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 을유세계문학전집 116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지음, 이경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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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이랍시고 니콜라이 고골에 관한 바이오그래피를 소개하는 건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으니 생략하자.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는 고골의 초기 작품으로 그의 나이 약관 스물두 살 때인 1831년에 발표해 페테르부르크의 종잇값을 높였다고 하는데, 역자 이경완에 의하면 “낭만주의적 우크라이나 창작 설화집”이라고 한다. 창작 설화집이라니 이게 무슨 뜻일까? 19세기 초에 고골이 낭만주의적 사조에 입각해 자신 스스로 설화를 창조했을까? 아니면 전래 동화나 설화를 작가가 낭만주의 사조에 어울리게 각색을 했다는 말일까? 나는 두번째 가정에 한 표.

  고골은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우크라이나 설화집을 출간한다. 이 책은 두 권 모두 싣고, 여분으로 <미르고로드>와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속에 든 작품을 합해 세 편의 단편을 보탰다.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 68번으로 나온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에 들어 있는 다섯 편과 중복되는 것이 없으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내용은, 음, 굳이 소개를 해야 할까 싶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만.


​  먼저, “야회”. 제목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라고 해서 나는 디칸카 라는 도시의 근처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 마을 주민들이 야유회 가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페스트를 피해 열 명의 귀족 신사 숙녀들이 시골로 내려가 진탕 먹고 마시면서 풀어놓은 음담패설을 모아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오정희의 세번째 작품집 《바람의 넋》에 실린 단편 <야회>를 생각했어야 했다. 즉, 야유회野會가 아니라 밤모임夜會이었던 것. 마을의 야회라고 하는 건 무도회와 비슷한 촌놈들의 놀이로, 사람 가운데 특히 여성들이 많이 모여 물레질을 하다가 노래 즉 노동요를 부르고, 이제 남자들과 아이들도 합세해서 악기를 보태 흥을 돋우다가 춤판, 우리가 잘 아는 우크라이나 지방의 전통무용인 호팍khopak, 앉았다 일어났다가 앉은 채로 무릎을 쭉 펴는가 했더니 다시 다른 쪽 다리하고 교대하는 경쾌한 춤을 곁들이는데,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가 더 남아 있었으니 바로 이야기다. 당시엔 영화는 물론 TV, 라디오 등의 매체가 없어서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이야기꾼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이야기꾼을 중심으로 반원을 이루어 앉아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민담, 야담, 설화, 전설 등에 귀를 기울인다. 유난히 글을 재미있고 화려하게 쓰는 작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이야기일지언정 정말 귀에 착 달라붙게 감칠맛을 더해 이야기하는 꾼도 있는 법이니, 별다른 즐길 거리가 없는 19세기 초엽에 그의 이야기 한 대목을 듣는 것은 지금 세상에선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재미였을 것이다. 이게 디칸카 근교에 있는 시골 마을에서 종종 있었던 야회, 밤마실 이야기다. 이 동네의 가장 으뜸인 이야기꾼은 “밤색 머리카락”이란 뜻의 “루디 판코”라는 이름을 한 양봉업자, 스스로 일컫기를 ‘벌치기’로, 하여튼 이 책의 구색은 이 벌치기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포마 그리예비치라는 신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이다.

  두번째로, 러시아 옛날 이야기 가운데 악마가 실제로 등장해 빗자루를 타고 보름달 아래를 비행하거나, 무덤을 열고 기어 나오는 원조 좀비 이야기는 주로 우크라이나에서 나오고, 이 가운데서 더 야만스러운 용맹을 찬양하는 와일드 버전은 우크라이나 가운데서도 특히 기마민족 카자흐 이야기다. 고골은 이 책을 쓰고 얼마 더 있다가 당대에 비견할 작품이 없는 멋진 카자흐 소설을 한 편 쓰니 바로 <타라스 불바>였고, 이후 모스크바에서 보름달 아래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이야기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 역시 우크라이나 출신 의사인 미하일 불가코프였으며,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카자흐 서사시 <고요한 돈강>도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출세한 미하일 숄로호프였다. 카자흐 문학이 뭐냐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나는 그것에 대해 뭐라 특정할 수준이 아니라서,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밖에 못하는데,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거친 광야 같은 성정과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이 사람들, 사랑을 한 번 해도 심장 약한 사람들은 생각도 못할 험한 짓을 저질러 버린다. 심지어 악마의 꼬리를 잡고, 잡은 뾰족한 꼬리로 꼬리의 주인인 악마의 귀싸대기를 찰싹찰싹 때리면서 연인이 요구한 결혼 선물을 얻기 위해, 그깟 것, 어차피 한 번은 죽을 목숨 같은 건 쉽게 내놓는 수준이다.


​  세번째로, 고골, 하면 그보다 열 살 많은 선배 작가 푸시킨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러시아 음악사상 고골과 푸시킨이 없었으면 러시아 작곡가가 만들어낸 오페라가 절반도 안 됐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동네의 벌치기 루디 판코가 제일 먼저 풀어놓는 이야기인 <소로친치 시장>은 무소륵스키가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로 만들려고 했다가 그만 뒀는데 참 과정이 애닯아서 소개한다. 이게 얼마나 재미지는지 무소륵스키 자신이 직접 <소로친치 시장>을 참고해서 대본을 쓰고 작곡을 해 존경하는 당대 음악선생에게 보여줬다가 악평을 듣는다. 가뜩이나 알코올 의존증이 심한 무소륵스키는 여기에 우울증까지 덮쳐 악보를 통째로 불살라 초기 스케치 일부만 남게 되고 곧 숟가락 놨다. 이걸 후배 블라디미르 에시포프 등이 되살리지만 공연은 거의 되지 않고 녹음 몇 종만 구할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헝가리 음반 레이블 상도스에서 (아마도)유일한 CD를 출시했지만 거의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사두지 않은 것을 지금 통탄하고 있다.

