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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16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지음, 이경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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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이랍시고 니콜라이 고골에 관한 바이오그래피를 소개하는 건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으니 생략하자.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는 고골의 초기 작품으로 그의 나이 약관 스물두 살 때인 1831년에 발표해 페테르부르크의 종잇값을 높였다고 하는데, 역자 이경완에 의하면 “낭만주의적 우크라이나 창작 설화집”이라고 한다. 창작 설화집이라니 이게 무슨 뜻일까? 19세기 초에 고골이 낭만주의적 사조에 입각해 자신 스스로 설화를 창조했을까? 아니면 전래 동화나 설화를 작가가 낭만주의 사조에 어울리게 각색을 했다는 말일까? 나는 두번째 가정에 한 표.
고골은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우크라이나 설화집을 출간한다. 이 책은 두 권 모두 싣고, 여분으로 <미르고로드>와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속에 든 작품을 합해 세 편의 단편을 보탰다.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 68번으로 나온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에 들어 있는 다섯 편과 중복되는 것이 없으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내용은, 음, 굳이 소개를 해야 할까 싶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만.
먼저, “야회”. 제목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라고 해서 나는 디칸카 라는 도시의 근처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 마을 주민들이 야유회 가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페스트를 피해 열 명의 귀족 신사 숙녀들이 시골로 내려가 진탕 먹고 마시면서 풀어놓은 음담패설을 모아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오정희의 세번째 작품집 《바람의 넋》에 실린 단편 <야회>를 생각했어야 했다. 즉, 야유회野會가 아니라 밤모임夜會이었던 것. 마을의 야회라고 하는 건 무도회와 비슷한 촌놈들의 놀이로, 사람 가운데 특히 여성들이 많이 모여 물레질을 하다가 노래 즉 노동요를 부르고, 이제 남자들과 아이들도 합세해서 악기를 보태 흥을 돋우다가 춤판, 우리가 잘 아는 우크라이나 지방의 전통무용인 호팍khopak, 앉았다 일어났다가 앉은 채로 무릎을 쭉 펴는가 했더니 다시 다른 쪽 다리하고 교대하는 경쾌한 춤을 곁들이는데,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가 더 남아 있었으니 바로 이야기다. 당시엔 영화는 물론 TV, 라디오 등의 매체가 없어서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이야기꾼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이야기꾼을 중심으로 반원을 이루어 앉아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민담, 야담, 설화, 전설 등에 귀를 기울인다. 유난히 글을 재미있고 화려하게 쓰는 작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이야기일지언정 정말 귀에 착 달라붙게 감칠맛을 더해 이야기하는 꾼도 있는 법이니, 별다른 즐길 거리가 없는 19세기 초엽에 그의 이야기 한 대목을 듣는 것은 지금 세상에선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재미였을 것이다. 이게 디칸카 근교에 있는 시골 마을에서 종종 있었던 야회, 밤마실 이야기다. 이 동네의 가장 으뜸인 이야기꾼은 “밤색 머리카락”이란 뜻의 “루디 판코”라는 이름을 한 양봉업자, 스스로 일컫기를 ‘벌치기’로, 하여튼 이 책의 구색은 이 벌치기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포마 그리예비치라는 신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이다.
두번째로, 러시아 옛날 이야기 가운데 악마가 실제로 등장해 빗자루를 타고 보름달 아래를 비행하거나, 무덤을 열고 기어 나오는 원조 좀비 이야기는 주로 우크라이나에서 나오고, 이 가운데서 더 야만스러운 용맹을 찬양하는 와일드 버전은 우크라이나 가운데서도 특히 기마민족 카자흐 이야기다. 고골은 이 책을 쓰고 얼마 더 있다가 당대에 비견할 작품이 없는 멋진 카자흐 소설을 한 편 쓰니 바로 <타라스 불바>였고, 이후 모스크바에서 보름달 아래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이야기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 역시 우크라이나 출신 의사인 미하일 불가코프였으며,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카자흐 서사시 <고요한 돈강>도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출세한 미하일 숄로호프였다. 카자흐 문학이 뭐냐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나는 그것에 대해 뭐라 특정할 수준이 아니라서,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밖에 못하는데,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거친 광야 같은 성정과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이 사람들, 사랑을 한 번 해도 심장 약한 사람들은 생각도 못할 험한 짓을 저질러 버린다. 심지어 악마의 꼬리를 잡고, 잡은 뾰족한 꼬리로 꼬리의 주인인 악마의 귀싸대기를 찰싹찰싹 때리면서 연인이 요구한 결혼 선물을 얻기 위해, 그깟 것, 어차피 한 번은 죽을 목숨 같은 건 쉽게 내놓는 수준이다.
