 해, 지금이 55세니까, 앞으로 15년가량의 여생을 편히 놀고먹으려 하는 꿍꿍이가 있긴 있었다. 스트레더도 역시 많은 재산이 있었지만 불운의 별은 과거에 벌였던 일곱 번의 사업마다 하는 족족 개골창에 빠뜨려 버려 이제 남은 거라곤 생의 마지막 날까지 그저 근근이 먹고 살기에 아주 약간의 부족함만 있을 정도. 스트레더 씨는 혼자 먼 길을 떠나기에 조금 적적한 면이 있으니 코네티컷 밀로스 출신의 변호사이자 자신이 가장 믿는 친구로 현재 멜버른에서 머물고 있는 웨이마시와 리버풀 항구 근처의 작은 도시 체스터에서 만나기로 한다. 여기서 우연히 만난 역시 밀로스 출신의 서른다섯 정도의 현명한 노처녀 마리아 고스트리 양. 게다가 파리 마르뵈프 구역의 작은 중이층 집에서 살고 있다. 스트레더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고스트리 양과의 우정을 맺게 되는데, 우연히 만난 이 현명한 여성의 덕을 얼마나 많이 보는지, 난 하마터면 뉴섬 부인 대신 고스트리 양하고 결혼할 줄 알았다니까 글쎄.

 

  여기서 잠깐. 헨리 제임스는 미국 태생이지만 나이 들어 영국으로 귀화한다. 내가 읽어본 그의 작품 속에도 미국과 유럽의 여러 장면이 나오고, 주된 장면은 거의 전부 유럽이다. 독자는 헨리 제임스가 젊은 시절부터 단단히 유럽동경이란 질병을 앓고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고, 실제로도 몇 작품 속에서 미국인이란 돈으로 승부를 거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 이렇게 양분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나마 상식이 통하고 총기가 제대로 작동하는 인물들의 그룹은 모두 유럽을 동경한다. 실제로 문장 속에, 의인화한 유럽이 등장인물에 이야기를 전달했다, 아니다 라는 말도 나온다. 그래 유럽이라 하는 오래된 건물, 조각품들과 아름다운 경치 같은 건 모든 부드럽고 우아하고 불가결하고 곡선적인 것들을 대표하는 반면, 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실제로도 그렇지만) 딱딱하고 천박하고 금전적이고 직선적인 것을 상징한다. 근데 우리의 주인공 스트레더 씨가 유럽에서 어쨌든 잘 지내고 있는 채드를 아메리카로 데려오는 일을 하게 됐는데, 우여곡절이 없을 수가 없는 거였다. 처음부터.
  그런데 진짜 파리에 가서 채드를 만나보니까, 예전의 천방지축 방탕한 채드가 아니라 어느새 세련된 몸가짐과 말씨, 행동거지가 완비한 신사로 변해 있었던 거였다. 왜냐고? 왜긴 왜인가, 위 문단에서 이야기했듯 유럽물을 제대로 먹어서 그렇지. 그리고 프랑스 아버지와 영국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해 백작한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은 마리 비오네 백작부인 가족과 친해진 결과라고 봐야 한다. 백작부인은 눈오네 자작의 친형인 비오네 백작과 결혼해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을 진짜로 아름다운 딸 잔 비오네를 낳았지만, 유럽의 귀족가문 전통상 이혼하지 못하는 쇼윈도우 부부로, 천 킬로미터 이상을 떨어져 살고 있다. 잔 비오네, 열다섯 살의 날개만 없는 천사를 만난 우리의 주인공이자 뉴섬 부인의 대사인 램버트 스트레더는, 채드의 변신이 근본적으로 사랑에서 비롯했다고 결론을 내리는데, 근데 누구를 향한 사랑인지 그게 좀 헛갈리는 상태에 이른다.
  그래 진짜로 스트레더 씨가 뉴섬 부인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고 울렛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을 때, 파리에 두 번째 대사가 도착한다. 파리에서 곧바로 할 일 없이 된 스트레더 씨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야 하며, 채드는 가업을 잇기 위해 아메리카로 가야 할까, 아니면 사랑을 위해, 아직 누가 사랑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하여튼 사랑을 위해 파리에 뭉개고 있어야 할까.

 

  하여튼 소설은 제목에 비해 너무 작은 스코프 안에 갇혀 있다. 아무리 잘 봐주어도 로맨스 소설. 더 좋은 마음으로 보면 심리소설. 좀 과도하게 심리탐구를 해서 그렇지만. 따라서 진도도 잘 나가지 않는데 책도 두 권이라 결코 만만하지 않다. 당신이 만약 인내심이 좀 부족하다면, 인내심 함양 차원에서 한 번 대차게 도전해보시는 것도 바람직하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5-07 14: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일단, 그 번역자의 문장을 그 편집자는 잡아내지도 않고 그 책을 그냥 출판했다는 겁니까? 그 말도 안되는 행위를 그 민음사에서 또..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5-07 14:1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웃겨서 미쵸요!

잠자냥 2021-05-07 14: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 지루하기 짝이 없고 그 난해하기 짝이 없는 <루이 랑베르>의 그 루이 랑베르가 여기에 또 나온답굽쇼? 게다가 그 헨리 제임스가 그 발자크 귀싸대기를 올려치는 수준이라니, 저는 이 작품 대차게 패스하렵니다. 감사합니다. 그 폴스타프 님께 땡스 투

Falstaff 2021-05-07 14:27   좋아요 4 | URL
이 책은 헨리 제임스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대화를 애매하게 만들기로 작정을 한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당연히 대화를 비롯한 행동에 확실한 타당성이 있다고 볼 수 없어서 독자는 트랩이 어디 묻혀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냥 당해야 하는 거 같았습니다.
헨리 제임스가 늙어가면서 점점 악당이 된 거 같아요!
ㅋㅋㅋㅋ 그 발자크의 그 귀싸대기 하나는 확실하게 올렸습니다!!

새파랑 2021-05-07 1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네요 ㅎㅎ 전 인내심이 많아서 미도전^^

Falstaff 2021-05-07 16:09   좋아요 2 | URL
ㅋㅋㅋ 좋습니다!
저는 소위 난해한 거보다 스케일이 작아서 별로였습니다.

coolcat329 2021-05-07 1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저는 표지 명화보고 국가 간 외교를 다룬 역사 소설이겠구나...생각했는데, 집 떠난 아들 데려오는 임무맡은 대사라뇨 ㅋㅋㅋ

Falstaff 2021-05-07 20:40   좋아요 3 | URL
아, 제 말이 그거 아닙니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