 

 무소륵스키, <소로친치 시장> 예전에 알던 음반은 아니다


  책의 세번째 이야기로 나온 <5월의 밤 또는 물에 빠져 죽은 여인>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5월 밤>이란 제목의 오페라로 작곡했다. 원주민의 대표니까 족장 정도 되나? 하여튼 그렇다 치고, 족장의 아들이 책에선 간나, 오페라에선 한나 – 러시아어 표기 Ganna는 들어보면 ‘한나’와 ‘간나’ 중간 정도의 발음인데 ‘한나’에 가깝다. 남자 이름으로도 German을 ‘헤르만’으로 불러야 하나, ‘게르만’으로 불러야 좋나, 말들이 많다 – 와 혼인하기 위해 전설로 전해지는 다수의 처녀 물귀신들 가운데 독한 마녀를 잡아 대장 처녀 물귀신의 소원을 풀어준 대가로 한나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얘기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오월 밤>


  2부의 첫번째 이야기 <성탄전야>는 페터 차이콥스키가 <꽃신: Slipper>라는 제목으로 역시 작가 자신이 대본을 쓰고 작곡했다. 동네 제일가는 젊은 대장장이 바쿨라는 자기 엄마를 사랑하는 늙은 대장장이 춥의 딸 옥사나를 사랑하고 있다. 옥사나 역시 바쿨라를 사랑하지만 내놓고 박대한다. 너무 어려 그렇게 해야 더 좋은 줄 아는데 바쿨라는 아예 죽을 지경이다. 이런 바쿨라에게 동네 많은 친구들을 증인으로 해놓고 여황제 즉 예카테리나 2세가 신는 구두(꽃신이 더 어울리지 않나? 그래서 내가 ‘쓰레빠’Slipper를 꽃신이라 쓴 거다)를 가져오면 결혼해주겠다고 한다. 절망하던 바쿨라는 자살을 결심하고 숲으로 가다가 자기 어깨 위에 악마가 걸터앉은 걸 보고 냅다 잡아서 자기 종으로 만들어버린다. 한밤중에 악마를 타고 우크라이나에서 페테르부르그까지 날아가 우여곡절 끝에 꽃신을 구해와 결혼에 성공한다는 동화. 

 차이코프스키, <꽃신>


  이렇게 고골의 낭만주의적 창작 설화를 오페라로 만든 작품은 솔직히 말해서 별로 재미없다. 왜 그러나 하면, 이 책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와 마찬가지로 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 내용을 즐기기엔 세대 차이가 크고 또 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그저 이런 설화 작품을 고골이 다시 쓰기도 했다는 정도로만 아는 수준이면 되지 않을까 한다. 굳이 직접 읽어 보시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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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이관우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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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까지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유대계 작가인지 몰랐다. 1897년에 발표했지만 이후 수십년 동안 외설물, 심지어 포르노그라피의 혐의를 쓰고 판매 및 공연 금지를 당한 극작 <라이겐>, 말년 작품으로 정말 많은 등장인물이 출연하는 장편소설 <트인 데로 가는 길>을 읽었음에도, 그저 이이의 작품에는 유난히 유대인들이 많이 등장하는구나, 싶었을 뿐, 작가 자신이 유대계인 줄은 생각도 안 했다. 유대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가업이 음악가, 연주자, 그리고 금융업이라고 칭하는 고리대금업이라 그랬는지 아버지, 아트루어 본인, 그리고 동생, 게다가 외갓집까지 모두 다 의료 전문인 집안인 것 하나 가지고 설마 작가가 유대인일까,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거 같다. 왜 이렇게 설레발을 치느냐 하면, 지금 독후감을 쓰는 중편소설 <죽음>에서는 등장인물이 유대인이냐 아니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아버지 요한 슈니츨러 씨가 후두학 전문의고 아르투어가 젊은 시절에 아버지의 조수, 시쳇말로 새끼의사를 몇 년 했다는 거, 그리하여 호흡기 질환과 구태여 결핵이라고 콕 집어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이 비슷한 질환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꽤 많이 관찰할 수 있었고, 심지어 숨을 거두는 장면도 목격을 했을 터라, <죽음>을 쓰는데 작지 않은 도움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죽음>은 1892년 완성해서 1894년 잡지에 세 번에 걸쳐 연재를 하고, 1897년 출판한 중편소설이다. <트인 데로 가는 길>에서도 짧게 이야기한 바 있지만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은 없을 것이 틀림없는 바, 여태까지 의사 짓을 하게 만든 아버지가 1893년 숨을 거두는 바람에 이제 청진기를 벽난로에 던져버리고 불을 확 싸지른 슈니츨러는 그 해에 당장 자신을 도발적인 극작가로 이름이 나게 만든 <라이겐> (혹은 <윤무>)를 발표한다. 한 해가 지나고 1894년에 <죽음>을 유명 잡지에 연재하자 이번엔 그를 실력 있는 산문 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고 하니 당시 기준으로 대단하기는 대단한 작가였던 모양이다. <죽음>은 당연히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을 내는데, 작품의 플롯도 대단히 간략하여, 폐병 환자의 마지막 1년을 그렸다.