세번째로, 고골, 하면 그보다 열 살 많은 선배 작가 푸시킨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러시아 음악사상 고골과 푸시킨이 없었으면 러시아 작곡가가 만들어낸 오페라가 절반도 안 됐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동네의 벌치기 루디 판코가 제일 먼저 풀어놓는 이야기인 <소로친치 시장>은 무소륵스키가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로 만들려고 했다가 그만 뒀는데 참 과정이 애닯아서 소개한다. 이게 얼마나 재미지는지 무소륵스키 자신이 직접 <소로친치 시장>을 참고해서 대본을 쓰고 작곡을 해 존경하는 당대 음악선생에게 보여줬다가 악평을 듣는다. 가뜩이나 알코올 의존증이 심한 무소륵스키는 여기에 우울증까지 덮쳐 악보를 통째로 불살라 초기 스케치 일부만 남게 되고 곧 숟가락 놨다. 이걸 후배 블라디미르 에시포프 등이 되살리지만 공연은 거의 되지 않고 녹음 몇 종만 구할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헝가리 음반 레이블 상도스에서 (아마도)유일한 CD를 출시했지만 거의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사두지 않은 것을 지금 통탄하고 있다.

무소륵스키, <소로친치 시장> 예전에 알던 음반은 아니다
책의 세번째 이야기로 나온 <5월의 밤 또는 물에 빠져 죽은 여인>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5월 밤>이란 제목의 오페라로 작곡했다. 원주민의 대표니까 족장 정도 되나? 하여튼 그렇다 치고, 족장의 아들이 책에선 간나, 오페라에선 한나 – 러시아어 표기 Ganna는 들어보면 ‘한나’와 ‘간나’ 중간 정도의 발음인데 ‘한나’에 가깝다. 남자 이름으로도 German을 ‘헤르만’으로 불러야 하나, ‘게르만’으로 불러야 좋나, 말들이 많다 – 와 혼인하기 위해 전설로 전해지는 다수의 처녀 물귀신들 가운데 독한 마녀를 잡아 대장 처녀 물귀신의 소원을 풀어준 대가로 한나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얘기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오월 밤>
2부의 첫번째 이야기 <성탄전야>는 페터 차이콥스키가 <꽃신: Slipper>라는 제목으로 역시 작가 자신이 대본을 쓰고 작곡했다. 동네 제일가는 젊은 대장장이 바쿨라는 자기 엄마를 사랑하는 늙은 대장장이 춥의 딸 옥사나를 사랑하고 있다. 옥사나 역시 바쿨라를 사랑하지만 내놓고 박대한다. 너무 어려 그렇게 해야 더 좋은 줄 아는데 바쿨라는 아예 죽을 지경이다. 이런 바쿨라에게 동네 많은 친구들을 증인으로 해놓고 여황제 즉 예카테리나 2세가 신는 구두(꽃신이 더 어울리지 않나? 그래서 내가 ‘쓰레빠’Slipper를 꽃신이라 쓴 거다)를 가져오면 결혼해주겠다고 한다. 절망하던 바쿨라는 자살을 결심하고 숲으로 가다가 자기 어깨 위에 악마가 걸터앉은 걸 보고 냅다 잡아서 자기 종으로 만들어버린다. 한밤중에 악마를 타고 우크라이나에서 페테르부르그까지 날아가 우여곡절 끝에 꽃신을 구해와 결혼에 성공한다는 동화.

차이코프스키, <꽃신>
이렇게 고골의 낭만주의적 창작 설화를 오페라로 만든 작품은 솔직히 말해서 별로 재미없다. 왜 그러나 하면, 이 책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와 마찬가지로 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 내용을 즐기기엔 세대 차이가 크고 또 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그저 이런 설화 작품을 고골이 다시 쓰기도 했다는 정도로만 아는 수준이면 되지 않을까 한다. 굳이 직접 읽어 보시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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