​  이 작품에 방점을 찍는 것은, 죽어가는 작가, 게다가 19세기에는 결핵이나 매독으로 죽는 것에 일종의 매력 또는 판타지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하는데, 작가나 독자로 하여금 뭔가 하여간 애틋한 감상을 기대하게 만드는 반면, 직접 폐병으로 인한 죽음의 장면을 목도한 적이 틀림없이 있을 슈니츨러는 독자의 기대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적어가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죽음이란 건 미모의 여배우가 창백한 화장을 했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통통한 얼굴을 하고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와중에도 할 말은 꼬박꼬박 다 한 연후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하고 죽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연인도 아름답게 이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누구도 고운 모습으로 죽지 못하는 게 인생이고 인간이다. 그래서 죽어가는 혹은 이미 죽은 사람더러 가끔 “정 떼려고” 이런 모습, 저런 행동을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지

  등장인물은 딱 세 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머지는 전부 엑스트라. 스무 살에 시작해 스물한 살에 막이 내리는 아름다운 아가씨 마리. 마리는 몇 살인지 모르지만 아직은 젊다고 해야 할 작가 펠릭스와 동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펠릭스는 자신의 이름 felix 처럼 행운이 따라붙기는커녕 결핵으로 보이는 폐병을 앓고 있고, 이를 어릴 적에 죽마를 함께 타고 지낸 의사 친구 알프레트에게 치료를 맡기고 있었다. 주연은 마리와 펠릭스, 알프레트는 조연이다. 이렇게 세 명이 이야기를 꾸려간다.

  알프레트가 자신의 최선을 다해 펠릭스를 치료하는 건 환자 본인도 알겠는데, 점점 병세가 나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알프레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좋아지고 있으며 심지어 완치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만 내놓는 데 의심이 든 펠릭스는, 어리석게도 (작가의 아버지를 빙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대학병원의 교수 의사 베르나르트 박사를 찾아가 정밀검사를 받는다. 베르나르트 박사는 대학병원 의사들이 늘 그렇듯이, 이 때가 1890년인데, 당신의 남은 생명은 1891년 1월에서 2월까지니까 미리 각오하고 있으슈, 라고 진실을 말해버렸다. 작품의 시작점은 1890년 5월. 한창 봄을 즐길 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빈이 위도 47도 지역에 위치해 있으니 해만 떨어졌다 하면 팔뚝에 오소소한 소름이 돋는 쌀쌀한 날씨다. 아직 그렇지는 않지만 저녁 어스름에 공원 벤치에서 마리 혼자 펠릭스를 벌써 30분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오늘따라 우중충한 표정으로 등장한 펠릭스는 나름대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프라터(그냥 도심에 있는 아름답고 넓은 공원 정도로 생각하자)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가더니 밥상을 앞에 놓고 갑자기 “뜨겁게 흐느끼면서” 울기 시작했다. 마리 입장에서 “내가 흠모하는, 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자기”인 펠릭스 때문에 밥맛이 똑 떨어졌다. 그러다가 드디어 펠릭스가 마리한테 고백을 하는데, 앞으로 자신 앞에 남은 생은 1년에 불과하다고, 자긴 오래 견디지 못한다는 것.

  마리의 마음이 찢어진다. 그리하여 다음날 날이 새자마자 아직 영업 개시도 하지 않은 알프레트한테 쫓아간 커플은 의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요구한다. 알프레트는 냉정한 베르나르트 박사하고는 다른 종류의 의사라서, 여전히 완치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펠릭스는 자신이 1년 안에 죽을 것임을 안다고, 마리는 나를 잊고 다른 남자를 찾아가야 한다고 어리광을 부린다. 이 말 듣고 가만히 있거나, 어떻게 내 마음을 그리 잘 알아? 나한테 유산 좀 남겨줄 수 있어? 그럼 영원히 자기를 잊지 않을 텐데, 라고 말하는 여주인공은 없는 법이라서, 순간적으로 확 돌아버리며 이렇게 외친다.


​  “독약 좀 주세요. 나는 이 사람보다 1초도 더 오래 살고 싶지 않아요. 이 사람이 그걸 믿도록 해야겠어요.”


  지금 당장 벌컥벌컥 독약 한 사발 들이켜 칵 죽어버리겠단다. 나는 이것이 진심이라는 걸 이해한다. 의사 알프레트도 알았다. 그리하여 의사는 커플에게 따뜻한 남쪽 지방으로의 여행을 처방한다. 신선한 공기와 편안한 휴식이 둘을 다시 온전한 상태로 되돌려 놓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리고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프레트 자신 역시 회생 또는 생명 연장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동남쪽, 스위스나 이탈리아일 수도 있는 호수에 바짝 접한 작은 집을 빌려 숙박을 하기 시작했다. 펠릭스는 건강에 관한 한 이름처럼 펠릭스(felix:행운)하지 않았지만, 펠릭스한 집안 태생이라 노동하지 않고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룸펜 인텔리겐치아 부르주아다. 그래 앞 문단에서 마리한테 재산 좀 유증해주는 것이 어떤가 운을 떼어봤던 건데, 여태까지도 그랬고 심지어 진짜로 죽을 때까지 비슷한 이야기 한번 꺼내지 않는다. 그래, 달리 부자겠니? 이런 구두쇠 노랭이 기질이 있어서 부자겠지.

  이제 이야기는 간단하다. 이들 커플에게 남아 있는 것은 병이 깊어짐에 따라 아름다운 죽음과 아름다운 이별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과, 삶에 대한 집착, 홀로가 아닌 ‘나 혼자’ 죽음을 맞아야 하는 두려움, 그리고 이런 환자를 직접 돌보는 간병자가 느껴야 하는 복잡한 심정. 사랑에서 애정으로 갔다가, 결국 정 밖에 남지 않게 되는 과정. 나중엔 그나마 있던 정도 싹 사라지는 비정한 죽음 또는 이별의 과정이다. 스스로 독약을 청했던 마리가 정말 자신과 함께 죽어줬으면 하는 펠릭스와, 자신이 처음엔 그렇게 주장했지만 결코 환자와 함께 죽고 싶지 않아서, 혹시 환자가 자기 모르는 사이에 독약을 물에 타 먹이거나 흉기로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마리.

  그래. 그렇게 죽고 이별하는 거다. 아름다운 이별과 아름다운 죽음은 세상에 없다. 꼭 책을 읽어야 아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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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2-20 0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ㅠㅠ
죽음은 실재의 극치라서 감히 아무도 닥치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하는듯요. 그래서 은유하고 미화하는듯요
과정속에서 마리의 마음의 변화는 이해하겠는데, 펠릭스는....^^

Falstaff 2022-12-20 15:43   좋아요 1 | URL
죽어가는 마당인데 펠릭스의 마음 역시 이해 못할 것도 없더라고요. 처음 마음엔 그러했지만 진짜 죽을 거 같으니까 혼자 죽기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니까 누구든지 죽은 다음에 애닲아 하지 말고 있을 때 잘 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ㅋㅋㅋㅋ

stella.K 2022-12-20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죽은 자는 말이없다만 알고있는데 이 사람 책이 좀되더군요. 그런 걸 보면 거의 모든 작품에서 죽음을 다루지 않았나 싶기도 하네요. 프로이트도 오스트리아면서 의사잖아요. 이 양반 프로이트에게서도 영향을 받지않았을까요?

Falstaff 2022-12-20 15:46   좋아요 1 | URL
프로이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프로이트도 슈니츨러도 과하게 섹스 오리엔티드 된 세계관에 사로잡히지 않았었나 싶습니다.
이 양반 작품이 많지만 몇 개 읽어보니까 이젠 내돈내산 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생기지는 않더라고요.

yamoo 2022-12-27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와 슈니츨러는 아주 잘 알고 있던 사이는 아니였지만 프로이트가 슈니츨러의 작품을 매우 흠모했고, 자신이 힘들게 쓰고 있는 임상 이론서들과 달리 그 내용을 절묘하게 작품에 잘 녹여내어 재미있는 우화로 쓰는 능력을 매우 매우 부러워하고 질투까지 했다고 합니다. 정신분석 공부하는 분들에게는 꽤 유명한 이야기..

슈니츨러의 <사랑의 묘약>은 그 단면을 여실히 볼 수 있는 작품이에요~

<죽음>은 제가 안봐서 모르지만, 여기에도 정신분석적인 모티브를 아주 잘 차용하고 있을 거 같습니다. 슈니츨러는 당시 정신분석 이론에 꽤 정통했었다고 합니다..

슈니츨러의 거의 모든 번역본을 모으고 있습니다만, 아직 죽음은 소장하지 못했는데, 이참에 주문해야 겠습니다. 과거에 나온 거의 모든 슈니츨러 작품들을 모으다보니, 한가지 기가 찰 노릇이 같은 작품을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제목으로 냈다는 거...심히 열받았었습니다~ㅎ

Falstaff 2022-12-27 11:55   좋아요 0 | URL
아, 프로이트가 슈니츨러를 흠모.... 그렇군요.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ㅎㅎㅎ
죽음, 슈니츨러 작품 가운데서도, 그래봐야 세권 읽었을 뿐이지만, 괜찮더라고요. 내돈내산을 안 할지언정 계속 파볼 생각입니다. 도서관 다니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
 
아메리카의 비극 -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0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김욱동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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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인데 안 팔리는 게 유감. 범우사 <미국의 비극>으로 읽었음. 몽고메리 크리프트, 리즈 테일러 주연의 <젊은이의 양지>의 원본. 물론 영화에선 왜곡이 있음. 지상 최고의 미녀 리즈를 멍청하게 보일 수 없어서 작품을 왜곡. 제목은 아메리카의 비극 대신 "미국식 비극"이 더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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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12-19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영화 <젊은이의 양지> 원작이군요! 상하 합쳐 1600 페이지가 넘네요. ㅠ
저는 <시스터 캐리> 갖고 있는데 이것도 참 두껍습니다.

Falstaff 2022-12-19 18:51   좋아요 1 | URL
근데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도무지 손에서 떨어지지가 않아요.
물론 지금 시각으로 보면 아침 엽기 드라마이긴 합니다만. ㅋㅋㅋㅋ
 
체인즐링
토머스 미들턴 지음, 조성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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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뒤편에 실린 지은이 소개를 읽어보면, 토머스 미들턴(1580~1627)은 '또 다른 셰익스피어'로 불릴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일한 극작가라고 했다. 그의 희극과 비극은 동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으며, 아리스토파네스, 입센, 라신과 비교되고, 17세기 중엽 영어권 최초의 여성 전업 작가 애프러벤, T.S. 엘리엇까지 숱한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셰익스피어의 16년 연하니까 영국의 르네상스 뿐 만 아니라 세계 르네상스 문학에서 거의 독보적 존재로 이름을 굳힌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수는 없겠지만, 토머스 미들턴이란 극작가가 있었다는 것만 알지 정말로 그의 작품은 단 한 편도 읽은 적 없고, 우리나라에서 막을 올렸다는 공연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도 기억에 없는 사람을 "또 다른 셰익스피어니”, 다른 이름도 아니고 아리스토파네스, 입센, 라신과 맞먹을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하면 조금 무리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여튼 토머스 미들턴은 미미하게 시작해 젠틀맨의 위치에까지 오를 정도로 입신양명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아버지를 다섯 살 때 여의긴 했으나 학업을 끝마치지는 못했지만 옥스퍼드에 입학했다. 이때쯤 극단 생활에 매력을 느껴 학교를 때려 치우고 '딴따라의 길'로 접어들긴 했지만, 대부분의 극단 종사자처럼 사주팔자에 역마살이 낀 건 아니라서 극단에 소속된 작가, 배우가 아니라 요즘 말로 프리랜서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인 <체인즐링> 역시 야외무대가 아닌 완전한 실내 극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쓴 것으로 보아 프리랜서가 맞다는 짐작도 해본다.


​  작년 연말에 오에 겐자부로가 쓴 <체인지링>을 읽은 적 있다. 오에의 '체인지링'이 미들턴의 '체인즐링'과 같은 단어다. 다만 일본어의 제한된 발음과 표기방식으로 쓰인 카타카나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서 "Changeling"이 '체인지링'이 된 것일 뿐이다. 오에 작품의 독후감에서도 한 번 이야기했지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체인즐링의 사전적 의미를 다시 소개하면, (1) 주저하는 사람, (2) 아무도 모르게 뒤바뀐 사람 혹은 아이(아이의 경우 요정에 의해서 바뀜), (3) 모자란 사람을 의미한다. 근데 내 경우에는 (2)번의 의미 말고 달리 쓰인 경우는 보지 못했다.

  19세기, 양보해서 18세기도 아닌 17세기 초반에 쓴 희곡이 현재와 비교해서 어떤 특징이 있고, 당시의 주류 연극행위에 관한 성격이 어떻고 하는 건 중세 영어를 연구하는 영문학자에게 맡겨 두기로 하자. 미들턴이 <체인즐링>을 처음 공연하고 정확하게 4백년이 흐른 오늘, 공연이 아니라 희곡을 읽은 현대인의 감상을 솔직하게 적고자 할 뿐임을 먼저 양해해주기 바란다.

  미들턴과 로울리가 공동작업을 해 완성한 <체인즐링>은 스페인의 버만데로 성과 인근의 정신병원, 이렇게 두 장소에서 번갈아 펼쳐지는데, 성 안에서의 비극과 정신병원의 희극 씬이 서로 교차해 전개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5막에 가서 인물들이 합해져 비극으로 마감한다. 역자는 해설에서 이를 주 서사(버만데로 성)와 보조 서사(정신병원)으로 설명한다. 보조서사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두 명인 안토니오와 프란시스커스는 나중에 성주 버만데로의 하인으로 밝혀진다. 주 서사나 보조 서사나 주제는 같다. 불륜과 부정. 지금은 아침 드라마의 막장에서조차 발견하기 힘든 범죄 등등.


  스토리를 이야기해보자.

  먼저 보조 서사. 정신병원. 병원장은 나이 많은 알리비우스. 나이가 많으니 전립선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배뇨에 문제가 있고, 그것보다 더 심각한 발기부전을 겪고 있는 바, 알리비우스의 이마에도 뿔이 돋으려고 하는지 근질근질하기 시작한다. 배우자는 자기 나이 근처에서 찾는 것이 현명하다는 진리를 무시하고 병원장이니 4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돈푼 깨나 만지는 덕분에 새파랗게 젊고 아름다운 이사벨라를 아내로 맞이한 건 뭐 알리비우스 개인의 욕심을 채운 거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사벨라 역시 뜨거운 피가 흐르는 절정기의 여성인데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이 의심 많은 원장선생은 아내를 자기 병원 안에 들여놓고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해버린다. 아닌게 아니라 아름다운 이사벨라를 탐하는 남자들이 많긴 하다. 이 가운데 위에서 얘기했듯 버만데로 성주의 하인 안토니오와 프란시스커스는 곧 숨이 넘어갈 만큼 상사병에 걸려 얼굴에 노랑병이 들어 죽어가려다가 드디어 고의로 미친 척을 해, 병원에 입원하는데 성공한다.


​  그리고 주 서사. 처음부터 끝까지 로만데로 성이다.

  막이 올라가면 주인공 알세메로가 친구 자스페리노와 함께 몰타로 항해를 하려다 바람이 좋지 않아 출항하지 않고 버만데로 성을 방문한다. 연극의 속도를 위해 곧바로 알세메로는 여주인공 베아트리스와 마주치고, 둘은 언제나처럼 한 순간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이미 알론조 드 피락쿠오와 정혼했고 일주일 후에 결혼을 할 예정이다. 아뿔싸. 알세메로는 이제 막 세상의 기쁨을 알았구나, 하는 순간에 사랑을 다시 거둬들여야 함을 알고 단칼에 포기해버리지만, 베아트리스는 정혼자 알론조를 자신의 남편으로 나쁘지 않게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알세메로한테 뭐가 씌었는지 그를 위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때 등장하는 버만데로 가의 하인 드플로레스. 콰지모도보다 흉하게 생긴 얼굴을 한 사나이. 자신이 자신의 외모를 품평해 놓은 것을 보자.


​  "내 얼굴이 꽤 추하다는 건 인정해. 매독에 걸려 얼굴에 흉터 자욱이 가득하고, 마녀 같은 턱, 대여섯 가닥의 머리털이 서로 붙어 있기 두려워서 얼굴 여기저기 구석에서 중얼대고나 있고, 여물통 같은 주름에 비열하고 정직하지 못한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고인 돼지만큼 추악한 얼굴"

  콰지모도를 창안해낸 빅토르 위고는 19세기 사람이다. 19세기 작가는 이처럼 못생긴 인물의 내면에 사랑이 가득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지만 17세기 초반 미들턴 시대의 작가들은 이런 인물에게 대개 괴물인간이나 악당, 비열함과 비겁함을 선사해주었다. <체인즐링>에서도 마찬가지로 드플로레스는 성주의 아름다운 딸 베아트리스를 사랑, 사랑 좋아하네, 사랑 말고 욕정의 대상으로 생각해온 인간이다. 당연히 베아트리스는 극의 도입부에서 흉한 외모의 드플로레스에게 "가까이 오지 마, 냄새가 지독해." 같은 경멸의 말도 서슴지 않는 기피 대상이었지만, 어떻게 하면 정혼자 알론조 대신 알세메로와 결혼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드플로레스에게 다정하게 제의를 하니, 괜찮은 남편감이라고 생각해온 알론조를 죽여 달라는 거였다. 알론조에게 그만한 대가를 치루기로 약속을 하고.

  그리하여 드플로레스는 알론조에게 성을 안내해줄 테니 구경 좀 하시라고 제의하고 이를 받아들여 한 바퀴 돌던 중, 좁은 틈바구니를 가야하는 동안 무장을 해제하라고 하더니 가슴에 품고 있던 단도를 알론조의 가슴에 정확하게 박아버린다. 이 당시 젠틀맨 정도의 일년 생활비가 백 파운드였다는데, 베아트리스는 드플로레스에게 3백 파운드를 주고자 한다. 그러나 드플로레스는 천만의 말씀. 베아트리스의 순결한 몸을 원한다. 일단 몸을 얻으면 돈이야 저절로 따라오는 거란 걸 알고 있는데 이 악당이 미쳤냐 말이지. 자기 목숨은 워낙 하찮은 거라서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백해 둘이 같이 죽는 길을 갈 거라고 협박을 하니, 결국엔 매독에 걸린 흉터 자욱이 가득하고 대여섯 가닥 머리털이 얼굴 여기저기에 붙은 드플로레스 앞에 누울 수밖에.

  알론조가 죽었다. 연극이니까 속도감을 위해 베아트리스는 일 분의 애도기간도 없이 곧바로 알세메로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여성의 순결은 명예와 직결되는 가치였다. 첫날 밤에는 당연히 출혈을 수반해야 했지만 이미 그건 드플로레스와 그렇게 해버렸으니 이걸 어쩌나. 고민하다가 베아트리스는 알세메로의 의약품 상자에서 신기한 약물을 발견한다. 처녀 감별 시약. 티스푼으로 하나를 먹이면 곧 하품을 하고, 재채기를 하고, 크게 웃다가 약효가 떨어지면 처음보다 우울해진다. 베아트리스는 자신의 순결한 하녀 다이아판타에게 이 시약을 먹여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관찰을 하고, 남편 알세메로가 자신은 너무 수줍어 결혼 첫날 밤은 도저히 얼굴을 보여줄 수 없으니 불을 끈 다음에 더듬어서 침대에 오르겠다고 요구해 허락을 맡는다. 하녀 다이아판타와 알세메로의 친구인 자스페리노가 베아트리스-드플로레스의 이야기를 우연히 옅들은 다음이다. 근데 허락했다고? 그렇다. 알세메로가 처녀 감별 시약을 아내에게 먹여 보았고, 아내는 하녀에게 일어난 현상을 그대로 연기해 새색시의 순결 여부를 확신했었으니까.

  그리하여 결혼식을 올린 날, 베아트리스는 아직 남자의 손길을 경험해보지 못한 하녀 다이아판타를 완전히 어두운 신방에 자기 대신 들여보내기에 이른다. 즉, 아무도 모르게 뒤바뀐 사람, 체인즐링의 사전적 의미 가운데 (2)에 속한다는 말씀.


​  이후 어떻게 되느냐? 이 책 읽어 보실 분이 별로 없을 거 같아서 시원하게 말씀드립자면, 베아트리스 입장에서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하녀를 살려 둘 수 없다. 그리하여 악당 드플로레스는 베아트리스의 묵인하에 다이아판타의 방에 불을 지르고 총으로 쏴 죽인 다음, 불에 타 죽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친구 자스페리노가 알세메로에게 진실을 밝혀 두 악당은 최후를 맞는다. 물론 훨씬 드라마틱하게.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대의 음담패설, 혹은 야한 상징들로 가득하다. 하긴 셰익스피어도 간간히 그런 농담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심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뭐 그래서 더 재미라도 있으면 좋은데, 정의는 살아 있다, 결국 정의가 이긴다는 식의 권선징악의 길을 똑바로 걷는 작품이라서,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당시엔 어떤 평가를 받았고, 영문학적 위치를 감안하지 않은 아마추어 독자의 감상으로는 굳이 책값 비싼 지만지 드라마 책을 사서 읽을 필요까지는 있겠나 싶었다. 나처럼 도서관에서 희망도서 신청을 해 "첫빠따"로 읽을 수 있으면 장땡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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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12-17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제목과 비슷해서 착각할 뻔했어요. 시대도 인물도, 영화랑 다르네요^^ 영화나 소설이나 (2)번 의미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지만^^

Falstaff 2022-12-17 17:31   좋아요 0 | URL
아하. 보신 영화의 원작이 바로 이거, 맞을 겁니다. 영화화 하면서 각색한 거겠지요.

yamoo 2022-12-17 1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두 문장...이거로 인해 저는 패수~~
이런 친절한 멘트, 너무 사랑합니다. 문트님..^^
이 한 권은 건너 뛸 수 있군요..ㅎㅎ

Falstaff 2022-12-17 17:31   좋아요 1 | URL
ㅎㅎㅎ 너무 오랜 텍스트라 도무지 권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

그레이스 2022-12-1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침드라마;;;
여기서부터 골드문트님 써주시는 글 읽고 패스할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침드라마 보진 않지만 우연히 한번 보면 그 한편으로 앞뒤 스토리를 다 꿰게 되는데...

이 소설은 그래서라기보다 막장 스토리때문인듯 합니다.^^

Falstaff 2022-12-19 06:28   좋아요 1 | URL
본문에도 썼지만 17세기 초에 읽었으면 재미있었을 듯합니다.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
 
아비가일
서보 머그더 지음, 진경애 옮김 / 프시케의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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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너의 인생에 닥친 변화는 집에 떨어진 폭탄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버렸다.”

작품은 이 같이 격렬한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주인공 비터이 게오르기너는 불과 열네 살. 언뜻 생각이 들기를, 아직까지는 행복할 권리만을 향유해야 하는 헝가리 군대 장군의 외동딸인데 무슨 특별한 곡절이 있을까 싶지만, 때는 1943년, 2차 세계대전에 헝가리가 참전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에 같은 부다페스트에서 열네 살 동갑내기 청소년 시절을 지내던 다른 헝가리 작가 한 명이 얼핏 생각난다. 케르테스 임레.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운명>,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3부작을 쓰게 될 유대인 소년. 임레는 유대의 피를 타고 났다는 누구나 아는 질곡을 짊어졌으나, 기너는 왜.

오늘 <아비가일>의 독후감은 쓰기가 매우 어렵다. 작품의 앞쪽에 소설의 방향을 확 바꿀 결정적인 전환점이 닥친다. 그러나 나는 그게 무엇인지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걸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작품의 초반 스토리 위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도 또한 아쉽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렇게 해야 다른 이들이 이 책을 더 흥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것을.

게오르기너, 기너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위었다. 홀아비가 된 아버지 비터이 장군은 기너의 양육과 교육을 위하여 동유럽 귀족들이 항용 그러하듯 프랑스 여성 마르셀을 고용해 기너를 맡겼으니, 기너에겐 마르셀이 거의 어머니와 비슷한 존재였으리라. 마르셀은 프랑스 동부의 알자스 출신이어서 기너는 자연스럽게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이것들과 비슷한 체계를 갖고 있는 라틴어를 능숙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너의 인생에서 폭탄처럼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4년이 지난 해엔 헝가리가 히틀러의 위협에 굴복할 수밖에 없어서 프랑스는 헝가리의 적국으로 변했고, 적국의 여성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대편 장군의 집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동안 마치 모녀 사이처럼 파리, 런던, 베를린, 로마, 스위스 등지를 함께 여행하기도 하는 등 숱한 인연을 맺었던 현명한 마르셀은, 전쟁이 끝난 후에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자신의 물품을 많이 남겨놓은 채 프랑스행 열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르셀 한 명이 기너가 뺴앗긴 모든 것은 아니었다. 기너는 부다페스트 집에서 공립인 쇼코러이 어털러 국립 김나지움을 통학하고 있었다. ‘미모’라는 이름의 고모가 있어서 매주 목요일에 고모네 집에서 무도 티파티가 열렸고, 부다페스트의 상류층 인사들이 많이 왕래를 했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지만 이 가운데는 연극배우, 오페라 가수, 그리고 열네 살 먹은 기너가 언젠가는 아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쿤츠 페렌츠 대위 같은 젊은이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맹렬한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기너는 쿤츠 페렌츠, 즉 쿤츠 페리 대위도 자신을 그만큼 사랑한다고 믿었다. 미모 고모네에서 열리는 주간 댄스 티파티. 하지만 마르셀은 페리 대위를 좋게 보지 않았다. 반면에 고모는 첫사랑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이해하고 기꺼이 기너의 수호천사를 자청했으니, 기너는 얼마나 고모를 좋아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듯.

상류사회의 화려함과 부드러움, 즐거움을 대변하는 이 모든 것을, 그러나 아버지 비터이 장군은 한 순간에 몰수해버렸다. 대신 동부 헝가리 대평원을 넘어 국경 근처 가상의 교육도시 ‘아르코드’로 보내 머툴로 주교의 이름을 딴 여자 기숙하교로 전학하게 만든다. 아버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어머니처럼 지내던 마르셀이 귀국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실제로 마르셀에게 자신의 경솔한 여동생 대신 어떤 군인도 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당부했던 적이 있었기도 해서, 마르셀 대신 미모 고모를 집으로 들여 함께 지내면 어떻겠느냐는 기너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는 기너를 그저 멀리 보내려 할 뿐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고모는 기너에게 언질을 준다. 네 아버지가 갑자기 결혼할 것 같아. 그래서 널 멀리 보내려 하는 것일 거야. 기너 생각으로는 아버지의 재혼은 당연한 것이고 자신도 새어머니와 잘 지낼 수 있을 거 같다. 그래도 고모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오빠가 변했어. 더 우울해하고 더 말이 없어. 비현실적이야. 여자가 있을 거야. 이제 두고 봐라.”

그러나 장군은 누구에게도, 미모 고모에게조차 기너의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장군이 기너와 부다페스트를 떠나는 것도 비밀로 부친 채, 엄격한 칼뱅주의 신교 기숙학교라 별로 챙길 짐도 없는 기너만 태워, 예외적으로 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새벽에 직접 차를 운전해 동부 헝가리 평원을 건넌다. 헝가리 동부를 흐르는 티서 강변의 작은 마을에 도착해 장군은 기너에게 묵직한 달이 달린 아주 곱고 가는 목걸이를 선물한다. 엄격하고 작은 달. 기너는 이에 대한 답례로 왜 그랬는지, 담배를 피우지도 않는 아버지에게 작은 재떨이를 사 건넨다. 아버지의 눈길이라니. 그는 말한다. 언젠가 이 순간은 아주 소중해질 거야. 신이시어,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소서.

드디어 교육도시 아르코드 근방에 도착한 부녀는 시내가 보이는 벌판에 서서 마주본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렇게 당부한다.

“자신을 돌보겠다고 약속하렴. 다 큰 성인처럼 조심하겠다고. 네가 아니라, 우리 곁을 떠난 네 엄마처럼. 들었니, 기너? 키스해주렴. 그리고 학교에 내가 널 놓고 가더라도 제발, 울지 말아라. 적어도 내 앞에서는.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

건조하게 스토리만을 전해서 그렇지, 나는 이 대목에서 책을 읽으며 첫번째 눈물이 흘렀다. 얼핏 인용한 부분만 읽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신파 같을 수도 있다. 신파 기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외동딸이 두 살 됐을 때 홀아비가 되어 평생 혼자 살면서 장군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 딸 아이를 저 먼 지방에 홀로 보내 놓았다고 이런 약한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군인, 그것도 장교, 장군으로서는 격이 떨어진다. 그러나 왜 이렇게 격 떨어지는 대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나는 차마 밝힐 수 없다. 오히려 여태까지 이야기도 말짱 생략한 채 “정말 재미있으니 그냥 읽어보시라.”라고만 하고 독후감을 끝내고 싶다.

서보 머그더는 <도어>보다 <프레스코>보다 이 책에서 더 매력적인 문장과 호소력으로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물론 앞서 읽은 책보다 “더 좋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화적이기도 하고, 서보 시절의 강압적인 헝가리 체제를 충분히 은유하기도 했지만, 반전을 주장하며, 희생에 저항하는 아름다움 등을 넘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물론 성인들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고등학생 정도의 젊은이들이 읽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다.

이제 스토리는 겨우 10 퍼센트 정도 왔다. 드디어 기너는 자신이 다녀본 세상의 어느 곳과도 같지 않은 아르코드의, 땅딸막하고 하얗고 차갑고 창문들이 작고, 철을 두른 철창문으로 닫힌 머틀로 주교 학교를, 완고한 수위의 확인을 거쳐 들어가게 된다. 이곳에 힘든 짐을 진 무수한 학생들. 엄격한 계율과 금지와 검열과 의무와 획일과 고집과 벌과 수많은 죄와 상상할 수도 없는 청결과 경쟁과 비밀과 소녀들의 모임과, 소근대는 웃음과, 장난과, 배신과, 따돌림과, 협의와, 작은 정의와, 다툼과, 화해와, 즐거움과, 눈물과, 갈증 속에서 그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의 부다페스트의 소녀 기너는 당연히 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데, 오직 하나, 기너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가 있었으니 정원 저 편에 물항아리를 든 조각상. 그것의 이름이 바로 “아비가일”이었으니,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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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2-12-15 0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 아비가일이 누군지 알지롱~

Falstaff 2022-12-15 07:2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는 입틀막!

scott 2022-12-15 11:56   좋아요 1 | URL
저도 🖐🖐🖐

그레이스 2022-12-19 10:30   좋아요 1 | URL
아비가일은 다윗의 둘째부인?^^

Falstaff 2022-12-19 06:29   좋아요 2 | URL
또한 느브갓네살의 수양딸이기도 합지요. ^^

자목련 2022-12-15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도어>가 무척 좋았던 기억으로 남았는데 골드문트 님의 별5개,
이 책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Falstaff 2022-12-15 13:13   좋아요 0 | URL
이 책 재미있습니다. 다만 굳이 재미를 포함해 ‘읽는 맛‘의 순서를 정한다면 도어=프레스코>아비가일로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순위는 말짱 필요 없습니다. 전 서보의 작품은 다 좋더라고요!

yamoo 2022-12-15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총평이 없어 어떤지 몰루겠습니다. 보통 쓰신 후에 재미진다, 읽어서 후회없다 이 책을 왜 이제서야 알았을까 등의 평이 보이면 바로 구매하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런 짧은 평이 없네요...별 5개나 주셨는데....이제 10퍼센트 읽고 계셔서 그런가??

어쨌거나 어느 정도 재미진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어요~~^^

Falstaff 2022-12-15 13:1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책 읽다가 세 번 울었다니까요!

scott 2022-12-15 13:52   좋아요 1 | URL
전 머그더 이전 작품들 영어판으로 읽었는데 산도르 마라이 작품과 비슷했습니다
눈물은 안 흘렸고
문트님은 👌번 울보 되쉼

Falstaff 2022-12-15 14:39   좋아요 1 | URL
마라이 산도르의 소설도 진짜 좋지 않습니까? ㅋㅋㅋㅋ
스콧 님은 강철심장!

yamoo 2022-12-15 17:05   좋아요 2 | URL
음....아주 감명깊은 작품이라고 받아들이겠어요!ㅎㅎ

alummii 2022-12-15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프레스코 읽다가 포기했어요 ㅠㅠ 서보 머그더는 저랑 안맞나봐요 ㅠㅠ

Falstaff 2022-12-15 14:36   좋아요 1 | URL
안 맞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ㅎㅎㅎ 전 아니 에르노하고 진짜 안 맞아요. 가즈오 이스구로하고도 억수로 안 맞습니다.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2-12-16 07:41   좋아요 1 | URL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떠나지마” 도 별로셨어요??? (재고해 주십사…)

Falstaff 2022-12-16 16:06   좋아요 0 | URL
ㅎㅎ 남아있는 나날하고 세상의 화가, 그리고 이번에 녹턴 읽었는데요, 이 세 권의 책만 가지고 말씀드리자면, 도저히 제가 좋아할 수 없더라고요.
27일에 야박한 평을 해도 양해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yamoo 2022-12-15 17: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뉘!! 저도 아니 에르노하고 이시구로 억수로 안 맞았습니다!!ㅎㅎ

Falstaff 2022-12-15 17:16   좋아요 2 | URL
앗! 그렇습니까!!
12월 27일, 일찍이 없었던 노벨 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험담이 벌어집니다.
ㅋㅋㅋㅋ 이거야말로, 개.봉.박.두!!! ㅋㅋㅋㅋㅋ

alummii 2022-12-15 21:0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전 이시구로는 억수로 좋아하는데예~~~아니 에르노하고는 안 맞심니더 ㅋㅋㅋㅋ걍 나랑 안 맞는걸 우째요 ㅋㅋㅋ

Falstaff 2022-12-15 21:21   좋아요 1 | URL
alummii 님은 27일 리뷰를 꼭 보셔야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2-12-19 1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궁금해서 안 읽을 수가 없겠는데요...아버지는 기너를 왜? 거기다 골드문트님이 눈물까지 ...

scott 2022-12-19 18:41   좋아요 2 | URL
👌번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머그더 도어 명작이고 이 작품은 헝가리에서 드라마로도 제작 된적이 있을정도로 대중적인 작품입니다 ^^

coolcat329 2022-12-19 18:46   좋아요 2 | URL
아 ~이 책 내용이 미스터리한게 드라마로도 어울리네요.
꼭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2-12-19 18:49   좋아요 2 | URL
ㅎㅎㅎ 그리하여 이 작품은 뽕짝 맞는데요, 그걸 엮어가는 스토리가 말입죠, 콕콕, 눈물샘을 찌르는 겁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